최근 수정 시각 : 2024-01-02 19:12:26

한적(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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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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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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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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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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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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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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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韓績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은사. 자는 흥제(興齊). 서주 광릉군(廣陵郡) 출신. 그의 집안은 삼국시대 혼란기에 난을 피해 동오의 가흥(嘉興)에 정착했다고 한다. 동오 시기 대홍려 한건(韓建)의 아들.

2. 생애

한적은 문학을 좋아하여 일찍이 속세에서 물러나 은둔하고자 하는 뜻을 품었고, 베옷만 입고 채식을 하면서 검소하게 지내니, 강동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 사도 왕도가 그 명성을 듣고 한적을 연(掾)으로 삼으려 했으나, 한적은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함강 말년에 회계내사 공유가 상소하여 한적을 천거하자, 조정에서 안거(安車)와 비단 한 묶음을 하사하였다. 여기서 상서령 제갈회가 비록 한적의 명망이 아직 가볍다고는 해도 예법을 갖추었다 첨언하니, 다시 조서가 내려져 한적은 박사로 부름받았다. 하지만 이때 한적은 이미 너무 늙고 병들어 제대로 일어날 수도 없었고, 결국 조서를 받들기도 전에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