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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피렌체 대성당에서 넘어옴
파일:cupola_.jpg
외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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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의 정면
기본 정보
위치
[[이탈리아|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피렌체
종교 가톨릭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지위 주교좌성당( Cathedral)
건축 정보
정초 1296년 9월 9일
(발레리아나 추기경)
축성 1436년 3월 25일
( 교황 에우제니오 4세)
건축가
(공사기간)
아르놀포 디 캄비오(1296~1302)
조토 디 본도네(1334~1337)
안드레아 피사노(1337~1348)
프란체스코 탈렌티(1349~1359)
조반니 디 라포 기니(1360~1369)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420~1446)
양식 르네상스, 이탈리안 고딕[1]
착공 1296년 9월 9일
완공 1469년
건축 내역
전체 길이 153 m
전체 너비 90 m
높이 114.5 m
돔 직경 45.52 m
돔 높이 114.5 m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글 [2]
영어 [3]
프랑스어 [4]
국가·위치 이탈리아 피렌체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2년
등재기준 (i)[5], (ii)[6], (iii)[7], (iv)[8], (vi)[9]
지정번호 174bis
1. 개요2. 역사
2.1. 신축 결정2.2. 미완성의 위기2.3.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등장2.4. 세계에서 가장 큰 2.5. 거장의 시련2.6. 돔의 완성과 천재의 죽음2.7. 미완성된 드럼 갤러리2.8. 대성당 정면의 완공
3. 부속 건물4. 예술 작품5. 관광6. 전례 시간표7. 기타

이탈리아어 Basilica Cattedrale Metropolitana di Santa Maria del Fiore
영어 Basilica of Saint Mary of the Flower
프랑스어 Cathédrale Sainte Marie de la Fleur
독일어 Kathedrale Santa Maria del Fiore
스페인어 catedral de Santa María de la Flor
포르투갈어 Duomo di Santa Maria del Fiore
중국어 聖母百花大教堂
일본어 サンタ・マリア・デル・フィオーレ大聖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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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피렌체 랜드마크이자 주교좌 성당. 15세기에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만든 세계에서 가장 큰 조적(masonry)[10] 으로 유명하며, 이 성당의 돔은 이후 서양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흔히 두오모라고 하면 이 성당을 말하는데, 정식 명칭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는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의미다.

2. 역사

2.1. 신축 결정

현재의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에는 성 제노비오와 함께 피렌체 수호성인 성녀 레파라타에게 바쳐진 산타 레파라타 성당(basilica of Santa Reparata)이 있었다. 5세기에 세워진 이래 끊임없는 보수하고 개축했지만 9백여 년이 흘러 13세기 말엽에 이르자 산타 레파라타 성당은 더 이상 손을 쓰기 어려울 만큼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뿐 아니라 성당이 너무 작았다. 이에 피렌체 자치 위원회는 모직물 무역이 성행하여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피렌체의 국위를 고양시키고자 다른 대도시의 대성당에 뒤지지 않는 규모로 성당을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2.2. 미완성의 위기

1294년 피렌체 시의회로부터 새로운 대성당의 설계를 의뢰를 받은 조각가·건축가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 1240경~1302/1310)는 옛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권역은 신랑(nave)으로 포함되도록 하고, 중앙에는 팔각형 돔이 올라가도록 설계했다. 마침내 1296년 9월 9일 교황청에서 처음으로 피렌체에 파견한 발레리아나 추기경이 첫 돌을 놓으면서 대역사가 시작되었지만 채 10년이 지나기도 전에 아르놀포가 사망하면서 공사는 30년 동안 중지되었다.

한동안 멈췄던 공사는 1330년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성 제노비오의 유해가 산타 레파라타 성당 자리에서 발견됨에 따라 재개되어 1331년 양모 상인 길드(Arte della Lana)가 공사비를 후원했고, 1334년 화가·건축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가 전임자의 설계도에 따라 공사를 감독해 본당 건물 옆에 종탑을 설계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불과 3년 만인 1337년 조토가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조토의 곁에서 작업을 도와주던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 1290~1348)가 공사를 이어나갔지만 1348년에는 흑사병이 창궐해 또 다시 공사가 중단되었다.

흑사병의 여파로 피렌체의 인구가 급감하고 경제력도 예전만 못하게 되었지만 1349년 프란체스코 탈렌티(Francesco Talenti, 1300경~1369?) 감독 아래 본당의 익랑(transept)과 후진(apse) 부분을 아르놀포가 처음 설계했던 것보다 훨씬 크게 확대했다. 이는 당대 유럽 성당의 최대급이었다. 탈렌티가 감독하여 조토가 설계한 종탑이 완성되었다. 10년이 지나 1359년에는 조반니 디 라포 기니(Giovanni di Lapo Ghini)가 공사 감독이 되어 가운데 신랑(nave)을 정사각형 구역 4곳으로 나누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첫 돌을 놓은 지 80년 가까이 지난 1375년 산타 레파라타 성당은 완전히 철거되었고 5년 후인 1380년에는 신랑이 완성되었다. 이제 공사가 남은 곳은 거대한 돔뿐이었지만 공사의 난점 때문에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였다.

돔을 설계한 네리 디 피오라반티(Neri di Fioravanti, ?~1374)는 돔 아래의 공간인 주교좌의 지름을 확장하면서 그 위에 얹혀질 돔의 지름도 함께 늘렸고, 결국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인 판테온보다도 더 큰, 지름 42 m짜리 돔을 짓기로 1367년에 최종 결정했다.

문제는 이처럼 거대한 돔이 받는 무게를 분산시켜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줄 공중부벽(flying buttress)을 돔 옆에 일절 덧붙이지 않는, 기존의 이탈리아 성당 구조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거대한 돔을 올려놓으면 그 하중 때문에 벽이 바깥으로 쓰러질 텐데, 벽이 버틸 수 있도록 외부에다가 추가로 기둥과 보를 만들어서 지탱해주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거부했다는 소리다.

이러한 고집스러운 태도에는 지역 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다. 당시 피렌체나 중남부 이탈리아인 입장에서 프랑스 독일은 물론 북부 이탈리아의 밀라노조차 로마 문명을 훔쳐간 야만인이 지배하는 곳과 다름없다고 생각했기에 정치적인, 역사적 라이벌 의식이 형성되어 모방이 금기시되었다. 당시에 고딕 건축이 성숙해지던 프랑스 등에서는 건물의 벽이 너무 높아 쓰러지는 것을 붙잡아주는 공중부벽을 적극 사용하여 훨씬 높은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건축물의 높이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용서되는 분위기인 고딕과 달리, 이탈리아인의 감성은 높이보다는 완벽한 조화가 우선이었기에 공중부벽은 억지 땜빵질처럼 느껴진다는 점도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네리 역시 설계에 공중부벽을 쓰지 않았고, 시의원과 사제들 또한 반대하였다. 문제는 공중부벽을 쓰지 않고 돔의 막대한 하중을 버티기 위해 돔 아래 중앙부의 벽 두께를 늘린다면 그 시점에서 이미 진행된 중앙부의 기초공사가 무효화되고, 벽 두께를 늘리면 자연스럽게 돔의 크기도 커져야 된다는 악순환이 있었던 것. 그야말로 난제 중의 난제였다. 그냥 공중부벽 쓰라고 참고로 오늘날에 와서는 이 과도기적 성당의 양식을 고딕 양식과의 연속성을 보고 "이탈리안 고딕"이라 분류하기도 하니 아이러니…

또한 당시까지는 아치나 돔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아래에 나무로 틀을 짜고 위에 아치나 돔을 건설하였는데, 이 성당에 올라갈 거대한 돔을 받칠 틀을 만들기 위한 목재의 양을 계산해보니 너무나 막대한 양의 목재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도저히 답이 안나오는 상태였다. 결국 그 당시까지 성당을 건설하던 석공 장인 집단에서는 포기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결국 성당 중앙의 천장이 뻥 뚫린 상태로 51년 동안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418년 돔 공사 해결책 을 공개적으로 모집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다른 응모자 10여 명을 제치고 선택된 사람은 금 세공사이자 시계공이었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였다.

2.3.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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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석상[11] 돔의 구조에 대해[12]

탈렌티와 네리의 설계를 수습해 실제로 돔을 올린 사람은 혜성처럼 등장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였다. 브루넬레스키는 인생의 많은 기간 동안 건축과는 인연이 없었으나, 특유의 관찰력과 창의력, 여행을 통해 얻은 지식, 교묘한 자기가치 관리로 난제들을 해결하고 대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원래 시계공이자 금속 세공사였다. 그러나 20대 젊은 나이에 참가한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을 둘러싼 심사에서 떨어진[13] 브루넬레스키는 경쟁자였던 로렌초 기베르티를 뒤로 하고 금속 세공업에서 떠났다. 이후 로마를 여행하며 당대인들에게 악마의 집이라고 불리던, 당시 세계 최대의 판테온을 보았고 여러 연구를 했지만 40세가 넘도록 건축과 금속 세공에 있어서는 별다른 업적이 없었다. 그러나 원근법의 수학적 법칙을 발견 혹은 발굴하였고, 이 덕에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공사에 참여할 명성은 얻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예술 계열의 장인들이 건축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특히 르네상스의 건축물들은 건축물의 비례와 외형적인 완성도에 집착하는 면이 있었고, 그러한 면에서 미적인 안목은 필수적이었다. 게다가 당시까지 실제 건축의 시공에서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석공 집단은 실무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뛰어났지만, 지나치게 경험과 과거의 예를 신봉하였기에 창의성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가 존재하였다.[14]

그렇지만 비슷한 이유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을 둘러싼 경쟁에 브루넬레스키뿐만 아니라 역시 건축에는 한 줄의 경력도 없었던 악연 로렌초 기베르티도 참가하였다. 브루넬레스키가 기베르티를 꺾은 방법은 정성이었다. 기베르티가 석공 4명과 함께 4일 만에 모형을 만들었지만, 브루넬레스키는 석공 4명에 도나텔로 같은 쟁쟁한 조각가와 함께 90일 넘게 시간을 쏟아 돔의 모형을 완성했다. 당연하게도 공사의 담당자는 브루넬레스키가 되었지만, 피렌체의 유명 예술가인 기베르티가 부 담당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둘은 똑같이 상금 200에 연봉 36 피오리노를 받았다. 기베르티가 싫었던 브루넬레스키는 그에게 구체적인 공사에 관해 거의 말해주지 않았고,[15] 1420년에 몸이 아프다는 이유.. 혹은 핑계로 요양을 떠났다. 그 사이에 공사를 담당하게 된 기베르티는 자신이 아는 바가 없음을 실토해야만 했고 1423년에 브루넬레스키는 돌아와 단독 책임자가 되었다. 연봉도 100 피오리노로 올랐다. 이후 기베르티는 사퇴하진 않았지만 연봉은 36피오리노에서 오르지 않았고, 돔 공사에서 존재감이 사라졌다.[16]

브루넬레스키는 당시까지는 한 번도 실현되지 않은 거대한 돔을 건설하면서도 새로운 방법으로 건축하겠다고 해서 세간을 놀래켰다. 브루넬레스키 이전에는 아치나 돔을 쌓기 위해 그 아래에 나무로 된 틀을 세우고 그 위에 벽돌을 쌓는 방법 등을 사용했다. 작은 다리의 아치를 세우는데도 지지 틀이 필요한데,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을 틀 없이 세우겠다는 브루넬레스키의 발언을 다들 황당하게 여김은 당연한 일이었다. 돌이 기울어지면 쓰러져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 자명하지 않은가!

2.4. 세계에서 가장 큰

1420년 8월 7일, 반 세기 넘게 손대지 못했던 돔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시작된 지점의 높이는 대성당 벽체 높이 42 m 위에 얹어진 팔각형의 드럼 높이 9 m를 더한, 도합 51 m 위였다. 브루넬레스키는 완성되어 있던 드럼 위에 다시 13.6 m 높이까지 석재로 드럼을 연장했고, 그 위의 경사진 돔부터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벽돌과 모르타르(mortar)를 사용하여 쌓아올렸다.[17] 드럼이 팔각형인 관계로 돔 역시 팔각형이 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수치가 기입된 설계도'를 도입하였으며, 시공을 정확한 수치로 하려고 노력하였다.[18]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당시까지는 석공집단이 감으로 공사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실제로 이 성당의 드럼은 부정확한 치수로 건설되어 각 변의 길이가 달라 정팔각형도 아니었다. 드럼 평면의 각 꼭지점을 직선으로 연결하면 중점들이 여럿 생기는데, 중심도 안 맞는다는 소리다. 물론 나중에 공사에 참여한 브루넬레스키도 이것은 고칠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위에 돔을 건설해야 했다.

하중을 줄이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에 이를 위해 돔을 안쪽의 두꺼운 돔과 바깥쪽의 얇은 돔으로 이중 구조를 만들어 빈 공간만큼 무게를 경감시키고, 안쪽 돔과 바깥쪽 돔을 격자 형태의 뼈대(rib)로 연결시켜 돔의 구조적 강도는 유지했다.[19] 또한 팔각형 돔에 맞춰 8개 대리석 뼈대(rib)를 돔 외각에 추가로 건설해 돔이 하중 때문에 바깥으로 팽창하는 힘을 상쇄시키고, 석재와 목재로 이루어진 고리들을 돔 사이 사이에 삽입하였다.[20] 거기다가 돔의 모양을 반구형이 아니라 좀 더 급한 경사의 첨두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돔의 하중을 반구형에 비해 좀 더 아래로 집중되게 만들어 구조적으로 안정되었다.

석재보다 가볍고 원하는 형상으로 쌓기 좋아 벽돌을 주로 사용했는데, 벽돌을 일종의 헤링본[21] 방식으로 쌓았다. 벽돌을 지그재그 모양이 되도록 교대로 방향을 바꾸면서 벽돌이 맞물리게 배열하는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벽돌의 결합력이 강해졌고, 미세하게 벽돌 벽의 아래가 위쪽보다 좁아져서 공중에서도 벽돌들이 아래로 추락하지 않게 되었다. 이 덕분에 공중에서 최소한의 목재 틀만 가지고 바로 벽돌을 쌓으면서 돔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고, 막대한 목재를 비계와 아치 틀로 사용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비로소 공사를 실현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벽돌 4백만 개를 사용해 만든 돔은 무게가 모두 4만 톤 이상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돔 아래에 목재 틀을 세우지 않는 대신, 한쪽만 지지되고 한쪽 끝은 돌출된 일종의 기중기와 같은 구조물인 '카스텔로(castello)'를 돔의 안쪽 면에 세워, 건설이 진행되는 동안 돔이 올라감과 동시에 조금씩 위로 움직이는 방식을 고안했다. 카스텔로를 사용해 무거운 건축자재를 높은 위치에 있는 작업대까지 운반하기 위해서는 많은 힘이 필요할 것으로 보였지만, 유능한 공학자이기도 했던 브루넬레스키는 1마리의 힘만으로 거대한 카스텔로가 작동하게끔 기계장치를 설계했다. 당시까지 보지 못했던 거대한 기계장치가 고작 소 한 마리의 힘으로 움직이자 사람들은 브루넬레스키를 '새로운 다이달로스'라고 부르며 경탄했다.


2.5. 거장의 시련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브루넬레스키는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다. 사실 그에게 주어진 공사비는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고, 주로 재정적으로 곤란해진 일들이 생겼다. 다행히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의 권력자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1426년에는 기베르티의 조수 건축가가 브루넬레스키의 공사를 장문의 글과 그림으로 비판했다. 브루넬레스키가 너무 독선적이고 결국 돔이 붕괴될 것이라며... 기베르티도 를 써서 브루넬레스키를 조롱했고 그도 시로 맞받아쳤다.

1428년에는 돔을 덮을 대리석을 보다 빠르고 저렴하게 운반하려고 설계한 수송선이 아르노 강에서 석재와 함께 침몰하는 바람에 처음 그가 제시한 금액의 3곱절을 치르고 새로 대리석을 매입해야 했다.

1429년에는 피렌체가 루카(Lucca)와 벌인 전쟁에서 쓰인 피렌체군의 방어용 제방을 브루넬레스키가 만들었는데, 이것이 무너져 피렌체군 막사로 강물이 들어차 브루넬레스키는 비난을 들었다.

1434년에는 석공 조합에 회비를 제때 납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투옥 소식을 듣고 격분한 사업단 임원들이 피렌체 사법당국에 강하게 항의한 덕분에 브루넬레스키는 2주일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미납된 액수가 워낙 적은 데다가 회비 미납으로 체포, 투옥된 경우는 브루넬레스키가 처음이었기에 기베르티가 그에게 번번이 물먹자 석공 조합에 손을 써서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로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은 사건.

석방 2달 후에는 양자 안드레아 카발칸티가 브루넬레스키의 돈과 보석을 챙겨 나폴리로 도주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브루넬레스키는 당시 피렌체에 체류 중인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게 청원해 양자를 나폴리에서 피렌체로 송환하라는 편지를 받아낸다. 사소한 가정 문제가 졸지에 외교분쟁으로 비화(…). 어쨌든 교황의 편지를 받은 나폴리에서는 안드레아 카발칸티를 피렌체로 송환했고, 이후 별다른 문제 없이 양부 곁에서 조각가로 일하며 일손을 도왔다.

브루넬레스키가 장인들을 빡빡한 임금으로 작업시켰기 때문에 그들이 파업한 적도 있었다. 그러자 브루넬레스키는 그들을 모두 해고한 후 북부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디아인 10명을 데려와 일을 시켰다. 그러자 실직한데다가 경쟁관계에 있던 롬바르디아인들과 비교당해 자존심이 상한 피렌체의 장인들은 다시 받아달라고 브루넬레스키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낮은 임금으로 부려먹혔다.

2.6. 돔의 완성과 천재의 죽음

1436년 3월 26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대성당의 축성식을 거행하고 나서 5개월 후인 같은해 8월 30일, 피에솔레 주교가 돔의 마지막 돌을 놓으면서 돔이 완공되었다. 공사가 시작된 지 16년 23일 만이었다.

돔이 완성된 후에도 돔의 꼭대기에 위치하게 될, 내부의 조명과 환기를 위한 탑인 루프 랜턴(roof lantern)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이 탑은 피렌체 대주교 안토니노 추기경이 1446년에 첫 번째 돌을 놓으면서 공사에 들어갔다. 브루넬레스키는 이 행사에 참석한 뒤 병을 앓다가 채 한 달이 지나기 전에 68세를 일기로 4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탑의 시공은 결국 친구인 미켈로초(Michelozzo)가 맡았다. 그가 건설한 대성당의 돔 아래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5월 15일 대성당 남쪽 측랑 지하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을 덮은 석판에는 다음과 같은 라틴어 묘비명을 새겼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uomo_Firenze_Apr_2008_(13).jpg
CORPVS MAGNI INGENII VIRI
PHILIPPI S BRVNELLESCHI FLORENTINI
피렌체의 위대한 천재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시신

목재 틀 없이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을 건설한 브루넬레스키는 '천재'라는 칭송을 받으며 건축가의 지위와 평판을 격상시키는 데 공헌했다. 이후 걸출한 후배 건축가들이 대거 등장하며 르네상스 시기의 건축에 혁신을 가져온 것은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랜턴의 공사는 1461년에 끝났고, 1469년에 화가·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1436~1488)가 디자인 한 금도금한 구체와 십자가를 꼭대기에 올려놓으면서 장식까지 끝났다.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승으로, 당시 견습공이었던 다 빈치 역시 이 작업에 참여했다.[22]

이후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설계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그것을 이어받아 건설한 자코모 델라 포르타 모두 이 성당의 돔을 참고하였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설계되었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조차 그 지름은 이 성당의 돔보다 살짝 작으며, 근대까지도 이 성당의 돔보다 작은 돔들만이 건설되었을 정도로 이 성당의 돔은 거대했다. 오늘날에는 철과 같은 각종 신재료로 지어진 훨씬 거대한 돔들이 등장했지만, 아직도 조적(masonry)[23] 돔으로서는 이 성당의 돔이 세계 최대 크기로 남아 있다.

2.7. 미완성된 드럼 갤러리

한편 돔의 드럼 주위를 둘러싼 갤러리는 공모를 거쳐 1506년에 바치오 다뇰로(Baccio d'Agnolo)가 맡기로 결정되었다. 바치오는 공사 도중 자신의 디자인을 주변인들에게 물어보았는데, 하필 독설이 심한 미켈란젤로에게 물어봤다가 ' 귀뚜라미용 케이지(gabbia dei grilli)'같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감을 잃어 스스로 공사 책임자에서 물러났다(...). 남은 사람들이 그 미켈란젤로가 혹평한 디자인으로 계속 공사하긴 뭐했는지 현재까지도 팔각 드럼의 한 면에만 갤러리가 있고 나머지는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다.

2.8. 대성당 정면의 완공

돔 공사가 워낙 존재감이 컸기 때문에 가려졌지만, 대성당 건축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성당 정면(facade)의 장식 등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설계한 정면은 아랫 부분만 완성된 채 오랫동안 중단되었다가 이 성당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1577-78년에 해체되었다. 여러 건축가들이 새로운 정면의 설계안을 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결과 19세기 중반까지(!) 아주 오랫동안 정면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

마침내 1864년에 열린 정면 설계안 공모전에서 건축가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Emilio De Fabris, 1808-1883)가 조토의 종탑 디자인을 모방한 설계안이 1871년 당선되었고, 이에 따라 공사가 시작되어 1887년에 완성되었다. 다만 이 정면에 대해 성당의 다른 부분과 달리 너무 복잡하게 장식되었다는 비판 여론도 있다.

3. 부속 건물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 성당의 정면(서쪽)에 있는 건물. 성당보다 오래된 건물이다. 이 세례당은 화려한 천장화와 대문들이 유명하다. 3개의 대문 중 건물 동쪽에 있는, 미켈란젤로가 아름다움을 극찬하며 ' 천국의 문'이라고 불렀다는 로렌초 기베르티의 대문이 특히 유명. 이 청동문은 로렌초 기베르티가 1425년부터 27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1452년에 완성한 대작이다. 기베르티가 당시 공모전에서 경쟁했던 브루넬레스키를 꺾고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문 위키백과. 이 문은 1966년 11월 3일 11월 4일 이틀에 걸쳐 아르노 강이 범람한 피렌체 대홍수 때 진흙에 잠기는 피해를 입은 뒤, 진품은 성당의 뒷편(동쪽)에 세워진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 보관하였고 현재 세례당에 있는 것은 정교한 복제품이다.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 방한을 기념해 동년 8월 15일부터 11월 14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천국의 문을 한국으로 가져와 특별 전시했다.

조토의 종탑(campanile di Giotto): 성당의 남쪽에 있는 높은 탑. 이름대로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가 설계한 탑. 인생의 말년인 1334년에 건축가가 된 조토가 설계하여 1334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조토는 1337년에 사망하였고 이 때는 탑의 하부만 완성되었다. 건축가도 변경되고 흑사병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결국 1395년에 종탑이 완성되었다. 다만 조토가 설계한 상부의 첨탑은 건설되지 않았다. 완성된 탑의 높이는 84.7 m이다.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Museo dell'Opera del Duomo): 성당의 뒤인 동쪽에 있는 건물. 성당에 관련된 많은 유물들을 모아놓은 곳이 이 박물관이다. 1296년부터 이 성당의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 세워진 위원회가 오페라 델 두오모(Opera del Duomo) 혹은 오페라 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Opera di Santa Maria del Fiore)이다.

브루넬레스키는 이 성당의 돔 외에도 그 위의 랜턴과 드럼 아래 좌 우의 엑세드라(exedra)도 설계했다.

4. 예술 작품

돔 내부에 그려진 천장화는 조르조 바사리와 페데리코 주카리(Federico Zuccari)가 그린 < 최후의 심판>이다. 프레스코화이며, 바사리가 1568년에 그리기 시작하여 1579년에 주카리가 완성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걸작, 다비드 상은 원래 이 성당의 북쪽 익랑(transept)위에 있는 부벽(buttress)에 놓여질 물건이었다. 그러나 6톤에 이르는 조각상을 이렇게 높은 곳에 올리기가 어렵거니와 조각의 완성도가 너무 뛰어나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산드로 보티첼리를 포함한 30명이 모인 피렌체 시민 위원회가 성당의 장식으로 쓰기에는 아깝다고 결정해 시뇨리아 광장에 전시하였다. 1501년부터 1504년까지 조각되었다.

기베르티는 돔 공사에서 사실상 물러났지만, 스테인드 글라스 일부를 비롯한 성당 내부의 많은 예술 작품들은 기베르티의 작품이다.

5. 관광

피렌체 여행의 필수 코스로 통한다. 피렌체 한가운데에 있고 워낙 돋보이기 때문에 빼먹을 수 없는 곳.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이름답게 외관이 아주 화려하다. 다만 내부는 의외로 돔 천정의 그림을 제외하면 단정한 분위기다.

성당 자체의 입장은 무료이다. 그러나 입장인원 제한이 있어 반드시 줄을 서서 들어가야 하고, 보통 그 줄이 매우매우 길게 늘어서 있으니 여행 계획을 짤 때는 이를 감안하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24]. 또한 입장권을 판다는 사기꾼들을 주의할 것.

돔(쿠폴라: cupola)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시간을 정해놓은 티켓을 사서 예약을 해야한다. 피렌체 카드를 쓰더라도 예약은 해야 한다고. 또한 돔 꼭대기까지의 계단은 무려 463개이니[25] 중간에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해도 체력이 약하거나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은 유의해야 한다. 올라가는 길에서 돔에 그려진 그림을 매우 가까이서 볼 수 있으나, 길이 좁아 시간상 오래 보기는 힘들다.

한편 두오모의 돔 자체를 바라보려면 조토의 탑에 올라가는 것이 좋다. 이쪽은 계단은 414개! 엘리베이터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 두 다리가 튼튼하지 않다면 둘 다 올라가는 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것. 조토의 종탑과 은 서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고, 둘 다 꼭대기에서 피렌체를 내려다볼 수 있으며 올라가는 고통도 비슷하다. 다만 종탑은 입장 티켓 가격이 조금 더 싸고 종이 있으며 올라가서 돔을 비롯한 성당의 외관을 바라볼 수 있고, 돔은 자체로 유명한데 종탑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꼭대기가 있고 돔 안쪽의 천장화를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두 곳 모두 계단의 숫자 때문에 올라가는 시간은 15~20분은 걸리니 시간을 여유롭게 배분하는 것이 좋다. 조토의 종탑이던 돔이던 대성당의 위치상 미켈란젤로 언덕보다도 더 리얼하게 피렌체 전체를 360도로 조망할 수 있으며, 노을이 지는 늦은 오후에 올라가면 노을의 붉은 빛 + 피렌체의 붉은 지붕이 어우러져 한 층 더 매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지하에는 그다지 볼 것이 없지만 기념품점과 브루넬레스키의 무덤이 있다. 물론 성당 지하, 종탑, 돔(쿠폴라), 세례당,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의 입장을 다 묶은 통합권 티켓도 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때문에 젊은 일본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연인들의 성지 이미지까지 더해져서 인기를 끄는 중. 덧붙이면 주인공들이 만나는 곳은 돔 꼭대기. 아무튼 이로인해 일부 일본인들의 낙서하는 행위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낙서는 예전부터 국적과 언어 안 가리고 많았고, 하도 관광객들의 낙서가 많으니 두오모 측에서 돔이나 종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디지털 낙서장'을 설치했는데 이게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기사

이 인근에서는 소매치기나 그림을 바닥에 늘어놓고 밟도록 유도하여 돈을 뜯는 범죄가 기승을 부리니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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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례 시간표

미사
  • 주일 미사: 9:00, 10:30, 12:00, 18:00
  • 평일 미사: 8:30, 10:00, 18:00
  • 자세한 내용은 대성당 홈페이지의 전례 시간표에서 확인

성무일도
  • 주일
    • 아침 기도: 10:00
    • 저녁 기도: 17:15
  • 평일
    • 독서 기도와 아침 기도: 8:00
    • 저녁 기도: 17:15 - 의무 축일이 아닌 대축일, 주님의 축일, 성모 축일에 거행.
  • 자세한 내용은 대성당 홈페이지의 전례 시간표에서 확인

고해성사

7. 기타

세간에 콜럼버스의 달걀로 알려진 일화는 사실 이 성당을 건설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일화다. 그가 처음 성당의 돔에 관한 공모전에 나왔을 때 돔을 어떻게 완성할지 묻는 사람들에게 자세한 공법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를 비난하자 브루넬레스키는 날 달걀을 탁자에 똑바로 세워보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는데, 아무도 세우지 못하자 브루넬레스키가 달걀 아래를 깨트리면서 세웠다. 사람들이 달걀을 깨트리면서는 자기도 할 수 있다고 말하자, 브루넬레스키가 자기가 자세한 공법을 말하면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으니 자세한 공법은 비밀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다. 다만 이 일화가 실화인지는 불명이다.

돔 건설의 방법을 모집한 공모전에서 희한한 제안들도 나왔었다. 돔 내부 중앙에 큰 기둥 하나를 만들어 돔을 지탱하게 만든다던가, 목재 틀 대신 흙을 대량으로 쌓아서 그 위에 돔을 짓고, 흙 속에 동전을 넣어 돔 건설이 끝나면 시민들이 동전을 찾아가며 흙을 같이 운반하게 만든다던가(...).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이 성당에서 암살당했다.

초창기 피렌체의 르네상스와 두오모 건설에 대해 그린 굽시니스트연중된 서양 미술사 만화 #1, #2

메디치 가문의 부흥을 다룬 드라마인 메디치: 마스터스 오브 플로렌스에서 이 성당의 돔이 지어지는 내용이 나온다. 돔이 지어지기 전의 성당 모습이 자주 나오기 때문에 흥미롭다. 성당 건축에 관련해서 고증 자체는 대체적으로 훌륭하지만, 아주 정밀하지는 않다. 예를 들면 돔이 지어지기 전이지만 후대에 만들어진 엑세드라, 드럼 갤러리가 보인다던가, 공사중인 돔의 껍질이 외각이나 내부나 비슷한 두께로 보인다던가.. 돔 건설과 관련된 사건의 흐름은 반은 사실 반은 허구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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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의 르네상스 이탈리아를 무대로 하는 어쌔신 크리드 2에서도 등장한다. 암살자 무덤 소재지. 게임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엔 실제로 타고 오르려는 사람이 많아서 대성당 앞에 매달리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었다고(...). 고증이 나쁘지 않지만 돔 윗부분이 너무 넓다던가, 후대에 만들어진 정면부 장식이 벌써 공사중이라던가, 돔의 실내 꼭대기에 이상한 구조물이 있다는 점 등이 현실과는 다르다.

문명 4의 두 번째 확장팩 비욘드 더 소드의 메인 화면에 나오는 건물이 이 성당인 듯하다. 단 게임 내에 불가사의 등으로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러브 라이브! 선샤인!! 더 스쿨 아이돌 무비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는 츠시마 요시코가 진정한 천사가 되기 위해... 혼자 보러 갔다가 Aqours 멤버들 몫으로 사온 티켓을 나눠주고 같이 보러 간다.

6 언더그라운드 초반부 피렌체 카체이싱 씬에서 포(4. 스카이워커)가 지붕 꼭대기에 있다 무전을 받고 주인공 일행들을 도와주러 거침없이 파쿠르로 내려간 성당으로 나온다.

[1] 초기 르네상스 시기에 세워져 훗날 알베르티 등이 완성한 성기 르네상스의 표준적인 양식과는 좀 다르다. 과도기적인 시기의 건물이기 때문에 이탈리안 고딕이란 명칭으로 양식을 분류하는 경우도 많다. [2] 피렌체 역사 지구 [3] Historic Centre of Florence [4] Centre historique de Florence [5]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6]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7]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8]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9]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10] 돌이나 벽돌 등을 쌓아서 만들어진 것을 말함. [11] 그의 사후 피렌체에 세워졌으며, 조각상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바로 그가 설계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이다. [12] 유심히 본 사람은 알겠지만 드럼의 평면에서, 각 꼭지점을 직선으로 연결하였더니 중점이 여럿이다(...). 드럼의 각 변 길이가 달라 중심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브루넬레스키가 담당하기 전부터 수치 없이 눈대중으로 건축해서 그렇다. [13] 공동 작업으로 결론 났으나, 브루넬레스키가 포기했다는 기록도 있다. [14] 물론 미술가 출신들이 모두 건축에서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당대에도 미술가의 자유분방한 기질로는 건축에 필요한 지루하고도 정교해야 하는 업무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여론도 존재했다. [15] 심지어는 그토록 공들인 모형에도 핵심적인 부분은 상세하게 만들지 않았다. [16] 대신 성당 내부의 예술품들을 계속 제작하였다. [17] 브루넬레스키가 판테온을 연구하긴 했지만, 그 돔을 만든 고대의 콘크리트는 이 당시까진 배합 방법이 실전된 상태였다. [18] 다만 어떻게 구체적으로 돔의 각 부분의 정확한 길이나 위치를 재면서 시공하였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현대에도 여러 설이 있다. [19] 얇은 외부 돔은 아래의 두꺼운 부분도 두께가 60 cm, 위는 30 cm에 불과할 정도로 얇아서 거의 내부 돔에 의지하여 서 있는 것이다. [20] 고리가 철제 사슬로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있었지만 현대의 조사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석재 사슬에 필요한 석재는 피렌체 북쪽의 채석장에서 캔 사암을 사용했다. [21] herringbone pattern. 한국에서는 화살촉을 닮았다고 오늬무늬 쌓기라고도 한다. 원래 고대 로마에서 쓰던 방식으로, Opus spicatum라고 했다. [22] 참고 링크. 그리고 이 장식은 17세기에 벼락을 맞아 파괴되었고, 더 큰 구체로 교체되었다. 현대에는 피뢰침이 설치되었다. [23] 돌이나 벽돌 등을 쌓아서 만들어진 것을 말함. [24] 보통 오후 늦은 시간이 줄이 좀 덜하다고 한다. [25] 웬만한 빌딩 30층 내외를 오르내리는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