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5D3462 0%, #611594 20%, #611594 80%, #5D3462); color: #BDB76B"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제3대 |
아르사케스 1세 | 아르사케스 2세 | 프리아파티오스 | |
제4대 | 제5대 | 제6대 | |
프라아테스 1세 | 미트리다테스 1세 | 프라아테스 2세 | |
제7대 | 제8대 | 제9대 | |
아르타바노스 1세 | 미트리다테스 2세 | 고타르제스 1세 |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미트리다테스 3세 | 오로데스 1세 | 시나트로케스 1세 |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프라아테스 3세 | 미트리다테스 4세 | 오로데스 2세 | |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
파코로스 1세 | 프라아테스 4세 | 티리다테스 1세 | |
제19대 | 제20대 | 제21대 | |
프라아테스 5세 | 무사 | 오로데스 3세 |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보노네스 1세 | 아르타바노스 2세 | 티리다테스 2세 | |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
바르다네스 1세 | 고타르제스 2세 | 메헤르다테스 | |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
보노네스 2세 | 볼로가세스 1세 | 바르다네스 2세 | |
제31대 | 제32대 | 제33대 | |
파코로스 2세 | 볼로가세스 2세 | 아르타바노스 3세 |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
볼로가세스 3세 | 오스로에스 1세 | 파르타마스파테스 |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
미트리다테스 5세 | 볼로가세스 4세 | 오스로에스 2세 | |
제40대 | 제41대 | 제42대 | |
볼로가세스 5세 | 볼로가세스 6세 | 아르타바노스 4세 | |
아케메네스 · 셀레우코스 · 사산 | }}}}}}}}}}}} |
파르티아 제국 16대 샤한샤 𐭐𐭊𐭅𐭓 | 파코로스 1세 |
||
제호 | 한국어 | 파코로스 1세 |
파르티아어 | 𐭐𐭊𐭅𐭓 | |
영어 | Pacorus I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기원전 38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39년 ~ 기원전 38년 |
[clearfix]
1. 개요
파르티아의 제16대 샤한샤.카르헤 전투 이후 파르티아군의 로마 공화국의 동방 속주 공략을 책임졌으나 끝내 전사했다.
2. 생애
'파코로스'( Pakoros)는 고대 이란어 'bag-puhr'(신의 아들)에서 파생된 그리스어 단어이다. 그는 오로데스 2세와 파르티아 동부 지역 출신 여인의 장남으로, 일찍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기원전 53년, 오로데스 2세는 크라수스와 연합한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공격해 굴복시킨 뒤, 그의 누이와 파코로스 1세를 결혼시키고, 아르메니아를 파르티아의 봉신으로 삼았다. 기원전 51년, 파르티아 사령관 오사체스와 함께 시리아로 쳐들어갔으나, 오사체스가 안티오키아로 진군하던 중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급습당하여 전사하자 퇴각했다.기원전 45년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시리아 총독을 자칭하면서 카이사르에 맞서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를 후원했으며, 기원전 40년 마르쿠스 브루투스 - 카시우스 롱기누스 연합에 가담했다가 파르티아로 망명한 퀸투스 라비에누스( 티투스 라비에누스의 아들)와 함께 시리아를 침공했다.(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시리아를 성공적으로 공략한 뒤, 라비에누스는 분견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갔고, 파코로스 1세는 휘하 지휘관 바르자파르네스와 함께 레반트를 침공했다.
그들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진군하여 프톨레마이스까지 이르는 모든 도시를 정복했다. 오직 티레만이 파르티아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유대 지방에서는 대제사장 요한 히르카노스 2세, 파사엘, 그리고 헤로데가 이끄는 친로마 유대군이 파르티아군과 그들의 유대 동맹인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에게 패배했다. 헤로데는 마사다로 피신했고,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는 파르티아에 의해 유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휘하 장교인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가 반격에 나섰다. 그는 기원전 39년 킬리키아 성문 전투에서 라비에누스를 상대로 완승을 거뒀고, 라비에누스는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벤티디우스는 뒤이어 아마누스 고개 전투에서 바르자파르네스의 파르티아군을 상대로 크게 이겼다. 파코로스 1세는 시리아에서 일시적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한 뒤, 기원전 38년 봄 다시 시리아로 진군하여 안티오키아 북동쪽 긴다루스 산 전투에서 벤티디우스와 맞붙었다. 전투 결과 파르티아군이 완패했고, 파코로스 1세는 전사했다. 로마군은 파코로스 1세의 수급을 창에 꽂은 뒤 시리아 전역에 돌려서 로마에 다시 복종하도록 했다.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는 기원전 37년까지 예루살렘에서 버티다가 헤로데에게 붙잡힌 뒤 처형되었다.
화폐학자 데이비드 셀우드는 기원전 39년에 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파코로스 1세의 주화를 발굴했다. 그가 아버지와 함께 통치했는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통치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