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토스 왕에 대한 내용은 미트리다테스 3세(폰토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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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10대 샤한샤 𐭌𐭄𐭓𐭃𐭕 | 미트리다테스 3세 |
||
제호 | 한국어 | 미트리다테스 3세 |
파르티아어 | 𐭌𐭄𐭓𐭃𐭕 | |
영어 | Mithridates III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기원전 80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87년? ~ 기원전 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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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티아의 제10대 샤한샤.존재 여부가 불명확하다.
2. 생애
이란 서부의 베히스툰 산에는 다섯 번째 인물에게 경의를 표하는 네 명의 인물을 묘사한 암각부조가 있다. 부조에는 심하게 훼손되어 알아보기 어려운 그리스어 비문이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코파사테스, 미트리다테스, [마모됨] 사트라프 중 사트라프 고타르제스, 그리고 위대한 왕 미트리다테스.
코파사테스는 파르티아의 사트라프 코프자드를 지칭한 것으로 추정되며, '위대한 왕 미트리다테스'는 미트리다테스 2세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학계는 이 부조와 비문이 미트리다테스 2세 치세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이로 볼때 고타르제스 1세가 미트리다테스 2세의 후계자로서 일찍부터 지명되었을 것이라 본다. 다만 라힘 M. 사예간은 이 부조는 고타르제스 1세 통치 기간에 건설되었으며,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시도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비문에 등장하는 '미트리다테스'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타르제스 1세의 형제라는 설이 있고, 바빌로니아의 장군으로 임명된 미트라투라는 설도 있으나,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87년 7~8월, 고타르제스 1세의 이름이 새겨진 주화가 바빌론에서 더 이상 출토되지 않고 '미트리다테스'의 주화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이 주화는 기원전 80년까지 발행되다가 오로데스 1세의 것으로 대체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화폐학적 기록을 토대로 기원전 87년 고타르제스 1세가 사망했고, 미트리다테스가 고타르제스 1세의 아들 오로데스를 제치고 왕위에 올라 7년간 집권하다 오로데스 1세에게 밀려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수의 학자들은 이를 입증할 문헌 또는 비석, 서판 등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미트리다테스 3세의 존재를 부정하는 의견도 강하다. 그들은 이 '미트리다테스'는 고타르제스 1세이며, 기원전 80년까지 계속 집권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를 판가름해줄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한편, 기원전 87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필리포스 1세가 베로에아에서 동생 데메트리오스 3세의 군대에게 포위되었을 때 파르티아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파르티아 총독 미트리다테스 시나체스가 출진해 데메트리오스 3세의 진영을 포위했다. 물을 구할 길이 없어 수많은 병사가 갈증으로 고통받자, 데메트리오스 3세는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파르티아로 끌려간 뒤 파르티아 왕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죽을 때까지 편히 지냈다고 한다. 이 모든 일을 주관한 파르티아 왕이 미트리다테스 3세인지, 고타르제스 1세인지는 불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