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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24대 샤한샤 𐭕𐭉𐭓𐭉𐭃𐭕 | 티리다테스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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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티리다테스 2세 |
파르티아어 | 𐭕𐭉𐭓𐭉𐭃𐭕 | |
영어 | Tiridates II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 | |
재위 기간 | 35년~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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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티아의 제24대 샤한샤.방계 황통인 아르타바노스 2세에 대항하여 샤한샤를 자칭했다.
2. 생애
프라아테스 4세의 손자로, 거의 평생을 로마에서 인질로 살았다. 서기 35년, 아르메니아 왕 아르탁세스 3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했다. 아르타바노스 2세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아들 중 하나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앉히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아케메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소유했던 영토를 언급하면서, 자신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계자이니 마땅히 아케메네스 왕조가 가졌던 땅을 돌려받을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보노네스 1세가 가져가버린 파르티아 왕실 보물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이때 아르타바노스 2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던 파르티아 귀족들이 로마에 밀사를 보내 프라아테스 4세의 아들 프라아테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로마는 이를 수락했지만, 프라아테스는 귀향하던 중 시리아에서 사망했다. 그러자 티베리우스는 프라아테스 4세의 손자인 티리다테스를 보냈고,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를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티리다테스를 돕도록 했다. 또한 이베리아[1] 왕의 형제인 미트리다테스(1차 35~37, 2차 42~51 재위)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앉혔다. 그러자 아르타바노스 2세는 아들 오로데스(37~42 재위) 휘하의 대규모 군대를 아르메니아로 파견했지만, 미트리다테스는 알바니아인과 사르마티아 지원군과 함께 이들을 물리쳤다.
이후 파르티아 일부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르타바노스 2세는 일단 히르카니아로 물러났고, 티리다테스 2세는 크테시폰에 입성한 뒤 샤한샤를 칭했다. 비텔리우스는 그를 샤한샤로 옹립한 뒤 시리아로 돌아갔고, 셀레우키아에는 티리다테스 2세의 지지자들이 시의회를 이끌었으며, 도시 자체가 자치권을 받았다. 하지만 티리다테스 2세가 자금을 확보하고자 동쪽으로 이동하여 아르타바노스 2세가 하렘과 보물을 숨긴 요새를 포위 공격하느라 시간을 잡아먹는 사이, 일부 귀족들이 히르카니아로 가서 아르타바노스 2세와 합류했다. 아르타바노스 2세는 사카족과 다하에 연합 부족을 이끌고 셀레우키아로 쳐들어갔다.
티리다테스 2세가 어찌해야 할 지 묻자, 여러 신하가 즉시 반격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티리다테스 2세를 샤한샤로 처음 추대한 귀족 압다게스는
"아르타바노스를 지금 추종하는 자들은 과거에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이다. 아직 그에게 복종할 마음이 충분하지 않을 테니, 일단 메소포타미아로 후퇴한 후 로마와 아르메니아 지원군을 결집해 대대적으로 반격한다면, 저들은 분명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라고 조언했다. 티리다테스 2세는 그의 조언이 옳다고 여기고 메소포타미아로 물러났다.그러나 병사들이 샤한샤가 겁을 먹고 후퇴한다고 여겨 도중에 뿔뿔이 흩어졌고, 로마가 제때에 도와주지 않는 바람에 모든 게 어긋나버렸다. 결국 티리다테스 2세는 소수의 추종자와 함께 시리아로 망명했고, 아르타바노스 2세는 다시 파르티아 전역을 장악했다. 서기 37년 봄,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와 아르타바노스 2세는 유프라테스 강둑에서 만나 협상했다. 협상 결과, 파르티아는 로마와 동등한 주권을 갖는 걸 인정받았으나 아르메니아 왕이 로마가 세운 미트리다테스임을 인정해야 했다. 이에 더해 다리우스라는 이름의 왕자를 로마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이후 티리다테스 2세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