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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제2대 | 제3대 | |
파이살 1세 | 가지 1세 | 파이살 2세 | ||
<rowcolor=#ffffff> 이라크 대통령 |
이라크 왕국 제3대 국왕
파이살 2세 الملك فيصل الثان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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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bgcolor=#CE1126><colcolor=#fff,#fff> 이름 |
파이살 빈 가지 빈 파이살 빈 후세인 빈 알리 الملك فيصل الثاني |
출생 | 1935년 5월 2일 |
이라크 왕국 바그다드 | |
사망 | 1958년 7월 14일 (향년 23세) |
아랍 연방 바그다드 | |
재위 기간 | 이라크 국왕 |
1939년 4월 4일 ~ 1958년 7월 14일 (20년) | |
전임자 | 가지 1세 |
부모 |
아버지 :
가지 1세 어머니 : 헤자즈의 알리야 |
무덤 | 바그다드 왕실 묘지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가문 | 하심 가문 |
[clearfix]
1. 개요
이라크 왕국의 제3대 국왕.2. 생애
파이살 1세의 손자로 1939년 부왕 가지 1세(Ghazi)를 이어 4살 나이에 즉위했다. 미성년자라 당숙 압둘 알-일라가 1953년까지 섭정했다.파이살 2세는 친영, 친서방 노선을 추구했다. 하지만 1948년 영국-이라크 조약과 1955년 중앙조약기구 창설로 외교와 군사가 영국에 농단된다고 생각한 민족주의자들이 큰 불만을 가졌고, 게다가 1952년 이집트에 출범한 나세르 정권의 영향을 받은 장교단 또한 동요했다.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아랍 연합 공화국을 창설하자 이에 대응, 같은 하심 왕가인 요르단과 아랍 연방을 출범시킨다.
그런데 1958년 여름, 요르단의 후세인 1세[1]가 레바논 위기에 이라크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여 파이살 2세는 파병을 결정했는데, 파병되는 이라크군을 이끌던 육군 장교 압둘 카림 카심이 7월 14일 바그다드로 방향을 돌려 이른바 7.14혁명을 일으킨다. 이때 파이살 2세는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근위대에게 항복을 지시한 후 카심의 쿠데타군에게 왕족들과 함께 붙잡힌다.[2] 이 과정에서 해외에 나가 있어 화를 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혁명 당일 파이살 2세를 비롯한 이라크 왕실 구성원 전원이 왕궁 정원으로 끌려나와 폭행과 강간을 당하고 기관총으로 무차별 총살된다. 이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결혼하기도 전에 총살당하여 자녀 역시 없다.[3] 총살형이 집행된 이후에도 파이살 2세는 숨이 붙어 있는 상태였으나 병원으로 이송되는 중 사망했다. 이때 왕세자비인 히얌공주도 총을 맞았지만 무사히 도주하는데 성공했다.[4] 그 다음날 총리대신 누리 알 사이드도 카심 지지자들에게 붙잡해서 살해당했다.
그나마 이라크 군부는 파이살 2세의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허락했지만 섭정인 압둘 알-일라와 누리 알 사이드의 시신은 발가벗겨진 채로 바그다드 시민들에게 던져 조리돌림당하게 했고 심하게 훼손된다.
3. 둘러보기
[1]
동갑으로 6촌 간이다.
[2]
당시 이라크 근위대는 전통방식으로 경무장만 하고 있었던 상태라 요르단에 전투파병될 계획이었던 쿠데타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던 파이살 2세가 근위대에게 항복을 명령한 것으로 보인다.
[3]
그래서 이라크 왕위 요구자는 작은할아버지 자이드 빈 후세인(1898~1970)으로 옮겨갔다가 그 아들이자 5촌당숙인 라드 빈 자이드(1936 ~ )로 옮겨갔다.
[4]
그녀는 그녀의 부족 군인들에게 보호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애초에 반군 지휘부도 총리랑 왕세자만 죽이기로 했고 나머지 왕실 구성원은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