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09:34:27

투타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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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투타겸업 선수가 나오기 어려운 이유4. 투타겸업 부활의 가능성5. 사례6. 기타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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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투타겸업 선수.jpg
오타니 쇼헤이

투타겸업(, Two-way)이란 야구에서 한 선수가 동일 시즌에 투수 타자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을 말한다.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리그[1]에서는 투수도 타석에 들어서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투타겸업에 해당되지 않는다. 투수 포지션만 맡으면 대타로서는 1경기에 1타석 초과 나올 수가 없어서 타석 수가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수가 등판일 외에도 전문적으로 타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때에만 투타겸업으로 취급한다.

과거의 프로야구는 역대 최고의 야구 스타로 꼽히는 베이브 루스처럼 뛰어난 선수가 팀 내 에이스 투수와 수위급 타자를 겸하는 경우가 있었지만[2] 이후로 급격하게 발달하고 분업화된 현대 프로야구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오타니 쇼헤이가 투타겸업으로 메이저 리그를 폭격하며 다시금 투타겸업 유행을 불러일으키고, 한국선수를 포함한 수많은 유망주들이 투타겸업을 시도하는 발판을 열어주었다.

2. 역사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지명타자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투수도 타석에 서야 했다. 하지만 투수가 타석에 서봤자 안타를 뽑아낼 확률은 거의 없기에 정확히 투타겸업이라 부를 수는 없고, 투수가 야수로 출장하는 경우 또한 경기 극후반에 대타나 대수비로 낼 야수가 부족할 때만 해당되기에 희소해진 건 매우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메이저 리그가 처음 등장한 19세기 중순만 해도 선수가 적었고 야구가 그렇게 발전되지는 않았기에 투타겸업은 당연시되었으나, 19세기 말 들어 투수와 야수가 분업화되면서 투타겸업은 차츰 사장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럼에도 투타겸업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선수가 없어서였고, 또 투수와 야수가 분업화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그 차이가 극복할 수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투수가 야수로 투입되거나, 이를 겸업하는 일이 잦았다. 반대로 야수가 투수로 등판하는 일도 꽤 많았다. 그러나 메이저 리그가 나날이 규모와 위상이 높아져 가고 마이너 리그가 확대되면서 자연스럽게 선수 부족 문제가 해결, 투타겸업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후 1970년대 들어 AL에서 지명타자 제도가 도입되면서 투타겸업은 사실상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계속된 포지션 분업화와 전문화로 인해 투타겸업은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거의 통하지 않을 단계까지 도달했다.
파일:271C413557A7E6911D.jpg
김성한

한국 야구에서는 아마추어에서 투타겸업을 하는 일이 잦다. 특히 고교야구에서는 2003년까지 지명타자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투수도 타석에 서야 했다. 1980년대 초 고교야구 신드롬의 마지막 주자이자 선린상고의 쌍두마차였던 박노준 김건우는 고교 시절부터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며 인기를 한몸에 받았고, 이후 한국야구 4대 타자라는 추강대엽도 모두 고교 시절에는 팀의 주축 투수이자 중심 타자 역할을 맡았고[3] 한국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 중 1명으로 꼽히는 류현진 동산고 재학 당시에는 4번타자 겸 에이스를 도맡았다. 현재도 고교야구에서는 투타겸업을 하는 일이 꽤나 흔하고 대부분 프로 입단 때 투수나 타자 중 하나의 포지션을 정한다.

KBO 리그에서는 초창기에 투타겸업에 도전한 선수가 여러 명 있었지만 그 중 제대로 된 성과를 낸 선수는 1982년의 김성한 한 명 뿐이다. 사실 김성한도 투타겸업에 도전했다기 보다는 속된 말로 ' 땜빵'에 가까웠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 선수단 인원이 겨우 14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김성한은 야구를 시작할 때 포지션이 투수였던지라 경험도 꽤 있었고 투타 양면에 재능이 있어서 투수와 타자를 겸한 것도 있지만 원년 KBO 리그는 4할 타자가 나올 정도로 경기 수가 적고 리그 수준도 낮았기 때문에 김성한의 투타겸업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김성한도 1983년부터는 투수 출장 횟수가 눈에 뜨이게 줄었고 선동열 입단 후에는 투수를 완전히 그만두었다. 김성한은 프로 통산 15승을 올렸는데 그 중 10승이 1982년 기록이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대학교 1학년 때 투수를 관뒀는데 프로에 오니 투수가 강만식, 신태중, 이상윤, 방수원 뿐이라 본인도 마운드에 올라야 했고 팔꿈치가 아파서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일본의 NPB에서도 투타겸업 사례가 몇 있으나, 대부분은 선수가 부족했던 양대 리그 출범 이전이나 양대 리그 초창기 시절에 집중되어 있으며, 당시 투타겸업을 했던 선수들도 어느 정도 리그의 기틀이 잡힌 후에는 투수나 타자 중 한쪽으로 자리잡은 경우가 많다.

3. 투타겸업 선수가 나오기 어려운 이유

사실 투수와 타자에서 모두 뛰어난 잠재력을 보이는 재능 자체는 그렇게 희귀한 편이 아니다. 야수 중 송구 능력이 매우 뛰어난 선수는 투수로 선수 경력을 보냈어도 대체로 성공했을 확률이 높고, 실제로 투수 출신이었다가 타자로 전향한 사례와 반대로 타자 출신이었다가 투수로 전향한 사례도 많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가장 큰 문제는 투수 능력과 타자 능력을 모두 프로 선수급으로 성장시키기까지 다른 사람에 비해 곱절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남들보다 훨씬 큰 체력 소모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고교야구에서 투타 모두 뛰어난 선수라고 해도 프로에 데뷔하기 전 투수 타자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며, 늦어도 입단 후 첫 스프링 캠프 때에는 반드시 투수와 타자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김대우, 하재훈처럼 양쪽 모두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선수는 프로 데뷔 후에도 여러 번 선택을 바꿔보는 일도 종종 있지만 둘을 동시에 하는 투타겸업은 매우 드물다.

투타겸업을 하게 된다면 투수 훈련과 타자 훈련, ( 지명타자 전담으로 나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야수 수비 훈련까지 다 소화해야 하는데, 이는 먼저 양쪽 모두 재능이 있어야 하고 훈련량이 받쳐주어야 하며 무엇보다 그 양쪽 훈련을 소화할 정도의 체력이 엄청나야 한다. 재능이 있어야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투수와 타자 출장 모두 실전을 위한 전술 숙지와 훈련을 남들 두 배로 해야 된다. 체력 면에서는 일단 투수로 한 번 등판하는 것부터가 엄청난 체력과 정신력이 소모되며, 야수가 아니더라도 주전 타자로 출장하는 것도 체력이 많이 받쳐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현대 야구에서 투타겸업을 하는 선수는 엄청난 야구 센스는 기본이고 괴물같은 체력까지 갖춘 완전체 선수가 아니고서야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양쪽에 재능이 있다고 해도, 프로 레벨에서는 체력 문제로 투타겸업을 시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실리적으로 보더라도 투타양쪽으로 힘을 뺄 만큼의 시간을 투수나 타자 중 한 쪽으로 집중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선수라도 투수의 팔꿈치가 소모품처럼 인식되듯 어깨도 마찬가지고 팔도 마찬가지다. 남들보다 두 배는 넘게 팔을 휘두르며 운동하기 때문에 신체의 피로도와 부상위험성은 남들의 두 배 이상은 높다. 사실상 하나의 몸에 두 사람이 들어있는 것처럼 남들의 두 배 이상 재능을 가지고 이를 반반 나눠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쓰는 근육이 달라 양쪽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프로 레벨에서라면 투타 어느 쪽이든 극단적으로 신체능력을 끌어내야하기 때문에 이런 것조차 민감할 수밖에 없다. 투타겸업의 대표적 사례인 김성한은 1982년 시즌 후 인터뷰에서 "너무 힘들어서 자청해서 마운드에 올라 죽도록 던지고 다시는 투수를 할 수 없도록 팔이 영영 고장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라고 털어놓았다. 박노준 역시 고교에 이어 대학에서도 투타겸업을 하느라 어깨가 거의 망가지기 직전까지 갔고 결국 투수를 완전히 포기했다. 제아무리 투타겸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는 오타니 쇼헤이도 풀타임으로 성공적인 투타겸업을 보여준 시즌이 몇 번 없고 부상으로 고생을 여러 번 했다. 특히 팔꿈치 수술을 벌써 두번이나 받았을 정도로 투수 쪽으로 제동이 계속 걸리고 있다.

투수가 타격을 하면 투구 리듬이 흐트러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지명타자 제도가 사용되는 KBO 리그에서는 지명타자 소멸로 투수가 타석에 들어설 때가 종종 있는데, 대부분 벤치에서 스윙도 하지 말고 그냥 서서 삼진을 당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물론 주자가 있을 때는 병살의 위험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스윙을 해서 투구 리듬을 흐트러뜨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등판했을 때 난타를 당할 수 있어서이다.

현 시대 야구에서 투타겸업 선수가 나온다면 대부분 그 리그의 수준이 한참 낮거나, 아니면 팀의 선수층이 매우 얇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인 야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교야구나 대학야구 또한 만성적인 선수 부족 문제 때문에 선수들이 야수와 투수, 혹은 포수 등을 돌아가면서 보거나 아예 투타겸업을 하는 경우 또한 자주 나온다. 그러나 한국고교야구에서는 2003년에 지명타자 제도가 도입된 뒤로는 위에서 언급한 선수 층이 얇은 경우가 아닌 이상 투타겸업을 하는 경우가 크게 줄었다. KBO 퓨처스리그에서도 투수가 야수를 보거나, 지명타자 없이 투수가 타격하는 경우가 있다.

다만 2군 리그나 학생야구의 투타겸업은 교육의 측면도 가지는데, 상식적으로 학생야구면 모를까 40명이 넘는 프로 2군에서 선수가 없어 투타겸업을 할 리는 없고 교육의 목적이 강하다. 투수는 타자를, 타자는 투수를 직접 해보고 해당 플레이가 이루어지는 원리와 상대의 심리를 경험하고 파악하는 것이 큰 공부가 되기 때문. 어차피 상무 피닉스를 제외하고는 팀 성적은 전혀 의미가 없기도 하다. 드물게 김대우 나종덕처럼 2군에서 시험해보고 소질까지 있어 보이면 본격적으로 전향하기도 한다.

4. 투타겸업 부활의 가능성

2012년 일본의 NPB에서 초특급 유망주 오타니 쇼헤이를 잡기 위해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제시한 플랜이 일명 이도류(二刀流). 이후 오타니의 투타겸업이 성공을 거두며 2016년 일본시리즈 우승과 퍼시픽 리그 MVP 수상으로, 투타겸업으로도 리그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2018년 오타니는 MLB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와 계약해 미국 무대에 진출했는데, 때마침 탄생한 오프너 전략에 맞물려 투타겸업[4] 논의와 시도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그 해 부상 문제로 풀시즌을 투타겸업 하지는 못했지만 투수, 타자 모두 합격점을 받았고 2018년 AL 신인왕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그러다가 2019년 토미 존 수술 이후[5] 투수를 재개해 2021년부터 다시 투타겸업을 시도하면서 본인의 투 웨이가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가졌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2021년 선발투수와 지명타자[6]로 동시에 맹활약하면서 아시아인 역대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최다홈런 신기록을 세우는 등 투타겸업을 통해 메이저리그에서 커다란 관심과 인기를 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오타니는 1933년 MLB 올스타전 개최 이래 역사상 최초로 투수와 타자로 동시 선정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됐다.

이 같은 오타니의 선례[7]를 통해 몇몇 팀들이 팀 내 가능성 있는 유망주의 투타겸업을 시도 중이다. 불펜투수들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는데도 로스터는 25인으로 빡빡하게 제한된 압박 속에서 운용의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의 연장선으로 주목받고 있다.

오타니 외에도 완전한 투타겸업까진 아니지만 투 웨이 플레이어로 가능성을 보였던 선수는 신시내티 레즈 마이클 로렌젠이다. 로렌젠은 롱 릴리프 투수와 외야수 대타로 투타겸업을 실험한다. 참고로 로렌젠은 2018년까지 통산 6홈런을 친 불펜 투수이다. 또 템파베이 레이스의 2017년 1라운드 지명자 브렌던 맥케이가 마이너 리그에서 투타겸업 선수로 육성되다가 2019년 6월에 콜업되어 6월 29일 선발투수, 7월 1일 지명타자 선발로 첫 출전하였다. 2022년 타자는 그만두었다.

의외로 투타겸업은 앞으로도 시도될 가능성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MLB 로스터는 투수 11명/야수 14명이 일반적이었고, 90~00년대에 조금 더 늘어나다가 2010년 중반부터 투수 12명/야수 13명, 2018년대 이후부터 아예 투수 13명/야수 12명로 로스터를 짜는 팀까지 등장할 정도로 모든 팀들이 선발 불펜 할 것 없이 투수 물량을 쏟아붓는 형식의 벌떼야구 메타로 가고 있다.[8] 2020년부터는 25인→26인으로 로스터 한 자리가 늘었지만 그래도 투수를 쏟아붓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트렌드는 마찬가지라, 투수에 로스터 자리를 만드느라 야수 백업은 4명 정도에 꼭 있어야 할 백업포수를 빼면 3명 정도의 빡빡한 로스터로 굴러가고 있다. 야구는 날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파워가 강해지는데 선수단 연봉 문제로 선수를 늘릴 수 없어 로스터는 30년 넘는 세월 동안 고작 한 자리 늘어나서 투수도 타자도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로스터를 아끼기 위해 등장한 궁여지책이 내야/외야 전 포지션 백업 역할을 한명에게 전부 몰아넣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와 패전처리 상황에서의 야수 등판, 그리고 투타겸업인 것. 굳이 오타니처럼 주전 지타/선발이 아니더라도, 백업야수/패전조 불펜 자리만이라도 한 명한테 몰아줄 수 있으면 로스터를 1자리 아낄 수 있다는 효과 덕에 실제 경기에 나와 찍는 스탯 이상의 도움이 된다. 실제로 로렌젠은 백업야수/불펜투수 투타겸업으로 빅리그에 안착했다.[9]

이를 반영하기 위해 2021년부터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새로운 로스터 운영정책을 발표하는데, 코로나-19로 인해 2021년부터 바로 실행하지 않고 1년 유예를 두지만 시작될 경우 변화는 다음과 같다.
1. 8월까지는 로스터를 25명→26명으로 확장하고, 9월부터는 40인 로스터→28인 로스터로 축소함(실행중)
2. 한 팀에서 투수 등록은 최대 13명만 가능. 9월부터는 최대 14명.
3. 더블헤더 경기때만 1명의 투수를 더 운용할 수 있음.

위의 투수 규칙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선수가 투타겸업 포지션으로, 팀에서 1명씩 지명을 할 수 있으며 해당 선수가 투수로써 전년도와 해당년도 중 한 해 20이닝 이상 투구하고, 같은 해 타자로써 선발출장해(포지션 제한 없음) 20경기 이상 출장할 경우 투타겸업 선수로 등록이 가능하여 투수 로스터 제한없이 자유롭게 투수등판이 가능해진다. 2022년부터는 투타겸업 선수를 배려하기 위해 선발투수가 지명타자로 경기에 출전하는 것과, 마운드에서 내려가도 지명타자로 경기에 남아 계속 출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과거에나 가능했던 낭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메이저 리그의 액티브 로스터 슬롯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거나, 스케줄 부담이 줄어들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오타니 쇼헤이와 같은 재능있는 선수가 등장하기만 한다면 꾸준히 시도될 전략 중 하나이다. 다만 애초에 그만한 재능을 가진 선수가 거의 없다는 치명적인 결점을 모든 구단들이 이미 알고 있다. 시도를 아무리 해도 결과가 안나왔으니까 안 해왔던 것을 갑자기 결과를 내라 한들 나올리가 만무하다. 확실히 트렌드로 자리잡은 유틸리티 플레이어나 가비지 이닝 야수등판 등의 전략과 달리 아직 실제 성과를 내고 있는 사례가 오타니, 로렌젠 정도로 걸음마 단계에 머물고 있는 전략. 표본이 없으니 결과가 나올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현시대 미국 야구, 심지어 미국 야구라고 할 지라도 투타겸업이 성행하긴 어렵다. 피지컬과 육성문제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로스터가 넉넉하고 선수를 많이 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아마추어 때 투타겸업이 가능할만한 실력자가 와도 굳이 투타겸업을 시킬 메리트가 없기 때문. 대표적으로 2017년 드래프트 전체 2순위에 뽑힌 헌터 그린이 있다. 타자로서는 거포 유격수, 투수로서는 100마일 선발투수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였는데, 결국 구단의 사정에 따라서 투수에 올인 중이다. 아무리 출중한 재능을 지녔다 한들 구단이 선발이 모자르다 하면 투수에 전념하게 될수고 있고, 타격이 부족하다면 타자로 전념하게 될 수도 있는 구단의 사정에 따라 언제든지 폐기될수 있는 플랜이라는 거다.

한편, 일본에서는 오타니 쇼헤이를 지명하여 성공한 바가 있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022년 드래프트에서 외야수-투수 이도류 야자와 코타를 지명하면서 또다시 화제를 모았다. 데뷔 시즌인 2023년부터 4월 30일, 에스콘 필드 홋카이도 우측 2층 어퍼덱에 꽂히는 데뷔 첫 홈런을 기록한 데 이어 5월 21일 오릭스 버팔로즈전에서 투수로 데뷔하여 1이닝 13구 2탈삼진 삼자범퇴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투수 데뷔를 마쳤고, 교류전 기간인 6월 2일 쿄진전에서 좌익수에서 투수로 등판하면서 2013년 오타니 이후 10년만에 야수에서 투수로의 수비 위치 변경을 기록하였다.

5. 사례

프로 리그에서 규정타석의 50%와 규정이닝의 50%를 동시에 달성한 시즌이 한 시즌이라도 있을 때만 기입 요망.
  • 베이브 루스: 메이저 리그 최고의 타자로 유명하지만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에는 투타겸업을 하였다. 1918년과 1919년 두 시즌은 투수와 코너 외야수를 병행하여 풀타임으로 투타겸업을 했다. 다만 규정타석 규정이닝을 동시에 달성한 적은 없다.[10]1915년부터 1918년까지 4년간 두자릿수대 승수를 기록했으며, 투타겸업 막바지에는 2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한 기록을 남겼다. 뉴욕 양키즈로 이적한 뒤로는 거의 타자로만 등판했기 때문에 투수로 등판한것은 몇경기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투수로 등판했다하면 승리를 거두어서 투수로서 통산성적은 94승 46패라는 기록을 달성하였고, 오타니 등장 이전까지 MLB 역사상 유일하게 투타겸업으로 성공한 사례였다. 타격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적을 올렸지만 투수로도 최고 수준이었으니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후지무라 후미오: NPB 원년 멤버로, 전쟁 전까지 매 시즌 투수, 2루수, 외야수를 오가며 투타겸업을 했고, 전후인 1946년에는 투수로서 23경기 등판해 107이닝 소화, 13승 2패, 평균자책점 2.44에 야수로서는 주로 3루수로 91경기 출장해 424타석, 타율 .323이라는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1946년 당시 일본프로야구의 규정이닝이 150이닝이어서 규정이닝에는 미달했지만(현대 기준으로는 105이닝이 되므로 규정이닝을 넘긴다) 규정타수[11]는 넘겼다. 심지어 1946시즌은 감독도 겸임한 시즌이었다. 1946년 이후로는 3루수로 완전히 전업했고, 6년 연속 베스트나인을 수상하며 오사카 타이거즈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자리매김했다.
  • 노구치 지로: 강철 어깨로 유명한 선수로, NPB 역사상 가장 꾸준히 투타겸업을 지속한 선수이다. 데뷔 시즌인 1939년에 투수로 69경기 등판, 야수로 48경기 출장해 459이닝[12]과 384타석을 소화한 것을 시작으로 단 8경기만 출장한 은퇴 시즌과 군 복무로 출장 기록이 없는 1944, 1945 시즌을 제외하고 1939년부터 은퇴 직전 시즌인 1952년까지 무려 12시즌 동안이나 투타겸업을 지속했다. 커리어 내내 여섯 차례나 규정이닝[13]과 규정타수를 동시에 달성했다. 1943년에는 딱 3타수 모자라서 규정타수를 달성하지 못했다.[14] 통산 성적은 3447.1이닝, 259완투, 평균자책점 1.96, 3594타석, 타율 .248이다. 타율이 낮아 보일 수도 있는데, 노구치 지로의 전성기였던 1940년대는 극심한 투고타저 시기로, 특히 투고타저가 심했던 1942년은 아예 리그 타율 10위였던 타자의 타율이 .216밖에 안 되었다. 더군다나 주자로서도 뛰어났는지 통산 94도루, 13도루자로 무려 87.9에 달하는 도루 성공률을 기록했다.
  • 김성한: KBO에서 투수로서는 모두 4시즌을 뛰었지만 풀타임으로 투수와 1루수로 투타겸업을 한 시즌은 1982년 1985년으로 2시즌이다. 프로 원년인 1982년 시즌에는 규정타석 규정이닝을 모두 넘기면서[15] 10승(리그 7위)과 2점대 평균자책점(리그 6위), 타점왕, 타율 3할(리그 10위)을 모두 달성했다. KBO 역사상 유일하게 투타겸업으로 성공한 사례.
  • 오타니 쇼헤이: 현재 투타겸업의 대명사이자 MLB 역사상 유일하게 규정타석과 규정이닝을 한 시즌에 동시에 달성한 선수이다. MLB에서 2022 시즌 규정타석과 규정이닝을 모두 달성하였다.[16] 2021, 2023 시즌에는 규정타석을 달성하고 규정이닝의 50%를 넘겼다.[17] NPB에서 2014년, 2016년 2년간 규정타석 규정이닝의 50%를 넘었다.[18] 데뷔 초기에는 투수로 출장하지 않는 날에는 외야수(주로 우익수)로 출장한 적도 있으며 2013년 시즌에는 외야수로 54경기, 2014년 시즌에는 외야수로 10경기에 출장했다. 2016년 시즌에는 NPB 역사 최초로 규정이닝 미만, 규정타석 미만으로 MVP를 수상했다. 2018년 MLB 진출 이후, 평상시에는 지명타자로 풀타임 출장하면서 6~9일 가량의 간격을 두고 선발투수로도 등판하는 투타겸업을 운용하는데, 지명타자 제도를 운용하는 아메리칸 리그 경기에서 현재 투수 출장일에도 타석에 서는 사실상 유일한 프로야구 선수이자[19], MLB 역사상 베이브 루스 이후 유일무이하게 이도류(二刀流)로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는 선수이다. 2021년 MLB 역대 최초로 투타겸업 MVP를 수상했다. 2022년엔 MLB 역대 최초로 15승 30홈런을 달성하는 금자탑을 쌓았으며, 23년에는 10승 40홈런이라는 또 다른 역대 최초 기록을 작성하며 두 번째 만장일치 MVP를 수상했다.


KBO에서는 박노준 1986년 시즌 투수로서 규정이닝은 넘겼지만, 타자로서는 대타로만 불과 54타석밖에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에 투타겸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987년 이후로는 사실상 타자로 전업.[20] 2021년 나원탁이 포수에서 외야수로 포지션 전향 이후 투수도 겸업하며 투타겸업을 시도했다가 22년부터는 완전히 투수로 전향.[21] 2023년 김건희가 투타겸업에 도전하며 투수로 2이닝, 타자로는 13타석에 들어섰었으나 2024년부터 포수로 포지션을 전향하였다. 2024년 기준 KBO 역사에서 한 시즌에 100이닝 & 200타석 이상 동시에 기록한 선수는 김성한이 유일.

MLB에서는 웨스 페럴 밥 레몬도 한시즌에 최고 150개 타석을 달성하긴 했지만 이들도 본격적으로 야수 포지션이 아닌 거의 대타로만 출장한 기록이라 본격적인 투타겸업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2000년 이후에는 2003년 브룩시 키시닉, 2007년 마이카 오윙스, 2010년 댄 해런, 2015년 마이클 로렌젠, 2017년 브렌던 맥케이 등이 투타겸업을 시도하긴 했지만 모두 타자로서는 100타석 미만으로 출장했던 기록이라 큰 의미부여는 하기 힘들다. 참고로 2024년 기준 MLB 역사에서 한 시즌에 100이닝 & 200타석 이상을 동시에 기록한 선수는 베이브 루스와 오타니 쇼헤이 2명밖에 없다.

NPB 야쿠르트 아톰즈 소속 투수였던 도야마 요시아키는 입단 2년차인 1971년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권유로 투타겸업에 도전해 투수로서 33경기(119.1이닝), 외야수로서 21경기(107타석) 출장한 적이 있으나 팔꿈치 부상으로 이후 뚜렷한 활약 없이 은퇴했다. 다만 해당 시즌에 투수이면서 1번 타자로 출장한 진기록이 남아 있다.

6. 기타

  • 준 명전급 커리어의 1루수이자 박찬호 시대를 본 팬들에게 '헬멧 쓴 1루수'로 인지도가 있던 존 올러루드는 대학 시절 투타겸업으로 매우 유명했는데, 커리어 하이인 2학년 때 타석에서는 .464 23홈런, 마운드에서는 15승 무패를 기록했다. 미국 대학 리그(NCAA)에서 2010년부터 그 해 투타겸업을 가장 잘 한 선수에게 존 올러루드 상[22] 을 주고 있다. 이 상을 3년 연속 수상하고 2017년 1라운드 4순위에 드래프트된 브렌던 맥케이는 마이너에서도 투타겸업을 할 것을 선언했다.
  • 투타겸업은 아니지만, 프로 리그에도 투수 타자를 보거나 야수가 투수로 등판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투수가 타자로 나오는 경우는 보통 지명타자가 소멸했는데 대타 자원이 없어 투수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는 일이 대부분이며, 잘 던지는 투수의 경우 다음 이닝에도 던지게 하기 위해 타석에 세우기도 한다. 지명타자/소멸사례 문서에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
  • 2021년 시즌에는 크게 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야수가 등판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2021년 4월 10일 한화 이글스의 야수 강경학 정진호가 등판해 각각 0.2이닝, 0.1이닝을 책임졌다. 동해 4월 17일 한화 정진호가 등판, 롯데에선 추재현-배성근-오윤석이 연달아 등판하며 최대 등판 기록을 깼다. 같은 해 4월 23일 포수 강태율이 투수로 등판하여 0.1이닝을 던지고 그 다음날 타자로 출장하여 홈런을 기록하여 김성한 이후 39년만에 투수 등판 다음날 홈런 기록을 기록했다. 또 6월 21일 SSG 랜더스 야수 김강민이 등판하여 0.2이닝 1K 1실점을 기록하여 역대 최고령 투수 데뷔등판 2위 기록을 하였다. 2022년에는 한화의 내야수 이도윤이 크게 지고 있는 상황에서 2차례 투수 등판하였고, 롯데의 심장 이대호는 본인의 은퇴 경기에서 1루수로 선발 출장한 후 8회 초 마운드에 올라와 한 타자를 상대한 바 있다. 근데 그 상대 타자로 등판한 선수도 LG의 마무리 투수였던 고우석이었다. 2024년 7월 31일 9회 초 기아 타이거즈의 외야수 박정우가 마운드에 올라와 한 이닝을 소화하였다. 거기다가 마지막 타자는 두산 베어스의 투수 권휘.
  • 승패보다 재미를 중시하는 KBO 올스타전에서도 투타겸업 사례가 나온 바 있다. 특히, 원년 올스타전부터 나왔다. 바로 김성한이 1차전과 3차전에서 투수로 출장하고, 2차전은 5번 지명타자로 출장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참고로, 김성한은 1차전 3이닝 무실점, 2차전에서 4타수 3안타, 3차전에서는 3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이후 2018년 올스타전에서 '한국판 오타니'라 불리던 강백호가 고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마운드에 올라 1이닝동안 삼진 2개를 잡았다.[23] 그리고 지명타자 자리가 소멸된 후[24] 박치국이 타석에 나서 안타를 쳤다. 이후에 장필준 함덕주도 타석에 들어섰지만 범타에 그쳤다. 2022년 올스타전에서는 SSG의 김민식이 10회초 승부치기 상황에서 오승환이 컨디션 난조로 등판하지 못하자, 대신 등판하였다. 승부치기 무사 1 2루 상황에서 2아웃을 잘 잡았고 무실점으로 막았으면 MVP 후보도 가능했으나 정은원한테 3점 홈런을 맞았다.
  • 야수의 마운드 등판은 끝장승부를 보는 MLB에서는 자주까진 아니어도 가끔 있는 편이다. 보통 승부가 완전히 기울어 졌을 때 가비지 이닝을 야수로 때우는 식으로 갈수록 이런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지난해 원래 야수였던 선수가 투수로 출전한 건 총 36번이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1946) 이후 최다 기록이었습니다. 올해 이 숫자는 74번으로 2배 넘게 늘었습니다. 투수와 타자를 겸하는 '이도류(二刀流)' 오타니 쇼헤이(大谷翔平·24·LA 에인절스)가 마운드에 오른 10번을 빼도 64번입니다. 바야흐로 '야수 등판' 전성시대가 막을 올린 겁니다.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베이스볼 비키니] 야수가 마운드에 섰다고 놀라지 말아요
이런 일이 생기는 건 선발투수의 평균 이닝이 짧아지고 불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굳이 기울어진 승부에 실낱같은 희망을 보고 전력을 다하느니 차라리 불펜을 아끼는 게 더 낫다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왕 게임 진거 팬 서비스나 하자는 차원에서 평소에는 보기 힘든 야수의 투구를 통해 즐거움을 주기 위한 효과도 있다. 또한 연장 15회를 넘긴다던가 해서 벤치의 투수나 야수들마저 모조리 소진되는 경우에는 다음 경기 등판을 준비하던 선발투수가 대타나 대수비로 나온다거나 하는 광경도 드물게 볼 수 있다. 2018년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1차전, 5차전 선발투수였던 클레이튼 커쇼가 '연장 17회말'에 대타로 나왔던 사례가 있다.
  • 투타겸업은 단순히 타격이 가능한 투수나 투구가 가능한 타자가 아닌 투타 양면에서 따로 놓고 봐도 각각의 성적이 팀의 전업 투수/전업 타자들과 비슷한 수준은 되어야 그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다. 구단 입장에선 투타겸업이라고해서 투수의 가치와 (지명)타자의 가치를 합산해서 비싼 돈을 들여 데려왔는데, 정작 성적이 1할대 타율의 15승 투수나 ERA 두자리 수의 40홈런 타자라면 돈값 못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차라리 단일 포지션으로 집중하는 것이 팀 승리에 더 낫기 때문.

7. 외부 링크


[1] 대표적으로 NPB 센트럴 리그와 2021 시즌까지 한정으로 MLB 내셔널 리그가 있다. [2] 현재도 아마추어 야구에서는 투타겸업이 꽤 흔한 일이다. 치열한 경쟁과 훈련을 거치면서 고르고 골라서 걸러진 선수들만 뛰는 프로에 비해서 아마추어는 선수들간에 재능의 차이가 천차만별이고 피지컬이나 기술적인 수준도 전혀 다르기 때문. [3] 심지어 이들 중 강정호를 제외한 3명은 모두 프로 입단 당시 투수로 입단했다. [4] 미국에서는 이걸 투 웨이(Two Way)라고 표현한다. [5] 2019 시즌에는 투수로서는 재활에 집중한다며 지명타자로만 나오면서도 풀타임 소화를 못하였고 무릎 수술로 시즌 아웃된 후유증이 2020 시즌까지 이어져 내구성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6] 사실상 투수가 수비 포지션인 타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메라칸리그같이 지명타자가 있는 리그에 적용 가능하며, 투수 - 야수 겸업보다 체력 부담이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 [7] 사실 이도류로 유명한 오타니는 본인의 재능과 투타겸업 의지, 그런 부분에 관대한 구단 분위기 등이 겹쳐 프로에서도 투타겸업을 할 수 있던 극히 예외적인 케이스이다. 일단 오타니는 일본에서 투타겸업으로 MVP를 수상하는 등 검증을 마쳤기에 LAA로부터 꾸준히 투자를 받은 것이다. [8] 이것때문에 투수들의 통산 누적 성적이 전체적으로 낮아졌다. [9] 간혹 지명타자를 유연하게 운용할수 없다거나 6인 선발 로테이션이 필요시된다는 이유로 투타겸업의 전략적 가치를 폄하하는 의견을 내는 측이 간과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현재 사실상 유일한 투웨이 플레이어인 오타니가 거의 매경기 출전하면서 투수로서도 타자로서도 리그 상위권의 높은 성적을 찍다보니 본말을 전도하기 쉽지만 사실 투웨이 플레이어라고 해서 꼭 지명타자로서 매경기 나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선발투수여야만 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오타니가 대부분의 경기에서 선발출전하는건 어디까지나 오타니가 홈런과 타점, 장타율 및 OPS에서 팀내 1위이자 리그에서도 5위~10위안에 들어가는 것을 기대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선수이며 심지어는 5~10위권이 아니라 리그 홈런왕에 OPS까지 1위를 기록했을만큼 강타자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소속팀의 선수층이 얇기때문이지 투타겸업 선수라고 무슨 특별취급을 해야하기 때문이 아니다. [10] 1918 시즌은 382타석/166.1이닝, 1919 시즌은 543타석/133.1이닝으로 각각 규정타석(434타석)과 규정이닝(140이닝)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못했다. 단, 당시 메이저리그에는 규정타석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으며, 1918 시즌은 타격 개인 타이틀 수상 자격을 만족한 시즌이었다. [11] 일본프로야구는 1956년까지 규정타수 제도였다. [12] 일본프로야구 역대 단일 시즌 이닝 소화 4위 기록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2위 기록(1942년 527.1이닝)도 노구치 지로. [13] 엄밀히 말하면 규정이닝이 아니라 투수 개인 타이틀 자격이 되는 기록 기준이다. 일본프로야구 초창기는 이 기준이 일정하지 않아 어느 해는 이닝 기준이었다가 어느 해는 등판 수 기준이었다가 하는 식으로 자주 바뀌었다. 전후에 이닝으로 통일되었지만 그나마도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 규정이 해마다 많이 달랐다. 여하튼 노구치 지로는 당시 기준으로 9번, 현대 기준으로는 10번 자격을 만족했다. 1949년 166.1이닝은 당시 규정이닝(180이닝) 미달이었다. [14] 여담으로 당시 노구치는 단 2피삼진만을 당했는데, 남은 3타수 모두 삼진으로 물러난다고 하더라도 일본프로야구 단일 시즌 최소 피삼진 기록(6개)이 바뀌게 된다. 실제로 노구치는 현역 시절 3594타석에 서서 단 101삼진만을 당하는 등 동 시기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도 삼진율이 극히 낮았다. [15] 1982년 340타석/106.1이닝. 규정타석 248타석, 규정이닝 80이닝 기준. [16] 2022년 666타석/166이닝. 규정타석 503타석/162이닝 기준. [17] 2021년 639타석/130.1이닝, 2023년 599타석/132이닝 [18] 2014년 234타석/155.1이닝, 2016년 382타석/140이닝. 규정타석 443타석, 규정이닝 143이닝 기준. [19] 2022년 시즌부터는 내셔널 리그에도 지명타자 제도가 도입되면서 현재는 사실상 MLB에서 유일하게 타석에도 서는 선발투수라고 볼 수 있다. [20] 선린상고와 고려대 시절 천재적 투수와 타자로 학생야구계를 평정했던 박노준은 OB 베어스 입단 첫 해인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년간 투타겸업을 했다. 고교와 대학 시절 투수와 타자 모두 빼어난 재능을 뽐냈던 박노준이기에 프로에서도 그 천재성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라고 믿었다.그러나 박노준은 투타겸업을 하는 동안 김성한처럼 10승을 올린 적도, 3할 이상 타율 또는 두 자릿수의 홈런을 기록한 적도 없었다. 투수로는 입단 첫 해인 1986년의 성적이 그나마 제일 나았지만 타자로서는 1할대의 타율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결국 박노준은 3년간 고작 5승 7패 7세이브를 올리는 것에 머물며 고교와 대학 시절 보여준 천재성에 크게 못 미치는 투타겸업 성적을 냈고 1989년부터는 외야수로 정착한다. [21] 2군에서 결승타와 세이브를 동시에 거두는 등 투타겸업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21년 9월 5일 1군에 등록되어 투수로는 1이닝 무실점, 타자로는 1타수 무안타를 기록하고 다시 말소되었다. [22] 풀네임은 The John Olerud Two-Way Player of the Year Award [23] 탈삼진의 희생양은 이용규 오지환. [24] 좌익수였던 강백호가 투수로 들어오면서 지명타자가 소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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