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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 폭동 Kapp-Putsch Kapp-Lüttwitz Putsch Kapp Puts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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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하르트의 여단이 베를린에 진군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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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20년 3월 13일 ~ 18일 | ||
장소 | ||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 ||
원인 | ||
우익 세력의 바이마르 공화국 전복 시도 | ||
교전 세력 | ||
[[틀:깃발| | ]][[틀:깃발| ]][[바이마르 공화국| ]]쿠데타군 | |
지휘관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구스타프 바우어 |
]][[틀:깃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볼프강 카프 발터 폰 뤼트비츠 헤르만 에어하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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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명 | -명 | |
결과 | ||
쿠데타군의 패배 | ||
영향 | ||
독일 사회민주당의 1920년 6월 총선 패배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세 불안정화 1932년 프로이센 쿠데타 발생 주모자 볼프강 카프와 발터 폰 뤼트비츠 망명 루르 파업 발생, 사회민주당과 극좌 세력의 대립 심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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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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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0년 3월 독일국 베를린에서 우익 세력이 신생 공화국 체제를 전복하는 것을 기도한 쿠데타. 주도자인 볼프강 카프(Wolfgang Kapp)의 성을 따서 보통 카프 폭동이라고 부르며 또 다른 주도자인 발터 폰 뤼트비츠(Walther von Lüttwitz)까지 더해 카프-뤼트비츠 폭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카프 본인은 바지사장에 가까웠고 실질적인 주도자는 뤼트비츠였기 때문이다.2. 배경
1918년 독일 11월 혁명의 발발과 동시에 빌헬름 2세는 퇴위했고 독일 제국은 붕괴되었다. 독일 제국의 뒤를 계승한 것은 중도좌익 계열인 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주도하던 바이마르 공화국이었다. 그렇지만 혼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정권 수립을 주장하면서 끊임없이 공산 혁명을 시도했으며 정부 측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참전용사들로 구성된 준군사조직인 철모단과 자유군단을 동원하면서 독일 전역은 사실상 내전 상태에 빠졌다.그렇다고 해서 우익 세력이 신생 공화국에 우호적이었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우익 세력 중에서도 핵심이었으며 1차대전 발발 이후 사실상 국가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던 군부는 사민당의 공화국 체제를 내키지 않아했다.[1] 일단 프로이센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군부는 정부에서 어느 정도 독립적이었고 우파의 분노가 배후중상설로 더더욱 강화되면서 군부의 바이마르 체제에 대한 태도는 더욱 냉담해졌다. 하지만 독일 전역에서 극좌 세력들의 봉기가 일어나던 판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우익 세력들의 비위를 맞춰 주어야만 했다. 그런데 여기서 뜬금없는 핵폭탄이 외부에서 터졌다. 바로 독일의 정규군을 10만 명 규모까지 축소하며 철모단, 자유군단을 비롯한 모든 준군사조직의 해산을 명령한 베르사유 조약이었다.
군부와 준군사조직의 수뇌부들은 당연히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에 반발했지만 국제 사회의 압력을 이길 수 없었던 총리 구스타프 바우어와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는 1920년 2월 29일 대표적인 준군사조직이었던 자유군단의 해산을 명령했다. 다음날인 3월 1일 자유군단은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퍼레이드를 베를린 근교에서 펼치면서 정부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여기에 정규군 장성이자 자유군단의 지휘를 겸하고 있던 발터 폰 뤼트비츠가 퍼레이드 직후 행한 연설에서 "나는 이렇게 폭풍전야인 상황에서 주력 부대를 잃는 것을 결코 참지 않을 것이다.(Ich werde nicht dulden, dass mir eine solche Kerntruppe in einer so gewitterschwülen Zeit zerschlagen wird)"라는 발언을 남기면서 타오르는 불에 제대로 기름을 끼얹었다. 당국의 지시를 대놓고 거부한 뤼트비츠의 발언에 모두가 경악했고 실력 행사로 군부를 제압할 수 없었던 정부는 부랴부랴 정부 각료들과 뤼트비츠 사이의 협상 자리를 마련했다.
대통령 에베르트와 국방장관 노스케가 참가한 협상 자리에서 뤼트비츠는 즉각적인 의회 해산과 새로운 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 실시, 자신을 정규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할 것과 같은 무리하기 짝이 없는 요구 조건을 내걸었고 격분한 에베르트는 단칼에 그 조건을 거부하는 한편 뤼트비츠에게 정규군 장성에서 사퇴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한 번 폭주하기 시작한 뤼트비츠에게 그런 말이 먹힐 리가 없었고(...) 협상 결렬과 동시에 뤼트비츠는 반란을 계획했다. 자유군단 내에서 가장 정예 병력 중 하나였던 에어하르트 해병여단(Marinebrigade Ehrhardt)이 적극적으로 동조했으며 프로이센 출신 극우 성향의 왕당파였던 볼프강 카프가 명목상 반란의 주도자 자리를 맡았다. 여기에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비롯해 군부 인사 중 상당수가 침묵이라는 형태로 반란 계획에 암묵적인 동의를 표했다. 마침내 3월 12일 에어하르트 해병여단의 지휘자인 헤르만 에어하르트(Hermann Ehrhardt)가 자신의 해병여단에게 베를린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하면서 카프 폭동은 시작되었다.
3. 진행
"국군은 국군을 향해 총을 쏘지 않습니다.(
Reichswehr schießt nicht auf
Reichswehr)"
- 한스 폰 젝트,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반란군이 베를린으로 진격해 왔지만 정부는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국방장관 노스케가 군부들에게 진압을 '요청'[2]했지만 군부는 '같은 독일군끼리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이를 거부했다. 다음날인 13일 새벽 반군이 베를린 시내로 돌입하기 시작했고 내각 구성원들은 황급히 베를린 밖으로 대피해야만 했다. 13일 아침 반군은 마침내 베를린 전역을 장악했고 카프는 스스로 국가수상(Reichskanzler)직에 올랐음을 선포했다. 실질적으로 반란을 주도한 뤼트비츠에게는 국방부 장관직이 주어졌다.- 한스 폰 젝트,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군부가 새로 수립된 내각에 지지를 표했고 바이에른에서도 반란에 지지를 표명했다.[3] 에베르트가 이끌던 기존 내각은 반군을 피해 드레스덴을 거쳐 멀리 슈투트가르트로 피신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독일 전역의 노동자들에게 반란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실시할 것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군부보다는 사민당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았던 노조는 정부의 호소를 듣자마자 곧바로 파업에 들어갔고 심지어 사민당과 앙숙이었던 독일 독립사회민주당[4]과 독일 공산당까지도 파업에 동조하던 상황 속에서 1200만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실시했고[5] 3월 15일에는 사실상 독일 전역이 올 스탑되었다. 반군 측은 당황해서 노동자들을 달래기도 하고 위협해 보기도 했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고 결국 3월 17일 쿠데타는 사실상 실패로 끝닜다. 하지만 정부 역시 반군 측을 결정적으로 몰아낼 힘은 없었고 결국 다시 한 번 협상이 열렸다. 사민당, 중앙당, 독일인민당과 같은 주요 정당 및 군부가 참여한 협상에서 카프와 뤼트비츠가 수립한 내각을 붕괴시키는 대신 젝트 장군을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 /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재선거의 실시 등을 골자로 하는 절충안이 결정되면서 마침내 반란은 끝났다.
4. 여파
- 안 그래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기가 바닥을 기고 있았던 사민당 정권은 3개월 뒤인 6월 실시된 총선거에서 참패했다.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고질적인 정국 불안정은 심화되었다.
- 이 사건으로 군부는 바이마르 체제에 충성하기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렇게 독자세력화된 군부는 후일 프란츠 폰 파펜의 프로이센 쿠데타[6]와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을 묵인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숨통을 끊었다.
- 반란의 주도자인 카프와 뤼트비츠는 극우 세력과 군부의 봐주기 속에 별다른 법적 제재 없이 스웨덴과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 카프는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Alfred Friedrich von Tirpitz)[7] 해군 대제독과 함께 독일 조국당(Deutsche Vaterlandspartei)을 만든 적도 있었는데 반유대주의와 배후중상설을 주장하는 전형적인 극우 정당이었으나 1년도 채 가지 않아 해산되었다. 여기서 당원으로 활동했던 안톤 드렉슬러란 사람은 나중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전신인 독일 노동자당을 창당했다.
- 루르 공업 지대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반란 종결 후에도 계속 이어져서 공산 혁명을 하려는 시도로까지 이어졌는데 결국 자유군단까지 동원한 끝에 무력으로 진압해야만 했다. 우파의 정권 전복 시도를 막지 못해 자신들을 부른 사민당이 오히려 다시 그 우파의 자유군단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궐기를 짓밟는걸 본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독일 공산당 등 바이마르 체제의 극좌파는 이후 사민당에게 유명한 '사민주의는 사회주의적 파시즘이다.' 드립을 치면서 사민당과 대립하게 됐다.
[1]
일단 내각의 핵심 장관직은 모두 사민당이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총리
구스타프 바우어,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
[2]
명령이 아니라 요청이었다. 당시 독일에는
문민통제라는
개념이 없었고 다만 정치와 군대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을 뿐이다.
[3]
다른 지역은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고 일단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간잽이
[4]
1차대전을 적극 지지한 사민당 주류에 반발하여 새로 성립된 정당이다.
[5]
이는 지금까지도 독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으로 남아 있다.
[6]
친위쿠데타를 통해 연방정부가 프로이센 지방정부의 사민당 정권을 붕괴시켜 버린 사건이다.
[7]
2차대전 시기의
전함 티르피츠가 이 사람에게서 이름을 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