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
1권 「선제기(宣帝紀)」 |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 3권 「무제기(武帝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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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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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기(戴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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鄒湛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윤보(潤甫)로 추궤(鄒軌)의 아들.
형주 남양군 신야현 사람으로 어릴 때 학문을 익혀 위나라에서 좌장군, 사위, 사랑, 태학박사, 중서통사낭 등을 지냈으며, 진나라에서는 서랑, 정위, 정남종사중랑을 지냈다.
양호의 재능을 중히 여긴 인물로 양호의 타루비에 대한 일화에서 양호가 양양에 머무르면서 선정을 베풀 때 현산에 올라 술을 마시면서 시 읊는 것을 즐길 때 늘 양호와 동행했다. 언제는 양호가 부하들을 돌아보면서 많은 현인들이 이 산에 오른 것을 얘기하면서 지금은 모두 그들이 사라져 이름조차 알 길이 없다면서 자신도 이름없이 사라질 것을 탄식했다.
그러자 추담은 공의 어진 명성이 반드시 이 산과 함께 할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과 같은 자는 공의 말씀처럼 될 거라 했는데, 그 말대로 양양 백성들은 양호를 기리는 타루비를 세웠다.
추담은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절하면서 자신을 진중서(甄仲舒)라 하면서 장례를 치러 달라고 했다. 추담이 깨어나 곰곰이 생각하니, 甄仲舒라는 글자를 뜯어보면 집 서쪽 기와더미 속에 있는 사람(舍西瓦土中人)이라는 뜻이라면서 그 곳에서 시체를 찾아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다시 꿈을 꾸자 그 사람이 찾아와 감사의 절을 올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