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0-31 11:09:19

창덕궁 태극정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5
대보단
건무문 광지문
청의정 태극정 농산정
농포
소요암 옥류천
소요정
취한정
수복방 신선원전 진설청
괘궁정 취규정
재실
능허정
의효전 사가정 청심정 천향각
몽답정 산단
백운사
천성동 태청문
청연각
존덕정
외삼문 폄우사 척뇌당
관람정
반도지
승재정
부군당
반빗간 태일문
통벽문 우신문 농수정
연경당 선향재
국출신직소 수인문 장양문
장락문
창덕궁 애련정
어수당 애련지
불로문
석거문 금마문 영춘문
운경거 의두합
희우정 천석정
서향각 주합루
어수문
사정기비각 부용지 영화당 춘당대 서총대
부용정
요금문 서소 개유와 열고관
창송헌 수정전 가정당
습취헌 집상전
영모당
경복전 경훈각 징광루 함원전
청향각
의풍각 융경헌 대조전 흥복헌
수랏간 관리합
만수전 태화당 재덕당 요휘문 경극문 창경궁
경추문 보경당 선평문 양심합 여춘문 병경문
함양문
선원전 진설청 내재실 만수문 건중문 희정당 영안문
양지당 만안문 관광청 선정전 건인문
책고 인정전 관물헌 어휘문
봉모당 억석루 연경문 만복문 향실 선정문 성정각 보춘정 중희당 칠분서 해당정 수방재 연영합 평원루 취명문
운한문 영의사 예문관 서방색 소주방 선화문 자시문 삼삼와 승화루 한정당 보화문
숭범문 선전관청 영현문 전의사 취운정 협문
훈국초관인직소 이문원 검서청 약방 내삼청 광범문 내반원 낙선재 석복헌
훈국초관인직소 홍문관 문서고 궁방 사옹원 등촉방 대은원 수강재
훈국군파수직소 정청 육선루
악기고
승정원 상서성 연영문 협양문 무예청 장락문 주명문
남소
위장청
인정문 + 대청 공상청 누국
수문장청 금천교 진선문 숙장문 건양문 일영대
금호문 결속색
정색
내병조
(창덕궁관리소)
호위청 상서원 배설방 금위군번소 패장직소 별감방 전루 문기수번소 저승전 낙선당
무비사
의장고
전설사 빈청
(어차고)
진수당 장경각 군옥재 춘방
수문장청 돈화문 수문장청 교자고 상의원 치미각 시민당 계방 등룡문
원역처소 사주문
단봉문 종묘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colbgcolor=#bf1400> 창덕궁 태극정
昌德宮 太極亭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와룡동 2-71번지)
건축시기 1636년 (창건)
파일:태극정.png
<colbgcolor=#bf1400> 태극정[1]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입체 영상. 소요정, 취한정, 취규정, 농산정, 청의정과 같이 소개한다.

1. 개요2. 이름3. 역사4. 구조5. 여담

[clearfix]

1. 개요

창덕궁 후원 옥류천 권역에 있는 정자이다.

2. 이름

태극(太極)’은 ‘ 음양 사상과 결합해 만물을 생성시키는 우주 근원’이다. 《 주역》에서 따온 이름으로 태극기의 그 태극이 맞다,
파일:음양.svg
<colbgcolor=#bf1400> 태극 문양

3. 역사

1636년( 인조 14년)에 지었다. 첫 이름은 운영정(雲影亭)이었는데 나중에 태극정으로 바꾸었다. 이후 많은 들이 쉬어가는 곳으로 활용했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파일:옛날 태극정.png
<colbgcolor=#bf1400> 왼쪽은 《동궐도》의 태극정(붉은 원 안), 오른쪽은 《조선고적도보》의 태극정

4. 구조

  • 1층[2] 목조 건물로 남향(南向)이다. 칸 수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총 1칸이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3단을 쌓았으며 그 위에 다시 장대석 1단을 깔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둥 주춧돌은 원형이며 기둥 안쪽 가장자리에 문틀을 설치했다. 출입은 남쪽 칸으로만 할 수 있으며 건물로 오르게하는 디딤돌은 2단이다. 기단의 사방 가운데에는 1단짜리 계단이 있다. 남쪽 기단의 계단 앞에는 돌판을 길게 덧대고 그 위에는 전돌을 깔았다.
  • 사방이 트여있다. 그러나 《 동궐도》를 보면 원래는 측면에 을, 정면에 을 달아놓았다.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조선고적도보》를 보면 벽은 사라졌지만 사방에 들문이 달려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제 지금처럼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지붕은 사모지붕, 처마는 겹처마이다. 기둥 사이에 창방을 두고 그 위에 소로를 얹었다.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기와로 쌓았으며 내림마루 끝에는 막새기와를 얹었다. 추녀마루가 만나는 부분에는 절병통을 올렸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칠했다.
  • 각 칸의 하단부에는 머름을 두었고, 건물 바깥에는 쪽마루를 깐 뒤 그 가장자리에 난간을 설치했다. 다만, 건물로 들어가는 부분에는 머름과 난간을 두지 않았다. 난간은 ‘아(亞)’자 형 교란으로, 그 위에 호리병 형태의 난간기둥과 돌란대를 얹은 형태이다.
  • 천장은 우물반자를 설치한 형태이다. 실내 바닥은 마루이다.
  • 기둥 바깥 쪽에 주련을 걸었다. 주련에는 를 적어놓았다. 주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隔窓雲霧生衣上 (격창운무생의상)

    창 밖의 운무(雲霧)는 옷 위에서 피어오르고


    捲幔山川入鏡中 (권만산천입경중)

    휘장을 걷자 산천이 거울 속으로 들어오네


    花裏簾櫳晴放燕(화리염롱청방연)

    꽃 속이라, 주렴 친 창 밖에 비 개자 제비 날고


    柳邊樓閣曉聞鶯(유변누각효문앵)

    버들 곁이라, 누각에선 새벽녘에 꾀꼬리 소리 들리네

5. 여담

  • 역대 임금들이 태극정을 많이 찾고 아꼈다. 숙종은 창덕궁 후원에서 아름다운 정자 3채를 '상림삼정(上林三亭)'으로 불렀는데 태극정도 여기에 포함시켰다.[3] 관련하여 《상림삼정기》를 썼는데 거기서 ‘ 여산(廬山)[4]과 난정(蘭亭)[5]이 어찌 여기보다 나을까’라며 태극정의 경치를 극찬했다. # 숙종의 증손자 정조는 《태극정시》를 지어 빼어난 풍경을 찬양했다. 정조의 아들 순조는 여기서 신하들을 만나 《 심경》을 읽게했다. #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트위터. [2]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이라고 표현한다. [3] 나머지는 청의정 소요정. [4] 산세가 수려하기로 유명한 중국 명산으로, 남북조시대 남조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모두 한 번씩 찾던 산이었다. [5] 중국 사오싱시에 있는 왕희지의 유적지. 역시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43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43 ( 이전 역사)
문서의 r4 ( 이전 역사)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