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11 20:21:51

창덕궁 금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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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colbgcolor=#bf1400> 창덕궁 금호문
昌德宮 金虎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와룡동 2-71번지)
건축시기 창건연대 미상 ( 1405년 추정)
중건연대 미상 ( 1608년 추정)
파일:금호문.png
<colbgcolor=#bf1400> 2010년 11월의 금호문 모습

1. 개요2. 이름3. 이용4. 역사5. 구조6. 여담

[clearfix]

1. 개요

창덕궁의 궁문이다. 돈화문의 서북쪽에 있으며 금천교와 마주본다.

정문인 돈화문을 주로 왕의 행차 같은 큰 의례에 이용했기에 사헌부 대사헌을 제외한 승정원, 홍문관 같은 궐내각사[1]에 근무하는 관원들이 주로 이용했다.[2] 조선 후기에 각 문마다 출입하는 사람들을 관행적으로 고정했는데, 이 때 금호문은 조정의 관리인 조신(朝臣)들이 이용하는 문으로 기능했다. 1789년(정조 13년)에 정조가 그러지말고 각자 다니고 싶은 문으로 다니라고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

2. 이름

이름은 당나라의 서쪽 궁문 이름에서 따왔다. # '금(金)'은 오행에서 서쪽을 뜻한다. '호(虎)'는 호랑이로, 역시 서쪽을 나타내는 동물이다. 즉 서쪽 문이라는 뜻이다.

3. 이용

현재도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입장은 할 수 없고[3] 나가는 것만 가능하다.

그런데 금호문으로 입장하려는 사람이 많았는지, 헷갈리는 관람객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인지 창덕궁관리소 측에서 금호문 앞에 돈화문으로 입장하라는 안내판을 설치해두었다.
파일:금호문 안내판.png
<colbgcolor=#bf1400> 금호문 앞에 있는 출입 안내판.
금호문은 출구이며 돈화문으로 입장하라는 내용이다.

4. 역사

파일:동궐도 금호문.png
<colbgcolor=#bf1400> 〈동궐도〉 금호문
태종 창덕궁을 창건하면서 같이 지은 듯 하다. 원래는 이름이 없었다. 그러다 1475년(성종 6년)에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금호문이란 이름을 지었다. #

1645년(인조 23년)에는 궁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금호문으로 드나들자 근처에 있는 서연청에서 세자가 조용히 공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폐쇄당했다. # 그리고 3년 뒤 다시 열렸다. # 이후에도 여러 번 폐쇄와 개방이 반복되었다. #

5. 구조

  • 정면 1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고 용마루 위에 용두를 올렸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공포는 초익공으로 익공의 끝을 둥글게 처리한 몰익공 형식이다.
  •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에 달았다. 양 측면의 칸 마다 중인방을 끼우고 위, 아래 위위아래를 초록색 나무 으로 마감했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했고, 위에는 홍살을 두었다. 단청은 긋기단청[4]으로 입혔다.
  •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이며, 궁 바깥 쪽 방향의 홍살에 걸려있다.

6. 여담

  •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들이 창덕궁으로 들어갈 때 이용했던 문이다. 금호문의 수문장 박효립이 문을 열고 반정군을 들여보냈다. # #

파일:송학선 의사 의거 터 표지석.png }}} ||
<colbgcolor=#bf1400> 송학선 의사 의거 터 표지석
1926년 4월 28일에 송학선 의사가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 암살하려다 실패한 의거의 현장이다. 거사 이틀 전에 순종황제 창덕궁에서 승하했다. 그리고 창덕궁 내 빈소로 가는 출입문을 금호문으로 정했다. 송학선 의사는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이 문상을 하러 금호문을 드나드는 것을 보고 사이토가 지날 때를 노려 암살하기로 했다. 그리고 4월 28일에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올 때 뛰어들어 안에 타고 있던 일본인 2명을 죽이고 달아났다. 그러나 송학선 의사가 죽인 인물은 사이토가 아닌 다른 일본인이었다.[5] 결국 송학선 의사는 체포당한 뒤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5월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현재 '송학선의사 의거 터'란 표지석이 있다. 한때 금호문이 아닌 돈화문 근처에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금호문 앞에 놓여있다.
  • 왕실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범죄가 일어난 곳이기도 했다.(...) 1928년 4월 19일 자 〈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그해 3월 15일 오전 11시 경에 종로에서 삼광상회라는 금은방을 운영하는 상인에게 범인이 전화를 걸어 "여기는 이왕직인데 대비 전하[6]께서 쓰실 것이니 금비녀랑 금반지, 귀이개 등 170여 원[7] 어치 귀금속들을 가지고 창덕궁 앞으로 오라." 했다. 이에 깜짝 놀란 상인이 부랴부랴 준비해 곧바로 창덕궁 금호문 앞으로 달려갔더니 양복을 차려 입은 범인이 "늦으면 어떡하냐"며 마치 왕실 사무관인 것마냥 야단을 쳤다. 정신이 없던 상인에게 범인이 "대비 전하가 고르실 수 있도록 물건을 먼저 달라"고 하자 상인은 물품들을 모두 건넸다. 범인은 물건을 받자마자 그대로 냅다 도망가버렸고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 #

[1] 궁궐 내의 행정관청. [2] 위치도 궐내각사와 가깝다. [3] 돈화문으로만 입장이 가능하다. [4] 가칠단청 위에 만 그어 마무리한 단청이다. 가칠단청은 무늬없이 단색으로만 칠한 단청이다. [5] 죽은 일본인은 국수회(國粹會) 지부장 다카야마(高山孝行)와 경성부회 평의원 사토(佐藤虎次郎)였다. 함께 탑승했던 평의원 이케다(池田長次郎)도 칼에 맞았으나 중상에 그쳤다. [6] 순종의 계후 순정효황후를 가리킨다. 순종이 승하한 후여서 당시 순정효황후는 이왕대비 신분이었다. [7] 현재 가치로 대략 1300만 원 정도하는 고가의 금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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