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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산 전투

임진왜란 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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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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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산 전투
稷山 戰鬪
<colbgcolor=#F0C420,#000080><colcolor=#800000,#D0FC5C> 시기 1597년 (신종 25년) 10월 17일 (음력 9월 7일)
장소

조선 충청도 직산
교전 세력 <rowcolor=black>
(공세)
일본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명나라 국기.png 양호
파일:명나라 국기.png 마귀
파일:명나라 국기.png 해생[1]
지휘관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구로다 나가마사
병력 명군: 4,000명 (기병) 일본군: 5,000명 (보병)
피해 전사자: 200명 (日) 전사자: 29명 (日)
전사자: 600명 ↑ (明)
결과 승패 구분 불가

1. 개요2. 배경
2.1. 일본군의 진격2.2. 명나라군의 구성2.3. 조·명의 1차 방어선: 남원성2.4. 조·명의 2차 방어선: 직산 평야
3. 전개4. 이후
4.1. 결과 및 양측 피해규모 논란4.2. 일본군의 철수 이유: 명량 해전4.3. 선조의 의도적인 '대첩' 띄우기
5. 매체

[clearfix]

1. 개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직산[2] 소사벌(소사평)에서 벌어진 명나라군 일본군 간의 전투.

2. 배경

2.1. 일본군의 진격

1597년 1월 12일(음력), 일본군이 재상륙을 시작한다. 조선 측은 이를 '정유재란'으로 분류한다. 다급해져 이순신 1회, 원균 4회 출정하여 강습하지만, 강습에 면역이 생긴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 한다. 하지만 힘의 균형은 유지되어, 재상륙한 일본군은 7개월간 한발짝도 진격하지 못 한다.

1597년 7월 16일(음력), 조선 수군이 너무 강습을 오가다보니 그 경로가 뻔히 노출되어, 일본군에게 대규모로 역습당한 칠천량 해전이 발발한다. 일본군은 처음엔 단순히 큰 전투의 승리 정도로 파악했으나, 조선 수군의 완벽한 와해와 힘의 균형의 붕괴임을 정탐으로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에 일본군은 8월 1일부로 3로로 나누어 북상을 시작했다.
  • 일본군 육군 우군 : 8월 7~16일 고령 전투, 8월 16일 황석산성 전투 등을 거치고 전주부성으로 합류했다. 이들이 북진하여 9월 7일 직산에 이르게 된다.
  • 일본군 육군 좌군 : 8월 3일에 이순신이 있던 곳에 도착했으나 놓치고, 8월 7일 석주관 전투, 8월 12~15일 남원 전투. 전주부성으로 합류했다. 이들은 충청도 일대, 전라도 일대를 휩쓸며 조선 수군의 근거지를 찾으려 수색했다.
  • 일본군 수군 : 8월 1~7일 진주~사천곤양~석주관을 따라 좌군 보급, 8월 중순 여수 전라좌수영 파괴, 8월 27일 어란포 해전으로 이순신과 조선 수군 발견, 9월 7일 벽파진 해전으로 추격해 명량에 초라한 13척의 조선 수군과 마지막 보루 전라우수영[3]이 있음을 확인하고 명량으로 향했다.

2.2. 명나라군의 구성

임진왜란 때로부터 긴 시간이 지나며 명나라의 파병군 지휘부도 다수 변경되었다. 다음과 같이 조선 조정은 양호-마귀와 자주 논의하게 된다.
  • 형개 - 파병군 총독. 명나라 병부상서라서 명목상 총대장일뿐 명나라에 있었다.
  • 양호 - 파병군 경리. 평양에 주둔. 직위가 높은 문관으로, 후방에서 관리감독 및 논공행상.
  • 마귀 - 파병군 총병. 한양에 주둔. 직위가 낮은 무관으로, 실제 전투를 지휘.
  • 양원, 해생, 오유충, 유정 등의 장수들은 임진왜란 때부터 있었으며, 진린은 새로 건너왔다.

2.3. 조·명의 1차 방어선: 남원성

1597년 7월 22일(음력), 칠천량 해전의 대패가 보고되었다. 선조는 즉각 명에 추가파병을 요청한다. #

1597년 7월 29일(음력), 일본군의 3로 진격(전라도 공략전)이 보고되었다. 선조는 명 육군에게 전주성/남원성 방어를 요청했다. #

1597년 8월 5일(음력), 이 시점에 마귀(한양, 명 도독)/양원(남원, 부총)/진우충(전주)/양호(평양, 경리) 등에 명 육군이 있는 상황이었다. 선조는 마귀의 1만 군사를 남쪽의 방비에 추가로 보내기보다, 한양에 두다가 전라도를 패싱하고 한양을 직공하려는 일본군과 평지에서 맞붙는게 낫겠다고 본다. 충주 탄금대와 한양의 내성에 성을 추가로 쌓지는 않기로 한다. #

1597년 8월 7일(음력), 마귀가 남산에 올라 한양의 내성을 이용한 수성전을 제안했다. 선조는 앞서 자신이 구상한대로 한양 수성전이 아닌 평지 전투를 제안한다. #

1597년 8월 9일(음력), 선조가 마귀에게 조선 육군은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겠다는 전략을 전달하고 암묵적 동의를 받는다. #

1597년 8월 12일(음력), 선조가 마귀의 한양 도성 축성 요구는 마귀의 뜻이 아니라 명나라 높으신 분들의 요구에 마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며 따르는 것임을 눈치채고 묵살하기로 한다. #

1597년 8월 15일(음력), 장운익(접반사)는 마귀가 (8월 5일 선조가 앞서 판단했듯) 일본육군 우군의 한양 직공을 우려해 남원에 구원군을 보내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다. 김신원(좌부승지)은 현 한양도성이 평양성 전투 때보다 수성하기에 조건이 괜찮으며, 전라도까지 수군이 밀려도 충청도 안흥 앞바다에서 수륙병진을 차단가능하다고 보고했다. #

2.4. 조·명의 2차 방어선: 직산 평야

1597년 8월 16일(음력), 남원 전투의 패배가 보고되었다.[4] 명나라군은 양원과 10여명만 겨우 탈출했다. # 명군은 일본육군 좌/우군이 모두 들이닥치는 전주성을 중과부적으로 지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보고, 진우충의 군대를 천안까지 물린다.

1597년 8월 19일(음력), 선조는 조선 조정이 피난을 갈 수도 있으니, 평양에 있는 양호의 명 육군은 한양으로 오지 말고 그대로 자리를 지켜달라고 요구했다. # 선조는 마귀에게 (평양의 양호가 요구하는) 도성 축성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한강 방어 전략을 준비하자고 요구했다. #

1597년 8월 24일(음력), 남원 전투에서 살아온 양원의 군대가 도착했다. 선조는 남대문 밖으로 나와 이를 맞이했다. # 선조는 양호에게 조선군은 한강 방어전을 준비중이라고 편지를 보낸다. #

1597년 8월 27일(음력), 선조가 마귀가 도독에서 제독으로 승진한 것을 축하하는 핑계로 찾아 가 이야기를 나눴다. 이 시점에 일본군이 여산(전북 익산)에, 명군이 천안(충남)에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 사헌부는 전주/공주 부근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충주/원주 등에 한강유역 방어선 구축을 건의했고, 선조가 이를 허락했다. #

1597년 9월 1일(음력), 은진(恩津)·여산(礪山)[5] 등까지 일본군이 진격했다. #

1597년 9월 2일(음력), 금산(錦山)·회덕(懷德)·임천(林川)·한산(韓山)[6] 등까지 일본군이 진격했다. #

3. 전개

1597년 9월 3일(음력), 평양에 있던 양호(경리)가 한성으로 내려왔다. 마귀(총병)에게 병력을 남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597년 9월 5일(음력), 마귀는 해생(부총병)을 시켜 기병 2000을 남파하고, 뒤이어 2000여기를 증파하였다.
파일:전국시대.jpg 파일:20190525095333_7dcc74a60c080a64d902a6f8598542f2_5.jpeg.jpg
일본군 보병 명나라군 기병
파일:attachment/직산 전투/Example.jpg
직산 전투 전개도

1597년 9월 7일(음력)
  • 해생의 기병대 2000이 새벽에 평택을 지나, 날이 밝기 전에 직산 남쪽 1km 삼거리에 도착했다. 때마침 북상중이던 일본군의 우군 선발인 구로다 나가마사 군의 선발 보병대 2000도 삼거리에 이르렀고, 서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 먼저 공격을 개시한 것은 일본군이었다.[7] 일본 보병대는 명 기병대에 조총 사격을 퍼붓고 나서, 칼을 들고 돌격했다.
  • 하지만 명의 기병대는 조총 화망을 방패로 방어한 뒤, 내려서 화포를 돌격하는 일본군에게 퍼부어 돌격속도를 저해한 뒤, 말에 다시 올라 타 일본 보병대를 향해 돌격했다. 이렇듯 처음 보는 기병 전술[8]에 당황한 일본군은 일시 퇴각한다.
  • 일본 측은 즉각 본대에 증원을 요청해 3천의 보병+기병을 추가 투입해, 좌/우로 나누어 명군에 또 조총 사격을 퍼붓고, 돌격하며 포위망을 형성하려 했다. 다만 일본 측의 기병은 명 기병의 상대가 되진 않았다.[9]
  • 명나라 측도 후발 기병대 2천이 추가 도착했고, 총 4천의 군을 좌/중/우 셋으로 나누어, 기병의 속도를 이용해 역으로 포위하려 하며 공격했다.

4. 이후

4.1. 결과 및 양측 피해규모 논란

결과상 양측의 승패 및 피해 규모는 불분명하고 무의미하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 29명 전사 vs 명군 200명 전사'로 일본 측 승리라 주장하며, 조선측 선조실록에 따르면 '일본군 600명 전사'로 명 측 승리라 주장한다. 양측의 최대 사상자로 집계하더라도, 선발대 간의 충돌이었고, 일정 이상 피해가 누적되자 각자 군을 물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충청 병사 이시언이 사로잡은 왜적 복전감개(福田勘介)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아비는 전 국왕의 장수였는데 관백(關伯)이 찬탈할 때 피살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를 혐오하여 쫓아내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처음에는 서생포(西生浦)로부터 청정을 따라 전라도로 향했습니다.
(중략)
또한 직산(稷山)의 싸움에서 갑비수(甲斐守)의 군대가 많이 죽었으므로 부끄러워서 숨기고 있다 합니다마는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이미 사로잡혔으니 항복한 왜인과 같이 대해 주면 죽도록 힘쓰겠습니다. 칼이나 창 쓰는 재주와 포 쏘는 기술은 남의 모범이 되지는 못하지만 몸을 방어할 수는 있습니다. 그 중에도 조총의 묘기는 잘 압니다."
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3일 경신 3번째기사

한편 1597년 조선의 충청 병사 이시언한테 사로잡힌 일본군 장수 후쿠다 간스케(복전감개福田勘介)는 "직산(稷山)의 싸움에서 갑비수(甲斐守)의 군대가 많이 죽었으므로 부끄러워서 숨기고 있다."라고 증언했다. 여기서 말한 갑비수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를 뜻한다. 그러니까 실제로 직산 전투에서 왜군이 입은 피해는 꽤 컸을텐데, 그것을 왜군 측에서 사기가 떨어질까봐 숨기거나 실제보다 적게 말했을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전투 중에 포로로 잡힌 병사가 구로다가 피해를 적게 측정했다고 하는것도 근거라기엔 부족하다. 출처

명군 200명 전사에 일본군 29명 전사 등 직산전투의 사상자 수 및 결과의 근거는 『日本戦史・朝鮮役』이다.
접대 도감(接待都監)이 아뢰었다.

"방금 당보(塘報)가 경리 아문(經理衙門)에 들어왔습니다. 전일에 떠난 중국 군대가 직산(稷山) 남쪽 10리쯤 되는 지역의 험하고 좁은 데가 많은 곳에 매복해 있다가, 어떤 장수의 수하인지 모르는 왜적의 선봉을 만나 말에서 내려 시살(廝殺)하다가 잠시 서로 물러났습니다. 중국 병사들이 급한 나머지 수급을 벨 겨를도 없이 마구 죽이자 나머지 왜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어제 떠나 보낸 3천 군사가 이미 도착하여 추격 중이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의 소식입니다.

또 중국 병사가 진중(陣中)에서 달려와 구두로 보고하기를 ‘적의 머리 30급을 베었고 총에 맞아 죽은 자는 부지 기수이다. 오후에 각각 수습하여 진을 쳤는데 벤 수급(首級) 중에는 금회(金盔)와 금갑(金甲)을 입은 자가 몇 명 있었다. 이들은 필시 왜적의 우두머리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 9월 8일 을미 2번째기사
제독 접반사(提督接伴使) 장운익(張雲翼)이 아뢰기를,

"방금 직산(稷山)의 전쟁터로부터 돌아온 중국 병사가 말하기를 ‘천안(天安)과 직산 사이에서 뜻밖에도 왜적의 선봉이 모두들 흰 옷을 입고 들판을 뒤덮어 오기에, 중국 병사들이 처음에는 조선 사람으로 생각하여 진격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왜적의 선봉이 먼저 포를 쏘므로 중국 병사들이 일시에 말을 달려나가 시살(廝殺)하며 한참 동안 교전(交戰)하였는데, 화살에 맞거나 곤봉에 맞아 죽은 왜적이 거의 5백~6백 명에 이르렀고 수급(道級)은 30여 개를 베었으며 해 부총(解副摠)[10] 과 양 참정(楊參政) 도 각각 손수 수급 2개를 베었다. 그런데 왜적이 산에 올라가 백기(白旗)를 드니, 천안의 대군(大軍)이 즉각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므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각자 퇴각하여 지켰는데 해 부총 등 네 장수는 지난밤에 직산을 떠나 올라오고 있으며 중국 병사들도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독이 즉각 각 군영에 명을 내려 모조리 강변(江邊)으로 나가 진을 치고 그대로 야영(野營)하게 하였다고 하며, 또 영기(令旗)를 보내 파 유격(擺遊擊)으로 하여금 정예병 2천 5백 명을 뽑아 거느리고서 수원(水原) 길에서 왜적을 맞아 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 9월 9일 병신 1번째기사

4.2. 일본군의 철수 이유: 명량 해전

일본군 우군의 기세가 한 차례 꺾였으나, 곧이어 9월 10일(음력), 안성(죽산)까지 추가진격하기도 했다.[11] 직산 전투 직후 조선 조정은 오히려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가야 하는지를 검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군 수군이 이순신에 의해 명량 해전에서 대패했음이 전달되었다. 수륙병진이 불가능하고 겨울이 찾아오는데 임진왜란 때처럼 무리하게 소모적인 북상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일본군 우군은 남해안 왜성까지 전면 퇴각을 결정한다. 조선 조정도 일본군이 충청도 약탈 이후 철수를 감행하자 안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직산 전투에서 붙잡힌 왜군 포로들의 심문 내용을 봐도, 왜군의 이어진 철수가 이 전투와 크게 관련이 없음이 드러난다.
포로1 당초에 행장과 청정의 뜻은 세 길로 나누어 직접 서울로 올라가려 했는데 관백이 사람을 보내어 전령하기를 ‘서울은 침범하지 말고 9월까지 닥치는 대로 무찔러 죽이고 10월 안으로 서생포나 부산 등의 소굴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까지 3일 길밖에 안 되는데 곧바로 돌아간 것이며 전라도에도 머물 뜻이 없었습니다.
10월3일
포로2 관백이 이미 전라,충청2도를 공략했으면 급히 군사를 철수하되 10월2일에 배에 올라 20일 이내에 일본에 도착해야 하니 어기는자는 참수한다하므로 각 병영의 장수들이 그기한을 어기게될까 두려워서 물러가고 있습니다.
10월2일
포로3 처음에는 서울로 침범하려고 하다가 서울이 비어 있다는 말을 듣고 날씨도 추워서 철수하였으며, 또 대도주(大島主)가 작년부터 반역을 일으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군대를 움직여 토벌하고자 하므로 나온 군대들도 철수해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조실록 30년 10월 20일자 기사

4.3. 선조의 의도적인 '대첩' 띄우기

일본군이 철수하자 선조는 이순신의 권위는 끌어내리고 (명나라 파병을 이끌어낸) 자신의 권위를 끌어올리고자, 명나라군의 직산 전투 때문에 일본군이 철수했다며 '직산 대첩'이라고 정치적으로 띄웠다. 오죽하면 칭찬을 받는 명나라 장수 양호조차 정도가 심하다고 여겨, 이순신을 칭찬하며 품계를 올려줄 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상이 말하기를,
"흉적이 조금 물러가고 종묘 사직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는 참으로 대인의 공덕이라 감사함을 무엇으로 말하겠습니까. 절을 하여 사례하겠습니다."
하니, 경리[12]가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이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이러한 예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상이 굳이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상이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戰船)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대인에 있어서는 그렇지만 과인에 있어서는 참으로 미안합니다."
-선조 30년 10월 20일자 기사 --

5. 매체

김경진의 소설 < 임진왜란>에서는 전반적으로 이 전투 자체를 제대로 된 교전이 아니라는 식으로 서술한다. 명군에 전투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명군은 초전에 패배하자 일본군 견제를 위한 기동 정도만 하다가 돌아갔고, 일본군은 거의 피해 없이 재편성을 위해 휴식하던 중 명량 해전의 소식을 듣고 스스로 물러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김훈의 소설 < 칼의 노래>에서는 직산 전투가 명군의 패전이라고 서술했다.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명나라군이 이 전투 직후 한양으로 후퇴하고 일본군은 오히려 북진한 기록을 토대로 명나라의 패전으로 기록했다.


[1] 총사령관 양호와 도독 마귀는 한양의 명군 본진에서 작전을 총괄하였고 전장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한 것은 부총병대장 해생이다. [2] 지금의 천안시 서북부 직산읍 일대. [3] 명량 바로 뒤의 해남군 문내면 남문길 25-2에 우수영 본진이 있었다. [4] 비슷한 시기 황석산성 전투도 패배했으나, 9월 1일에 뒤늦게 보고된다. [5] 오늘날 지명으로 은진은 충남 논산, 여산은 전북 익산. [6] 오늘날 지명으로 금산은 충남 금산군, 회덕은 대전 신탄진, 임천은 충남 부여군, 한산은 충남 서천군. [7] 전국시대로부터 충주 탄금대 전투 때도 그러했듯, 기병을 상대로 조총부대는 압도적이어왔기 때문. 이에 양측의 숫자가 비슷한 상황에서 조총부대가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8] 이전까지 조선이나 일본의 기병은 무장을 가볍게 하여 속도를 높여, 보병대를 충파하여 부숴버리고 각개격파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경기병의 파훼법이 조총이었기에 일본군이 평지전에서 승승장구해 왔으나, 이번 정유재란에서 명나라 측은 마귀(총병)을 비롯해 초원에서의 기병 전문가들이 대거 파병되어, 평지전에서 대등한 전력을 보인 것이다. [9] 애초부터 일본 기병은 말 탈 줄 아는 하급 사무라이들을 모아서 급조하다보니 전투로 단련된 명나라 기병한테 상대가 될 수 없다. 게다가 명군에는 기마술과 마상전을 잘하는 중앙아시아 출신 병사들도 상당했다. [10] 명나라 부총병대장 해생을 말한다. [11] 9월 14일 "왜적이 10일에 안성을 노략질하고 전진하여 죽산 지경을 침범했다"고 짧게 보고된다. [12] 명나라 장수 양호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