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20:54:55

석주관 전투


임진왜란 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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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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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관 전투
石柱關 戰鬪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1597년 (선조 30년) 10월 31일 ~ 12월 18일
(1597년 음력 9월 22일 ~ 11월 10일)
장소

조선 전라도 구례읍 석주관
원인 일본군의 전라도 진공
교전국 <rowcolor=black> 일본
(공세)
조선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우키타 히데이에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왕득인 †
파일:조선 어기.svg 왕의성
파일:조선 어기.svg 이정익 †
파일:조선 어기.svg 한호성 †
파일:조선 어기.svg 양응록 †
파일:조선 어기.svg 조경남[1]
병력 일본군: 34,000명 조선군: 3,653명
- 의병: 3,500명
- 승병: 153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군 궤멸
결과 일본의 승리

1. 개요2. 배경3. 제1차 석주관 전투4. 제2차 석주관 전투5.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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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97년 음력 9-11월, 석주관(현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을 두고 일어난 수 차례의 전투.

2. 배경

1597년 음력 2월, 정유재란 즉 일본군의 대규모 재상륙 이후에도 양측은 전선 고착화 상태였다.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으로 힘의 균형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임진왜란 때와 달리 전라도 방면으로 침공하고자 한다.

1597년 8월,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전라도로 진격한다. 이 때 구례 석주관은 중과부적으로 여겨져 군사를 빼서 남원 전투에 합류했으나 이들 모두 전멸하고 만다.

1597년 8~9월, 일본군의 전라도 초토화 작전으로 방화, 약탈, 살육, 코베기가 이어졌고, 이는 산속까지 진행되어 의병 활동이 힘들었다. 하지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싸우다가 죽는게 더 낫다는 생각 하에 자생적인 향보의병이 일어났다. 하지만 기나긴 전란과 초토화 작전 때문에 임란 때와는 다르게 규모도 크지 못 했고 소규모 의병대들이 향토방위전을 전개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3. 제1차 석주관 전투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명량 해전에서 조선군이 대승하여, 일본군의 수륙병진이 좌절되어 퇴각할 것이 예상되면서, 의병들이 다시 용기백배하여 향토의 거점, 구례의 경우 석주관을 다시 탈환하자는 의병들의 움직임이 생겨난다.

1597년 10월 31일(음력 9월 22일), 구례에서 왕득인이 50명의 의병을 일으켜 석주관을 공격하기로 한다. 주변에 매복했다가 나오는 왜군에게 돌을 던졌으나 중과부적으로 전멸당했다. 이것이 1차 석주관 전투다.

4. 제2차 석주관 전투

1597년 12월 16일(음력 11월 8일),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5명의 의사와, 남원 의병장 조경남, 인근의 화엄사의 승병 153명과 군량 103석이 모여 공격 계획을 세운다. 이것이 2차 석주관 전투다.

1597년 12월 17일(음력 11월 9일), 의병들은 연곡에 매복했다가 왜군 60명을 죽이고 200명의 포로를 구출하고 석주관을 장악했다.

1597년 12월 18일(음력 11월 10일), 왜군들이 즉시 석주관을 되찾으러 향했다. 의병들은 석주관 아래 협곡 '피내'의 좌우에 5의사와 승병들이, 정상부에 왕의성이 진을 쳤다. 왜군이 피내에 진입하자 좌우에서 협공하고, 정상부에선 돌을 굴리며 공격했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5의사군과 승병군은 전멸하고, 왕의성군 일부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5. 이후

구례에 석주관칠의사묘가 세워져 전사한 의병장들을 기렸다.
[1] 전라도 남원의 위대한 의병장으로 임진왜란에 활약했을뿐만 아니라, 수십년의 이야기를 모은 난중잡록이라는 엄청난 서적을 남겨 한국 역사학에도 크게 기여한 중요한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임진왜란 부분은 왕실 대소사를 제외한 대부분이 난중잡록의 기록에 의지하여 작성되었다. 역사학계와 문학계에서는 조경남이 춘향전의 저자라는 설도 있어 몇몇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들은 그걸 전제로 책을 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