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9:58:21

경상도 방어선

임진왜란 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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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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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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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방어선
慶尙道 防禦線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f0ad73> 시기 1592년 (선조 25년) 5월 23일 ~ 1592년 6월 7일
(음력 1592년 4월 13일 ~ 음력 4월 28일)
장소

조선 경상북도 경상남도 충청도 일부지역.
원인 일본군의 대규모 침입과 부산진 전투 이후 일본군의 북진.
교전국 일본
(공세)
<rowcolor=black> 조선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고니시 유키나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가토 기요마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소 요시토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마츠라 시게노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아리마 하루노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오무라 요시아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고토 스미하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구로다 나가마사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신립 (도순변사)
파일:조선 어기.svg 조방장 변기 (조방장)
파일:조선 어기.svg 김여물 (종사관)
파일:조선 어기.svg 이종장 (충주목사)
파일:조선 어기.svg 이일
파일:조선 어기.svg 박안민
파일:조선 어기.svg 정발 (부산첨사)
파일:조선 어기.svg 송상현 (동래부사)
파일:조선 어기.svg 이각
파일:조선 어기.svg 박홍
파일:조선 어기.svg 조영규
파일:조선 어기.svg 이언성
파일:조선 어기.svg 홍윤관 †
파일:조선 어기.svg 송빈[1]
파일:조선 어기.svg 김득기
파일:조선 어기.svg 이대형
파일:조선 어기.svg 류식
파일:조선 어기.svg 이령
파일:조선 어기.svg 김해
파일:조선 어기.svg 김수
파일:조선 어기.svg 권길
파일:조선 어기.svg 박지
- 파일:조선 어기.svg 서예원[2]-
- 파일:조선 어기.svg 이유검[3]-
병력 일본군: 102,000여 명 조선군: 165,600여 명
피해 사상자: 890여 명 사상자: 22,420명
결과 일본의 승리
- 충청도 함락 및 방어실패.
- 일본군에 의한 경상도 지역 조선군 무기 탈취
- 최고 지휘관 전사 및 경상도 지휘부 붕괴
- 경상도 방어군 궤멸.
- 경상도 병영 수영 함락.
영향 수도 한양 방어 포기. 선조의 몽진.
-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의병항쟁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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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직후 경상도와 충청도 일부지역에서 일어난 전투(경상도 및 충청도 함락)와 의병항쟁을 포함한 경상도 지역을 둘러싸서 한양으로의 진격을 막기위해 구축된 방어선을 말한다.

2. 상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직후 경상도를 방어하기 위해서 부산진 첨사 정발이 왜군과의 첫 전투를 치르었다. 이를 부산진 전투 라고 하며, 이 전투의 패배로 경상도 전역이 위험에 처하였다. 이후 14일 동래성 전투마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사실상 경상도 방어는 확대되었다. 18일 김해성 전투에서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과 중위장인 초계 군수 이유검(李惟儉)이 달아나면서 성이 함락된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는 진주에 머물렀는데, 왜군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자 합천으로 이동하여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21일 왜군은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우도군은 영산->창녕->현풍으로, 중도군은 청도->경산->대구로, 좌도군은 울산으로 진군했다. 동래성 전투에서 도망친 이각은 안동에서 진을 쳤는데 왜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 도망쳤다. 당시 경주 부윤 윤인함(尹仁涵)이 도망친 병사들 잡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경주 판관 박의장(朴毅長), 장기 현감 이수일(李守一)이 경주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왜군이 나타나자 모두 달아나버렸고 경주가 함락되고 만다

23일 왜군의 우도군이 낙동강을 건너 성주성을 공격해 성을 불태웠는데, 성주 목사 이덕렬(李德悅)은 끝까지 지켜냈다. 좌도군은 영천을 공격했고, 영천 군수 김윤국(金潤國)은 도망쳐 버렸다. 김해를 점령한 왜군이 창원을 공격하자 창원 부사 장의국(張義國)도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좌도군의 한무리는 장기를 공격하자, 경주에서 도망쳤던 장기 현감 이수일은 패하여 도망친다. 또다른 무리가 안동을 공격하자 안동 부사 정희적(鄭熙績)도 도망쳤다. 이각을 대신해 경상도 좌방어사로 임명된 성응길(成應吉)과 조방장 박종남(朴宗男)은 의흥에 진을 쳤다.

24일 중도군이 선산을 함락시키고 의흥을 공격하자 의흥 현감 노경복(盧景福)은 도망쳤다. 개령 현감 이희급(李希伋), 선산 부사 정경달(丁景達)도 이미 도망쳐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 도착했으나, 상주 목사 김해(金澥)는 도망친 후였다. 이일은 판관 권길(權吉)에게 명령해 농민 1천여명을 징집했다. 25일 오합지졸이었던 이들을 훈련시키던 중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고, 이일은 간신히 도망쳤다.

26일 문경이 함락되었고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은 2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령에서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해 붙잡힌다. 문길원은 사지가 절단되어 죽임을 당했는데,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왜군들을 꾸짖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좌도군이 비안을 공격하자 비안 현감 김인갑(金仁甲)이 도망쳤다. 또다른 무리가 풍기를 공격하니 풍기 군수 군수 윤극임(尹克任)도 도망쳤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앞선 김해성 전투에서 도망친 초계 군수 이유검을 붙잡아 참수했다.

그리고 조선 조정은 도순변사 신립을 보내어 경상도 방어선의 수비를 부탁하였다. 이때 1차로 조선군이 막고 있었던 길목은 아래와 같다. 이 위치는 당시 일본군의 진격로를 어느정도 예측한 까닭도 있었다. 신립은 용인에 이르러 “왜적의 기세가 무척 성해서 정말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세가 답답하고 절박하기가 그지없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린다.

25일 전라 방어사 곽영(郭嶸)과 조방장 이지시(李之詩)가 군사 5천여명을 이끌고 경상도를 구원하기 위해 함안에 도착한다.

당시 " 영남대로" 구로다 나가마사"추풍령"을 넘어서 진격하려고 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조령"을 통해서 한양으로 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죽령"을 넘기로 하였다. 이때문에 고모산성을 1차적으로 방어하고 죽령과 추풍령을 2차적으로 방어하려던 본래 조선군의 계획대로라면 어느정도 일본군에게 피해를 줄수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명칭 위치
추풍령 충청북도 영동군, 경상북도 김천시
조령 경상북도 문경시, 충청북도 괴산군
죽령 경상북도 영주시, 충청북도 단양군
고모산성 경상북도 문경시

그러나 신립은 기마부대가 움직이기에는 평지가 더 좋다고 판단하여 모든 조선군을 탄금대로 모이게 하였다. 그 결과는 충주 탄금대 전투 문서에서 나오듯, 대패로 끝났으며 이로 인하여 경상도 방어선은 붕괴되었다.

28일 경상도 우방어사 조경(趙儆)과 그의 종사관 이수광(李睟光)이 추풍령에서 왜군과 싸웠으나, 패배한다.


[1] 임진왜란 당시 첫 의병장 [2] 김해성 전투 당시 달아남. [3] 김해성 전투 당시 달아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