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 부주석 |
초대 |
저우포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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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난징 국민정부 초대 부주석 저우포하이 周佛海 | Zhou Foha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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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96> 이름 | <colbgcolor=#ffffff,#191919>주불해 | 周佛海 | Zhou Fohai | |
자 | 화부(華府) | |
출생 | 1897년 5월 29일 | |
청나라 호남성 원릉 | ||
사망 | 1948년 2월 28일 (향년 50세) | |
중화민국 난징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왕징웨이 정권 → 중화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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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일관도 | |
학력 | 도쿄제국대학 | |
직업 | 교육가, 정치인 | |
부주석 재임 기간 |
초대 1940년 3월 30일 ~ 1945년 8월 20일 | |
재정부장 재임 기간 |
초대 1940년 3월 30일 ~ 1945년 8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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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이며 중화민국의 정치인. 제1차 국공합작의 결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한 이후 공산당을 탈퇴했다. 장제스의 측근으로 활동하다가 1938년 중일전쟁 중 왕징웨이 공작에 호응하여 일본 제국에 붙었다. 전쟁 말기에 다시 국민정부에 합류했지만 전범으로 체포되어 수감된 이후 옥사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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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의 저우포하이 |
1897년 후난성 원릉(沅陵)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정치적 야심을 드러냈다. 1916년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자꾸 바뀌는 내각을 보며 자신이 국무총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꿈꿀 정도였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 가서 교토제국대학을 다녔다.
1921년, 일본 유학 중 일본 유학생 대표로 중국공산당 창당에 참여하여 지배계급을 무너뜨리고 혁명정권의 지도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으나 사회주의 이론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 여겨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직후인 1924년 9월 공산당에서 탈당했다. 이후 쑨원 밑에서 유명한 삼민주의 이론가가 되었으며 국민혁명 과정에서 장제스에게 협조, 4.12 상하이 쿠데타를 옹호했으며 CC단과 남의사에 가입하면서 장제스의 큰 신임을 얻었다.
2.2. 강소성 교육청장
1931년 만주사변 발생 이후 선안내 후양외 정책과 국제연맹을 통한 외교적 해결 정책을 옹호하였다. 1931년 11월 국민당 제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최다 득표로 중앙위원에 당선되었고 경력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초기에는 왕징웨이 계열의 개조파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31년 12월 강소성 정부가 개편된 이후 1932년 1월 강소성 정부위원 겸 교육청장에 임명되었으며 10여년간 강소성의 교육을 관장하며 교육청 조직과 인원을 정비하고 임무를 구체화시켰다. 이때 의무교육 보급, 소학교원 검정, 교육림의 육성, 교육법규 심사 등과 관련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교육발전을 추구했다. 또한 강소성 교육 3개년 계획을 발표, 교육재정의 확충과 교육행정 책임자들에 대한 자격시험을 실시하여 교사들의 자질을 관리했다.저우포하이의 이러한 노력으로 13만 7천명의 아동이 입학, 강소성의 취학 아동은 71만명으로 증가했으나 여전히 400만에 가까운 미취학 아동이 있었으므로 저우포하이는 1933년까지는 4천개의 초급소학교를 건설하고 이에 필요한 교육비, 경상비를 마련하는 한편 매년 미취학 아동을 5%씩 감소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노력했다. 또한 향촌연합재정위원회를 조직해 여러 향촌이 힘을 합쳐 소학교를 유치하도록 하고 고급소학교에는 주변이 대부분 농촌임을 감안하여 농사과목과 농원실습을 추가하여 졸업생들이 생활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게 했고 중심소확구제를 통해 교육의 질을 강화했다. 그리고 사범중학을 독립시키고 성립 사범전문학교 학과를 증설하여 의무교육 보급을 위한 교사들의 확충에 힘썼다.
교육청장 재직 시절 학생들의 항일 시위를 탄압, 일본 제국과의 전면전은 중국을 망하게 하는 일이라 여겨 항일운동을 반대했고 1936년 시안 사건으로 장제스가 2차 국공합작을 선포하자 이를 용공정책이라 비판하며 일본을 자극할 것이라 여겼다.
2.3. 중일전쟁의 발발과 곡선구국론
이후 국민당 중앙선전부장에 임명되었으며 군사위원회 위원장 시종실 부주임을 지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후스 등 대일유화론자들과 함께 여러 통로로 장제스에게 일본과 담판하여 평화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후스, 메이쓰핑, 슝스후이, 구주퉁, 타오시성, 천궁보 등의 주화론자들과 모여 저조구락부를 조직하여 항전을 반대하고 안내양외를 주장하며 '곡선구국론'이라 불리는 항전반대론을 내세웠다. 제2차 상하이 사변으로 상하이가 함락되고 11월 15일 수도가 난징에서 충칭으로 이전하자 저우포하이는 이를 마치 의화단 운동 때 8개국 연합국이 베이징에 침입하는 모습과도 같지 않느냐면서 매우 비통해했다.1937년 11월 주중 독일대사 오스카 트라우트만을 통한 트라우트만 공작에 기대를 걸었으나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걸면서 결렬되자 장제스에게 크게 실망하고 왕징웨이를 수장으로 하여 1월 14일 우한에서 예문연구회를 창설하여 독립자주의 이론을 수립하고 공산당에 저항하는 것, 정부에 화전양면정책 촉구 여론 조성을 목표로 내걸고 반공과 평화를 주장했다. 이후 영국령 홍콩에 대외연락 기지로 국제문제연구소를 조직하여 분회로 삼고 국제주보, 국제통신 등의 잡지를 출간하였다.
1938년 1월 중국공산당 기관지 신화일보와 논전을 벌이며 중국 공산당은 사실 항일로 이득을 얻으려는 기회주의자이며 사실 공산당이야 말로 패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이때 일본은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 정부)를 수립하고 고노에 담화를 발표해 국민정부를 말살하겠다고 선포하고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1938년 4월, '항전건국의 두 가지 요점'을 발표, 민족적 감정만으로는 경제, 기술대국인 일본을 이길 수 없으며 전 국민이 과학적 원리와 방법에 따라 물자와 설비를 충분히 갖추어야 현대 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4. 왕징웨이 공작
"국가의 존망, 개인의 성패, 모두가 이 행동에 걸렸다."
1938년 12월 5일 쿤밍으로 가는 비행기에서의 저우포하이의 발언.
1938년 12월 5일 쿤밍으로 가는 비행기에서의 저우포하이의 발언.
중일 외교관계의 단절 이후 저우포하이는 가오쭝우, 메이쓰핑 등과 함께 일본의 주화파와 접촉하여 교섭을 추진했다. 1938년 3월 중화민국 유신정부가 수립되고 5월에 쉬저우 회전에서 중국군이 쉬저우를 잃고 퇴각하자 저우포하이는 더욱 항전에 희망을 잃고 왕징웨이를 수장으로 하는 반장반공의 신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을 꾸몄다. 1938년 7월, 저우포하이는 가오쭝우를 일본에 파견하여 비밀리에 접촉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제스는 격노하여 가오쭝우를 질책하며 그를 해임해버렸으나 저우포하이는 선전부 예산을 동원하여 계속 일본과 접촉했다. 저우포하이는 10월 16일 혜주 함락과 연이어 광저우 함락을 듣고 장제스에게 우한을 사수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면서 "마침내 중국이 국민당의 손에 망한다.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다."라고 한탄하며 충칭으로 피신했다. 10월 22일에는 자신의 신세와 국가의 장래에 대한 걱정으로 밤을 지세웠다고 썼고, 마침내 우한이 함락된 27일에는 암담하다고 기록했다.
1938년 10월, 왕징웨이는 일본의 화평조건이 중국의 생존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1] 가오쭝우의 7월 교섭을 교섭의 기초로 삼겠다고 발표하며 중일화평의 의사를 타진했다. 이에 1938년 11월 3일, 일본은 2차 고노에 성명을 통해 국민정부가 종래의 지도정책을 버리고 그 인적구성을 바꾸어 동아의 영원한 안정을 확보할 동아신질서 건설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겠다고 태도를 수정하였다. 이에 11월 19일 가오쭝우와 메이쓰핑이 상하이의 중광담회담에서 일본측의 가게사 사다아키, 이마이 다케오와 합의에 성공하여 11월 20일 중일협의기록에 조인했다.
이에 저우포하이는 12월 5일 쿤밍 시찰을 명목으로 충칭을 탈출하여 12월 19일, 왕징웨이와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하노이로 탈출했다. 저우포하이는 하노이에서 천궈푸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 행동하는 것 뿐이라고 해명하고 12월 29일 국민정부에 화평을 권고하는 통전을 왕징웨이의 명의로 보냈으나 분노한 국민정부는 왕징웨이 등을 제명하고 3월에 왕징웨이 암살을 기도했다. 당황한 저우포하이 등은 5월에 상하이로 이동하여 8월에 제6차 국민당 전체대회를 개최하여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당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저우포하이는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겸 재무부, 특무위원회 주임위원이 되었다.
일본은 신정부를 룽윈이 지배하는 운남성에 수립하여 국민정부의 항전에 타격을 줄 것을 원했으나 룽윈, 장파쿠이 등 왕징웨이의 접촉을 받은 군벌들이 모두 씹으면서 난징에 신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저우포하이는 흥아원을 통해 중화민국의 관세 수입을 업어 이를 화평운동 경비로 사용, 배분의 역할을 맡았으며 1939년 12월 일화신관계조정요강이 조인되면서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이 일화신관계조정요강은 중광당회담의 합의와 달리 매우 가혹하고 압제적인 것으로 분노한 가오쭝우 등이 다이리의 공작에 호응하여 왕징웨이 정권에서 이탈,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하는 일까지 생겼다.[2] 하지만 저우포하이는 화평운동의 뜻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
"신중앙정부 성립 후, 충칭과 융합할 방법이 자연히 만들어져, 안으로는 통일을 이루고 밖으로는 화평을 얻는다. 나는 일본과의 교섭을 책임지면서 다시는 장제스 선생의 하야 문제를 일본이 제기하지 않도록 청하겠지만, 장 선생도 반드시 주화를 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노력은 결국 아무 결과도 만들지 못할 게 될 것이니, 이후 충칭과 난징의 통일의 관건은 우리 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충칭에 있다.
1940년 1월 13일의 발언.
1940년 1월 13일의 발언.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 정권이 정식으로 발족되면서 저우포하이는 왕징웨이 정권 부주석 겸 재정부장, 경정부장, 행정원 부원장, 중앙정치위원회 지정위원, 군사위원회 상무위원, 중앙정비은행 총재, 상하이 시장 등을 겸임하면서 최고 실력자 중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매국적인 협약을 체결한 결과물이었지만 자신이 매우 높은 자리에 올랐단 사실에 저우포하이는 큰 만족을 표했다.
2.5. 다시 국민정부에 합류
"일본은 원칙상 통제권을 반환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무한으로 제한을 가하고 있으므로 반환하지 않은 것과 같다. 일본인이 하는 것은 늘 이와 같다."
1940년 5월 5일 저우포하이의 일기
1940년 5월 5일 저우포하이의 일기
저우포하이는 일본이 중국의 주권, 정치적 독립, 영토를 존중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왕징웨이의 영향력이 일본의 기대와 달리 형편없다는 것을 알자 일본은 매우 실망하여 왕징웨이를 푸대접했다. 3월에 성립된 왕징웨이 정권에 대하여 일본 제국은 장제스를 포섭하려는 최후의 공작인 동 공작이 실패한 후인 10월에야 승인하였으며 점령지에 대한 경제봉쇄, 물류지배를 지속했다. 저우포하이는 중앙은행을 설립하여 일본의 군정적 경제지배를 바꾸어보려고 했다. 일본은 이에 불만을 품었지만 저우포하이는 만약 중앙은행이 설립되지 않으면 자신이 사직하겠다고 강경히 나오면서 1940년 4월 16일 중앙은행 주비위원회 위원주석에 취임하여 5월 3일 중앙저비은행을 만들고 통화 일원화 정책을 펼쳤다. 이에 일본도 1940년 11월 30인 이를 승인했다. 하지만 일본은 일본인 고문들을 대거 배치하여 중앙저비은행을 장악해버렸고 저우포하이는 격노하여 "그러한 괴뢰은행이라면 만들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이후 중일전쟁 내내 저우포하이는 통화안정 정책을 추구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성과가 없었으며 중국을 위기에서 구하기는커녕 매국노로 남을 상황에 처하자 점과 미신을 신봉하면서 매우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며 왕징웨이 정권에 참여한 것을 후회했다.
환도 반 년간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환도의 본래 의미는 중일합작의 모범을 만들어, 충칭이 이를 보고 항전이 필요없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현재의 상태를 보면 나조차도 난징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다. 국민정부를 자유로이 발전시켜 이를 원조해야 한다.
1940년 10월 2일, 저우포하이 일기.
1940년 10월 2일, 저우포하이 일기.
한커우, 충칭에 있던 때 나의 일본에 대한 관찰은 매우 잘못되었다. 일본에 대항한 항전파가 옳았다.
1940년 12월 20일, 도조 히데키 일본 육군대신과 만난 소감.
1940년 12월 20일, 도조 히데키 일본 육군대신과 만난 소감.
일본은 중국을 제2의
만주국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1941년 3월 15일, 저우포하이 일기.
1941년 3월 15일, 저우포하이 일기.
일본 측이 하는 것은 전혀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 금후 화평운동의 전도, 중일관계는 실로 비관적이다.
1941년 9월 11일, 저우포하이 일기.
1941년 9월 11일, 저우포하이 일기.
설강가상으로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이 미국에게 덤비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저우포하이는 어쨌거나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생각을 고쳐 1942년, 다이리와 접촉하여 충칭에 자수의 뜻을 극비리에 전하였다. 1944년 왕징웨이마저 사망하고 나서는 천궁보가 행정원장 대리를 맡아 난징 정부 내부의 분열도 가속화되었고 저우포하이는 난징 정부에 대한 희망을 버리게 되었다. 저우포하이는 일본의 귀주성 침공 계획을 충칭에 누설하고 충칭과의 통합을 위해 장제스의 고향인 절강성의 개발에 나서는 등 일본을 버릴 준비를 하였다. 1944년에는 탕성즈의 동생 탕성밍을 비롯한 충칭 인사들과 접촉하여 대외중립, 대내통일을 구호로 삼자고 정하고 미군과 일본군을 모두 중국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전했다. 일본 패망 직전인 7월 1일에는 어머니의 장례를 이유로 한달간의 휴가를 받아 상하이에 칩거하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상하이 행동총대 총지휘로 임명되어 상하이 치안 유지를 유지하여 공산당에 의한 접수를 방지하고 폭도들의 약탈을 방지하며, 괴뢰정권에 속한 인원, 서류, 물자를 국민정부에 양도하고 국민당 지하조직에 활동경비를 제공하라는 지시를 받아 수행했다. 8월 17일, 휘하의 세경대를 동원하여 난징시장 주학창, 전 상해시장 대리 오홍상, 선전부장 조존옥, 사법행정부장 오송고 등을 긴급체포하였으며 저항하는 육군부장 소숙선을 사살했다. 천궁보 역시 체포하려 했지만 천궁보를 지지하는 사관학교 생도들이 장제스는 몰라도 저우포하이 따위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고 저항하여 실패했다. 이후 일본군이 개입하여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자 마지못해 풀어주었고 이를 두고 자신이 국민정부에 충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1945년 8월 20일, 저우포하이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 1. 본 사령부 관할구역 내 각 부대는 장제스 위원장의 허가 없이 이동하거나, 다른 부대의 개편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 2. 치안유지에 관계된 집회 등의 행동은 본 사령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 3. 이미 정전에 따르고 있는 일본군과 일본인 거류민에 대해, 모욕과 상해를 주어서는 안된다.
- 4. 인민의 납세의무는 계속 이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유를 불문하고 체납해서는 안된다.
- 5. 공장설비 및 공공의 재산을 파괴하거나 임의로 매매해서는 안된다.
- 6. 우군과 중앙파견의 부대는 우선 본 사령부로 연락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그는 일본의 패망으로부터 살아남는 듯 했지만 어디까지나 잠깐에 불과했다.
2.6.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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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저우포하이 |
9월에 접어들면서 국민정부는 한간에 대한 체포를 지시했다. 10월에 들어서 상하이, 난징, 쑤저우에서 수많은 한간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저우포하이는 다이리의 지시로 충칭에 보내져 백공관이라는 호화로운 2층 별장에서 자유롭게 오락을 즐기며 간호부, 요리인 등 5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보호자인 다이리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한간을 처벌하라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1946년 9월 17일, 저우포하이는 체포되어 난징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의 공판일에 무려 1만명이 운집하여 헌병과 경찰들이 제지에 나섰음에도 엄청난 숫자의 방청객 때문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10월 8일 국민정부는 그의 10대 죄상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 1. 애국심을 팔아넘기고 적국에 협조한 것.
- 2. 괴뢰정부 행정원 부원장, 재정부장 등의 요직을 맡아 본국에 저항한 것.
- 3. 매국언론을 발표하여 그 죄를 정당화한 것.
- 4. 1942년 7월 20일 일본을 방문하여 적국에 아첨한 것.
- 5. 중일차관조약을 체결하여 중국 경제를 파괴시킨 것.
- 6. 법폐를 회수, 금융을 혼란시킨 것.
- 7. 중일기본조약, 중일동맹조약 등 매국조약을 체결한 것.
- 8. 위(僞) 만주국을 승인하고 방문한 것.
- 9. 화폐를 난발하여 중국경제를 파멸에 빠뜨린 것.
- 10. 물자를 수탈, 이를 적국을 위해 이용, 민생을 피폐케 한 것.
저우포하이는 이에 죄는 인정하나 자신의 친일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국익을 위해 조금이라도 빼앗긴 중국의 재산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고 변명하며 자신이 중일전쟁 후기에 군사정보를 충칭에 제공하고 일본으로부터 2톤의 황금을 반환받은 것 등 중국에 유익한 행동을 많이 했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그는 1946년 11월 7일 열린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저우포하이의 아내가 저우포하이는 이미 조사통계국에 자수하여 항전에 협력하였으며 집에 무전기를 설치하고 충칭의 지하공작원을 원조했다는 증거를 제시하며 재심을 요청했다. 1947년 7월 천궈푸, 천리푸 형제가 장제스에게 편지를 보내 저우포하이가 종전 직전에 국민정부에 귀순한 공적을 무시할 수 없다고 감형을 요청하자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감형을 명했다. 이 덕분에 저우포하이는 수많은 한간들 중 유일하게 감형을 받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3]
그러나 저우포하이는 매우 고통스럽게 죽었다. 죽기 한 달 전까지 그는 고문을 당했고, 심장병을 비롯한 합병증은 그를 죽기 전 1년 동안이나 고통에 빠뜨렸다. 그럼에도 국민정부는 의료 가석방을 허가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우포하이는 이부자리 위에서 낮밤을 가리지 않고 숨을 헐떡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사망 38일 전에는 저우포하이의 신음과 비명소리가 매일 교도소 곳곳을 울렸다고 한다. 결국 저우포하이는 감형 이후 1년도 되지 않은 1948년 2월 28일, 감옥에서 옥사했는데, 뼈가 앙상하며 신체의 7개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전해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국민당은 저우포하이를 위해 현재 가치로 2만 프랑스 화폐의 관을 준비해 그를 묻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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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포하이의 죽음 |
3. 가족
정식 부인은 두명이다. 그외에 많은 애인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일본인도 있었다.첫째부인은 1남 1녀를 낳았다.
둘째부인도 1남 1녀를 낳았다. 둘째부인의 아들은 상하이 공안국 부국장을 맡기도 했다.
저우포하이가 일본에서 만난 간호사인 일본인은 딸을 낳았다.
4. 주요 경력
왕징웨이 정권 부주석 | |||||||
왕징웨이 정권 수립 | → | 초대 | → | 왕징웨이 정권 멸망 | |||
저우포하이 ( 1940년 3월 30일 ~ 1945년 8월 20일) |
왕징웨이 정권 재정부장 | |||||
왕징웨이 정권 수립 | → | 1대 | → | 왕징웨이 정권 멸망 | |
저우포하이 ( 1940년 3월 30일 ~ 1945년 8월 20일) |
상하이시 시장 | |||||||
4대 | → | 5대 | → | 1대[4] | |||
오송호 | → |
저우포하이 ( 1945년 1월 15일 ~ 1945년 9월 12일) |
→ | 전대균 |
5. 매체에서
건당위업에서 중국 배우 장역(张译)이 연기했다.
6.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글항아리.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중일전쟁기 周佛海를 통해본 친일협력, 김정현, 아시아문화연구 11집,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조우 포하이(周佛海)의 일기를 중심으로 본 항일전쟁시기 대일합작(對日合作) 문제에 대한 한 검토, 황동연, 코키토 62집,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 南京國民政府時期(1927~1937)國民敎育政策의 地方履行, 이재령, 동양사학연구 102집, 동양사학회.
- 중일전쟁 전후 대일 협력자 '汪精衛集團'의 형성(1928~1938), 박상수, 사총 65권 65호, 고려대학교 역사학연구소.
- 중국, 대만의 친일파재판사, 마스이 야스이치, 한울.
7. 관련문서
- 1차 국공합작
- 국민혁명
- 편견회의
- 반장전쟁
- 탕산 사건
- 1차 양광사변
- 만주사변
- 제1차 상하이 사변
- 열하사변
- 하매 협정
- 진토 협정
- 왕징웨이 저격 사건
- 기동사변
- 수동사변
- 2차 양광사변
- 서안 사건
- 중일전쟁
- 2차 국공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