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23:37:21

일본령 가라후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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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통치지 통치기관
<colbgcolor=#de8b94,#742129> 남사할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1px-Emblem_of_Karafuto_Prefecture.svg.png 가라후토(樺太)* 가라후토청
한반도 파일:고시치노키리.svg 파일:고시치노키리_White.svg 조선(朝鮮) 조선총독부
타이완 섬 파일:대만총독부휘장.svg 대만(臺灣) 대만총독부
태평양 제도 파일:남양군도 휘장.svg 남양 군도(南洋群島) 남양청
랴오둥 반도 파일:Emblem_of_Kantou_Prefecture_and_Dairen_City.png 관동주(關東州) 관동주청
* 가라후토는 1943년 이후 본토[[ruby(內, ruby=ない)][ruby(地, ruby=ち)]\]로 편입
괴뢰국 · 군정청 }}}}}}}}}

가라후토
樺太 | Карафуто
일본 제국 식민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1px-Emblem_of_Karafuto_Prefecture.svg.png
국기 휘장
파일:Karafuto.png
진한 초록색 부분이 가라후토( 사할린 남부).
1905 ~ 1945
점령 이전 멸망 이후
러시아 제국 소련
국가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위치 북위 50도선 이남 사할린
면적 36,090.3 ㎢
인구 557,000명 (1941년)
최대 도시 도요하라(豊原)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군사독재 · 익찬 체제
통치기관 가라후토청
군주 천황
언어 일본어

1. 개요2. 역사3. 가라후토의 일본 내 지위4. 가라후토의 민족 구성
4.1. 일본인4.2. 토착민4.3. 조선인
5. 기타
5.1. 철도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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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라후토(樺太) 또는 화태는 사할린 섬을 가리키는 일본어 표현으로, 역사적으로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에 의해 통치되던 북위 50도선 이남 사할린 지역을 말한다.[1]

2. 역사

17세기 러시아 제국 태평양 진출에 성공한 이후 부동항 확보를 위한 전초기지로 사할린 섬을 노리고 있었고 일본 또한 에도 막부 이래 이 섬을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 섬을 언젠가 영토로 삼기 위해 홋카이도에 근거지를 둔 마츠마에 번이 1679년 오도마리(현 코르사코프)를 시작으로 사할린 남부 해안 거점에 군데군데 어업 중심의 식민지를 설치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러시아와 일본은 각각 섬의 북해안과 남해안에 정착지를 경쟁적으로 건설, 섬의 영유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1855년 양국은 러일화친조약(시모다 조약)을 체결하여 쿠릴 열도는 우루프-이투루프 사이 해역을 경계로 이북은 러시아, 이남은 일본이 관할하며 사할린은 양국의 공동 관할구역으로 편성되어 러시아인과 일본인이 잡거하는 특이한 지역이 되었다. 그 뒤 러일 양국은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가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을 맺어 우루프 이북의 러시아령 쿠릴 열도 전부를 일본이 가지는 대신 사할린은 전부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전근대에는 물론 근현대까지만 해도 사할린은 중국, 일본, 러시아 그 어디도 큰 가치를 두지 않던 땅이었다.[2] 사할린은 워낙 기후가 험하고 땅 자체도 경작이 거의 불가능한 불모지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일본은 이 섬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러시아가 남하하기 전까지 별로 손을 대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위협이 현실화되자 부랴부랴 홋카이도와 쿠릴 열도 남부를 완전히 병합하고 사할린에도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해 러시아의 남하를 방어할 전초기지로서 인프라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사실 현실적으로도 당시의 일본의 국력으로는 본토와 더 가깝고 비교적 따뜻한 홋카이도, 쿠릴 열도 관리만으로도 버거웠다. 전통적으로 더위를 피하기 위한 구조로 짜여진 일본식의 가옥과 의복은 가라후토에서는 무용지물이었고, 지금만큼 교통과 운송이 발달한 시절도 아니라서 그때까지도 미개척지에 가까웠던 홋카이도를 사이에 두고 본토와 멀리 떨어진 가라후토에 물자를 보급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일본 정부 내에서도 가라후토 영유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기 때문에 1855년 시모다 조약 당시 가라후토는 러시아와의 공동 관리라는 애매한 상태로 임시적인 현상 유지에 만족했고 홋카이도 개발에 더욱 집중했으며 1875년에는 아예 일본령 가라후토와 러시아령 쿠릴 열도를 교환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해 가라후토에서 손을 뗀 바 있다.[3]

그 이후 러일전쟁 뒤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의해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남부는 가라후토(樺太)[4]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외지로 편입, 일본인들을 정착시켰다. 1905년 9월 5일 가라후토 민정서를 설립했고, 1907년 3월 15일 가라후토청으로 개편했다. 조선에서는 한국 한자음인 '화태도(樺太道)'라 불렸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한 뒤 탄생한 소련은 당시 사할린 개발에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할린 섬의 석유 개발권을 일본에 양도했다. 일본은 러시아 내전 당시 러시아령 북사할린(사가렌)을 점령하였으나 오래못가 철수했다. 또한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은 사할린 영유를 로마노프 왕조 제국주의에 의한 불법 점유라고 주장했고, 일본에게 사할린 섬 전체를 반환하려고 했지만 결국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5년까지 일본이 지배하였으며 특히 1943년에는 내지로 공식 편입하였지만,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쿠릴 열도랑 더불어 사할린 섬 전체가 소련의 영토가 되었고[5] 소련이 붕괴된 이후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일본에서 발간되는 지도에서는 북위 50도 이하의 가라후토 지역이 어느 나라의 영토로도 표시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사할린과 쿠릴 열도 귀속 문제를 보류했는데, 그 직후 쿠릴 열도 분쟁이 발생하여 영토 관련 협의가 모두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공식 요구는 남쿠릴 열도 4개 섬 반환이고 가라후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는데 이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북쿠릴 열도와 가라후토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조약을 러시아가 조인하지 않아 더이상 일본령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법적으로 러시아령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주장이다.[6]

극우 세력을 비롯한 일부에선 단순히 남쿠릴 4개 섬을 넘어 쿠릴 열도 전체와 가라후토까지 환원 요청을 하고 있다. 2차 대전 이전의 영토로 돌아가길 요구하는 것이지만 당연히 현재 실효지배국인 러시아는 물론 일본 정부 역시 이러한 주장을 무시한다. 오히려 구 가라후토의 중심도시이자 현 사할린 최대도시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일본 영사관을 설치해 암묵적으로 러시아 영유를 인정했다. 일본인들은 가라후토의 상실을 아쉬워하지만 이곳에 투자하며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3. 가라후토의 일본 내 지위

1905~1945년 일본령 시절 가라후토의 지위는 이중적이었다. 가라후토는 공식적으로 조선, 대만, 남양군도와 같은 외지로 분류되어 본토가 아닌 식민지로 분류되었다. 반면 가라후토와 제반 환경이 유사했던 홋카이도와 치시마 열도(쿠릴 열도)는 공식적으로 일본의 내지였다. 홋카이도의 경우 혼슈와 인접한 지리 특성상 이미 가라후토 개척보다 훨씬 앞선 14세기 일본인들이 정착한 이후 17~18세기에 일본인들에 의한 실질적인 식민화가 완료되었고, 1807년 에도 막부의 직할령으로 공식 편입되었으며,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 국가에 의해 처음부터 일본 영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변방일지언정 내지로 분류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치시마 열도의 경우에도 현재 분쟁 중인 북방영토(남쿠릴 열도)는 1855년, 그 이북의 북쿠릴 열도는 1875년 각각 러시아에 의해 일본령으로 인정받았으며 면적도 워낙 협소했기 때문에 내지인 홋카이도의 부속 도서로 기능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가라후토는 큰 섬일 뿐만 아니라 1905년까지 러시아령이었기 때문에 병합 후 바로 내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라후토는 외지 중 가장 내지와 유사한 성격의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점령 기간이 워낙 짧은 남양군도는 차치하고라도 조선이나 대만의 경우 각각 조선인과 대만인의 인구가 이주한 일본인의 인구를 압도했기 때문에 이들 지역은 일본인이 소수인 외지의 실제적 정의에 부합하였다. 반면 가라후토의 경우 원주민(사할린 아이누, 윌타족, 니브흐족)의 인구가 조선과 대만에 한참 못미쳤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일본인의 이주가 시작되자 이주민의 수가 본토 원주민을 크게 압도하였다. 실제로 1940년 무렵이 되면 가라후토 인구의 90% 이상이 본토에서 이주한 일본인이었고 나머지도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으며 원주민은 미국 내 아메리카 원주민과 같이 소수 민족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이유로 가라후토는 조선과 대만에 비해 내지화하기 유리한 환경이었고 실제로 일제는 패망 2년 전인 1943년 가라후토를 본격적으로 내지로 승격했다. 물론 1945년 소련에 의해 다시 빼앗겼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법적으로 외지였다.

이렇듯 일본령 가라후토는 홋카이도와 조선/대만의 중간지적 성격이었으며 이주민의 인구로 원주민을 압도하여 이주민 위주의 정책을 폈다는 점에서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이나 호주 등을 개척해 형성한 식민지와 유사하다.

4. 가라후토의 민족 구성

4.1. 일본인

일본인은 근대 이후부터 남사할린에 진출하였다. 남사할린은 본래 인구밀도가 극히 낮은 지역이었는데 일본인의 진출이 활발해져 1940년대에는 일본인 비율이 90%를 넘었다.

소련은 남사할린을 점령한 이후 남사할린 내 일본인을 모두 일본 본토로 추방하였다.

4.2. 토착민

일본인이 도래하기 전의 남사할린에는 사할린 아이누, 윌타족, 니브흐족 등이 분포해 있었으며, 그 안에서는 아이누가 압도적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7] 일본 통치기에 이들은 그냥 가라후토 토인(樺太土人)로 퉁쳐 분류되었으나 1932년에 호적법을 고쳐 공식적으로 아이누에 한해 내지인(일본인)으로 분류되어 일반 일본인과 법적으로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일본인들로부터 야만적이라 여겨졌던데다 머릿수도 밀리게 된 남사할린의 토착민들은 정책적으로 차별받기 일쑤였다.

소련은 남사할린을 점령한 이후 아이누로 분류된 원주민은 일본인으로 간주하여 다른 일본인과 함께 일본 본토로 추방하였다.

4.3. 조선인

사할린에는 조선인의 이주도 활발했다. 자발적으로 이주한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1930년대와 1940년에 징용으로 인해 이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강제노동이나 다름없는 노동자로 종사하였다.

일본인과 달리 사할린의 조선인은 소련의 추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은 일본인들만 본국으로 송환하고 자신들이 징용한 조선인들은 신경쓰지 않아, 조선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할린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의 귀환을 위한 소송이 일본에 대해 제기되기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새로이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는 소련과 적대하는 관계라 오랫동안 이들의 사정에 무관심했고, 북한 정부는 송환에 노력했으나 대다수의 사할린 한인들이 삼남 지방 출신이라 고향인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의 송환을 꺼려 진전이 없었다. 1989년부터 한국과 소련 간 실무자 접촉 등의 가시적 진척이 있었고, 그 후 2000년에 407세대(814명)가 귀국하는 등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영구귀국을 희망하나 미처 귀국하지 못한 사할린 한인들이 많이 남아있다.

사할린은 과거 일본 영토였음에도 일본계 인구는 거의 없는 반면, 한국계 인구는 수만 명에 이르며 이들은 러시아인 다음으로 많은 소수민족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2002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이 주민의 83%를 차지해서 1위인데, 2위는 바로 한인이다. 30,000명으로 주민 수의 5.5%를 차지한다.

5. 기타

남사할린이 일본 영토였을 적에 이곳에서 하드로사우루스류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학자들은 '일본의 도마뱀'이란 뜻으로 니폰노사우루스라는 학명을 명명했다. 다만 출토지가 현재 러시아령인 관계로 일본에서는 연구 진척이 부진하며 학명이 학명인지라 러시아 역시 이 공룡 연구에 큰 관심이 없다.

5.1. 철도

오늘날 사할린의 철도 남쪽은 이 시기 일본 제국이 깔아놓은 철도를 바탕으로, 약간씩 연장한 것이다. 북쪽 부분은 러시아 제국 말기 및 소련 당시에 지은 산업철도이다.

특이한 것은 본토의 러시아 철도가 광궤인 것과 달리 이 곳은 일본 철도와 같은 케이프 협궤 철도가 깔려 있었다. 일본이 이 시기 철도를 갈고 닦아가며 써서 그렇다. 북쪽 부분도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러시아 본토의 광궤가 아닌 700mm/762mm 협궤 경편철도로 부설된 것을 1945년 이후 단일 철도국으로 통합되면서 운영편의를 위해 남사할린와 같은 1067mm 케이프 협궤로 개궤. 이 노선들이 러시아 광궤로 개궤 완료된 것은 2019년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이 시기에는 오도마리역과 홋카이도의 왓카나이역을 잇는 치하쿠 연락선을 통해 일본 홋카이도 소야 본선 철도와 연계되어 운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이 사할린을 점령하며 자연스레 왕래는 끊어졌으나 냉전 이후 일본과의 정기여객선이 다시 취항했다. 다만 해운을 이용해 양국의 철도를 연계하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6. 관련 문서



[1] 이와 대비되어 러시아 제국 및 소련이 통치했던 북위 50도선 이북 사할린 지역은 사가렌(薩哈嗹)이라고 불렀다. 본디 가라후토든 사가렌이든 사할린섬 전역을 일컫는 명칭이었으나, 일본과 러시아가 사할린섬을 분할한 시기에는 일부러 구분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2] 사실 현재에도 지하 자원 창고로서 잠재 가치는 높게 평가받지만 안그래도 러시아 자체가 자원대국이기 때문에 특별히 중요히 취급되진 않는다. [3] 당시 가라후토보다 가까우면서도 훨씬 쓸모있는 홋카이도조차 완전히 개척한 지 얼마 안된 시점이라 일본이 가라후토를 관리할 여력이 없었다. 또한 가상적국인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 소지도 존재해 신생 메이지 정부는 가라후토를 짐짝처럼 여겼으며 홋카이도만으로도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내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실제 가라후토를 쿠릴 열도와 교환한 이유도 비생산적인 가라후토보다 재해권 확보에 용이한 쿠릴 열도의 가치를 높게 보았으며 가상적국인 러시아와 육지 국경 문제를 해소할 수 있었고 또한 상대적으로 중요한 홋카이도 개발에 집중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이 1875년 가라후토를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쿠릴 열도와의 교환이 아닌 사할린 내 러시아와의 파워게임에서 패배해 울며 겨자먹기로 러시아령 쿠릴 열도와 일본의 사할린 주권 절반을 맞바꿔 모양새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이다. [4] 아이누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카무이 카르 푸트 야 모시르(Kamuy kar put ya mosir)에서 따와 음차했다. 신이 의 하구에 만든 섬이라는 의미. [5] 소련은 홋카이도 또한 반분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수립했으나 이는 미국 해리 트루먼 더글라스 맥아더의 완강한 거부로 불발되었다. [6] 쿠릴 열도를 포기했음에도 일본에서 소위 '북방 영토'라 부르는 4개 섬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는 일본 정부가 이들 섬을 쿠릴 열도가 아닌 홋카이도의 부속 도서로 보기 때문이다. 일본의 입장에 따르면 일본은 쿠릴 열도를 이미 포기했으며 북방 영토는 쿠릴 열도가 아닌 홋카이도 소속이기 때문에 가라후토나 북쿠릴 열도와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7] 윌타나 니브흐의 경우 줄곧 러시아의 영향권이었던 북사할린에 다수 분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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