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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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憙
(? ~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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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옛 중국 서진(西晉)의 인물로 자는 계화(季和). 기록에 따라 이희(李喜)이라고도 되어있다.2. 생애
병주 상당군 동제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고상한 품행을 지니면서 예술과 학문을 깊이 연구했다고 하며, 은사 관녕과 일찍이 친분을 쌓아 위나라 조정에서 여러 차례 초빙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몇 년 후, 태부에 오른 사마의가 이희를 그의 속관으로 쓰기 위해 사람을 보내 부르자, 이번에도 이희는 병을 핑계로 극구 사양하며 가지 않으려 하니, 관리는 그를 억지로 수레에 태워 관청으로 데려갔다. 이희가 꾀병을 부리긴 했으나, 당시 그의 어머니는 진짜로 병이 위중한 상태였기에 몰래 담을 넘어 집으로 돌아갔고, 이후 어머니가 병사하자 장례까지 무사히 치렀다. 이 일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 이희의 지조와 효심을 칭찬하였다.251년, 사마의가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사마사가 이희를 종사중랑에 임명하자, 이희는 은거 생활을 정리하고 순순히 사마사의 수하에 들어갔다. 당연히 관직을 사양할 줄 알았던 사마사는 의아해하며 이희를 불러 물었다.
그대는 과거 선공(先公)의 부름에 응하지 않다가, 내가 부르니 이렇게 응한 이유가 무엇이오?
이에 이희가 답했다.선공께서는 예를 갖추어 저를 불렀으니, 저 또한 예를 지키며 관직을 사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공(明公)께서 법으로 저를 구속하시니, 저는 법이 두려워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마사는 이희를 중히 썼고, 이희는 사마사 밑에서 사마와 우장사를 역임하며 그를 보좌하였다.255년, 사마사가 관구검과 문흠의 난을 평정할 때, 곁에서 도움을 준 공으로 어사중승에 올랐다. 이희가 어사중승 업무를 수행하면서 권세에 아첨하지 않았으며, 항상 정직하고 위엄있게 일을 처리하니,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하였다. 결국, 이희의 이러한 행실은 부패한 관료들에게 밉보이면서 면직당해 조정에서 쫓겨났다.
남안정후 사마주가 영삭장군이 되어 업을 지키러 갈 때, 이희를 자신의 사마로 등용했다. 양주가 강족들로 인해 어지러워지자, 조정에서 이희를 양주자사로 승진시키고 양위장군, 호강교위를 겸하게 했다. 이희가 안정(安定)에서 강족들을 정벌하니, 사람들은 이희를 전한의 풍봉세(馮奉世)과 감연수(甘延壽)][1]에 비견된다 평했다. 양주를 대강 진정시킨 이희는 양주자사직을 내려놓으면서 수도로 돌아오길 청했고 조정에선 이를 승낙해주었다. 이후 한 달여간 집에만 머물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기주자사에 임명된 뒤, 점차 승진하여 사예교위에까지 이르렀다.
265년, 위나라 조환이 사마염에게 제위를 선양할 때, 사도 대리 신분으로 선양식에 참가하여 태위 정충이 선양책서를 받드는 것을 보조하였다. 그리고 서진 건국 후 \기후(祁侯)에 봉해졌다.
267년, 사예교위를 지내다가 옛 입진 현령 유우, 전 상서 산도, 상서복야 무해 등과 함께 관청의 도전을 침해했다고 탄핵해 관직이 면직되었다. 그러나 양호가 거기장군직을 사양하고 이희를 이윤, 노지 등과 함께 천거하면서 품덕이 고상하고 직무에 공정하다는 칭찬을 하니, 사마염은 이희를 다시 불러 태자태부로 삼았다.
278년, 태자태부에서 상서복야로 전근되었다. 그 해 독발수기능이 오래도록 변방의 근심거리로 자리잡아, 군사를 출진시켜 그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청했지만, 조정에서는 당장 군사를 출병시키기가 어렵고 근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하여 따르지 않았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양흔까지 전사하자 조정에서는 이희를 따르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282년, 특진하여 광록대부에 임명되었으며, 사마준, 양수, 왕제, 진덕 등과 함께 사마유를 봉지인 산동으로 돌려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사마염은 순욱과 풍담의 말을 더 귀담아들어 끝내 사마유를 산동으로 보냈고, 이희는 실망하여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대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사마염은 그에게 금자광록대부를 더하고, 50만 전과 비단 100필을 하사했으며, 은퇴 후에도 지위와 봉록을 삼사(三司)와 같게 하였다.
이희는 조정에 있을 때 인친이나 옛 친구들과 입을 것을 나누었고 먹을 것을 같이 했으나 아직 일찍이 왕관을 사사로이 한 일이 없었으니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그를 칭찬했다고 하며, 283년에 죽은 후 태보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성(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