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9 02:59:42

이치카와 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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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이치카와 엔오
二代目 [ruby(市川, ruby=いちかわ)] [ruby(猿翁, ruby=えんおう)] | En'ō Ichikawa II
파일:2대 이치카와 엔오.jpg
본명 [ruby(喜熨斗, ruby=きのし)] [ruby(政彦, ruby=まさひこ)] (키노시 마사히코, Masahiko Kinoshi)
예명 3대 이치카와 단코
3대 이치카와 엔노스케
2대 이치카와 엔오 (2012년 습명)
출생 1939년 12월 9일
도쿄도
사망 2023년 9월 13일 (향년 83세)[1]
도쿄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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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65cm, 68kg| A형
학력 치요다 구립 반쵸 초등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 중등부 (졸업)
게이오기주쿠 고등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일본문학과 / 학사)
가족 친증조 2대 이치카와 단시로(1855-1922)[2]
친할아버지 초대 이치카와 엔오(1888-1963)[3]
아버지 3대 이치카와 단시로(1908-1963)[4]
어머니 타카스기 사나에(1918-1995)[5]
여동생 키노시 야스코(1941-2003)
남동생 4대 이치카와 단시로(1946-2023)[6]
전처 하마 유코(1965년 결혼-1968년 이혼)[7]
후처 후지마 무라사키(2000년 결혼-2009년 사별)[8]
장남 9대 이치카와 츄샤(1965-)[9]
장손 5대 이치카와 단코(2004년생)[10]
친손 카가와 ○○(2008년생)
친손 카가와 ○○(2022년생)
조카 4대 이치카와 엔노스케(1975-)
야고[11] 오모다카야 (澤瀉屋)
직업 가부키 배우
문장 파일:Tachi_Omodaka_inverted.png

1. 개요2. 생애3. 연기 스타일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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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무형문화재 보유자, 가부키 배우.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가부키 배우로 가부키계의 혁명아라 불렸다. 엔노스케 극단을 창설한 인물이며 현재의 수퍼 가부키 극을 제작하였고 여러 고전극을 재창조하여 부활시키는 등 여러 무대 예술을 성공시켰다.

2. 생애

파일:키노시 일가2.jpg
가족과 함께 촬영한 사진[12]
1939년, 가부키 배우 3대 이치카와 단시로와 유명 여배우 타카스기 사나에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맏이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인 초대 이치카와 엔오가 당주를 지내고 있던 오모다카야 가문은 제1명문가 나리타야의 제자 출신의 가부키 가문이었으며 장남으로 태어난 마사히코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영재 교육을 받으며 일찍이 가부키를 익혔다.
파일:3대 단시로.jpg
부모님, 남동생과 미국 뉴욕에서
마사히코는 1947년 1월, 오모다카야의 후계가 오르는 명적인 3대 이치카와 단코를 습명받으면서 본격적으로 가부키 극에 올랐다. 학교 생활과 함께 가부키, 무용 등을 병행하였고 아버지의 해외 무대에는 남동생과 함께 그를 따라다니며 함께 무대에 오르기도 하였다.

게이오기주쿠 중등부와 고등학교에 진학한하였다. 학업 생활도 우수하여 반에서는 성적으로 늘 1~2등을 하였고 중등부 때는 산악부에 들어가며 등산을 즐겼다. 고등학교 때에는 아버지의 추천으로 연극부에 들어가 또래와 연극을 연출하기도 하는 등, 게이오에 몸 담았던 10년이 제일 행복하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후에 우수한 성적으로 게이오기주쿠대학 일본문학과에 진학해 학사 졸업하였다.

졸업 이후, 여러 배역을 완벽하게 해내어 그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1963년 5월에는 고대하던 이치카와 엔노스케의 명적을 습명받아 3대 이치카와 엔노스케가 되었다.[13] 그러나 동년 6월에는 가문의 당주이자 할아버지인 초대 이치카와 엔오가, 11월에는 아버지인 3대 이치카와 단시로가 잇따라 사망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14]

2대 이치카와 엔오는 다른 가문의 입적 요청을 전부 거부하고 젊은 나이에 오모다카야를 짊어지기로 결정한다. 당시의 가부키 극은 고전의 극을 몇 년이 지나도록 반복하여 젊은 층의 인기를 사로 잡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에 엔오는 모든 배우가 반대하던 여러 시각적 요소를 극에 집어넣었다. 폭죽 효과라든가 조명, 여러 현대의 소품 등, 상향되던 예술을 고전극인 가부키에 집어넣는다는 파격적 시도를 한 것이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서양의 연출 양식을 사용하는 걸 꺼리고 크게 반대했지만 엔오는 자신의 가부키 극에 이런 요소를 전부 반영하였다.
파일:마사히코 가부키.jpg
오모다카야를 대표하는 수퍼 가부키 극 中
와이어에 매달려 관객석을 오가는 2대 엔오
결과는 대성공. 기성세대의 반발을 무릅쓰고 도전한 연출이 새로운 가부키 시대를 개막하였으며 가문의 명성도 더욱 높아졌다. 리엔의 고아에서 가부키계의 혁명아로 불리게 된 2대 이치카와 엔오는 당시의 세습명이던 3대 이치카와 엔노스케로 유명세를 떨치며 인기 배우 반열에 올라섰다.

특히 롯포로 퇴장하는 하나미치를 와이어로 퇴장하는 연출은 극히 일품으로 여겨지며 오모다카야의 특색으로 자리 잡혔고 현재에는 이러한 연출을 많이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파일:마사히코 유코 결혼.jpg 파일:엔오 유코.jpg
1965년, 하마 유코와의 결혼식에서
1965년, 유명 다카라즈카 가극단 출신의 배우 하마 유코와 결혼하였다.
파일:마사히코 유코.jpg
1965년, 유코와의 런던 신혼 여행에서
사실 2대 엔오에게는 본인이 12살에 첫 눈에 보고 반한 16살 연상의 후지마 무라사키라는 여성이 있었다. 후지마 무라사키가 첫사랑이던 엔오는 나이가 차면 그녀에게 고백을 하고 싶어했지만 그녀는 2대 엔오의 무용 스승이기도 한 후지마 칸소의 아내였고 이미 슬하에 두 아이가 있었다. 결국 마음을 접어두기로 한 2대 엔오는 무대에서 연을 맺은 하마 유코에게 구애하여 그녀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파일:테루유키.jpg
1965년, 장남 키노시 테루유키의 탄생
1965년 12월, 하마 유코와의 사이에서 장남 키노시 테루유키가 태어났다.
파일:테루유키 시치고산.jpg
테루유키의 시치고산을 기념하여
첫 아들이 태어난 뒤, 2대 엔오는 꽤나 가정에 충실했었다. 그러나 이는 얼마 가지 않았는데, 무대에서 첫사랑이던 후지마 무라사키를 오랜만에 마주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제 후지마 무라사키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엔오는 다시 구애하였고 끝내 두 사람은 불륜에 이르게 된다. 결국 아들인 테루유키가 겨우 한 살이 되자마자 2대 엔오는 무라사키와 동거를 하게 되었고 1968년, 유코에게 이혼을 요구하며 정식으로 갈라서게 된다.[15]

이는 가부키 가문에서도 미친 짓으로 분류될만도 했던 것이, 가부키 가문은 보통 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며 오직 가문의 남성만이 가부키 무대에 설 수 있었다. 2대 이치카와 엔오도 아무리 본인 아래에 남동생도 있다 하지만 본인이 가문의 장남이었으며 이를 잇기 위해서는 하나뿐인 외동아들이 엄청난 존재였다는 것이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치 않은 배우자와의 아이라는 이유로 아내와 함께 내쫓은 것이다.

이때 아들인 테루유키는 키노시의 성을 버리게 되었고 '카가와(香川)'로 개명하여 카가와 테루유키가 되었다.
파일:엔오 분장.jpg
공연을 앞두고 분장하는 2대 이치카와 엔오
근대 가부키와 수퍼 가부키로 대성공을 거둔 2대 이치카와 엔오는 독일 바이에른의 국립 가극장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곡한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의 연출을 담당하였다. 이후 여러 오페라 공연의 연출을 맡으며 성공 가도를 달렸으며 교토 예술대학[16]의 부학장을 지내며 예술 감독으로 지내기도 했다.

1990년 겨울, 편모 가정에서도 별 탈 없이 자란 카가와 테루유키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배우로 데뷔하여 자신의 공연장에 찾아오자, 2대 엔오는 "중요한 공연 시작 전에 갑자기 찾아오는 것은 배우로서의 예의가 부족해 보입니다. 나는 가정과 결별하며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나와 당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기에 나도 당신의 아버지가 아닙니다."라며 망언을 퍼부었고 하나뿐인 자식과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고 만다.

2000년, 오랜 동거 생활 끝에 후지마 무라사키와 정식으로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오랜 동거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부자관계의 불화를 알게 된 무라사키는 몇 번이고 하나뿐인 아들인 카가와 테루유키와 화해하라고 엔오에게 간청했다.

2003년, 하카타좌에서 자신이 연출, 출연하는 가부키 공연을 준비하던 중 파킨슨 병이 발병하였다. 거동과 목소리를 내는 것이 불편해진 엔오는 본인이 주력으로 연기하는 몇몇의 극에서만 짧게 모습을 비추고 모든 공연에서 하차하며 요양에 돌입하였다.

이 시기에 유일한 자식인 카가와 테루유키와 절연한 상태였기에 일문에서는 엔오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4대 이치카와 엔노스케를 입양해서 양자로 입적 시키라고 하였지만 엔오는 오모다카야는 방자를 육성하는 것으로 지킨 전통도 있기에 양자로 입양하는 것은 선조들의 의지에 어긋난다며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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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테루유키와 장손 마사아키의 가부키계 입성
2009년, 아내 후지마 무라사키와 사별하였다. 이듬해에는 그녀의 생전 적극적인 주선으로 사이가 많이 완화되었던 장남 카가와 테루유키와 극적으로 화해하며 테루유키와 손자인 마사아키가 가문 복귀하여 가부키계에 정식으로 입성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2대 엔오는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며 테루유키의 생모인 하마 유코에게 고맙다고 하였다.[17]

2012년, 아들인 카가와 테루유키는 '9대 이치카와 츄샤'를 습명받았고, 손자인 카가와 마사아키는 오모다카야 후계자의 명적인 '5대 이치카와 단코'를 습명받았다. 또한 2대 이치카와 엔오는 지금의 명적을 습명받음과 동시에 세습명과 당주의 자리를 조카인 4대 이치카와 엔노스케에게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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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장남 9대 이치카와 츄샤와 함께
이후 가부키 극장의 직원 출신인 30세 연하의 여성과 동거하며 아들의 집 근처 맨션으로 이사하였다.[18] 이는 아들과 손자가 언제든 자신의 집에 찾아와 연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전처인 하마 유코도 아들과 손자의 리허설 현장에 찾아와 수척해진 엔오의 모습을 마주하고는 '잘 지내고 계셨나요? 오랜만이에요, 많이 달라지셨네요, 테루유키는 잘하던가요? 당신의 아이니 많은 걸 지도해주세요'라며 이혼 이후 처음으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19]

이 시기즈음, 본인이 출연한 가부키를 정리하여 후대에 남기려 한 <엔노스케 18번>을 <3대 엔노스케 48회>로 정정하여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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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2회 몽블랑 국제문화상 수상[20]
이후, 몸이 좋아지는가 싶다가도 발작이 오면 무척 고통스러워했기에 결국 그토록 좋아하던 신인 육성에서도 손을 떼면서 아예 대외활동을 중단하기도 하였다. 또한 어딜가든 아들이나 조카, 남동생의 부축을 받지 못하면 아예 걷지를 못하여 본인도 힘들어 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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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대 이치카와 엔오의 마지막 긴자 가부키좌
2015년, 자신의 방자 출신인 타카시마야의 3대 이치카와 우단지[21]의 공연 막바지에 등장하여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다. 많은 이들이 그의 야고인 오모다카야를 외쳤고 엔오는 꺾인 손가락으로 이에 간신히 화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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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대 이치카와 엔오의 마지막 하카타 가부키좌
이후로도 2017년, 2018년, 2021년에 자신이 육성한 배우들의 무대 커튼콜에 등장하여 간신히 대사를 읊조리는 등 가부키와 제자들을 향한 열정을 보였었다. 그러나 이것은 2대 이치카와 엔오의 마지막 가부키 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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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이치카와 엔오의 사망을 보도하는 NHK
2023년 9월 16일, 지난 13일 오전 6시 55분경에 2대 이치카와 엔오가 도쿄도 내에서 부정맥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향년 83세. 2023년 5월, 남동생인 4대 이치카와 단시로가 자살한 지 4달도 안 돼서였다. 이에 많은 가부키 배우들부터 정재계 인사 등이 위로의 말을 올리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아들 9대 이치카와 츄샤와 손자 5대 이치카와 단코도 엔오를 기렸으며 전 배우자인 하마 유코 또한 '진짜 이별이 되었네요, 오랜 투병생활이셨어요'라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제1명문가 나리타야의 당주인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셔서 추억도 많고 동경했던 삼촌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3. 연기 스타일

2대 이치카와 엔오의 공중 롯포
'3대 이치카와 엔노스케'로서 여러 명성을 쌓았기에 세간에는 '3대째'라 불리기도 했다. 사생활이 깨끗한 편은 아니나, 그의 연기와 그가 창시한 수퍼 가부키 극으로 가부키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은 모든 배우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며 이로 인간 국보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오모다카야의 수퍼 가부키는 모든 무대에 주연 배우의 체력 소모가 심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를 무려 5,000회 넘게 피로하였다. 특히 파킨슨 병 발병 이후에도 계속 무대에 섰으며 기억력이 저하됐음에도 카메라를 보자 '이치카와 엔노스케이옵니다'라며 크게 외친 뒤, 혼신의 힘을 다해 미세바를 선보였었다.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마사히코 씨, 배우를 해볼 생각이 없나요?'[22] 라는 말을 듣고 가부키 배우로 진로를 정했는데 당시에는 몸이 약해 그만둘 생각도 하였으나 할아버지로부터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극단을 꾸려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어왔다고 한다.

엔오는 여러 무용에서도 능했는데 특히 가마이치 무용을 주력으로 하였고 여러 강연에서도 늘 가마이치 무용을 소개하며 애정을 드러냈다. 2대 마츠모토 하쿠오, 7대 오노에 키쿠고로와는 달리 주로 여성형 무용을 자주 피로했으며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와 함께 피로한 극도 여럿 있다.

4. 여담

파일:엔오 엔노스케.jpg }}} ||
후계자이자 조카인 4대 이치카와 엔노스케와 굉장히 각별했다고 한다. 아들인 카가와 테루유키 절연 상태였을 당시에는 하나뿐인 가문의 후계자였기에 모든 기술을 전부 쏟아붓듯이 가르쳐주었다고. 덕분에 4대 이치카와 엔노스케도 인기 배우 반열에 올라섰고 연기력도 수준급이라 평가되었다.
  • 와이어 장치로 하나미치를 나아가는 연출을 총 5000번 이상한 것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이력이 있다.
  • 외신에서는 일본판 찰스 3세로 비유되어 보도되기도 하며 자국에서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첫번째 결혼 이야기부터 현재까지의 생활을 보았을 때, 찰스 3세 다이애나 비, 카밀라 파커 보울스 삼각관계와 겹치는 구석이 꽤 많다. 엔오가 무라사키와의 재혼 당시, 아사히에서 찰스 3세의 불륜에 그를 비유한 기사를 쓰자 명백한 명예훼손이라며 으름장을 놓기도 하였다. 본인도 알기는 하는 모양.

[1] 오전 6시 55분경 사망하였음을 9월 16일에 알렸다. 사인은 부정맥. [2] 본명은 키노시 카메지로. 초대 이치카와 엔노스케를 지닌 인물이다. 다부진 몸매와 훤칠한 외모로 유명했다. [3] 본명은 키노시 마사야스. 일본 예술원 회원이자 그 유명한 2대 이치카와 엔노스케를 지낸 인물이다. [4] 본명은 키노시 마사노리. 지병을 앓았기에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 [5] 본명은 키노시 히로코. 유명 여배우였다. [6] 본명은 키노시 히로유키. 2대 이치카와 엔오의 친동생이며 마찬가지로 인간 국보이다. 2023년 5월 18일, 자택에서 아내와 함께 수면제 등을 과다복용하고 자살을 기도하여 결국 함께 숨졌다. [7] 다카라즈카 가극단 40기생 출신. 장남인 카가와 테루유키를 출산했으나 3년 뒤인 1968년, 2대 엔오가 후지마 무라사키와 동거를 하며 이혼하게 되었다. [8] 본명은 키노시 아야코로 가부키 배우였다. 유명한 가부키 집안(야고)인 후지마 가의 2대 후지마 무라사키였다. 2대 후지마 칸소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2대 엔오의 첫사랑으로 16살이나 연상이었지만, 1968년 유부남 유부녀로 재회해 불륜을 저질렀다. 동거에 들어가면서 두 사람이 모두 가정을 버렸으나 후지마의 남편인 칸소가 이혼해주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사실혼 관계로 32년이 흐른 2000년에야 결혼할 수 있었고 2009년 아내의 죽음으로 그나마도 정식 결혼 생활은 9년 뿐이었다. [9] 전처인 하마 유코 소생. 본명은 카가와 테루유키. 한때 절연하였으나 극적으로 화해하며 입적하였다. [10] 본명은 카가와 마사아키(香川 政明) [11] 가부키 배우로서 가지는 집안 이름. 세습명 구도를 중심으로 창시되며, 가부키계에는 10대 명문가를 포함한 40개 정도의 야고가 있다고 한다. [12] 뒷줄의 서 있는 두 여성은 당시 키노시 일가의 자택에서 일하던 하수인들이다. 앞줄의 좌측부터 여동생 야스코, 어머니 타카스기 사나에, 아버지 3대 이치카와 단시로, 남동생 4대 이치카와 단시로, 2대 이치카와 엔오 본인. [13] 오모다카야=이치카와 엔노스케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오모다카야의 대표 명적이며 당주격인 남성에게 주어지는 세습명이다. [14] 오죽하면 당시 언론과 여러 가문에서는 그의 처지를 두고 '리엔의 고아'라고 지칭했으며 2대 엔오도 당시를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회고했다. [15] 불륜 상대가 오히려 가부키 가문과 더 연관이 있는 가문의 여성이었기에 하마 유코도 뭐라 할 말 없이 일방적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16] 구 교토 조형예술대학. [17] 물론 그 자리에 테루유키의 생모는 참석하지 않았다. [18] 거동도 못하는 할아버지의 병수발을 드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텐데(...) 꽤나 지극정성으로 돌봤다고 한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여러 가문에 선물을 돌리고 명단을 적는 등, 리엔의 아내들이 하는 일들을 전부 도맡아 했었다고. [19] 엔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코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고. [20] 젊은 배우를 육성한 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21] 엔오에게 말을 거는 남성. 많은 수퍼 가부키에 출연하였다. [22] 배우였던 어머니는 자식 모두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