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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피터 블래티

윌리엄 피터 블래티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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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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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피터 블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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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피터 블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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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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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제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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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없음 윌리엄 피터 블래티
( 엑소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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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1981년)
제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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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의 추적자)
윌리엄 피터 블래티
(9번째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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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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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스필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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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피터 블래티
( 엑소시스트 3)
테드 텔리
( 양들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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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7302E><colcolor=#fff> 윌리엄 피터 블래티
William Peter Blat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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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8년 1월 7일
뉴욕 주 뉴욕 시
사망 2017년 1월 12일 (향년 89세)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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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작가, 영화감독, 프로듀서
장르 호러, 드라마, 코미디
학력 조지타운 대학교 (영문학 / 학사)
조지 워싱턴 대학교 (영문학 / 석사)
신체 185cm
배우자 메리 마가렛 리가드 (1950년 결혼–1963년 이혼)
엘리자베스 길먼 (1965년 결혼–1971년 이혼)
린다 투에로 (1975년 결혼–1980년 이혼)
줄리 윗브로트 (1980년 결혼)
자녀 슬하 7명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 ~ 초기 활동2.2. 호러 작가 활동2.3. 사망
3. 작품 목록
3.1. 장편 소설3.2. 영화
4. 여담5. 관련 문서6.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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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매혹적인 소설가에서 영화 제작자로 변신한 그는 신앙에 대한 조사를 통해 사후세계에 대한 그의 믿음을 입증했다.
영국 영화 협회 #

미국 작가, 영화감독, 프로듀서. 엑소시스트 시리즈의 원작자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 초기 활동

1928년 1월 7일 뉴욕 주 뉴욕 시 맨해튼에서 레바논 출신의 이민자인 피터 블래티와 메리 블래티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블래티가 6살일 때 가족을 버리고 집을 떠났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맨해튼 거리에서 모과 젤리를 팔아서 자식들을 부양했다. 어린 시절 집세를 내지 못해 28개의 다른 주소에서 살았다고 한다. 블래티는 인터뷰에서 이 시절을 "편안한 궁핍"이라고 회상했으며, 다른 인터뷰에서는 "어머니는 우리를 계속 가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믿음과 확신의 힘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블래티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은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2]였다. 또한 블래티는 예수회 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고 교육을 받았다. 예수회 고등학교인 '브루클린 예비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예수회 대학교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으며, 1950년에는 영문학 학사 학위를 받아 졸업했다. 이곳에서 그는 철학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블래티는 후일 인터뷰에서 "조지타운에서 보낸 시간들은 아마도 제 인생에서 최고의 시간들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1954년에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미합중국 공군에 입대해 심리전 사단에서 복무했다. 최종 계급은 중위다. 제대 후에는 베이루트에 있는 미국 국제 공보국(USIA)[3]에서 일했으며, 이때부터 잡지에 재치 있는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미국으로 돌아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예수회 대학인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교의 홍보 책임자가 되었다. 1959년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로 직장을 옮긴 후, 여가시간에 자신의 공군 복무기인 "메카로 가는 길은 어느 쪽인가요, 잭?"이라는 제목의 코미디 회고록을 썼다. 이듬해에 그는 책을 홍보하기 위해 그루초 막스가 진행하는 퀴즈쇼 " 유 베트 유어 라이프"에 출연했는데, 이 방송에서 받은 1만 달러로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블래티가 공식적으로 첫 번째로 집필한 소설 '존 골드파브, 제발 집으로 와주세요!'(1963)는 스파이 비행기 위기와 중동의 미식축구를 결합시킨 코미디 소설이다. 당시 그의 책은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는데, 뉴욕 타임스는 "S.J. 페렐만처럼 글을 쓰는 재능 있는 거장. 윌리엄 피터 블래티보다 더 재미있는 대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극찬했다. 이 소설은 1965년에 셜리 맥클레인 피터 유스티노프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로 각색됐으며, 블래티가 직접 영화판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당시 그는 코미디 영화 각본가로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4]이 연출한 핑크 팬더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핑크 팬더 2 - 어둠 속에 총성이'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이외에도 전쟁 코미디 영화 '아빠, 전쟁에서 무슨 일이?'(1966)와 느와르 스릴러 영화 '건'(1967) 등 많은 각본을 썼다.

2.2. 호러 작가 활동

1971년 베스트셀러 소설 《엑소시스트》로 인쇄본과 대형 스크린 모두에서 공포 장르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
로저 이버트 닷컴 #
많은 가톨릭 신자들처럼, 저도 제 삶의 과정에서 흔들리는 신앙의 작은 싸움을 많이 해왔습니다. 그 당시 저는 신앙의 전쟁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듣고 자세한 내용을 읽었을 때, 그것은 매우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세상에, 만약 누군가가 이것을 조사하고 증명한다면, 이것은 신앙에 엄청난 힘이 될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그것을 하고 싶습니다.
윌리엄 피터 블래티 #

윌리엄 피터 블래티는 60년대 초에 코미디 소설가 겸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을 거두자, 엑소시즘을 소재로 한 호러 소설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에이전트가 블래티를 설득하여 호러 소설을 쓰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블래티는 1950년 조지타운 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퇴마 소설을 쓰고 싶어했다. 1949년 미국 메릴랜드주에 살던 열네 살 소년이 악마에 빙의되어 두 달간 구마 의식을 받고 해방된 사건이 터졌는데, 블래티는 신문 기사를 통해 이 사건을 접하고 악의 본성에 대한 종교적 견해와 해석, 철학적 고찰을 더한 장편소설의 영감을 받았다.

그러다가 1968년 극장에서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 악마의 씨'를 보고, 아내에게 "저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라고 말하며 소설 '엑소시스트'의 집필을 시작했다.[5] 그리고 당시 블래티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어머니가 정말로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를 갈망하다 '엑소시스트'를 쓰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 또한 소설 집필 당시 작품을 망치는 것이 두려워서, 10개월 동안 암페타민을 복용하며 '엑소시스트'를 썼다고 밝혔다. # 잠도 잘 안자고, 하루 평균 최소 14시간~18시간 동안 집필했다고 한다. #

집필을 마치고 1969년 새해 전야 파티에서 자신이 쓴 소설을 출판사 'Bantam Press' 소속 편집자에게 건넸다. 편집자는 소설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그 자리에서 바로 엑소시스트의 판권을 샀다.[6] 이 책은 1971년 7월에 출판됐고, 출판 이후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으며, 미국에서만 무려 1,300만부가 팔렸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서 17주 동안 1위를 차지했고, 57주 연속으로 순위에 머물렀다.[7]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미국 문학계에 호러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이 책은 블래티의 대표작이자 호러 문학의 한 획을 그은 걸작 스테디셀러로 평가받고 있다. #
파일:C2EGv95XgAI6Y87.jpg
윌리엄 프리드킨(왼쪽)과 윌리엄 피터 블래티

큰 성공을 거둔 소설 '엑소시스트'는 1973년 동명의 영화 영화화됐다. 전년도에 ' 프렌치 커넥션'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윌리엄 프리드킨이 연출을 맡았으며[8], 원작자인 블래티가 직접 각본과 제작을 담당했다.[9] 영화판은 개봉 이후 전 세계적으로 사회현상을 일으켰다. 평단에서 '호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라는 극찬을 받았으며,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둬 1973년 가장 흥행한 영화가 됐다. 지금까지도 물가 상승률 적용시 영화 역사상 가장 흥행한 R등급 영화다. 또한 영화의 성공으로 인해 블래티는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했으며, 제작자로서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했다. 또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설과 영화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출판사와 영화 제작사에서 블래티에게 '엑소시스트'의 후속작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요청을 무시하고 어머니에 대한 회고록을 출판했다. 또한 그는 영화 ' 엑소시스트'의 후속작인 ' 엑소시스트 2'(1977)에 참여하는 것도 거부했다. 이듬해에 그는 7년 만에 집필한 스릴러 소설 '9번째 배치'[10]를 공개했다. 이 책은 1980년에 영화화됐는데, 블래티 본인이 직접 영화판의 연출과 각본을 담당했다. 영화의 전반부는 코믹한 느낌이지만, 후반부는 인간의 고통, 희생 그리고 믿음이라는 핵심적인 문제들을 깊이 파고들어서 굉장히 어두워진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평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지금까지도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신앙에 관한 가장 초현실적인 영화'라고 평하는 매체도 있다. #

1983년 '액소시스트'의 후속작인 장편 소설 '레지옹'을 공개했다. 원래는 속편을 쓸 생각이 없었지만, 고민 끝에 윌리엄 킨더만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생각해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블래티는 '레지옹'을 윌리엄 프리드킨이 감독을 맡은 장편 영화로 구상했지만, 프리드킨은 영화에 대한 의견 대립 때문에 제작 과정에서 하차했다. 이후 존 카펜터에게도 감독 제의를 했으나, 카펜터 역시 의견 차이 때문에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이 영화는 원작자인 블래티가 직접 연출했다. '레지옹'을 원작으로 한 ' 엑소시스트 3'(1990)는 흥행에 어느정도 성공했지만, 평단과 관객들에게 미묘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어느정도 재평가를 받고 있다. # '1편이 워낙 걸작이지만, 3편도 저평가된 수작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다.[11]

말년에는 굉장히 과작을 했으며, 영화계 활동도 중단했다. 커리어 후반에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단편 공포 소설 '다른 곳에서'(2009), 알바니아의 한 신부의 처형에 관한 내용을 담은 '디미터(2010)'[12], 이전 작품의 종교적, 심리적, 공포적 요소들을 결합한 호러 소설 '크레이지(2010)' 등이 유명하다. 또한 2011년에는 '엑소시스트' 소설 출간 40주년을 맞아 본인이 직접 가필 수정한 판본을 공개했다. 블래티는 서문에서 "엑소시스트 40주년 기념판에는 전반적으로 내용을 다듬는 과정에서 새로운 표현과 문장이 더해졌다. 첫 출간 당시에는 시간과 자금의 한계로 미처 담지 못했던 부분들이다. 독자들이 이 판본을 기억해주길 바란다"라고 적었다.

블래티의 많은 책과 각본은 강박적으로 사후 세계라는 주제와 이 세상을 초월하는 영역의 존재에 대해 다루곤 했다. BBC의 영화 평론가 마크 커모드[13](Mark Kermode)는 "그 영역에 대한 그의 믿음은 오싹하고 희망적이었으며, 그의 글(그리고 나중에 연출)을 통해 그것을 환기시키는 그의 능력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의 작품의 근본적인 메시지는 항상 '모든 것은 시간의 끝에서 해결된다'는 확신 중 하나였기 때문에, 실제로 블래티가 '공포의 대가'라는 명성을 얻었어야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라고 평했다. #

1997년에는 호러 장르에 큰 영향을 끼친 개인들에게 수여하는 공로상인 브램 스토커상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2.3. 사망

2017년 1월 12일, 생일을 맞은 지 5일 만에 메릴랜드의 한 병원에서 향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블래티의 아내 줄리 윗브로트는 "블래티가 혈액암의 한 종류인 다발성 골수종을 앓다 눈을 감았다"라고 성명문을 보냈다.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스티븐 킹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공포 소설을 쓴 윌리엄 피터 블래티에게 명복을 빕니다"라고 추도문을 썼고, 윌리엄 프리드킨은 "엑소시스트를 만든 친애하는 친구이자 형제인 윌리엄 피터 블래티가 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추도문을 썼다.

3. 작품 목록

3.1. 장편 소설

제목 발간년도
메카로 가는 길은 어느 쪽인가요, 잭?
Which Way to Mecca, Jack?
1959년
존 골드파브, 제발 집으로 와주세요!
John Goldfarb, Please Come Home!
1963년
I, 빌리 셰익스피어
I, Billy Shakespeare
1963년
트윙클, 트윙클, '킬러' 케인
Twinkle, Twinkle, "Killer" Kane
1963년
엑소시스트[14]
The Exorcist
1971년
9번째 배치
The Ninth Configuration
1977년
레지옹
Legion
1983년
데몬 파이브, 엑소시스트 낫씽: 어 페이플
Demons Five, Exorcists Nothing: A Fable
1996년
다른 곳에서
Elsewhere
2009년
디미터
Dimiter
2010년
크레이지
Crazy

3.2. 영화

<rowcolor=#fff> 년도 제목 연출 각본 제작 비고
1963 다이어 클럽의 남자
The Man from the Diners' Club
공동 각본
1964 핑크 팬더 2 - 어둠 속에 총성이
A Shot in the Dark
공동 각본
1965 존 골드파브, 제발 집으로 와주세요!
John Goldfarb, Please Come Home!
원작자
프라미스 허 애니씽
Promise Her Anything
1966 아빠, 전쟁에서 무슨 일이?
What Did You Do in the War, Daddy?
1967
Gunn
공동 각본
1969 그레이트 뱅크 강도
The Great Bank Robbery
1970 밀애
Darling Lili
공동 각본
1973 엑소시스트
The Exorcist
원작자
아카데미 각색상 수상
골든글로브 시상식 각본상 수상
1976 마스터마인드[15]
Mastermind
공동 각본
1980 9번째 배치
The Ninth Configuration
원작자
골든글로브 시상식 각본상 수상
1990 엑소시스트 3
The Exorcist III
원작자

4. 여담

  • 데뷔 초창기에는 코미디 작가로 유명했지만, 엑소시스트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후에는 대중들에게 호러 작가로 알려졌다. 윌리엄 피터 블래티는 후일 인터뷰에서 "슬픈 사실은 아무도 내가 코미디를 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엑소시스트는 나의 코미디 경력을 끝냈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워버렸다"라고 말하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2013년 인터뷰에서는 "엑소시스트를 후회할 수 없어요. 그 책은 저와 제 가족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것을 쓸 수 있는 많은 자유를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 네 번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테니스 선수 린다 투에로(Linda Tuero)와 결혼 생활을 했다. 딸 J. T. 블래티(J. T. Blatty)는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육군 대위이며, 현재는 사진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 굉장히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블래티는 자신의 저서 엑소시스트를 " 예수회에 보내는 350페이지 분량의 감사 편지"라고 적기도 했다. # 또한 모교인 조지타운 대학교에 대해 "더 이상 가톨릭이라고 자칭해선 안 된다. 교회 교리에서 너무 멀리 벗어났다"라고 비판하며 교회 법정에 고소하기도 했다. 블래티는 "조지타운이 낙태권을 지지하는 연사들을 초청하고 1990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내린 지시를 교회 부속 단과대에 거부하는 등 수십 년간 교회 교리를 침해했다"라고 주장했다. # 블래티는 바티칸에 직접 정식 청원서를 제출했고, 2014년 한 대주교로부터 "근거 있는 청원"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친 예수회 선생들에 대해 "나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줬다"라고 적었으며, 영어 교수인 버나드 와그너에 대해서는 "나에게 글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라고 적기도 했다. #
  • 본인의 영화에 카메오로 종종 출연했다. 그리고 엑소시스트의 오디오북을 본인이 직접 녹음하기도 했다. #
  • 토마스 아퀴나스 컬리지(Thomas Aquinas College)의 후원자였다. 2002년 토마스 아퀴나스 컬리지에 100,000달러를 기부하는 Peter Michael Blatty 기념 장학 기금을 시작했다. #
  • 1970년대 초에 배우 티피 헤드런과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키우는 사자들 중 하나를 블래티의 이름을 따서 빌리라고 이름 지었다.
  • 존 부어만이 연출한 ' 엑소시스트 2'를 엄청나게 싫어했다. 2편과 마찬가지로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은 폴 슈레이더의 '도미니언: 프리퀄 투 더 엑소시스트'는 굉장히 좋아했으며 극찬을 남겼다.

5. 관련 문서

6. 외부 링크


[1] 둘 다 공로상 자격으로 수상했다. [2] 가톨릭 교회 주교의 조카이기도 했다. [3] 1953년부터 1999년까지 운영된 공공외교 업무를 전담하는 미국 정부 기관 [4] 국내에서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5] 다만 블래티는 폴란스키가 자신의 태아에 대한 주인공의 우려가 진짜인지 아닌지 관객들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던 방식을 좋아했지만, 결말을 '천박하다'고 느껴서 좋아하지 않았다. # [6] 소설이 완성되자 Bantam Press는 판권을 Harper & Row에 팔았다. [7] 엑소시스트가 베스트셀러에 오르기 전에는 마리오 푸조 대부가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 [8] 블래티가 직접 프리드킨에게 영화판의 감독을 맡아달라고 제의했다. [9] 원래는 ' 내일을 향해 쏴라'의 기획자 폴 모나시와 공동 제작하기로 했지만, 각본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모나시가 영화의 지배권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공동 제작 체제는 무너졌다. [10] 1966년 출판한 Twinkle, Twinkle, "Killer" Kane을 재작업한 소설이다. [11] Syfy에서 이러한 주장을 기사로 올렸다. # [12] 윌리엄 프리드킨이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 [13] 블래티와 절친한 사이였다. [14] 국내에서 유일하게 정발된 윌리엄 피터 블래티의 저작이다. [15] 테렌스 클라인이라는 필명으로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