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6:5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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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쁨/evil, Bad)
1.1. 정의1.2. 악에 대한 인식과 역사1.3. 관련 문서
2. 한국어 단어3. 포켓몬스터 타입

1. (나쁨/evil, Bad)

"Evil is unspectacular and always human, and shares our bed and eats at our own table."
악은 특별하지 않고 항상 인간적이며, 우리와 함께 자고 함께 먹는다.
오든(Wystan Hugh Auden, 1907~1973)
악은 선을 알고 있지만 선은 악을 모른다.
프란츠 카프카
좁게는 인간의 의지·태도·행위가 도덕적 규범에 어긋남을 뜻하며, 넓게는 사물이나 행위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와 반대될 경우에 적용되는 말.[1]

의 반대, 마이너스의 끝, 온갖 나쁜 것의 통칭, 모든 종교를 먹여살리는 대형 떡밥. 철학의 한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인간들이 저지르기도 하는 악행들도 惡이라고 부른다.

거창한 사상적 목적보다는 사소한 이기심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저 냉혹한 현실 속에서 조금만 덜 힘들고 싶고 조금만 더 편하고 싶어서, 악이 발생하는 어떤 현실 구조에 대해 고뇌하고 저항하는 대신 생각 없이 넘기거나, 대세를 핑계로 순응하는 행동이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식으로 확대되곤 한다.

1.1. 정의

대부분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악'이란 개념을 쉽게 그릴 수 있지만 워낙 악이라고 부를 만한 사례가 많고, 누군가에겐 악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악이 아닌 경우도 많아 딱히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처럼 옛부터 사람들은 악의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골머리를 싸맸다. 그래서 내린 결론도 다양하다.
  • 선과 악은 고유한 것이며 동등하다.
    극단적인 이원론.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며,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우월하지 않다는 뜻이다. 장점이라면 세상에 악이 가득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애먹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메르 신화가 대표격인데 바알 모트는 동일한 위격을 가지고 서로를 치받는다. 결국 세트가 관광을 타긴 했지만 끝없이 부활해서 혹은 오시리스와 대결하는 이집트 신화도 결론은 같다.
    이 주장은 나중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대로라면 선과 악의 구분이 없어진다는 데 있다. 둘 다 동등하고 고유한 존재라면 선이 악보다 우월한 게 없는 데다 더 나은 것도 없기 때문에 선과 악은 말 그대로 상대적인 개념이 된다. 악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는 있으나, 악을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는 셈이다.
  • 선이 없는 상태가 악이다.
    "Privatio boni (debiti)"라고도 한다.
    악은 '부족한 상태', '결여된 상태'를 의미하며 그 이빨 빠진 부분이 채워진 것이 선이라는 식의 논리. 소크라테스가 '무지'를 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한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 제자인 플라톤이 이 논리를 특히 좋아했다. 기독교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도 『자유의지론』에서 이 입장을 지지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 등도 이를 이었다.
    이 주장대로라면 선은 당연히 악보다 더 우월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따라야 할 것이 된다. 악이 세상에 만연한 이유도 설명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악이 모자란 상태이기 때문에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완벽한 상태인 선보다는 경우의 수가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
    플라톤 후대의 추종자들은 그 결여된 상태에 갈수록 정체성을 부여시켜 현대적 개념의 구체적 악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물질이 악이니 여성이 악이니 하는 별 헛소리를 다 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선의 부재가 악이라면, 둘 다 선이 부재하는 것이 같음에도 왜 더 악한 것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맹점이 있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방사물 폐기능을 버리는 것은 둘다 선(시민의식)이 결여되어 발생하지만, 이 이론에서는 둘다 똑같은 정도로 악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방사능을 버린 것과 쓰레기를 버린 것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더 악한 사람이 누구일지 명백하다. 방사능을 버린 것이 더 악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악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적은 쓰레기 버리기는 방사능 버리기 보다 더 '선한' 것인가? 혹은 단지 버린 쓰레기를 줍지 않음으로서 선행(쓰레기 줍기)을 하지 않았으니 이것도 선의 결여이므로 악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아무튼 이 이론도 여러가지로 토의되고 있는 주장이다.
  • 악은 선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보잘 것 없으며 선의 극치(지선)인 아래의 것이다.
    일반적인 종교적 개념의 악. 악은 영원할 수 없으며 신은 악을 용납치 않는다. 악은 기어이 모두 소멸하고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한편 기독교에서는 상술한 "악은 선의 부재"를 통하여 다시 더 나아가 선의 상실이라고 이해하고 있다.[3] 단점은 절대선인 신이 악에 개입하지 않음로부터 발생하는 모순인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이 있다. 특히나 유일신 체제인 종교들이 그렇다.
  • 선은 악의 무한한 번성을 위해 필요한 일종의 숙주다.
    악의 영원한 지속에 선이 필요하여 진화론적으로 공존한다는 관점이다. 악한 인간만 있는 사회는 공멸하여 지속될 수 없다. 게임 이론에서 이기주의에 해당되는 전략은 이타주의에 해당되는 전략을 호구 삼아 맘껏 착취하는데 이러면 이타주의 전략은 오래 유지될 수 없고 결국 이기주의 전략만 남아 공멸한다. 따라서 이기주의 전략의 번성을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정의(복수 또는 응징)에 해당되는 전략이 필요해진다. 거시적으로 봤을 때 악이 착취할 선은 물론이고, 악의 착취를 견제할 선 역시 악의 존속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선과 악이 통약이 불가능하여 악으로 인한 고통을 선이 완벽하게 상쇄시킬 수 없다고 본다면, 선악을 같이 존재시키는 행위는 선악을 같이 존재시키지 않는 행위와 달리 악한 행위로 볼 수 있다. 쾌락은 나쁘지 않지만 굳이 강요할 필요는 없는 반면 고통을 강요하는 것은 나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을 따를 경우, 모든 선악을 같이 존재시키는 행위, 굳이 악으로 인한 고통을 느낄 존재를 창조하는 행위는 피조물에게 불필요한 창조자의 자기만족적 악행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존재자가 복제를 멈춘다면 악도 지속될 수 없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선을 핑계 삼아 악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창조•복제•번식•증식•유전 등이 곧 악이라는 또는 바이러스의 무한한 자기복제로 볼 수 있으며, 생명의 본능과도 같은 복제•창조 행위 자체가 만악의 근원이라고 볼 수도 있고, 선이 악을 통제한다기보다는 악이 선을 사육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선인만 있는 사회는 없을까? 각기 태생과 환경 조건이 다른 생명이 자신의 질서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의 질서를 직간접으로 약탈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약탈에 도움이 되는 식욕이나 사냥 본능 같은 공격성이 진화하고, 환경 적응 문제로 인해 개체가 죽어도 이어지는 생식이 진화하면서 이에 도움이 되는 성욕이나 경쟁심 역시 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4]
  • 정답은 없으며 선과 악도 명백히 정의 내릴 수 없다.
    사람마다 대답이 다르거나, 문제가 잘못됐다 보거나, 혹은 말 그대로 답이 없을 거라는 견해다. 가령 살인은 일반적으로 악으로 규정되지만, 적군이나 악인을 죽이면 영웅이 되기도 한다. 칼을 요리할 때 쓰면 좋은 것이나, 사람을 해칠 때 쓰면 악하다는 식이다. 다만 무조건 선악은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면 상대주의의 역설에 빠지게 된다.

이기적 행위와 이타적 행위를 손쉽게 악과 선으로 분류할수도 없거니와, 설령 개인의 이기심 추구를 악이요, 이타적 행위를 선으로 가정한다고 해도 악만이 개인의 삶을 윤택하고 풍요롭게 한다는 것은 개인의 이기심에 대한 판타지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전에 여기에 있던 피카레스크적 전개와 이기심 추구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매체의 인기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기 때문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개개인이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수도 없고, 그렇게 되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스럽게 채운다는 보장도 없으며, 심지어 그런 행동의 결과도 작품 속 세계와는 다르기 때문에, 내 환상대로 작동하는 세상을 매체로라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현실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현실이 안 그러니까 그런 작품에 대한 선호가 발생한다.

개인의 이기심 추구가 진리요, 절대적 가치라면 애시당초 인간사회가 공동체와 사회를 구성하고 함께 살아감으로서 악과 선을 구분하거나, 이에 대해 고민할 필요자체가 없다. 문자 그대로 악의 승리가 확정되어 있고, 극한의 이기심 추구가 인간의 삶, 개인의 삶을 윤택하고 보람차게 한다면 굳이 그것을 악인지 아닌지 고민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애초에 그런 상황에서는 그것울 추구하며 사는 것에 대한 고민 자체가 필요없는 것이다. 그냥 그것을 삶의 진리로 생각하며 모든 이가 추구하면 그만이니까. 한마디로 공기로 호흡하는 인류가 공기를 흡입할지 말지를 '선택'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 그냥 하면 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과연 이기적이고 악한 것이 옳으며 개인에게 이득만 가져다 주는가? 선한 행동 자체가 불필요하며 개인에게 불행과 짐만을 가져오는가? 반대로 선이 우리에게 어떤 이득도 주지 않고, 악이 우리에게 도움만 준다면 왜 인류에게 있어서 선한 가치는 필요했는가? 그리고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라는 질문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질문이고 이에 대해서 개인의 이기심 추구만이 정답이라는 논리는 진작에 부정된지 오래다.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강력한 이론적 기반이 된 신고전파 경제학의 이윤추구의 논리와 행동윤리가 개인의 이기심은 선이자 현명한 행위요, 이타적 행위는 개인의 이윤추구를 침해하기에 불필요하고 어리석은, 구태의여한 도덕주의에서 비롯된 구속이라는 생각을 전파함으로서 개개인의 이득추구에 대한 강력한 합리화 논리를 줬으며, 이전 글처럼 개인의 이득추구를 무한정 추구하는 것이 현실의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는 하나, 그것은 고작해야 어떤 사회와 인간의 일부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심리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등 이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결과는 이런 인식과 거리가 멀다. 애초에 사회와 공동체라는 것 자체가 개인의 이기심과 이득추구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개인이 이기심을 누릴 수 있는 공동체 구성은 역으로 개인의 이타적 행위의 실현과 보장 또한 반드시 요구한다. 실제로 인간의 개인적 욕망과 이득의 추구가 극한으로 용인되고 어떤 질서도 없는 무질서한 파괴가 허용되는 상황은 거의 항상 인류사에 있어왔다. 심지어 지금도 그런 헬게이트가 존재하기도 하고.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는 역설적으로 모두가 각자의 이득추구를 행하기는 커녕 자신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목숨조차 위협되거나,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는 상황으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개인의 이득추구만이 가장 우선시되는 상황은 역설적으로 그 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상황이다. 내가 욕망을 위해서 맘껏 행하고 이기적으로 행할 수 있고, 타인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으면? 남들도 얼마든지 나에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

특히 근현대 이후 '개인의 이기심'이 인간 동기의 핵심으로 등장하면서 심리학자들은 '개인의 이타심'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연구했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이 상황만 주어진다면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행동만 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의 이득을 위해 행동한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존 내쉬가 시작한 게임 이론과 '죄수의 딜레마'와 같이 인간 이기심을 자기 행동의 근원으로 본 이론들은 현실은 이론가들의 상상과 그렇게 일치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기적인 행동만큼이나 이타적인 행동도 많이 하며, 이타적 선택과 이기적 선택은 인간 행동에 굉장히 혼재되어 있다. 애초에 현대 사회에 자신만의 이기심에 철저히 복무하는 인간형에 대한 연구인 소시오패스 문항을 보자. 대략적으로 100명 중에 2명 정도를 명확한 소시오패스로 추정하고 있다. 그 말은 이타적 행동과 이기적 행동 사이를 오가거나,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98명을 차지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물론 소시오패스는 자기 자신의 행동을 위장하니 더 많을 거라는 예측도 있지만, 이런 주장들은 역설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철저히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쉽지 않으며 그렇기에 소시오패스들이 자신을 위장해야할만큼 이타적 성격을 가진 인간군도 많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공동체의 역사는 개인의 욕망 추구가 무한정 실현되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억제하기 위한 역사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즉, 이타적 행위를 억지로라도 할 자신이 없으면 그 인간은 공동체에서 추방되던가 격리됨으로서 역설적으로 모든 자유를 잃게 되는 것이 인간사의 또 다른 진리이기도 했다. 이기심을 앞세워 모든 것을 누리는 자조차도 사회와 공동체와 타인을 위해서 무언가를 내놓지 않거나, 기여하지 않으면, 또는 아무것도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경우에는 자기가 추구했던 모든 것을 너무나 쉽게 잃을 수 있다. 모든 것을 가진 것만 같은 권력자들의 가장 훌륭한 생존전략은 무한정한 권력 추구가 아니라, 자기의 권력행사의 촛점을 나뿐만 아니라 더 많은 다수에 두고, 이를 일부라도 실현하는 것에 있었다. 개인의 이기심의 추구와 실현은 이타적 행위의 실현과 추구와 같이 따라가며, 이 두 가지는 갈등하지만 절대 완전히 분리되거나 이기심에 눈먼 자들의 생각처럼 철저히 대립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1.2. 악에 대한 인식과 역사

동양에서는 악(惡)이라는 개념 대신 오(惡)라는 개념을 주로 써 왔다. 이것은 추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노자 도덕경이 대표적. 사실 옛날에는 질서(秩序)와 혼돈(混沌), 시비(是非), 호오(好惡), 선악(善惡), 미추(美醜) 등을 딱히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질서는 옳은(是) 것이요, 옳은 것이 곧 좋은(好) 것이요, 좋은 것이 곧 착한(善) 것이요, 착한 것이 곧 고운(美) 것이다. 즉, 질서의 반대인 혼돈은 그릇되고 밉고 나쁘고 추한 것이 된다. 이러한 시대배경을 감안하여 보지 않으면 자칫 핵심을 곡해할 수 있다. 성악설 문서로. 실은 현대에서도 여전히 잘 구분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서양에서 악은 선의 반대급부로서 강력한 존재를 가지고 있어 왔고 이는 중세시대를 지배했던 기독교의 핵심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유일신의 존재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인간을 사랑하는 전지전능한 유일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훼방을 놓는 악이라는 변수가 필요했으며, 그 결과 중세시대에는 악을 정의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기독교에 존재하는 악마와 천사의 개념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도 중세시대이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유일신은 전지전능하며 이 세계는 모든 것은 유일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이 세계의 악 역시 유일신에게서 비롯된다는 모순이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신 잘못으로 귀결된다. 실제로 무신론자들이 기독교 등 유일신교를 공격할 때 자주 쓰는 것이 '선과 악의 존재'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선 악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발생했다고 가르친다. 이를 '원죄'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래도 전지전능 때문에 왜 원죄를 저지르게 내버려두었느냐라는 의문이 있는데, 이 원죄에 대한 신의 반응이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한 죄에 대한 구원[5]이다. 세상에 만연되는 악은 요한 묵시록의 최후의 심판에서 종결된다. 유대교 말락 야훼의 개념을 동원하기도 했다.[6]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의 실낙원에는 이미 전지전능하지만 피조물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창조자와 스스로 창조자를 거부하고 악이 되기를 원한 피조물이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본다. 이는 성경의 창세기를 기반으로 이야기한 것이며, 인간이 자유의지를 악용했기에 죄가 들어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C. S. 루이스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 자세히 나와있다.

현재까지도 각종 창작물에는 정의와 함께 대립 구도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는 선보다도 더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백 번 선한 일을 하는 것보다 한번 제대로 악행을 저지르면 사회적 평판을 깎아먹기 일쑤다. 착한 일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해도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는 않지만 단 한번의 악행은 그 힘이 철저히 은폐되지 않는 이상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온다.[7] 하나의 예를 들자면 연예인/정치인 등의 유명인사들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여차해 한번 제대로 큰 병폐를 일으키면 사회적 평판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은 순식간이며 그 명예를 다시 회복하는 데에도 부단한 노력이 필요해진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악의 병폐를 이야기할 때 핵심을 제대로 짚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악을 단지 추악한 괴물로 묘사하면서 그것이 왜 그토록 유혹적인지는 설명하지 못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부지불식간에 악마적인 생각을 취하곤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악이 추하다고 배웠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아주 아름다운 것만 보여. 그러니 나는 악한일 리가 없어.’

하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할리우드 영화가 볼드모트(<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악당), 사우론(<반지의 제왕> 에 나오는 어둠의 군주), 다스 베이더 같은 악당을 추악하고 야비하게 묘사할 때 저지르는 것과 같은 실수다. 악당들은 보통 자신의 가장 충성스런 지지자에게도 잔혹하고 비열하게 군다. 그런 영화를 볼 때마다 시청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어떻게 해서 볼드모트 같은 메스꺼운 작자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을까?

악의 문제는 악이 실제 삶 속에서는 반드시 추악하지는 않다는 데 있다.

악은 사실 대단히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기독교는 할리우드보다 현명했다. 전통적인 기독교 미술에서는 사탄을 대단히 매력적인 내연녀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탄의 유혹에 저항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1.3. 관련 문서

2. 한국어 단어

  • 모질게 쓰는 기운을 뜻하는 명사.
  • 감탄사로, 유격훈련 가면 많이 들을 수 있으며, 태권도, 합기도 같은 데서 구령을 넣을 때도 들을 수 있다. 크게 내지르는 소리나 놀랐을 때 내는 외마디 소리이며 문학에서도 많이 쓰이는 보편적인 의성어다. 인터넷 상에선 의미를 강조하거나 일반적인 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의미하는 '앆'이나 '앍'으로 쓰기도 하나 이는 표준어가 아니므로 유의해야 한다. 군대 유격 훈련 같은 곳에서는 대답을 “악”으로 하기 때문에 해병문학의 필수요소 중에 하나로 쓰인다. 악! 황근출 해병님! 미군에서는 “hooah!”가 악 대신 쓰인다. 아픔을 느낄 때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3. 포켓몬스터 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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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惡, evil) (교육학용어사전, 1995.6.29, 하우동설) [2] 20%건 40%건 99%건 완벽하지 않다는 점에선 똑같다. [3] 다시 설명하자면 기독교에서는 신 자체가 곧 지선인데, 여기서 악은 그러한 신을 인간이 "상실"한 상태라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4] 만약 포식 행위가 가해 행위이고, 가해 행위가 악이라고 본다면 모든 포식자는 사멸할 때까지 악을 끊임 없이 실행하는 존재가 된다. 이때 포식자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신과 자신 이외의 것에 대한 구분 능력(지능과 자의식)은 가해를 유도하는 원천인 동시에 가해 개념의 근간인 피해 개념의 원천이 될 수 있다. [5] 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인 인간 대신 원죄에 대한 처벌을 받는 것 [6] 말락 야훼 항목에 자세히 기술된 대로 말락 야훼는 야훼의 다크사이드(dark side)가 아니며 굳이 번역하자면 "야훼의 천사", "야훼의 사자" 정도다. [7] 당장 나무위키만 해도 문서를 반달/왜곡 하는 등의 악행을 저질렀던 것이 신고 들어가면 IP가 차단 당할 수 있듯이 말이다. [8] 악의 안티테제이지만 일각에서는 악이야말로 진정한 정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