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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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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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宏(? ~ 284)
위나라와 서진 인물이며 자는 정종(正宗)으로 왕개의 손자이자 왕업의 장남, 왕필의 형.
2. 생애
연주 산양군 고평현 사람으로 아버지 왕업에게서 조부 왕찬의 1만권의 장서를 왕필과 함께 물려받았으며, 위나라 때 공부에 벽소되어 상서랑, 급사중을 역임했으며, 태시 초에 급군태수를 지내 백성을 가족처럼 아꼈으며, 군을 통치하면서 치적을 쌓았다.사례교위 석감이 왕굉의 정치에 대해 상소해 무제가 조칙을 내려 식량을 늘리는 것은 중요하다면서 왕굉의 방식을 넓혀야 한다고 조칙을 내렸다. 위위, 하남윤, 대사농 등을 역임했고 왕굉은 중앙에서는 명성을 얻지 못했으며, 죄인을 체포하면 진흙과 먹물을 바르고 깊은 구덩이 속에 내버려둔 채 식량을 주지 않았다.
독단으로 금고 5년 이하로 한 죄인이 21명이 있어서 유사에서 상주해 탄핵되었는데, 무제는 왕굉이 지방에서 치적을 올린 공이 있으므로 왕굉을 용서했다. 태강 연간에는 사례교위가 되었고 수레와 의복에 대해 고대의 제도와는 다른 제도를 만들고 서인은 자강색의 옷이나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무제는 측근을 시켜 풍속을 관찰하게 했다.
왕굉이 부인의 옷이 화려하다며 길바닥에서 이를 몰수하니, 여러 사람들로부터 늙어서 잘못된 판단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상의 비난을 받고 면직되었다가 복귀해 상서가 되었으며, 284년에 죽고 태상으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