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great man theory역사가 몇몇 특출난 개인(영웅)들에 의해 주도되고 결정된다는 역사관. 주로 군주, 정치인, 장군, 종교 지도자, 사상가, 혁명가, 천재, 발명가 등이 그 중심이 된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등 이미 오래전부터 이러한 역사관을 찾아볼 수 있으며 19세기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이 영웅 사관을 대표하는 역사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사실 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사관은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예를 들어 동아시아에서 정사로 인정받은 역사서의 형식인 기전체 같은 것만 봐도 군주의 일대기인 본기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들의 일대기인 열전이 중심이 되어 철저하게 인물 중심으로 쓰여졌다.
보통 좌파 사관의 대표 주자인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 사관이나 민중 사관에 대비되어 보수 우익의 전통주의적 사관의 대표 주자로 여겨진다. 실제로 영웅 사관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인 토머스 칼라일도 대영 제국 및 앵글로색슨족의 우월성과 반유대주의를 주장하고 민주주의를 비판한 우파 역사학자로 평가된다. 유물 사관은 물질적인 경제 구조에 의해 역사가 진행된다고 보고, 민중 사관은 영웅이나 권력자가 아닌 다수의 민중들에 의해 역사가 움직인다고 보아서 개인이 역사를 움직인다는 영웅 사관에 반대한다. 좌익도 우익도 아닌 비교적 중립적인 사관으로는 영웅, 권력자도 아니고 민중도 아닌 역사 자체의 필연적인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것으로 보는 레프 톨스토이의 필연론이 있다.[1]
영웅 사관은 현대 들어서 엘리트주의적, 계급주의적이고 낡은 역사관이라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인기 있는 역사관이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 아프고 복잡한 사회 구조나 거시적인 시대상을 분석하는 역사관보다는 대중에게 인기 있는 뛰어난 위인의 활약으로 역사가 바뀌었다는 식의 영웅 사관이 훨씬 통쾌하고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극이나 대체 역사물도 영웅 사관에 입각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2. 개인이 역사를 바꿀 수 있는가?
개인이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영웅 사관에 대한 찬반 논쟁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논제들이 예를 들어 아돌프 히틀러가 없었다면 나치 독일도 없었을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없었다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못했을까?[2] 세종대왕이 없었다면 한글도 없었을까? 칭기즈 칸이 없었더라도 몽골 제국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을까? 카를 마르크스가 없었다면 공산주의도 없었을까? 마르틴 루터가 없었다면 개신교도 없었을까? 코페르니쿠스, 찰스 다윈이 없었다면 지동설, 진화론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같은 것들이다. 즉, 영웅 사관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이러한 역사가 권력자 개인의 행보나 선구자, 천재의 활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보는 반면 영웅 사관을 부정하는 측에서는 시대의 흐름상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고 이러한 특출난 개인들이 없었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가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2.1. 부정론
우선 아돌프 히틀러 같은 경우 20세기 초반 독일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프로이센 왕국으로부터 내려오는 군국주의, 국가주의와 당시 유행하던 반공주의 및 반유대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설사 히틀러가 없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히틀러의 자리에 올라 파시스트 독재자가 되었을 거라는 주장이 대표적인 반론으로 제기된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또한 당시 유럽의 항해술 및 조선술의 발전이나 맘루크 왕조 및 베네치아 공화국의 향신료 무역에 대한 독점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할 필요가 있었던 시대적 상황이 맞물린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 반론으로 제기된다. 즉, 콜럼버스가 없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것이다.과학의 역사를 바꾼 천재 과학자, 발명가의 학문적인 발견이나 발명도 동시대에 여러 사람이 독립적으로 비슷한 발명이나 학문적 발견을 이룬 사례가 많다는 것이 반론으로 제기된다.[3] 즉, 코페르니쿠스, 다윈이 없었더라도 당대 유럽에서 이루어진 과학의 발전을 고려했을 때 다른 누군가가 비슷한 학문적 발견을 했을 거라는 것이다.
역사에서 흔히 거론되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라는 수식어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대를 앞서갔다는 것은 당시에는 별다른 파급력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개인의 능력과 천재성이 뛰어나고 선구적인 사상이나 발명을 만들어냈다고 하더라도 시대적 조건이 받쳐주지 못하면 결국 개인이 역사를 바꾸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헤론이 발명한 증기기관이 있지만 당시 시대적 한계로 인해 천 년 뒤 나온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개발한 증기기관과는 달리 산업 혁명을 일으키진 못했고, 고대 그리스의 또 다른 천재 아리스타르코스도 코페르니쿠스보다 2000년 앞서 지동설을 발견했으나 그의 지동설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레이프 에이릭손은 콜럼버스보다 500년이나 앞서 신대륙을 발견했지만 당시에는 대서양을 오가며 신대륙에 대규모 식민지를 개척할 정도로 유럽의 항해술이 발전하지도 못했고 인구가 많지도 않았기 때문에 후대의 콜럼버스와는 달리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200년 앞서 나온 고려의 금속 활자도 시대적 한계로 인해 구텐베르크 활자만큼의 사회적 파급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마르틴 루터 또한 루터 이전에도 발도파,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등 선구적인 종교 개혁 운동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루터만이 최초로 종교 개혁에 성공한 것은 르네상스로 인한 유럽의 사회 변화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인한 성경의 대량 보급이라는 거시적인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2.2. 반론 및 긍정론
예수나 무함마드는 한 명의 개인이 인류의 역사를 바꾼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들이 인류의 역사에 끼친 파급력은 너무나도 막대해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만큼의 전 세계적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고 예수나 무함마드가 없었더라도 세계사적으로 그만한 파급력을 줄 수 있는 다른 인물이 나올 수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역사상 수많은 종교 지도자가 있었지만 예수, 무함마드만큼의 파급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전무후무하기 때문.역사 연구가 진척되어 오히려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더 크다는 게 드러난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어 훈민정음 창제는 기존에는 집현전의 공동 창작이라고 알려졌지만 지금은 세종이 창제와 반포를 주도했다는 게 정설이다. 세종이 한글 창제를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한국인들은 지금도 일본처럼 한자를 쓰거나 베트남처럼 로마자를 쓰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일개인이 역사를 크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에서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또 다른 사례가 아돌프 히틀러로, 나치 독일이라는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친 체제의 성립과 몰락에서 히틀러라는 개인을 빼고는 결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대표적 반론이 상술한 것처럼 히틀러가 없었더라도 히틀러를 대체한 다른 사람이 이끄는 나치당이 결국 집권했을 것이라는 필연론이다. 그러나 뮌헨 폭동 이후 나치당은 사실상 거의 와해된 상태였고 그런 상황에서 당을 빠르게 재건하고 정권을 잡은 것이 히틀러 개인의 선전 선동과 정권 장악 능력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당대 독일의 군국주의, 반공주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히틀러가 없었다고 해도 파시즘의 집권은 필연적이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독일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다른 유럽 국가들의 기득권, 보수 우익들 또한 기본적으로 반공주의, 반유대주의, 군국주의, 국가주의 성향이 있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반유대주의는 대놓고 정부의 묵인 아래 포그롬이 벌어지던 러시아나 동유럽이 훨씬 더 심각했고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라는 프랑스에서도 드레퓌스 사건이 벌어졌던 적이 있었다. 반공주의 또한 소련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국내에서도 독일 공산당의 세력이 컸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당대 독일에 반공적인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필연적이었다는 의견도 있으나 그렇다면 소련과는 다른 대륙에 있고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이 원내에 진입조차 못 하던 미국에서 왜 매카시즘이 탄생했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영국과 프랑스는 민주주의가 발전해서 파시즘이 발붙일 곳이 없었다는 주장은 로버트 팩스턴의 프랑스 파시즘에 대한 연구로 인해 논파된 지 오래이고 만약 프랑스에도 히틀러와 같은 수준의 정치적 수완과 선동 능력을 가진 파시즘 지도자가 있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요컨대 당대 독일의 파시즘 정권 성립에서 히틀러라는 개인이 영향을 미친 지분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의 불안정성을 보았을 때 당대 독일에서 반유대, 반공, 군국주의적인 보수 독재 정권의 집권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수도 있으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히틀러가 없었다면 그것이 나치즘이 아닌 다른 형태의 정권, 예를 들어 반유대, 반공인 것은 같지만 대외적인 침략 전쟁에는 큰 관심이 없던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이나 유대인을 절멸시키려고까지 하지는 않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과 유사한 형태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것.
과학의 발전이 소수의 천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과학사에서의 영웅 사관의 경우, 실제 과학적 발견이나 발명이 독립적으로 여러 사람들에 의해 동시기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같은 발견/발명을 했다는 사람들을 전부 다 합쳐봐도 결국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있는 수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컨대 과학적 발견/발명을 해낸 것이 1명이든, 5~6명 정도가 우연히 동시에 해냈든 간에 그러한 발견/발명을 해낸 것이 몇 명 정도의 소수 천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건 변함이 없으며 과학의 발전이 소수의 천재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는 것도 부정되지 않는다. 영웅사관의 지지자인 미국의 철학자 시드니 훅은 이렇게 논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같은 것은 과학 혁명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던 당대 유럽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설사 뉴턴이 없었더라도 다른 과학자가 그것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게오르크 칸토어의 초한수 이론 같은 경우 아인슈타인, 칸토어 이전이나 동시대나 그와 유사한 이론을 발견한 사람조차 없으며, 사실상 과학/수학의 새로운 분야를 창조해 낸 수준이기 때문에 만약 아인슈타인, 칸토어가 없었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러한 이론을 고안해 내거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즉 과학의 발전사에서 소수 천재들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
3. 관련 문서
[1]
이는 그의 저작인
전쟁과 평화에서 언급된 "제왕들도, 장군들도 모두 역사의 노예에 불과했다"는 어록에서 잘 나타난다.
[2]
정확히는 "콜럼버스가 없었다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와 지속적으로 교류하지 못하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이 적합하다. 게다가 콜럼버스 자신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도달한 대륙이 인도의 일부라고 믿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빈란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아메리고 베스푸치 문서 참고.
[3]
즉, 남의 발명이나 발견을 표절한 게 아니라 같은 시대에 다른 사람이 우연의 일치로 비슷한 발명/발견을 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아이작 뉴턴과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미적분 이론 발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