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8 20:03:09

안정환/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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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부산 대우 로얄즈/ 부산 아이콘스
2.1. 1998 시즌2.2. 1999 시즌2.3. 2000 시즌
2.3.1. 이적 사가
2.4. AC 페루자 (임대)
2.4.1. 2000-01 시즌2.4.2. 2001-02 시즌2.4.3. 세리에 A 시절의 평가
3. 시미즈 S펄스
3.1. 2002 시즌3.2. 2003 시즌
4. 요코하마 F. 마리노스
4.1. 2004 시즌4.2. 2005 시즌
5. FC 메스
5.1. 2005-06 시즌
6. MSV 뒤스부르크
6.1. 2005-06 시즌
7. 수원 삼성 블루윙즈
7.1. 2007 시즌
8. 부산 아이파크
8.1. 2008 시즌
9. 다롄 스더
9.1. 2009 시즌9.2. 2010 시즌9.3. 2011 시즌
10. 현역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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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 안정환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부산 대우 로얄즈/ 부산 아이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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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대우 로얄즈 시절의 활약상.
1998-2002
통산 88경기 44골
아주대 졸업 후 부산 대우 로얄즈로 입단하였다. [1] 다만 IMF 시절이라서 다른 선수들에 비해 계약금, 연봉 모두 적었다고 한다. 당시 한 달에 약 100만 원 정도 받았다고 한다.

2.1. 1998 시즌

1998 K리그 베스트 11
FW
김현석
FW
샤샤
MF
고종수
MF
유상철
MF
백승철
MF
안정환
MF
정정수
DF
안익수
DF
마시엘
DF
이임생
GK
김병지

데뷔하자마자 팀의 주전으로 활약하며 컵대회 포함 33경기 13골을 기록하며 1998 시즌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실력으로 2년 먼저 데뷔한 수원 삼성의 고종수, 같은 해 데뷔한 포항 스틸러스의 이동국과 함께 K리그의 흥행을 이끌었다.

1998 시즌: 33경기 13골
대회 경기 득점
K리그 17 5
아디다스 컵 7 4
필립모리스 컵 9 4
합계 33 13

2.2. 1999 시즌

파일:19991110000061_0.jpg
1999 K-리그 MVP[2]
1999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안정환
FW
샤샤
MF
서정원
MF
고종수
MF
데니스
MF
고정운
DF
강철
DF
김주성
DF
마시엘
DF
신홍기
GK
이운재

1999년에는 K리그 24경기 14골[3]을 기록하면서 사상 최초로 비우승팀 MVP에 오르게 된다. 1998년에는 미드필더, 1999년에는 포워드로 뛰었는데, 이는 사샤 드라쿨리치가 부산에서 수원으로 이적한 여파로 보인다.

1999 시즌: 35경기 21골
대회 경기 득점
K리그 24 14
대한화재 컵 7 4
아디다스 컵 1 0
합계 35 21

2.3. 2000 시즌

후술할 이적 문제로 인해 반 시즌을 뛰고 이탈리아 무대로 임대이적하게 된다. 이 시즌에도 반년동안 20경기 10골을 넣는 활약을 펼쳤다.

2000 시즌: 20경기 10골
대회 경기 득점
K리그 13 8
대한화재 컵 7 2
합계 20 10

2.3.1. 이적 사가

안정환은 리그 MVP 혹은 득점왕을 달성하면 유럽으로 진출을 추진한다는 계약을 대우 로얄즈와 맺고 있었는데, 1999년에 대우가 파산하고 구단이 현대 산업개발로 넘어가면서 구단은 부산 아이콘스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당시 현대산업개발(현산)은 K리그 최고의 스타인 안정환의 가치를 포함해서 대우 로얄즈를 인수한 것이기 때문에 안정환이 리그 MVP가 되자 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결국 안정환은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은퇴를 하겠다는 초강수를 두었고, 현산은 반 시즌을 더 뛰는 대신 유럽 이적을 추진하기로 합의를 본다. 이후 안정환은 2000년에 반 시즌 동안 총 20경기 10골을 넣는 활약을 한 뒤, 해외 진출을 추진한다.

흔히 알려지기를 안정환의 해외 진출은 국책 사업의 일부로서 현산 측의 지원 사격에 의한 것으로 오해받고 있고 일본에서도 그런 식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 시기 설기현의 진출은 국책 사업의 일환이었다. 안정환의 진출도 국책 사업의 일환이 맞다. 왜냐면 공군으로 돌아와 복무를 해야 했던 차범근의 사례나 거의 병역 특례 안 받으면 그냥 군대 안 가고 말지에 가깝던 박주영의 사례처럼, 그 전까지 병역 의무를 수행하지 않은 선수는 해외진출을 못했기 때문이다.
황선홍은 91년에 건국대를 졸업하고 독일에 진출했다. 위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설기현처럼 이동국이나 안정환이 이 시기 해외진출이 가능했던 것은 2002년 성적을 내기 위해 너희들이 성장해라, 그리고 너희들이 성장해서 16강이라는 성적을 내면 병역 특례를 주겠지만 못 하면 돌아오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야구의 박찬호와 같은 사례는 잘 모르겠으나 이 당시 젊은 선수들의 해외진출과 병역이 얽혀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일간지에서도 언급하곤 했던 사실이다.

하지만, 안정환 본인은 국책 사업이 아니라 개인 에이전트를 통해서 해외로 나갔다고 말했다. 국책 사업이란 말의 어감이 이상할 수 있으나, 분명히 전두환에 의해 개정된 스포츠 선수의 병역법은 병역과 관련된 이유로 인해 스포츠 선수들의 해외진출을 막았었다. 이 시기에 이와 같은 명분으로 인해 풀어줬던 것이다.

안정환의 경우 나카타 히데토시로 재미를 본 AC 페루자가 안정환을 영입했기 때문에 해외진출이 가능했던 것이고, 설기현은 국책 사업이 아닌 축구협회 프로젝트로 벨기에에 진출한 케이스이다. 이때 축구협회 프로젝트로 해외 진출한 선수들이 설기현을 포함에 몇몇이 있었지만 전부 실패했다.

어쨌든간에, 안정환은 라 리가의 라싱 산탄데르와 계약을 추진했고 사인까지 48시간을 남겨두고 있었던 상황에서 AC 페루자가 중간에 안정환을 하이재킹한다. 이 사태를 레알 라싱은 분노하면서 부산에 항의하고 소송까지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나 결국 안정환은 페루자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이 행보가 안정환의 커리어를 결정적으로 망가뜨리게 된다.

안정환의 팬들은 이를 많이 안타까워하는데, 대우가 도산하지 않았다면 안정환은 2000시즌을 반년 뛰지 않고 바로 해외 진출을 했을 것이고, 임대라는 불안정한 신분이 아니라 완전 이적으로 이적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우 김우중 회장은 축구 선수의 해외 진출을 지원 사격할 정도로 적극적일 뿐만 아니라, 선수 계약금 외에도 5천만 원을 주고 대우 라노스 광고에 안정환을 출연시킬 정도였기 때문이다. 또한, 안정환이 처음 레알 라싱과 페루자의 계약을 거절한 이유가 바로 임대 신분이었고, 안정환의 목표가 명문 구단 혹은 최고의 환경 같은 게 아니라 유럽의 큰 무대에서 뛴다는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구단이 조건만 절충하여 잘 협상한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조건을 맞출 수도 있을 것이라고 팬들은 생각하고 있다.

안정환은 은퇴 직전 한 인터뷰를 통해 현역 시절 해외를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야 했던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밝히기도 했다. 안정환 인터뷰 기사

역대 K리그 단일시즌 최고의 선수 5명

2.4. AC 페루자 (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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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자 VS 유벤투스 동영상
2000-2002
통산 34경기 5골 1도움

2.4.1. 2000-01 시즌

안정환은 우여곡절 끝에 세리에 A에 임대 생활을 하게 된다. 부산 아이콘스에서 페루자로 이적 당시 세계 최고 리그였던 라리가 RC 셀타 데 비고와도 협상을 진행했지만 안정환은 세계 2위 리그인 세리에A를 선택했다.

임대료는 당시 돈으로 40만 달러다. 안정환은 첫 경기에서 원래 포지션인 공격형 미드필더로 첫 경기를 뛰었지만 결과는 영 아니었고, 둘째 경기는 잠깐 뛰고 끝났다. 이후 10경기가량을 벤치만 달구게 된다. AC 페루자는 안정환이 입단하기 전에 일본 나카타 히데토시를 2년 임대로 쓴 적이 있었다. 이때 나카타의 마케팅 효과가 상당했던 걸로 알려져 있는데, 경기날에는 일본인 수백 명이 관전을 하러 왔고, 유니폼과 관련 상품도 많이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축구 구단주들에게서는 종종 보이는 인물상이긴 하지만 페루자의 가우치 구단장은 기행과 돈독으로 잘 알려진 인물로, 한국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축구 팬에도 관련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다.

가우치 구단장은 처음 안정환을 임대할 때 그의 상품성에 주목한 걸로 알려져 있다. 얼굴도 잘 생겼고[4] 축구도 잘 해서 구름 관중을 몰고 온 K리그 최고의 슈퍼스타였다.[5] 한국의 경제력도 있고,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대우자동차의 스폰서까지 생각하면 임대선수로서 채산성이 높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헌데 한국은 당시 IMF 관리체제이며 모기업 대우그룹은 도산한데다가, 스폰서 업체인 대우자동차는 채권단 관리 속에서 해외매각설과 이에 따른 노사분규로 힘들어했다. 일본과는 달리 아직 한국의 축구 팬들은 위성방송과 해외 축구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지 않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서형욱 같은 직업적 축구전문가가 아닌 이상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관광까지 간다는 문화 자체도 생소했으며, 축구 상품을 산다는 개념 자체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관련 상품도 팔리지 않았다. 중계방송이래봤자 SBS축구채널(현 SBS Plus)이 개국 특집으로 단독 방송한 코파 이탈리아 32강전 뿐이었으며, 대다수 경기는 네티즌들이 해외 정보를 일일이 번역한 후 축구 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해 문자중계를 해야 했다.[6] 이걸 보고 빡친 가우치는 안정환을 쓰지 말라고 코스미 감독에게 지시를 했고, 결국 부상자로 자리가 날 때까지 안정환을 쓰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다.

이 내용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안정환 본인과 전술한 서형욱의 견해를 토대로 하면 안정환을 마케팅 보고 데리고 온 것도 맞고, 나카타를 보러 일본에서는 수백 명이 오는데 한국인은 한 명도 오지 않는다고 갈군 것도 사실이고, # 유니폼이 안 팔린다고 갈군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안정환이 출전을 많이 하지 못한 이유는 임대계약사항 중 해당경기 출전에 도달하면 이적할 수 있는 완전이적조항의 이적료 때문이었다. 아마 페루자의 계획은 임대선수로서 적당히 쓰면서 부산과의 계약 종료 시점에 완전 이적을 싸게 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워낙 이탈리아 구단주 중에 별종이란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내뱉었다가 철회하는 게 일상이라 그냥 빡쳐서 한마디 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고 농담이라고 넘겼을 가능성도 있다. 페루자에서 실제로 안정환을 완전이적시키려 했기 때문에, 별 중요하지 않은 말일 가능성이 99%를 넘어간다.

더구나 안정환은 완전히 이적을 한 게 아니라 임대 신분이였고, 미필 상태였다. 이탈리아에서 한국은 북한으로 혼동될 정도로 인지도가 떨어졌었고, 인종 차별이 심하기로 유명한 이탈리아에서 안정환은 인종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고,[7] 이에 대한 에피소드도 여럿 남아있다. 페루자가 굳이 이적이 아닌 임대를 진행한 것은 부산아이콘스의 이적료 욕심 때문이었다. 페루자는 첫 시즌 후 완전이적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무산됐고 안정환의 경기활약에 비해 출전을 하지 못한 부분은 출전시 대한 추가 임대료 지급조항이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당시 코스미 감독은 "안정환은 대단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재능을 지닌 선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기회를 많이 줄 수 없어 안타깝다."라고 말했다.[8][9]

14라운드에 드디어 교체 출전한 안정환은 이후로도 계속 출전 시간을 늘려갔다. 코스미 감독은 안정환을 포워드로 쓸 생각이었지만, 안정환은 K리그에서도 미드필더였고, 2선에서 치고 올라가는 플레이를 했지 1선에서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결국 공미로 다시 돌리자 성적이 괜찮아졌고, 리그 후반에는 투톱 아래의 1 공미로 좋은 활약을 보이며 4골과 1번의 어시스트, 3번의 MotM, 2번의 주간 베스트 11에 선정된다.

2000-01 시즌: 17경기 4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15 9 6 4 1
코파 이탈리아 2 2 0 0 0
합계 17 11 6 4 1

2.4.2. 2001-02 시즌

그리고 다음 해, 안정환은 임대 신분에도 불구하고 등번호 10번을 달게 된다. 당시 등번호 10번이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팀의 에이스가 주로 다는 번호로, 안정환의 처음 등번호인 8번도 처지는 번호가 아닌 걸 생각하면 코스미 감독의 구상에서는 안정환이 좋은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페루자는 등번호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팀인 것처럼 보였고 그런 팀들이 세계 리그에 적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큰 의미는 없었다. 어쨌든 2001년 6월, 페루자는 안정환의 완전 이적을 현대에게 요청했다. 이적료는 100만 달러에 연봉은 70만 달러. 선 지불한 임대료 40만 달러에 세금 등을 감안하면 2백만 달러를 웃돌게 된다. 안정환도 이 요청을 환영했는데, 애매한 임대 입장에서 완전 이적이 된다면 첫 해 후반에는 거의 주전으로 자리잡았기에 유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적은 무산되었고 안정환은 다시 임대 신분으로 남게 된다.

결국 안정환은 2년차에도 1~4라운드까지만 어정쩡하게 출장하고 한참을 벤치만 달구다가 18분, 8분, 33분, 11분, 1분 생색내기 수준으로 출전을 했다. 이때 17라운드에 1분 출전한 이후 다시 2경기 벤치를 달군 안정환은 절치부심이라도 했는지, 20라운드와 21라운드에 폭풍 활약을 하여 2연속 경기 MotM에 뽑히게 된다. 하지만 그 다음 라운드부터 다시 벤치에 앉게 된 안정환은 교체 출장을 이어나가다 2002 한일 월드컵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페루자는 이미 안정환을 라치오로 보내기로 가계약을 맺은 상태였다고 한다.[10] 참고로 2001-02 시즌의 라치오는 리그 순위가 6위, 페루자는 8위였다. 2002 한일 월드컵에 히딩크호에 승선한 안정환은 히딩크의 주문인 활동량과 체력을 키웠고, 당시 오노 사건으로 국민 감정이 고조된 미국과의 경기에서 헤딩 동점골을 넣더니 마침내 16강에서 당시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이탈리아를 골든 골로 침몰시킨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안정환과 주변 사람들은 이 활약으로 모든 고생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이탈리아의 스쿼드는 역대 최강 수준이었고, 그 이탈리아의 세리에 A에서 뛰는 안정환이 카테나치오를 뚫고 말디니를 상대로 헤딩을 따내 부폰을 상대로 골든 골을 넣었으니. 당연히 이탈리아로 돌아가면 크게 평가를 받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11]

안정환의 골든 골로 이탈리아가 16강에서 탈락하자, 가우치 구단주와 코스미 감독, 페루자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축구계는 공황에 빠졌다. 절정을 달리던 이탈리아의 전력도 전력이거니와 한국은 역사적으로 그리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팀이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축구를 한국보다 훨씬 사랑하고 가까이하는 나라인 데다가, 리그 수준도 천양지차인 만큼 커다란 충격을 입고 자존심이 상할 만한 상황인 것도 맞았다. 가우치 구단주는 그 충격에 헤어나오지 못한 채 이탈리아 공영 방송에서 안정환에 대해 국민 감정까지 빌어 "입단 당시 그는 샌드위치 사먹을 돈도 없는 길 잃은 염소 신세"라며 "팀에선 하는 일 없이 이젠 돈방석에 앉았으며 월드컵에선 이탈리아 축구를 망쳤다"라고 말하며 엄청난 인신 모독을 퍼부었고, 당장 안정환을 방출할 것이며 그러한 배신자에게 결코 급여를 지불할 생각이 없다고 거품을 물었다. 페루자 구단에서는 안정환에게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마라, 오면 이탈리아 훌리건 마피아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라는 경고를 할 정도였으며[12][13], 안정환이 현지 적응을 위한[14] 수단으로 1년 연봉을 퍼부어 구입한 고급차는 이탈리아 훌리건에게 완전히 박살났고, 이탈리아에서 짐을 정리할 때도 아내 이혜원이 대신 가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대로 자존심이 상할 만한 일인 건 맞지만 명색이 유명 리그의 구단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편협하고 소인배적인 행보였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안정환의 몸값이 10배[15]가 뛰었다는 소식이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일본 등의 언론에 나자 가우치의 아들 알레산드로 단장은 해외축구 사이트 사커리지와 SBS 뉴스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직접 사과와 해명을 했다. 코스미도 충격에서 벗어나 자신의 실수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정환은 이미 화도 났고 두렵기도 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안정환의 에이전트인 이플레이어의 안종복은 안정환에게 이빨을 까며 페루자는 놔두고 자기들끼리 이적을 진행하자고 말했다. 이런 사고가 가능했던 건 안정환은 원래 페루자에 임대가 되어 있었고 임대 기간이 곧 끝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선 협상권은 계약할 때부터 페루자에 있었던 데다 페루자는 냉정을 찾자마자 바로 거래 조약에 있는 완전 이적금을 부산 아이콘스 측에 보내 안정환을 완전 이적시켰다. 물론 부산 측은 이미 기간이 지났다며 생깠지만 그들의 기대와 는 달리 씨알도 먹힐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안정환이 이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산과 안종복은 페루자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안정환이 자신들의 선수라며 절대 복귀시킬 수 없다고 말했고, 안정환은 안종복만 믿고 있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훌리건의 난동 등으로 완전 충공깽에 빠진 상태라 어떻게든 이탈리아에서 탈출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물론 페루자도 그럼 세리에 A가 아니라 프리미어 리그로 이적시켜주겠다고 했지만, 안종복은 이를 씹고 프리미어 리그의 블랙번과 단독으로 협상을 진행했다. 한편 페루자도 런던으로 사람을 보내 안정환과 접선하려고 했지만 결국 안정환을 만날 수 없었고, 빡친 가우치는 이탈리아 축구 협회에 도움을 요청하여 제소에 들어갔다. 또한 이적 기간이 끝나기 전에 안정환을 이적시키기 위해 볼튼과 협상을 진행했다.

결국 영국에선 같은 날에 안정환의 이적 확정 뉴스가 2개가 뜬다. 하나는 안종복이 진행한 블랙번행이고, 또 하나는 페루자가 진행한 볼튼행이었다. 결국 2002 한일 월드컵으로 EPL은 물론이고 파리 생제르맹이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등 세계 유수 클럽의 이적 제의가 있던 안정환의 상품 신뢰성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블랙번조차 페루자가 부담스러워 거스 히딩크의 추천서에도 불구하고 워크퍼밋이 안 나왔다는 말로 안정환의 이적을 무산시켰다.[16]

결국 이적 시장 데드라인이 끝나고 안정환을 파는 데에 실패한 가우치는 분노하여 FIFA에 국제 소송을 제소한다. 결국 FIFA는 일주일 만에 페루자의 손을 들어주는데, 더 가관인 건 부산과 대한축구협회는 그 일주일 동안 안정환을 도와주기는 커녕 손가락이나 빨며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애당초 질 줄 뻔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부산 측에서는 일본 스포츠 매니지먼트 업체인 프로페셔널 매니지먼트(PM)에[17] 안정환의 소유권을 고작 150만 달러에 훌러덩 넘겨버렸다. 이 사건으로 안정환은 한국 돈으로 36억 원의 빚을 지게 되고, 안종복은 에이전트 자격 영구 박탈만 받고 입을 쓱 닦았다. 결국 순식간에 국제 미아에 36억 원의 빚쟁이가 된 안정환은 PM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PM은 부산과 페루자에게 추가로 돈을 더 주고 36억 원의 빚을 청산한 다음 안정환의 소유권을 완전히 사서 3년 동안 J리그로 임대보낸다. 이 계약에는 시미즈로의 임대는 물론이고 광고 수익과 예능 출연 등의 수입을 모두 갖기로 한 계약이었다. PM은 이 3년을 통해 100억 원의 이익을 창출했다고 한다.

안정환은 훗날 이 사건을 굉장히 후회한다고 술회하며 페루자로 돌아갔어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지나치게 순진했던 안정환과 임대 기간 종료의 절묘한 시간 차이, 세리에 A 임대 선수가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든 골이라는 드라마와 자기 나라를 상대로 골을 넣었다고 길길이 날뛴 가우치의 소인배적인 행보, 갑작스러운 몸값 상승을 두고 페루자와 부산의 이적료를 둘러싼 진흙탕 싸움, 그리고 안종복의 무책임이 빚어낸 촌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가우치는 전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으며, 외국에서도 이 사건을 'Ahn-gate(안느 게이트)'라고 부르면서 가우치 하면 안정환 방출 사건이 꼭 따라오게 된다.[18]

하지만 이탈리아 여론이 꼭 안정환에게 적대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축구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는 이탈리아인 만큼 역대급 스쿼드를 상대로 골을 넣은 안정환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많았으며, 결국 안정환은 이 사건으로 이탈리아에 학을 떼서 끝끝내 이탈리아로 가지 않았지만 안정환이 이적할때면 늘 세리에 A 명문 구단의 오퍼가 들어오게 된다.[19][20]

더불어 안정환을 쫓아낸 루치아노 가우치는 1999년부터 남자 프로팀에 세계 최초로 여자 감독을 앉히거나, 여성 선수를 기용하겠다고 땡깡을 부리는가 하면[21]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22]의 아들인 알 사디 카다피를 영입시켰다가 방출해 버리는 등[23] 수많은 기행을 저질러대서 안 그래도 미친 구단주로 악명이 자자했는데 2005년 이후엔 파산 사기 및 탈세 혐의로 아들 알레산드로, 리카르도와 같이 범죄자가 되어서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피하는 추태를 보이다가 결국 부자가 사이좋게 수감당하는 완벽한 국제 범죄자로 2020년 2월 2일에 사망해 버리면서 최후까지 페루자에게 지워지지 않을 흑역사를 새겨버린지라 안정환이 미친 범죄자 1명에게 휘말려 인생을 망쳤다는 여론이 조성된 것도 크다. 국내 사이트에서 루치아노 가우치가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대다수의 국내 축구 팬들이 안정환의 축구 인생을 망친 쓰레기 자식 잘 죽었다라는 등 각종 패드립 댓글로 도배되었을 정도.

이러한지라 훗날 이탈리아의 언론과 몇몇 감독들도 "상품성 때문에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방출당해 외국의 하위 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가 있다."며 안정환을 언급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오라는 얘기를 넌지시 했다.

2001-02 시즌: 17경기 1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15 4 11 1 0
코파 이탈리아 2 1 1 0 0
합계 17 5 12 1 0

2.4.3. 세리에 A 시절의 평가

[기록출처] Rai sport , La Gazzetta dello sport , Kataweb , Lega Calcio
(00/01)SEASON 선발=9 교체=6 명단=25 제외=9
1R-선발출전 10R-명단포함 19R-명단제외 28R-선발출전
2R-교체출전 11R-명단제외 20R-명단제외 29R-선발출전
3R-명단포함 12R-명단제외 21R-명단포함 30R-선발출전
4R-명단제외 13R-명단포함 22R-명단포함 31R-선발출전
5R-명단제외 14R-교체출전 23R-교체출전 32R-선발출전
6R-명단제외 15R-선발출전 24R-명단포함 33R-교체출전
7R-명단제외 16R-교체출전 25R-선발출전 34R-선발출전
8R-명단제외 17R-명단포함 26R-명단포함
9R-명단포함 18R-명단포함 27R-교체출전 =(15P/4G/1A)
[출전경기 평점 및 기록] ㅡ 라이/가제타/카타웹 순
1R -- (무) 레체[H] 5 / 5 / 5.5 = 54분
2R -- (패) 라치오[A] - / - /- = 18분
14R - (패) 브레시아[H] - / - / - = 8분
15R - (패) 유벤투스[H] 6 / 6.5 / 6.5 = 풀타임
16R - (승) 레지나[A] 6 / 6 / 6 = 26분
23R - (무) 나폴리[A] 6 / 6 / 6 = 22분
25R - (패) 볼로냐[A] 5.5 / 6 / 5.5 = 60분
27R - (무) 아탈란타[H] 6.5 / 7 / 7 = 48분/1G/MOM
28R - (승) 바리[A] 7.5/7.5/7.5 = 풀타임/1G/1A/MOM
29R - (승) 밀란[H] 6 /6.5 / 6 = 70분
30R - (무) 우디네세[A] 7 / 7 / 7 = 81분/2G/MOM
31R - (무) 브레시아[H] 6 / 6.5 / 6.5 = 풀타임
32R - (패) 유벤투스[A] 5.5 / 6 /6 = 풀타임
33R - (무) 레지나[H] 6 /6 / 6 = 37분
34R - (패) 베로나[A] 6 /6.5 /6 = 76분
※ 통계 평균평점 6.230 (라이 6.076, 가제타 6.346, 카타웹 6.269합산)
※ 총 860분 소화, 경기 MVP 3회, 풀타임소화 4회, 시즌통계 유효슛팅률 3위 (43%), 28R 주간베스트11 선정, 30R 주간 베스트11 선정
※ 비고 (명단제외 사유)
11R~12R : 국가대표팀 차출 (한일전) 및 약혼식일정 때문에 방한
19R~20R : 국가대표팀 차출 (UAE 두바이컵 - 덴마크전)
(01/02)SEASON 선발=4 교체=11 명단=28 제외=6
1R-교체출전 10R-교체출전 19R-명단포함 28R-명단포함
2R-선발출전 11R-명단제외 20R-교체출전 29R-명단포함
3R-선발출전 12R-교체출전 21R-선발출전 30R-교체출전
4R-교체출전 13R-명단포함 22R-명단포함 31R-명단포함
5R-명단포함 14R-교체출전 23R-교체출전 32R-명단제외
6R-명단포함 15R-교체출전 24R-선발출전 33R-명단제외
7R-명단포함 16R-명단포함 25R-명단포함 34R-명단제외
8R-명단제외 17R-교체출전 26R-교체출전
9R-명단포함 18R-명단포함 27R-명단제외 =(15P/1G/1A)
[출전경기 평점 및 기록] ㅡ 라이/가제타/카타웹 순
1R -- (패) 인테르[A] 6 / 6 / 6 = 18분
2R -- (무) 라치오[H] 6 /6.5 / 6.5= 풀타임
3R -- (무) 베로나[A] 6 / 6 / 6 = 77분/1A
4R -- (패) 우디네세[H] - /- / - = 12분
10R - (패) 파르마[A] 6 / 6 / 6 = 18분
12R - (패) 키에보[A] - / - / - = 8분
14R - (승) 베네치아[H] 6 /6.5 /6.5 = 33분
15R - (패) 볼로냐[A] - /- /- = 11분
17R - (승) 피오렌티나[A] - / - /- = 1분
20R - (승) 베로나[H] 7 /7.5 / 7 = 40분/1G/MOM
21R - (무) 우디네세[A] 6.5 / 6.5 / 7 = 풀타임/MOM
23R - (승) 레체[H] - / - / - = 15분
24R - (패) 로마[A] 5.5 /5 / 5.5 = 67분
26R - (패) 피아첸자[A] - /- / - = 14분
30R - (패) 유벤투스[H] 6 / 6 /6 = 16분
※ 통계 평균평점 6.210 (라이 6.120, 가제타 6.230, 카타웹 6.280합산)
※ 총 511분 소화, 경기 MVP 2회, 풀타임소화 2회, 20R 주간 베스트11 선정, 20R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선정(RAI UNO), 20R 월간 베스트골 3위기록(1월), 평균평점 용병 150명중 9위기록(용병랭킹)
※ 비고 (명단제외 사유)
11R : 국가대표팀 차출 (세네갈 평가전, 크로아티아 평가전)
27R~29R : 국가대표팀 스페인전지훈련 합류 (튀니지 평가전, 핀란드 평가전)
31R~34R : 월드컵대표팀 독일전지훈련 합류 (코스타리카 평가전, 스코틀랜드 평가전, 잉글랜드 평가전)
※ 이탈리아웹 평점
2000-01 시즌 : 5 - - 6.5 6 6 5.5 7 7.5 6.5 7 6.5 6 6
2001-02 시즌 : 6 6 6 - 6 - 6 - - 7 6.5 - 5.5 6

출장했던 30경기 중 포워드로 올라가서 뛴 경기는 단 6경기, 나머지 경기는 모두 투톱 밑에서 중앙 공격형미드필더로 뛰었다.

안정환 빅리그 시절 serie"A 현지 평점 통계

안정환은 페루자에서 2000-01 시즌 15경기 4골 1어시, 2001-02 시즌 15경기 1골 1어시의 성적을 거두었다.

안정환은 2000년 페루자 이적 이후 클럽 커리어가 다소 부족해 보이는 감이 있다. 이 때문에 이를 두고 안정환의 플레이를 직접 목격하지 못한 축구팬들 사이에서 안정환의 실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제기 되었었다. 그러나, 실제 플레이를 관찰했던 전문가들과 함께 뛰었던 선수들의 증언, 남겨진 영상데이터, 수데이터를 모두 종합한 결과로 보아 안정환은 한국 축구 역사상으로도 손에 꼽을 재능을 지닌 선수 중 한명이었으며, 불행하게도 그의 커리어는 그의 재능을 완전히 대변해주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출장시간대비 MOM 선정횟수
두 시즌동안 안정환의 페루지아에서의 출장시간은 총 1371분이었는데, MOM에 총 5회 선정되었다. 빅리그 주전 선수들은 한 시즌 2,000분~3,000분 정도 출장하는데, 이들 중 MOM에 6회 이상 선정되는 선수들이 보통 그 리그에서 가장 잘 하는 선수로 인정받고, 3~4회 이상 선정되는 선수들이 각 팀의 에이스 선수로 인정받는다. 당장 21살의 나이에 프리미어리그 볼튼에서 주전으로 뛰며 재능을 입증했던 이청용은 09/10시즌 2,400분여를 뛰며 2회의 MOM에 선정되었고 10/11시즌에는 단 한 차례도 선정되지 못했다.

안정환은 00/01시즌 860분을 뛰며 3회 MOM에 선정되었다. 스스로 가장 경기를 못 했다고 자평하는 00/01시즌에서 겨우 한 시즌 800분여의 작고작은 기회에도 무려 3회나 그 경기에서 가장 잘한 선수로 꼽혔다. 두 시즌을 모두 합하면 1, 300분동안 5회의 MVP에 선정되었다. 말 그대로" ‘나오면 잘 하는데 안 내보낸다.’ '라고 밖에 볼 수 없다."라는 시각도 있는 반면 30경기 출장하여 고작 5골 2어시라는 성적표를 보여준 선수였다는점에서 선수 안정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평가들도 다수였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 안정환 선수가 최전방에서 피지컬적으로 고전했던 부분도 분명했기에 쓰임새에서 분명한 제한이 있었다는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기도 했다.[24]

둘째, 평점.
안정환은 대단히 높은 평점을 받았다. 2000-01 시즌과 2001-02 시즌에서 모두 평균 6점대의 평점을 기록했는데, 세리에A에서 평균 6점대의 선수는 상위 25%에 해당되며, 2001-02 시즌의 안정환의 평균 평점은 150명의 용병 중의 9위에 해당된다. 짧게 주어지는 출전 시간에도 당대 높은 수준의 용병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안정환은 페루자에서 후반 조커로서 게임의 향방을 바꾸는 게임체인저로서 활약했기 때문에 선발 풀타임 선수들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당대 최고 선수들이 모인 세리에A에서 열악한 축구 환경에서 성장한 고작 24살의 빼빼마른 청년이 보인 퍼포먼스는 절대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2000-01 시즌 안정환이 시간대비 득점률로 리그 2위였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안정환은 215분당 1골인데, 크레스포가 당시 26골을 넣었고 셰브첸코가 24골을 넣었기 때문에 두 선수가 아무리 경기를 많이 뛰어도 시간대비 득점률은 안정환보다 높다. 그래도 400여명의 선수 중에서 10위 안에 든다.

셋째, 리그 내 평가
월드컵을 통해 이름이 세계축구계에 널리 알려지기 전에도 이탈리아 축구팬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선 그가 재능있는 선수임을 진작 알아보았으며, 그를 영입하고자하는 팀들의 위상 역시 우디네세, 라치오 등 상당히 뛰어났다.

3. 시미즈 S펄스

파일:/image/038/2003/12/28/goldriver25200312281704250.jpg
2002-2003
통산 54경기 26골

3.1. 2002 시즌

소송에서 패소하고 빚쟁이가 된 안정환은, 결국 돈의 흐름에 따라 가장 많은 돈을 제시한 J리그 시미즈 S펄스로 이적한다.[25] 이 당시 일의 대해 안정환은 훗날인 2012년 은퇴 기자회견에서 블랙번 로버스와 계약을 체결했지만, 소유권 문제로 워크퍼밋이 발급되지 않았고, 그때 체결한 계약서는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유는 그때 블랙번으로 이적했다면, 자신의 축구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 '계약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한 거니 재능이나 축구 인생이야 안타깝지만 자업자득'이라고만 보기에는 구단주의 병크가 너무 심각했다. 더군다나 이미 현지에 있던 집에 폭도들이 난입해서 물건들을 부수며 난리를 치고 가족살해 협박까지 하는데 누가 페루자로 돌아가고 싶어했겠는가?"란 측의 의견도 있고, "구단주의 병크가 심각한 거야 심각한 거고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안정환의 이적 당사자인 페루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블랙번으로 가야 될 이유도 없었다. 그냥 다른 데 가면 될 일이지, 굳이 본인이 가고 싶은 블랙번을 택한 건 안정환이다. 자업자득이라고까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안정환만 구단주의 강짜에 억울하게 희생된 재능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라고 하는 쪽도 있다. 물론 안정환이 비판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26] 그래도 안정환의 축구 인생을 불쌍하다 여기고 페루자와 부산을 비판하는 쪽이 대부분이다.

J리그 무대에서 6개월간 컵대회 포함 15경기동안 7골을 터뜨리며 맹활약했다.

2002 시즌: 15경기 7골
대회 경기 득점
J1리그 10 3
J리그컵 1 0
천황배 3 2
AFC 챔피언스 리그 예선 1 2
합계 15 7

3.2. 2003 시즌

2003년, 시미즈와 반 년간의 계약이 끝난 안정환은 다시 해외진출을 모색한다. 그러나 조건적인 문제 탓이었는지 별로 흥미를 드러내는 구단이 없어서 시미즈에 잔류하게 된다. 팀은 16팀 중 11위를 차지하지만, 안정환은 컵대회 포함 19골로 구단 최고 득점자를 차지하면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2003 시즌: 39경기 19골
대회 경기 득점
J1리그 28 11
J리그컵 4 2
천황배 4 3
AFC 챔피언스 리그 3 3
합계 39 19

4. 요코하마 F. 마리노스

파일:/image/076/2004/07/07/47h01004.jpg
2004-2005
통산 38경기 18골

4.1. 2004 시즌

좋은 활약을 인정받았는지 안정환은 이듬해 2004년, 우승팀인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하게 된다. 팀은 전기리그에서 우승을 한 뒤, J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우라와 레즈를 꺾고 2003년 우승에 이어서 2연패를 달성한다. 이 때 안정환은 25경기 출전, 12골을 넣으며 팀내 최다 득점자를 차지하는 준수한 활약을 보이며 요코하마 F. 마리노스 J리그 우승에 기여하였다.

사실, 요코하마 F. 마리노스는 안정환과 함께한 시절 이후, 디시 리그우승을 할 때까지 15년이 걸렸으나 어차피 안정환이 오기 전 해에도 우승한 팀이었고, 10골씩 넣은 차점자들도 두 명씩 있으며 안정환도 전반기에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가 후반기 골절로 인해 페이스가 떨어지게 되면서 우승을 이끌었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준수한 활약을 한 것도 사실이다.

2004 시즌: 29경기 14골
대회 경기 득점
J1리그 25 12
J리그컵 1 0
천황배 1 1
AFC 챔피언스 리그 예선 1 1
J리그 슈퍼컵 1 0
합계 29 14

4.2. 2005 시즌

2005년에도 9경기 4골로 맹활약하던 중 프랑스 리그 1 FC 메스의 오퍼를 받고 유럽으로 다시 진출하게 된다.

2005 시즌: 9경기 4골
대회 경기 득점
J1리그 9 4

5. FC 메스

파일:attachment/Ahn_Metz.jpg
2005-2006
통산 18경기 2골

5.1. 2005-06 시즌

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이적료를 모두 갚은 후 계약이 끝난 2005년 여름에 높은 연봉을 마다하고[27] 프랑스 르샹피오나 FC 메스로 이적하였으나 부실한 팀 전력으로 인해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이때 메츠의 경기를 보면 9-0-1 포메이션이 뭔지 알 수 있다.

참고로 당시 메스가 얼마나 막장이었냐하면, 16라운드 시점에서 1승 6무 9패로 리그 19위였다. 그 시점에서 안정환은 6번 선발 출장에 3번 교체 출전을 했고, 1골만 넣은 상태였다. 프랑스 축구 전문지조차 팀이 막장이고 출장 시간도 적으니, 빨리 팀을 나가 반 시즌이라도 임대하려는 팀에 이적하는 게 훨씬 낫다고 조언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팬들은 실패한 이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메츠에서의 계약은 1년이었는데, 원래 구단은 2년짜리 계약을 추진했다. 하지만 안정환은 1년 계약을 원했는데, 프랑스에 계약한 것 자체가 독일 월드컵 문제로 현지 적응을 미리 꾀했기 때문이다. 1년 계약이 끝나면 영국으로 갈 생각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안정환은 프랑스 리그 1에서 2005년 7월 29일 첫 경기부터 2006년 1월 29일까지 총 24경기에서 18경기 출장했고, 10번 선발 출장했으며 5번 풀타임으로 뛰고, 골은 PSG와의 경기에서 1골, FC 소쇼와의 경기에서 1골을 넣었다. 출전 시간은 총 1007분이었다.

2005-06 시즌 (메스): 17경기 4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리그 16 10 6 2 0
쿠프 드 프랑스 1 0 1 0 0
쿠프 드 라 리그 1 0 1 0 0
합계 18 10 8 2 0

6. MSV 뒤스부르크

파일:attachment/Ahn_Duisburg.jpg
통산 12경기 2골 1도움

6.1. 2005-06 시즌

2006년 초, 독일 분데스리가 MSV 뒤스부르크로 이적하나 몸상태가 워낙 좋지 못해 출전을 많이 하지 못하였다. 10년 뒤 마리텔에서 밝힌 바로는 안정환 자신은 분데스리가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이적하고 싶지 않았으나, 당시 대표팀 수석코치인 핌 베어벡이 월드컵이 독일에서 열리니 독일에서 현지적응을 하고 있으면 월드컵 엔트리에 뽑아 주겠다는 얘기를 했고, 안정환이 수락해서 이적한 것이라고 한다.

이걸 보면 안정환은 월드컵 출전에 목을 걸었던 걸 알 수 있는데, 메츠로 이적한 것부터 시작해서 뒤스부르크에 가기까지의 2년을 전부 독일 월드컵을 고려해서 이적하였다. 상식적으로 본인에게 안 맞는 리그인 분데스리가를 월드컵 보내준다는 이유로 간 것이 단순히 생각하기엔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안정환에게 있어서 국대는 클럽보다 훨씬 중요했던 걸로 보인다. 마리텔에서도 안정환은 나라를 위해서 뛰었다라는 말을 자주하고, 일본에서도 안정환이 애국심이 굉장히 강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가치 평가 기준이 국대에 맞춰 있을 정도다.

당시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체력적인 문제가 심각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도 안정환은 이제 국가대표에서도 풀타임 못 뛴다, 후반기 조커다 등의 운운을 했고 실제 딕 아드보카트 감독도 안정환을 한 방을 노리는 공격수로 썼고, 2010년 월드컵 때는 더욱 더 심해져서 허정무 감독이 안정환은 중~후반 20분 정도 남겨놓을 때나 쓸 수 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하지만 세간의 시선과는 다르게 2006 FIFA월드컵에서는 토고전에 후반 역전 중거리 슛을 넣는 등[28][29]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이후 에이전트사의 미숙한 일처리로 인해 6개월 동안 무적신세가 되었고, 이후 블랙번이나 매우 적극적이었던 스코틀랜드의 허츠 구단 같은 곳에서 오퍼가 있었음에도, 나이가 30줄이 되고 기량도 하락하면서 유럽 생활을 고집하기보다는 가족과의 생활을 더 중시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며 2007년 K리그로 복귀하여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했다.

분데스리가에서는 2006년 1월 28일 첫 경기부터 2006년 5월 13일의 마지막까지 총 15경기에서 12경기 출장했고, 3번 선발 출장에 1번 풀타임으로 뛰며 총 420분을 뛰었다. 기록은 2골 1도움으로,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1도움, 베르더 브레멘과 빌레펠트와의 경기에서 각각 1골을 넣었다.

사실 안정환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뛸때 부상 등의 문제를 계속 겪었기 때문에 저 정도의 출장시간은 주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나쁘다고 하기도 어렵다. 공격포인트 또한 약팀인 걸 생각해 보면 썩 나쁘지는 않긴 하나 당시 뒤스부르크나 메스의 팬들조차 몇 년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어버릴 정도의 기록이기는 하다. 위의 기록에서 프랑스 리그1과 분데스리가의 시간이 겹치는 2006년 1월 28일에 이미 안정환은 분데스리가에서 첫 번째 경기에 나갔고, 2006년 1월 29일의 프랑스 리그1 마지막 경기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2005-06 시즌 (뒤스부르크): 12경기 2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분데스리가 12 3 9 2 1
합계 12 3 9 2 1

7. 수원 삼성 블루윙즈

파일:external/c2down.cyworld.co.kr/download?fid=64224689c97ede8a5d16468edf30ca8d&name=%BE%C8%C1%A4%C8%AF%20%BC%F6%BF%F8.jpg
통산 26경기 5골

7.1. 2007 시즌

수원 삼성 블루윙즈 입단 초기에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부활의 기미가 보였으나, 노쇠한 기미를 드러내며 주춤했다. 2군에서 연습경기를 하던 도중 FC 서울 서포터에게 가족에 대한 인신공격을[30] 당한 후, 경기장을 빠져나와서 항의를 하다가 퇴장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안정환은 벌금 1천만 원 징계를 받았다. 일부 언론에서는 안정환을 깠지만, 사정을 다 안 팬들은 그 FC 서울 서포터들을 그야말로 가루가 되도록 깠다고 한다. 그런데 FC 서울의 서포터인 수호신들은 안정환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31] 특히, 네티즌에 지목당한 여자 서포터가 수호신의 간부로 활동한 적이 있어 반응이 더 안 좋아졌다.

이로 인해 전국의 수많은 안느빠들을 적으로 돌리게 됨은 물론이고, 가뜩이나 연고이전으로 욕을 먹는 FC서울의 서포터인 수호신은 덩달아 전국의 서포터들에게 그야말로 쌍욕을 쳐먹게 되었다. 또한, 수원의 서포터 그랑블루를 포함한 다른 팀의 서포터들도 "감히 한국축구의 영웅인 안정환을 까다니!"라고 말하며 공공의 적 이미지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수원의 서포터인 그랑블루는 안정환을 위로하기 위해서 신문에 안정환을 응원하는 광고를 냈다. 참고로, SBS 뉴스도 가루가 되도록 까였는데, 안정환이 욕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안정환의 항의를 '삐-'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안정환은 해당 건을 부인에게는 경기 중의 시비문제로 벌금을 받은 것처럼 이야기했고,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은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사실, 부인과 연애하던 시절에 안정환은 좀 더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훈련을 무단이탈했다 벌금징계를 받았던 전적이 있었을 정도로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가족, 더 나아가 아내를 가지고 성적인 모욕과 패드립을 던졌으니 그 화가 오죽했을까 싶었다.

여담으로, FC 서울의 클럽송을 제작한 바 있는 가수 신해철은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인연이 있어서 서울을 응원했으나 앞으로는 절대로 응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그 정도로 축구계를 넘어 전 사회적으로 파장이 심대했던 사건이었다.

수원에서 기록한 성적은 26경기 5골. 수원이 안정환에게 몸값으로 지불한 액수가 10억가량으로 추정되는 만큼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다. 결국 차범근 감독은 안정환과 재계약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마침 2008년 부산 아이파크 황선홍 감독이 부임하면서 안정환에게 친정팀 복귀를 권유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몸값 때문에 협상이 지지부진했다. 부산은 최대 4억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안정환 측은 10억을 요구하면서 다시 해외진출설까지 흘러나왔다. 결국 안정환은 6억, 계약기간 1년에 친정팀 부산으로 이적을 하게 된다.

2007 시즌: 26경기 5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K-리그 15 6 9 0 0
FA컵 1 1 0 0 0
삼성 하우젠컵 10 8 2 5 0
합계 26 15 11 5 0

8. 부산 아이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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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통산 28경기 6골 3도움
1998-2002, 2008
통산 116경기 50골

8.1. 2008 시즌

6년만에 돌아온 친정팀인 부산 아이파크에서는 경기력이 매우 좋아졌으며 주로 4-2-3-1 포메이션의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되었다. 이 때 부산의 골 결정력은 부실했는데, 안정환이 찔러준 킬패스로 인한 골키퍼 1:1 찬스를 잘 살렸으면 안정환이 08년 K리그 도움왕이 됐을 거라는 우스개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팀 상황이 좋지도 않은데 더럽게 공 끌고 접어댄다는 의견도 있었다. 후반기에 팀 전력 보강이 됐을 때에는 연이은 부상으로 몇 경기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기 부산은 10년 전 로얄즈 왕조 시절의 팀이 아니었다. 계약이 끝난 2009년 안정환과 재계약을 천명했으나 부산이 연봉으로 제시한 2억 5,000만원 거부하면서 수차례 협상이 모두 결렬되었다. 이 액수를 놓고 넷상에서도 말이 많았다. 안정환 네임밸류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낮다는 측과 부산 살림살이에 저 정도면 최고 대접이란 측이 팽팽히 맞섰다.[32]

이때 안정환은 좀 미묘한 상태였는데, 수원에서 부산으로 이적할 때는 이적료가 발생했다. 때문에 부산은 안정환을 데려오기 위해 수원에 안영학을 내주는 트레이드를 해야했다. 반면 부산에서는 FA신분을 획득했기 때문에 자칫 부산은 다른 팀 좋은 일만 하고 끝날 가능성이 다분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안정환은 팀을 이탈하고 중국 슈퍼 리그, 일본 J리그, 중동클럽으로부터 오퍼를 받았으나 안정환은 J리그의 오퍼를 거절하고 다롄 스더(중국)로 이적한다.

2008 시즌: 28경기 6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K-리그 19 16 3 4 3
FA컵 1 1 0 0 0
삼성 하우젠컵 8 5 3 2 0
합계 28 22 6 6 3

9. 다롄 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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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11
통산 61경기 18골 6도움

9.1. 2009 시즌

2009 시즌 다롄 스더에서 처음에 3개월 단기 계약으로 뛰다가 이후 계약을 연장하여 2009년도 시즌을 끝낸 상태에서 2010년 말까지 계약을 연장하게 된다. 이때 활약은 절정의 회춘모드로[33], 현지에서 별명이 다롄의 왕(大連的王). 09 시즌 단기 계약에는 6골 2도움이라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2009 시즌: 26경기 6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중국 슈퍼 리그 26 19 7 6 2
합계 26 19 7 6 2

9.2. 2010 시즌

2010 시즌에는 2009시즌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미드필더로 활약 하면서도 두자리수 골 기록인 10골 4도움을 갱신하며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준다. 이런 활약 속에 다롄은 시즌 3위까지 올라가서 아시안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기대해볼만했으나 안정환이 상대 수비의 태클로 무릎에 부상을 입어 이후 경기들을 쉬었는데 다롄이 이후 부진에 빠지면서 결국 리그 6위로 마무리를 해야했다. 거기다가 리그 최고 용병 1위에 선정되는 포스를 발휘하기도 한다.

2010년, 다롄과의 계약이 만료된 상태에서 당연히 다롄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았으며 재계약 K리그 복귀 혹은 스페인 진출을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 다롄과 1년 더 재계약을 채결하였다.

무엇보다 안정환 본인이 마음 편히[34] 축구할 수 있다는 점이 작용한 듯 싶다. 이때 쉬밍 구단주도 안정환을 좋아해서 자기 돈으로 최고급 저택을 사서 안정환에게 선물로 줬을 정도였으며 현지에서의 인기도 매우 높아서, 훗날 인터뷰에서 밝히길 자신이 어디에서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도 다 언론에서 보도할 정도였다고 언급했다.

이 시기에는 차를 마시는 취미가 생겨서 여러 차모임에 참석하고[35] 원없이 싼 차부터 아주 비싼 차까지 갖가지 차를 실컷 마셔봤다고 고백했다.

2010 시즌: 20경기 10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중국 슈퍼 리그 20 18 2 10 4
합계 20 18 2 10 4

9.3. 2011 시즌

2011년에는 벤치에 앉는 시간이 길어지며 지난 2년보다는 아쉬운 활약을 펼쳤다.

2011 시즌: 15경기 2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중국 슈퍼 리그 15 6 9 2 0
합계 15 6 9 2 0

10. 현역 은퇴

2012년 1월 19일, 성남 일화 천마의 유니폼 발표회 때 당시 성남 감독이었던 신태용 감독이 2002년의 무직인 국가대표 삼인방(안정환, 김남일, 송종국) 중 한 명을 영입하겠다고 말했는데 이 한 명이 안정환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발언 이전에도 안정환 영입과 관련한 물밑접촉이 있었던 걸로 보였지만 1월 26일, 안정환의 에이전트사에서 안정환의 은퇴 결정을 발표하면서 팬들의 기대는 안타까운 마무리를 지었다. 1월 31일 공식적으로 은퇴 기자회견을 펼치면서 한국 축구의 한 역사를 그린 공격수의[36] 여정은 13년을 끝으로 그렇게 막을 내렸다.[37]

[1] 마치 로베르토 바조를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인 말총머리로 대표되는 시절로, KBS 예능프로 김승우의 승승장구에서 밝히길 미용실 갈 시간이 없고 귀찮아서 기른 머리라고 한다. 나중에 자르려니 구단에서 기를 쓰고 반대했다고 한다. 이미 트레이드 마크가 된 상태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내와의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갈 때는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한다. [2] 우측은 당시 신인왕을 차지했던 이성재 [3] 컵 대회까지 포함할 시 총 35경기 21골 [4] 서양인들한테도 충분히 먹히는 외모였다. 영국에서 뽑은 월드컵 미남 축구 선수 3위였다. 1위는 베컴, 2위는 피구. 호주에서는 4위로 뽑혔다.반면에 이천수는 못생긴 축구선수 2등을 했다 [5] 그 당시에 황선홍, 홍명보, 유상철 등은 J리그에서 뛰고 있었다. [6] 축구해설가 서형욱의 저서 <유럽축구여행>에 따르면 저자는 2001년 2월 라치오전 관전 당시 현지 토박이 노신사로부터 "요새 경기장에 잘 안와서 선수 이름을 다 모른다"느니, "나카타 넘버 원" 등을 들으면서 일본인으로 오해받았고, 동네 꼬마들로부터 '원숭이'라고 멸시당하고 돌을 맞을 뻔했다고 한다. [7] 그나마 얼굴이 잘생겨서 다행이었을 것이다. [8] 이는 출전경기에 따른 임대료지급 때문일 것이다. [9] 이동국 항목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동국의 독일 진출도 비슷한 난항을 겪으며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동국은 부상 회복기에 6개월 임대됐을 뿐이라 팀에 대단한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했고 안정환과 달리 독일 선수들과 어울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내년의 구상에도 포함하는 등 안정환처럼 나름대로 코치진에서는 좋게 봤던 듯하나 이동국은 안정환과 달리 해외에서 성공해야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부족해서 본인이 그냥 돌아오게 된다. [10] 2연속 MotM을 받고도 출전 시간이 줄어든 건 이와 연관이 없진 않을 것이라는데, 페루자는 이런 장난질을 부리기에는 UEFA컵 진출이 충분히 가능한 순위권이었다. 팬들의 망상이다. [11] 안정환이 골을 넣고 운 건 단순히 골든 골을 넣어서가 아니라 임대 생활과 인종차별의 설움을 딛고 드디어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월드컵이고 그것도 자국에서 열리는 데다가 8강 진출인 만큼 그 정도까지 추측하는 건 오버가 아닐까 싶다. [12] 이게 단순한 협박인지 진지한 충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안정환은 구단에서 직접 온 얘기였기 때문에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인 걸로 보인다. [13] 만약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을 넣었다는 이유만으로 안정환에게 생명의 위협을 할 경우 이탈리아도 러시아처럼 중징계를 받을 수도 있었다. 겨우 골을 넣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선수의 목숨을 위협하는 건 엄연한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 행위나 마찬가지다. [14] 당시 이탈리아 내에서의 한국의 인지도는 진짜 듣보잡이라 한국의 영상이 나올 때는 북한의 영상이 대신 나올 정도였다. 안정환이 때 빼고 광을 내는 데 돈을 많이 쓴 건 비슷한 급으로 놀아야 동료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정환은 동료들이 패스를 안 하고 인종차별을 하는 등 적응기에는 마음 고생이 굉장히 심했다고 말했다. [15] 안정환이 처음 페루자에 임대로 올 때 40만 달러였으며, 한 시즌을 뛰고 완전 이적에 이적료 100만 달러와 연봉 70만 달러 제안이, 그리고 다시 한 시즌이 지나려는 2002년에 블랙번과 350만 계약을 맺고 FIFA의 벌금이 400만 달러였으니 안정환은 정말 2년 만에 몸값을 10배 불린 게 된다. [16] 안정환의 소속이 불분명해서 영국 노동청이 워크퍼밋 발행을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2013년에 안정환이 김현회와의 칼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진짜 이적 실패 이유는 블랙번이 페루자의 행보를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7] 파칭코 판매업체 필즈(주)의 자회사로, 2005년 토탈 워크아웃 및 J.사카자키 마케팅을 합병하여 '재팬 스포츠 마케팅'이 됐다가 2011년에 피트니스클럽 사업부문을 신규법인 토탈 워크아웃 프리미엄 매니지먼트로 양수한 후 청산됐다. [18] 해외 일간지에서도 '한국 축구 영웅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을 넣었다고 해고당해'(sacked, perugia as korea's goal hero as italy blames fifa conspiracy for shock exit)라는 문구가 1면에 실렸다. 안정환의 골든 골도 해외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월드컵 20대 충격골(20 Goals That Shook the World)에 나온다. [19] 대표적으로 FC 메스로 이적할 때 우디네세와 리보르노의 오퍼가 들어왔었다. 그 중에 우디네세는 당시 감독이 안정환의 페루자 시절 감독이었던 코스미였던지라 특히나 영입을 원하는 편이었다. 다만 안정환 항목의 멘탈왕&대인배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우디네세와 리보르노와의 협상 차 이탈리아에 가있을 때 직접 국경을 넘어 8시간 운전해온 메츠 구단주의 정성에 감동먹어서 메츠로 이적했기에 둘 다 결렬이 되었다. [20] 사실 판정 논란 때문에 한국과 심판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는 것과 별개로 자국 팀을 상대로 골을 넣었다고 그 선수를 박대하는 행위 자체가 나라 망신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디에고 마라도나나 그와 같이 이탈리아를 상대할 수 있는 월드컵 진출팀 국가대표급 선수도 언제든지 방출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선수들이 이탈리아로 갈 리가 있겠는가? 거기다 구단주가 인종차별성 발언까지 했는데 이런 논리대로라면 나카타 히데토시 같이 실력과 상품성이 확실한 선수도 이탈리아로 가지 않을 것이다. [21] 그 선수는 독일의 전설적인 여자축구 선수 비르기트 프린츠다. 여자축구에서 레전드급 선수다. 그러나 어쨌든 여자 선수의 신체적 한계가 남성 프로 선수를 넘을 수 없는 건 자명할 뿐더러, 여자 선수들도 남자 팀에서 뛰라는 제의에 대해 모욕감을 느끼는 게 현실이다. 당장 여자축구를 검색하면 나오듯이 세계랭킹 5위이던 호주 여자 국대팀이 호주 중고교 팀에게 7:2로 대패했거나, 한국 여자 국대팀도 같은 나이 성인 실업팀도 아닌 고교팀이랑 연습 경기를 해도 압도하지 못할 수준이다. 당연히 프린츠는 이 제안을 거절했고 이 일은 지금도 유럽 축구 역사상 역대급 기행 중 하나로 남아있다. [22] 그가 이탈리아 축구의 팬인지라 이탈리아 축구계에선 유명하다. 유벤투스 팬으로 알아주기에 유벤투스가 리비아로 가서 친선 경기도 벌이는가 하면 아예 유벤투스를 사려다가 실패한 적도 있다. 여하튼 유벤투스에 돈을 많이 줘서인지 이탈리아 축구 연맹은 2002년 세리에 A 슈퍼컵을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열기까지 했다. [23] 평가는 3부 리그 수준이라는 평까지 받았다. 오죽하면 카다피의 돈이 많이 들어온 유벤투스조차도 테스트하고 영입을 포기했을까? 거기에 약물 도핑까지 걸려 출전 정지를 당했다. '아무도 막지 못한 선수'로도 유명했는데, 아무도 막을 수 없을 만큼 막강해서가 아니라 아예 막아볼 기회조차 없었다. [24] 결국 나올 때의 활약은 확실하나 경기에 나오지 못했다는 점이 최종적인 평가에 악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기에 온전한 대단히 평가가 어렵고 논쟁이 오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25] 정확하게는 PM이 소유권을 구입해서 시미즈에 임대 형식으로 보낸 것. 이적 후 빚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외향적인 성격이 아님에도 PM과의 계약 때문에 일본 쇼프로에도 자주 출연했다. [26] 안정환 본인도 그때 자신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며 자신의 잘못도 어느정도 있음을 직접 인정했다. [27] 오퍼를 한 팀은 J리그의 나고야 그램퍼스로 연봉 29억을 제시했다고 한다. 안정환은 당시 우디네세 칼초의 코스미 감독의 러브콜을 받고 우디네세, 리보르노와 협상차 이탈리아에 가 있었는데, 직접 국경을 넘어 8시간 운전해온 메스 구단주의 정성에 감동을 먹어서 진정성이 보였다는 이유로 FC 메스를 선택했다고 한다. [28] 토고의 골키퍼가 메스에서 동료였던 아가사였다. [29] 이 골로 대한민국 월드컵 최다 득점자가 된다. 2010년 박지성이 2018년 손흥민이 타이를 이뤘다. [30] 일명 권오크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친과 부인, 특히 부인에 대한 성적인 모욕이었다. 부인에 대한 성적인 모욕은 네티즌에 지목당한 여자 서포터가 아니라 술먹고 깽판치던 아저씨들이 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tvn에서 방영하는 용감한 기자들이라는 프로에서 해당 상황의 녹화가 방송된 적이 있는데 명확하게 여자 목소리다.(하지만 욕설 부분은 삐 처리되어서 들을 수 없다.) 참고로, 이때 부인과 가족들이 관전을 하고 있었다! [31] 사과를 하긴 했는데 대상이 안정환이 아니었다. [32] 이후로도 부산은 쪼들리는 형편 탓에 쓸만한 선수는 계속 팔아치우고 풋사과만 끌어모아 어렵사리 선수단을 구성했다. [33] 본인 말로는 이때 축구에 눈을 떴으며, 잘하면 월드컵에서도 활약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친화력도 좋아서 당시 선수단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팀워크도 좋았고, 현재도 당시 선수들과 연락한다고 한다. [34] 페루쟈 임대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선 일개용병에 불과했으며 골을 못 넣는다고 감독에게 질책까지 들어야했다. K리그 복귀 후에는 연봉만 많이 먹는 폼이 떨어진 노땅에 불과했다. 근 10년 마음고생 하다가 팀의 에이스로 대접을 받는 것이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35] 중국에서 차 모임은 그냥 차 마시는 모임이 아니라 중국내서 잘 나가는 지역 유지, 기업가, 정치인 등이 모이는 자리이기도 하다. 차도 아주 비싼 고급 전통차는 한국 돈으로 억대를 넘어가는 것도 있다. [36] 트레콰르티스타라는 말이 거의 쉐도우 스트라이커 수준으로 공격에 치중하는 공격형 미드필더를 뜻한다. 국대에선 원톱으로 주로 나왔지만 리그에서의 안정환은 주로 트레콰르티스타였다. [37] 여담으로 성남 이적이 무산된 이후 신태용 감독은 나름 아쉬워하면서, 나랑 밥 먹을 때는 100% 올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 은퇴했다면서 투덜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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