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05:04:54

안시성 전투

안시성 혈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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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전투
安市城 戰鬪
<colbgcolor=#C00D45,#032807><colcolor=white>
파일:attachment/ansi_castle_war.jpg

안시성 전투. 박창돈. 1975년 작. 독립기념관 소장.
시기 645년 ( 보장왕 4년) 9월 6일 ~ 10월 14일 그레고리력
645년 7월[1] 또는 8월 10일 ~ 9월 18일 음력
장소

고구려, 안시성
(現 중국 랴오닝 성 하이청 시 잉청쯔(英城子) 촌)
원인 제1차 고당전쟁 중, 당의 안시성 포위
교전 세력 <rowcolor=black> 고구려
(수세)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구려 군기.svg 안시성주[2][3]
지휘관

파일:tang_fel2.jpg 태종 (당황제)
참전자

파일:고구려 군기.svg 참전자 불명
참전자

파일:tang_fel2.jpg 장손무기
파일:tang_fel2.jpg 이세적
파일:tang_fel2.jpg 아사나사이
파일:tang_fel2.jpg 이도종
파일:tang_fel2.jpg 부복애
병력 병력 규모 불명[4]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고구려의 승리
영향 제1차 고당전쟁 종료
1. 개요2. 배경3. 진행4. 결과
4.1. 안시성 전투의 필요성
5. 역사적 의의6. 등장 작품
6.1. 영화 <안시성의 꽃송이>6.2. KBS < 삼국기>6.3. SBS < 연개소문>6.4. KBS < 대조영>6.5. 영화 < 안시성>6.6. 만화 < 소년장수>

[clearfix]

1. 개요

645년 고구려를 침공한 태종 문황제 이세민 이하 당나라의 대군이 7월부터 9월까지 고구려의 안시성에서 2개월(60여 일) 동안 충돌한 전투로,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의 대표적인 전투이다.

개전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의 여러 성을 함락했지만, 이 안시성을 공략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패퇴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안시성 하나에서 막혀 철수했다기보다는 안시성에서 당군의 발목이 잡혀있는 사이에 고구려군이 전열을 정비해 반격했고, 이에 당군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된다. 기록을 상세히 살펴보면 안시성뿐만 아니라 요동 방어선 북방의 신성, 남방의 건안성에서 고구려군의 반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수성전(守城戰)의 교과서적인 전투로, 후대 한국의 역사가들이 안시성 전투 자체나 안시성 전투 전후로 벌어졌던 사건들을 예로 들어 고구려군의 구원 시도 실패나 당시 당군의 공성 무기에 맞선 고구려군의 전략•전술들을 연구해 국방 전략을 논의했다. 그리고 살수대첩과 함께 중국에 대한 승리로서 자부심의 상징이 되었다.

270년 만에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 고구려 침공에 실패하면서 극도의 혼란에 휩싸여 왕조를 세운 지 40년도 안 돼서 패망하고, 이어서 등장한 통일왕조 당나라의 태종은 '정관의 치'(貞觀之治)[5]를 이룩한 중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황제로서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하며 고구려에서 물러가는 서사시적인 전개가 특징이다.

2. 배경

이세민 현무문의 변으로 집권한 이래, 줄곧 고구려 정복을 꿈꾸며 동북방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집권으로 이에 제동이 걸렸다. 연개소문 당나라의 오만하고 무리한 요구들을 거부했고, 특히 신라 공격에 대한 당나라의 내정 간섭이 무시당하자 태종은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트집잡아 전쟁을 일으켰다.

이세적, 이도종 등이 개모성, 장량이 이끄는 수군이 비사성, 당태종이 요동성, 백암성 등 4개의 성을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지만 백암성 함락 이후로는 공세가 한풀 꺾인 모습을 보였다.

요동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 요하에서 이틀 거리 이상 나아가지 못했으며, 평양을 향해야 하는 수군의 활약도 사라진 채 32일 동안 단지 요동성을 거쳐 안시성에 접근하는 데 그쳤고, 주필산 전투가 벌어진 6월 22일부터 안시성 남쪽에 접근하는 8월 10일까지 별다른 행적을 남기지 못했다. 구당서 태종본기에 따르면 이미 7월부터 이적이 공세를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고, 토산을 쌓은기간이 50일인 점을 볼때 공세 자체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세민은 건안성과 안시성 중 어느 쪽을 먼저 칠지를 논했는데 밑작업으로 안시성을 먼저 정리하고, 집중하여 건안성을 쳐야한다는 이세적의 주장에 따라 안시성 공략에 먼저 들어갔다. 이세적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주장을 한 것이었다. 당군의 군량은 요동성에 있었는데, 안시성이 건안성보다 전진 배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건안성을 먼저 공격했다가는 재수가 없을 경우 안시성의 군대가 퇴로를 차단하고 건안성의 군대가 쌍방향에서 밀고 들어오면 그대로 포위당할 수 있고, 운 좋게 건안성 부대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안시성 부대가 요동성과 연결되어 있는 보급로를 끊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게다가 앞서서 요동성 북쪽의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신성의 고구려군이 요동성을 직접 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다. 이처럼 당군의 보급로는 위험요소가 상당히 많았고, 당태종이 별 말 없이 이세적의 주장을 수용한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었다.
한편 공격을 결정할 당시 당태종은 "안시성의 성주는 막리지의 난(연개소문의 쿠데타) 때 성을 지키고 굴복하지 않았고, 막리지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 그에게 주었다."라고 발언하였다. 이에 대해서 후대의 해석이 갈리는 편이다. 안시성주와 연개소문이 정치적으로 충돌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당태종의 이 발언 외에는 안시성주와 연개소문이 충돌했다는 증거가 남아있지 않다.

3. 진행

파일:IMG_5564.jpg

당나라의 군사들이 안시성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자,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당태종의 깃발과 수레의 덮개 등을 발견하는 즉즉 성루에 올라가 북을 두드리면서 황제를 도발했다. 태종이 화를 내자 이세적은 "성을 함락시키는 날 저들을 모두 묻어버리게 해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이 소식이 성 내부에까지 들려오자 안시성 군사들은 이미 배수진을 쳤다고 생각, 더욱 굳게 지키기를 각오했다.

이후 여러 차례 공습이 시도되었으나 당군은 번번이 성벽을 넘는 데 실패했다. 이내 전투가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당태종을 포함한 당군 수뇌부는 고뇌에 빠졌다. 이때 주필산 전투에서 패전한 고구려 항장, 고연수 고혜진이 안시성은 포기하고 오골성의 성주는 늙어서 공격하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니 오골성을 함락시킨 다음에 바로 평양성을 공격하자는 의견을 내놨다.[6] 하지만 당태종의 오른팔과 같았던 장손무기가 나서서 "천자께서 직접 하시는 정벌인데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됩니다. 지금 안시성을 포기하고 오골성으로 돌리면 분명 100,000명의 적군이 우리 뒤를 칠 것입니다.[7] 안시성과 건안성을 먼저 함락시켜야 합니다."라며 반발하자 안시성 공략을 계속하기로 결정이 났다.

이후 안시성을 포위한 당군과 수성 중인 고구려군 사이에는 산발적 교전이 몇 주간이나 이어졌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들려오는 닭과 돼지 소리를 듣고는, "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면서 성 안의 연기가 미미해졌지만, 지금 닭과 돼지가 시끄러운 것은 군사들에게 잡아먹히고 밤 중에 나와서 기습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이세적에게 대비하도록 했다. 그 뒤 정말로 밤에 수백 명의 고구려군이 성벽에 줄을 매달아 내려왔고, 이 소식을 들은 당태종이 성 아래로 군사를 불러 공격해 수십 명을 죽이고 물러나도록 했다.

전투 말기, 이도종이 무리를 감독해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토산을 쌓고 안시성을 압박했는데, 안시성에도 이에 대응해 성을 더 높이 증축했고, 여러 차례 군사들이 교대로 싸워 하루에도 6번에서 7번 교전할 정도였다. 당군이 충차와 포석으로 성벽을 부수자 안시성은 목책으로 부서진 부분을 수리했으며, 이도종이 싸우다가 부상당했고 당태종 자신도 다치는 등 사상자가 점점 늘어났다. 이렇게 토산을 완성하는 데 2개월이나 걸렸다. 당시 당군은 토산을 쌓는 데만 연인원 500,000명을 동원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토산이 완성되고, 꼭대기에서 성곽까지는 몇 장 정도 떨어져 있어 내려가 성 안으로 들어가게 했는데, 이도종은 부복애를 시켜 토산 꼭대기에서 대비하게 했지만, 부복애가 사사로이 부대를 거느리고 떠나고 있던 중에 고구려의 정예군 수백 명이 부서진 틈을 통해 기습에 성공, 토산을 빼앗아 점거하면서 참호를 파고 지켰다. 결국 당태종은 화가 나서 부복애를 참수하고, 조리돌렸으며, 이도종 또한 죄를 청했으나 개모성과 요동성을 함락한 공로가 있어 용서했다.

요동성이 일찍 추워지며, 풀은 마르고 물이 얼어 병사와 말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양식이 떨어지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태종은 철수했다. 이때 당군의 퇴각 루트가 안시성에서 철수해서 요하 하류의 요택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기록에는 요택이 진흙창이라 겨울철에 병사들이 건너는데 몹시 고생해 태종 자신까지 나서서 병사들과 함께 수레를 밀어야 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8]

태종 이세민이 최후의 자존심 때문에, 성주에게 성을 잘 지켰다는 공으로 비단을 하사하고, 품위를 지키며 퇴각하려 한 기록이 남아 있다.

4. 결과

당나라는 안시성의 대패로 인해 고구려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시켰으며, 당의 주력군이 고구려 원정을 한 틈을 타서 튀르크계 설연타(쉬르-타르두쉬)의 힐리구리실설사다미가한이 하주를 노략질했다.[9] 이 때문에 태종 이세민은 수도 장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주를 직접 정벌하려다가 병에 걸리게 되었다.[10]

그리고 이세민은 자신이 제1차 고당전쟁에서 고난을 겪었던 사실들 및 철수하는 과정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추격을 당했다는 사실을 아예 빼 버리고 자기 입맞에 맞게 역사서를 기록했는데, 대표적인 예시로 《 진서》에는 고구려를 아예 기록하지 않았다.

안시성 전투는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 가운데 하나로서 대미를 장식했으며, 당태종과 당나라의 주력군이 패배함에 따라, 안시성 전투는 이후에도 동아시아에서 강력하게 각인이 되었다. 당태종은 안시성의 참패 후, 수양제 양광이 행한 당장의 무리한 대규모 원정보다는 장기적으로 대규모의 원정을 준비하면서 고구려와는 계속하여 소모전 및 유격전을 치르고, 신라와는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 때문에 안시성 전투는 이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역사에서 큰 분기점이 되는 역사의 시작을 알린 전투이기도 하다.

당태종은 이후에도 다시 한번 대규모의 고구려 원정을 준비했으나[11] 그러던 도중에 쓰러졌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당태종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고구려 원정을 그만두라."

결국 당태종이 붕어하게 되면서 그의 생전에 재원정은 실현되지 않았다.

4.1. 안시성 전투의 필요성

  • 안시성 전투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안시성은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작은 성이었다. 더구나 요하 하류인 요택에 인접한 위치로 굳이 당군이 공격할 필요는 없었다. 요택은 지금의 요하와는 달리 온통 진흙 투성이의 뻘로 평상시에도 사람의 통행이 힘든 지역이었으며, 당시 교통로나 수군, 당군의 침공로도 요하 중, 상류를 통한 길이어서 이곳을 지키는 최대의 성이 '요동성'이었다. 따라서 당태종도 처음에는 전략적인 가치가 거의 없는 안시성을 공격하지 않고, 수도인 평양성으로 가려고 했으나 이세적 등 신하들의 반대로[12] 안시성을 공략한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안시성에 발이 묶이는 바람에 고구려군이 당군이 함락시킨 성들을 탈환하면서 퇴로도 차단당하고, 어쩔 수 없이 요택으로 후퇴하게 된 것이다. 만약 당태종의 생각대로 안시성을 무시하고, 평양성으로 직행했으면 전쟁의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안시성 전투는 당시로선 불가피했다.
    안시성 전투가 일어날 필요가 없었다는 주장은 결과론적인 해석일 수 있다. 당시 당태종과 휘하 인사들이 생각하기엔 안시성은 꼭 처리해야 할 곳이었다. 안시성이 작은 성이라지만 이를 거점으로 삼아 평양을 직공하는 당군의 후방 교란과 보급로를 공격하기는 충분했고, 그 상태로 당군이 건안성으로 직행했다면 보급로 문제는 상당히 피곤한 일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당군은 수십년 전 살수 대전의 전훈을 당연히 상기하고 있었고, 평양을 공격하기 전 요동 방어선을 먼저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안시성을 두고 가면 필시 고구려군이 후미를 공격할 것이라는 이세적과 장손무기의 주장을 당태종이 받아들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은 이세민은 부친인 당고조 이연으로부터 '천책상장'이라는 칭호를 받은 백전노장이자 명장이었다는 것이다.[13]

5. 역사적 의의

書生驅馬儘悠悠
서생이 먼 길 내내 말을 몰아 왔으니
好向郵亭一日留
우정에서 하루쯤 머물러도 좋으렷다
嵐翠平分山勢遠
산세를 멀리 공평히 나누는 푸른 이내요
春光初上柳梢浮
버들가지에 막 올라와 떠도는 봄빛이라
長川芳草晴還雨
긴 하천 방초에는 날 개었다 비 내리고
沃野嘉禾歲有秋
기름진 들판의 곡식은 풍년을 예고하네
正是居民懷盛德
그야말로 주민들이 성덕을 그리워하는데
文皇何事到荒陬
문황은 무슨 일로 이 구석까지 행차했나[14]
이숭인. 《도은집》 제2권 시 <개주>(蓋州)
조선(朝鮮)은 인현(仁賢)한 기자(箕子)[15]의 후예로서 하늘(天)의 돌봄이 독후(篤厚)하여 한무제(漢武帝)와 당태종(唐太宗)도 멸할 수 없었던 나라이다.
임진왜란 개전(開戰) 1592년. 명나라 병부(兵部)에서
이 전투 자체의 결과가 남긴 파장은 상당했다. 대당제국의 6부 상서(오늘날의 장관급) 중 무려 4개 상서(병부, 예부, 이부, 형부)가 참전했고, 이들 외에도 종3품~정3품 이상의 고관대작들과 정관 연간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이었던 이세적, 황제의 오른팔이었던 장손무기까지 참전한 총력전에서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안시성에서 완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태종 본인도 수당교체기의 중국 대륙을 재통일시킨 명장이었다.

이후에 남긴 상징성은 더욱 빛났다. 당태종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고 그의 업적이 크게 부각되면서, 역으로 그 당태종조차 함락시키지 못한 안시성과 고구려의 위상이 역사에 크게 각인된 것이다. 이 때문에 후대 왕조인 고려 조선의 사대부들 역시 안시성 전투의 승리를 크게 자랑스러워했으며, 그들 국가들이 당태종을 물리친 강국이라는 이미지를 가지도록 했다. 여몽전쟁 말기에 고려가 결국 항복하려 하자 세조 쿠빌라이 칸이 매우 기뻐하면서
"당태종조차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의 태자가 스스로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라고 말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16][17]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고구려 이후 한반도 국가들의 소위 '국위 선양'을 크게 시킨 전투이다. 또한, 이미 고려 시대부터 한반도에 위치한 국가가 안시성 전투를 자랑스러워하고, 중국은 한반도에 위치한 국가를 무시하지 않게 된 상황을 통해 동북공정을 부정하는 한•중의 계승의식을 볼 수 있기도 하다.

한편, 정사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전투에서 당태종이 한쪽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전승이 전해져 안시성 전투를 다루는 매체에서는 으레 묘사되곤 한다.[18]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안시성주의 실명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19]

6. 등장 작품

안시성 전투는 KBS 대하드라마 < 삼국기>, < 대조영>과 SBS 대하사극 < 연개소문>에 자세하게 묘사된 적이 있다. 뒤의 두 작품은 그보다 훨씬 뒤에 나온 작품인데, 둘이 비슷한 시기에 방영했고, 두 작품 모두가 나온 시기가 시기다 보니, 둘 다 당나라군은 쓸어버리게 묘사했고, 서로 비교가 되는 편이다.

반면 중화권에서 수당교체기 및 당 태종 시기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 등에선 거의 언급되지 않는 편이다.

6.1. 영화 <안시성의 꽃송이>

1964년 이규웅 감독 제작 영화. 링크
시놉시스: 안시성의 젊은 장수 고헌에게는 사랑하는 버들아기가 있었다. 버들아기는 그의 생명을 구해준 이의 딸이기도 하다. 그 젊은 장수를 또한 고구려의 충신인 연개소문의 딸이 연모하고 있었다. 그 즈음 당나라 태종이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하여 안시성을 쳐들어온다. 하지만 고헌의 용맹과 버들아기의 지혜 앞에는 30만 대군의 위력도 무력했다. 마침내는 당나라의 30만 대군이 회군하게 되고, 고헌과 버들아기는 백년가약을 맺게 된다.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 본래 KBS 연속극으로 방영되었다가 인기를 얻어서 1964년 영화로 나왔다고 한다. #

창작 인물인 안시성의 젊은 장수 고헌과 버들아기가 주인공이다.

6.2. KBS < 삼국기>

<삼국기>의 경우는 작품 중반부의 절정으로 꽤 많이 신경써서 제작했고, 훌륭한 퀄리티를 보여준다. 특히 당군은 안시성 전투 전까지 승승장구했고, 다양한 작전을 쓰며 다양한 공성 병기[20]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절대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이 아님을 묘사했다. 안시성은 이것을 죽을 힘을 다해가며 처절히 막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6.3. SBS < 연개소문>


1, 2화, 86화, 87화에서 등장한다. <연개소문>의 경우에는 산성의 세트장이 대조영보다 더 고구려식 산성에 가까우며, 무장들이 무쌍을 찍다보니 액션 부분이 많지만, 연개소문 특유의 병맛스러움[21] 때문에 <대조영>보다 낮게 평가되는 감이 있다. 토산이 무너지는 장면을 묘사하지 않은 것도 고증 오류. 드라마 상에서는 토산에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 측이 목책을 쌓았는데, 이 목책을 토산 쪽으로 넘어뜨려 다리로 썼다.

그런데 연개소문 본인이 안시성주를 대신하여 안시성의 지휘권을 잡고, 그것도 모자라 당나라 황제 앞인 최전선에 나서서 무쌍을 찍는 묘사는 상당히 우려스런 고증오류로 지적되었다.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무리한 주인공 미화로 인해 정작 안시성 전투의 주역인 안시성주를 쩌리로 만들어버린 꼴이었기 때문. 작중 양만춘을 연개소문에 비견되는 거물로 높게 평가하는데, 정작 안시성주가 활약하는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은 그저 활 잘쏘는 부하 장수 수준으로 전락하고, 정작 고구려군의 총 지휘를 맡아야 할 연개소문이 일선 장수나 할 법한 짓을 하며 양만춘의 비중을 다 잡아먹는다. 또한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선대 추모왕도 아니고 단군과 치우천왕에게 비는 묘사는 드라마의 환빠적 성향을 드러내고 말았다.

6.4. KBS < 대조영>

토산이 무너진다! 토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나라 대군이 무너진다!
-<대조영> 5화 중-
<대조영>에서는 직접 수십만의 당나라 대군이 양만춘의 도발에 걸려 안시성으로 돌격하는 모습, 공성전, 쌓아놓은 토산의 붕괴와 타격감 등을 실사 촬영, CG로 리얼하게 처리함으로써 거의 반지의 제왕 급의 전투신을 구현해냈다. 특히 토산이 무너질 때의 장면과 OST가 맞물리는 폭풍 간지의 장면은 <대조영> 초반 최고의 명장면으로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된다. 거기에다가 병졸들의 갑옷도 <대조영>이 좀 더 투박해서 더 병졸스럽다는 평이 있다.

당나라 군이 안시성 공격을 결정한 계기를 을지문덕과 살수 대첩과 연계해서 각색하였다. 작중 안시성주 양만춘은 을지문덕의 후계자로 설정되어 있으며, 안시성 내에 을지문덕의 사당이 나온다.. 또한 당군에게 피로 물든 옛 수나라 깃발과 여수장우중문시를 보내고, 사자로 보낸 대중상을 통해 '당나라 황제의 목을 평양의 연개소문 장군에게 뺏길 생각은 없다'라는 독설까지 보낸다. 이에 당 태종은 크게 분노하며 평양 직공이 아닌 안시성 공격을 결정한다. 다만 당 태종도 홧김에 무작정 결정한 것은 아니고, '이렇게 도발해서 내 판단력을 흐리게 할 정도면 이 양만춘은 참으로 뛰어난 장수임에 틀림없다. 이런 자를 뒤에 놔두고 평양성으로 간다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라고 판단하고 결정한 것으로 나온다.

사서와는 달리 고구려군이 토산 지하에 굴을 파서 지하수를 흘려보내 지반을 약화시킴으로써 토산의 붕괴를 유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토산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토산을 점령한다든지 하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토산이 완전히 무너지는 시각적 연출은 훌륭했다. 또한 고구려군이 도끼를 많이 들고 있는데 당시 고대전에서 중요한 무기였던 도끼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더 현실감이 있다는 평이다. 두고두고 설인귀에겐 트라우마가 된 전투.

6.5. 영화 < 안시성>

이 전투를 소재로 한 < 안시성>이란 제목의 영화가 2018년 9월 개봉했다. 감독은 < 찌라시: 위험한 소문>을 제작한 김광식. 연개소문 역에 유오성, 양만춘 역에 조인성, 당 태종 역에 박성웅이 출연했다. 스케일이 크고 시종일관 전투신만 나온다. 개연성 측면에서는 평가가 별로지만, 개봉 시기가 추석 연휴였던 것을 잘 살려서 500만 관객이 넘는 흥행 성공은 거두었다.

당군이 투석기로 공격했지만 안시성에서는 이를 막아냈고, 당군이 공성탑을 준비해 공격했지만 안시성 측에서 탑을 모두 무너뜨리고 막아냈다. 안시성에서 기마 부대를 이끌고 당군에게 야습을 시도하지만 밀고자들을 통해 정보를 받아 매복한 당군의 화살에 모두 전멸한다.

안시성에서는 당군이 토산을 완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땅굴을 파고 무너뜨려서 점령하며, 당태종이 토산을 점령하기 위해 모든 군사들을 보내 공격하자 안시성의 군사들은 위기를 맞이한다. 전투 도중에 양만춘이 당태종에게 화살을 쏴 왼쪽 눈을 실명하게 하며, 사물이 연개소문과 함께 달려온 원군이 나타나자 당군은 후퇴한다.

6.6. 만화 < 소년장수>

서국[22] 양광[23]이 고구려를 치러갈 때, 안시성을 모티브로 한 안평성에서 토산을 쌓을 정도로 쇠메와 결전을 치렀는데, 쇠메의 지략과 지난 전쟁의 견제로, 호비의 아버지 모골 승상은 자결했고, 서국의 장수들과 쇠메의 숙적 호비[24], 그리고 군사들을 섬멸함과 동시에 굴복시켜서 승리를 이끌었다.

[1] 구당서 태종본기 [2] 실제 이름이 양만춘이었는지는 여전히 역사학적으로 불분명하지만, 민간전승이나 야담에서 양만춘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2009 개정 교육과정까지의 대부분의 한국사 교과서는 이 이름을 정설처럼 채택했었다. [3] 양만춘이란 이름의 유래를 다룬 글. [4] 신당서》에서 장손무기가 주장한 바에 의하면 100,000명인데 《 삼국사기》와 《 자치통감》 기록에 따르면 장손무기가 주장한 100,000명의 병력은 안시성이 아니라 신성과 건안성의 병력을 합친 것이다. [5] 당 태종의 연호를 딴 것이다. [6] 이는 어서 빨리 당군이 승리해야 자신들의 가족이 무사하기 때문이었다. [7] 신당서》에선 장손무기 안시성의 병력만 100,000명이라고 주장했고, 《 자치통감》과 《 삼국사기》에선 신성 + 건안성의 병력이 100,000명이라고 주장했다. 이병도의 경우 '《신당서》 기록은 중국애들이 뻥튀기 한 게 아니냐?' 라고 주석을 달아 의문을 제기했다. [8] 이미 요동성이나 백암성, 비사성, 개모성 등의 고구려 변방 지역 성들을 함락시켰으면서 그 길로 가지 않고 굳이 험한 길을 택해서 간 이유는 당군이 안시성에서 발이 묶여 있는 사이에 고구려군이 반격을 실시해 배후로부터 당군이 함락시킨 성들을 탈환하면서 당군을 압박했고, 이것이 당군의 퇴각이 굳이 요택이라는 험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9] 설연타의 당나라 배후 공격은 연개소문의 책략이 개입한 결과라는 지적이 있다. [10] 태종 이세민은 이 과정에서 등창이 났는데, 황태자였던 이치가 이세민의 등에 난 고름을 빨았다는 기록이 있다. [11] 사천 지역에서 이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12] 배경에서도 설명했지만 당군의 군량은 요동에 있었기 때문에 안시성을 무시하고 건안성을 공격했다면 안시성의 군대가 보급을 막아버릴 수 있었고, 더구나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므로 안시성 부대가 퇴로와 보급로를 끊어버리고 건안성 부대가 성을 빠져나와 쌍벽으로 공격을 가하는 동시에 신성 쪽에서 증원군을 끌고 들이닥치면 오히려 당군이 역으로 포위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13] 당장에 이 전쟁에서도 당태종은 요동성은 커녕 그 일대의 성 하나조차 못 무너뜨린 수양제와 비교하면 군인으로서 훨씬 유능했다. 수양제도 황자 시절에는 직접 5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조의 진나라를 무너뜨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태종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더욱 실감하게 해 준다. [14] '문황'은 당태종 이세민의 시호였던 '문무대성황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당태종이 요동까지 원정하러 갔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대패한 것을 풍자하는 것이다. [15] 기자는 중국 고대국가인 상나라의 3대 현인 중 한 명이다. 중국은 중화주의로 인해 다른 나라들의 선조를 한족화(漢族化)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중국 역사서인 <위서> -동이전-과 -왜인전-에는 일본이 주나라 고공단보의 장남이자 오나라를 세운 태백의 후손들의 나라라고 했다. 기자(箕子)도 그런 맥락에서 보기도 하고, 상나라가 중국 동북쪽에서 발원했다는 점 때문에 그 민족이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온 것을 사람에 비유했다는 설도 있으며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고려 중기 이후, 유교적 문치주의가 널리 퍼지면서 기자 사당을 세우고, 국가적으로 기자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는데, 조선에서도 기자에 대한 숭배가 이루어졌다. 일본에서도 일본 천황가의 뿌리가 오나라 태백이냐는 논쟁이 난보쿠초(남북조) 시대부터 있어 왔으며, 일본 유학자들은 명나라가 멸망하자 오랑캐인 청나라가 아닌 일본이 오나라 태백의 후손들의 나라로서 명나라를 잇는다며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기도 했다. 조선도 그렇지만 당시의 소중화(小中華)란 중국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는 것이 아닌 제일의 선진 문명국 지위를 의미했다. 이것이 일본 제국주의 사상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연구도 있다. 일본의 오나라 태백 시조설은 오늘날에는 고고학적으로도 맞지 않고, 믿지 않는 분위기이다. [16] 물론 쿠빌라이가 고구려가 멸망했다는 것을 진짜로 몰랐을 리는 없고, 대칸 계승 서열에서 밀리던 쿠빌라이가 자신에게 항복해온 고려의 위상을 세워주면서 간접적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발언이었다. 안시성 전투 당시 고구려의 정식 명칭은 '고려'였고, 왕씨 고려 또한 대외적으론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국가였기에 당시 기준으로는 별로 이상할 게 없는 발언이기도 했다. [17] 다만 왕씨 고려도 거란의 침입을 수차례 막아내고 송과 거란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는 등 당대 동아시아에서 위상이 결코 낮은 국가는 아니었다. 때문에 나중에 쿠빌라이는 카다안의 침입때 고려군이 초전에 고전하자, '정규 국가도 아니고 반군 상대로 당태종을 물리친 고려가 왜 쩔쩔매냐'며 의아해 하기도 했다.(...) 반란의 원인이 보르지긴 가문 내의 왕위계승전쟁이라 반군일지언정 정규군에 준하는 수준이었고 오랜 대몽전쟁으로 인해 고려가 피폐해져서 그런 거였지만... 결국 카다안의 침입은 원나라가 나름 신속하게 군사개입을 하면서 종결된다. [18] 물론 진짜로 눈에 화살을 맞았다면 단순히 애꾸에서 끝나지 않고 뇌가 관통당해 즉사하든 감염으로 조금 뒤 죽든 니키포로스 1세 수준의 비참한 꼴이 났을 것이다. 즉 그저 야사에 불과하다는 것. [19] 《삼국사기》 등에서는 실명이 드러나지 않아 유감이라고 기록된 바가 있고, 후대의 소설에서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언급된다. [20] 대표적으로 공성 사다리인 운제. 이거 나온 작품, 몇 없다. 절대 다수는 사다리 세워 올라가기만 할 뿐. [21] 예시를 나열하자면 < 연개소문> 특유의 발 CG와 《 환단고기》 드립들과 척준경을 아득히 능가하는 인간 흉기로 묘사되는 장수들과 슝슝 추풍낙엽처럼 갈려나가는 일반 병졸들 등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22] 이 나라는 수나라와 당나라를 모티브로 했다. [23] 만화의 양광은 역사상의 수양제 양광뿐만이 아니라, 당태종 이세민의 생애도 섞었다. [24] 쌍둥이 첫째 아들 호두는 전사했고, 소미와 수압, 그리고 노비 곰보와 패두는 내분으로 다 죽었으며, 쌍둥이 둘째 아들 소두는 살아 남아서 훗날을 도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