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 |
울진 성류굴 蔚珍 聖留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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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북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산30번지 |
분류 |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 지구과학기념물 / 천연동굴 |
수량/면적 | 137,454㎡ |
시대 | 고생대(2억5천만년전) |
지정연도 | 1963년 5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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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 있는 석회암 동굴.2. 특징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관광용으로 개방된 동굴로 1960년에 지질조사를 하다 발견돼 1963년 5월 천연기념물 제155호에 지정됐으며 1967년에 개방됐다. 당시에는 민간이 관리했으나 1976년부터는 울진군이 관리하고 있다. 다만 신라시대에 성류굴을 방문했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조선시대까지도 성류굴과 관련한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어 이 지역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성류굴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동굴의 전체 길이는 주굴이 330m, 지굴이 520m로 약 870m 정도이며 이 중 270m가 개방돼 있다. 동굴을 처음 개방할 당시 구간별로 나눠 총 12개 광장으로 분류 했는데 현재 동굴 끝자락에 있는 11, 12광장은 보호를 위해 출입이 금지돼있다.
이 동굴은 선유산 서쪽 절벽 아래에 있으며 동굴 입구 바로 앞에서 왕피천과 매화천이 합류해 동해로 흘러 나간다. 동굴 내부는 물에 잠긴 곳이 많은데 동굴이 왕피천과 연결돼있어 왕피천의 수위에 따라 동굴 안 연못의 수위도 변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왕피천에 사는 물고기가 동굴 안으로 드나들기도 한다. 동굴 연못의 수심이 30미터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모든 구간의 수심이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5미터 정도는 되므로 빠질 경우 매우 위험하다. 이 외에 물에 잠긴 수중 구간도 85m 정도 있다고 한다.
다만 워낙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공개된 터라 동굴 곳곳에 이끼가 끼고 종유석 표면이 검게 변하는 등 훼손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비 및 안식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3. 지명과 유래
성류굴(聖留窟)이라는 이름은 '성불이 머물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이름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으며 이 외에 '선유굴(仙遊窟)' ‘탱천굴(撑天窟)’ ‘장천굴(掌天窟)’이란 이름으로도 불리기도 했다.성류굴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 중 하나는 신라 보천태자(寶川太子) 이야기이다. 신문왕에게 보천과 효명(孝明)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속세를 떠나 오대산으로 들어가 암자를 짓고는 매일 샘물을 길어 문수보살에게 차를 공양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 신문왕이 동생과 왕권 싸움 끝에 쫓겨나는 일이 생겨 신하들이 두 아들을 옹립하려고 찾아왔으나 보천은 거절했고 효명은 수락해 그가 성덕왕이 됐다고 한다.
한편 매일같이 샘물을 마시며 공양하던 보천은 마침내 육신이 공중으로 떠오르게 됐고 이에 도를 닦기 위해 지금의 성류굴에 갔다. 그리고 성류굴에서 매일 수구다라니를 외웠는데 어느날 굴신(窟神)이 나타나 자기가 그곳의 신이 된지 2천 년이 됐지만 보천이 염송(念誦)하는 것을 듣고 처음으로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됐다며 보살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 후 동굴의 형체가 사라졌는데 그러고도 보천은 한동안 그곳에 머물다가 다시 오대산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성인, 또는 성불이 머물었던 동굴이라는 뜻에서 성류굴이 됐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울진에까지 불교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기존 신앙이 사라지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로 여겨진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지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류글 근처에 있던 절의 불상들을 이 굴 속에 피난시켰는데, 이게 성불이 머무는 동굴이라는 뜻에서 성류굴이 됐다는 것이다. 임진왜란과 관련해서 당시 인근 주민 500여 명이 전쟁을 피해 이 굴로 피난을 했는데 왜군이 입구를 막아 모두 아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4. 역사학·금석학적 가치
울진 성류굴 명문은 성류굴의 동굴 암벽에 새겨진 삼국 시대 시기의 기록을 가리킨다. 성류굴은 경상도 일대에서는 오래 전 고대 시대부터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동굴이었으므로 이 동굴 내부와 주변에는 무려 신라 시대 때부터 동굴을 방문한 사람들이 새긴 많은 각석 명문이 발견되고 있다.2019년 3월, 성류굴 8광장의 높이 2.3m에 있는 동굴벽에서 신라시대에 새겨진 문자기록이 발견되었는데, 심현용 박사와 이용현 박사가 판독하여 진흥왕이 울진 성류굴에 행차했다는 내용임을 확인했다. 울진 성류굴서 신라 진흥왕 행차 명문 발견(종합) 명문은 해서체로 6행 25자였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辰六月日(경진육월일)
柵作榏父飽(책작익[1]부포)
女二交右伸(여이교우신)
眞興(진흥)
王擧(왕거)
世益者五十人(세익자오십인)
경진년( 560년, 진흥왕 21년) 6월 ○일, 잔교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 여자 둘이 교대로 보좌하며 펼쳤다. 진흥왕이 다녀가셨다(행차하셨다). 세상에 도움이 된 이(보좌한 이)가 50인이었다.
柵作榏父飽(책작익[1]부포)
女二交右伸(여이교우신)
眞興(진흥)
王擧(왕거)
世益者五十人(세익자오십인)
경진년( 560년, 진흥왕 21년) 6월 ○일, 잔교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 여자 둘이 교대로 보좌하며 펼쳤다. 진흥왕이 다녀가셨다(행차하셨다). 세상에 도움이 된 이(보좌한 이)가 50인이었다.
진흥왕이 배를 타고 성류굴에 행차하기 위해 잔교, 즉 배를 정박할 수 있는 가교를 설치했고 그때 50명의 수행원이 동행했다는 뜻인 듯하다. 특히 진흥왕이 다녀간 것을 강조하려 했는지 진흥과 왕거 네 글자는 다른 글자보다 더 크게 새겼다. 진흥왕이 성류굴에 왜 행차했는지는 연구가 필요하지만, 명문의 내용만으로 보면 여흥이었을 개연성이 있다. 진흥왕 관련 명문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문화재로 지정될지 여부도 관심거리이다.
성류굴에서는 진흥왕 관련 명문 외에 다른 각석 명문들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癸亥年三月八日 窟主荷智大奈麻 ○○○ 此山○○○大尺○ 二十日五十九村○人大息食 刀人○○
2015년 12월 성류굴 입구 암벽에서 발견한 명문으로 내용은 신라 진흥왕 4년(543년) 3월 8일 ○축부(○丑付)의 굴의 주인 혹은 관리자인 굴주(窟主) 하지(荷智)라는
대나마가 59개 촌의 사람들과 함께 와서 크게 쉬고 먹었다로 해석된다.貞元十四年 戊寅八月卄五日 梵廉行
2019년 4월 동굴 내부에서 발견한 명문으로 정원(貞元)은 당나라
덕종의 연호여서 정원 14년은 798년이 되는데 즉, 798년 8월 25일 범렴(승려)이 성류굴에 다녀가면서 남긴 글자이다.또 위의 명문 주변에서 임랑(林郞), 공랑(共郞) 같은 화랑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글자도 발견돼 성류굴이 그 당시의 명승지이면서 동시에 화랑이나 승려들의 수련지였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이 외에 병부사(兵府史, 신라의 관직), 이복연(李復淵, 조선 시대 울진 현령) 등 시대를 넘나드는 다수의 글자가 발견됐다.
2024년부터 2027년까지 발견된 성류굴의 명문 및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명문까지 찾아 기록하고 동굴 전체를 전수조사 할 계획이라고 한다. #
그 외에도 현재는 물에 잠겨 있는 부분에 있는 석순은, 과거 빙하기로 인해 해수면이 지금보다 낮아서 석순이 자랄 수 있는 마른 땅이었다가, 석순이 생긴 이후 해수면이 상승했다는 뜻으로 기후 변화의 증거로 판단된다.
5. 기타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이 1349년 8~9월 사이에 개경을 떠나 관동 지방을 유람한 후 남긴 개인 문집 가정집(稼亭集) 권5 동유기(東遊記)에 다음의 내용이 실려있다.21일에 아침 일찍 울진을 출발하였다. 현에서 남쪽으로 10리쯤 가니 성류사(聖留寺)가 나왔는데, 그 절은 석벽의 단애 아래 장천(長川) 가에 위치하였다. 단애의 석벽이 1000척의 높이로 서 있고 그 석벽에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는데, 그 동굴을 성류굴(聖留窟)이라고 불렀다. 그 동굴은 깊이도 측량할 수 없었지만 으슥하고 어두워서 촛불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절의 승려로 하여금 횃불을 들고서 길을 인도하게 하고는, 또 출입에 익숙한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앞뒤에서 돕게 하였다.
동굴의 입구가 워낙 좁아서 무릎으로 4, 5보(步)쯤 기어서 들어가니 조금 넓어지기에 일어나서 걸어갔다. 다시 몇 보를 걷자 이번에는 3장(丈)쯤 되는 단애가 나타났으므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더니 점점 평탄해지는 가운데 공간이 높다랗고 널찍해졌다. 여기서 수십 보를 걸어가자 몇 묘(畝)쯤 되는 평지가 나타났으며, 좌우에 있는 돌의 모양이 매우 특이하였다.
다시 10여 보를 걸어가자 동굴이 또 나왔다. 그런데 들어왔던 동굴의 입구보다 훨씬 비좁아서 아예 배를 땅에 대고 납작 엎드려서 기어갔는데, 그 아래가 진흙탕이었으므로 돗자리를 깔아서 젖는 것을 방지하였다. 7, 8보쯤 앞으로 나아가자 조금 앞이 트이고 널찍해진 가운데, 좌우에 있는 돌의 형태가 더욱 괴이해서 어떤 것은 당번(幢幡)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부도(浮圖) 같기도 하였다. 또 10여 보를 가니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돌이 더욱 기괴해지고 모양이 더욱 다양해졌는데, 당번과 부도처럼 생긴 것들만 하더라도 이전보다 더욱 길고 넓고 높고 컸다. 여기에서 다시 앞으로 4, 5보를 가니 불상과 같은 것도 있고 고승과 같은 것도 있었다. 또 못이 있었는데 그 물이 매우 맑고 넓이도 수 묘쯤 되었다. 그 못 속에 두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하나는 수레바퀴와 비슷하고 하나는 물병과 비슷하였으며, 그 위와 옆에 드리운 번개(幡蓋)도 모두 오색이 찬란하였다. 처음에는 석종유(石鐘乳)가 응결된 것이라서 그다지 딱딱하게 굳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고는 지팡이로 두들겨 보았더니 각각 소리가 나면서 길고 짧은 크기에 따라 청탁(淸濁)의 음향을 발하는 것이 마치 편경(編磬)을 치는 것과도 같았다.
이 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한 경치가 펼쳐진다고 어떤 사람이 말했지만, 내 생각에는 속세의 인간이 함부로 장난삼아 구경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기에 서둘러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 동굴이 많이 뚫려 있었는데, 사람이 한번 잘못 들어가면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동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느냐고 그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동굴 안을 끝까지 탐험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평해군(平海郡)의 해변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거리는 대개 여기에서 20여 리쯤 된다”라고 하였다.
앞서 동굴 입구에서 옷에 훈김이 배고 더럽혀질까 걱정이 되어 동복(僮僕)의 의건(衣巾)을 빌려 입고 들어왔는데, 일단 동굴 밖으로 나와서 의복을 갈아입고는 세수하고 양치질을 하고 나니, 마치 화서(華胥)를 여행하는 꿈을 꾸다가 퍼뜩 잠에서 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물(造物)의 묘한 솜씨는 헤아릴 수 없는 점이 많다고 내가 예전부터 생각해 왔는데, 이번에 국도(國島)와 이 동굴을 통해서 더욱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치는 자연스럽게 변화해서 이루어지도록 한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인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라면, 그 변화의 기틀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오묘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천세토록 만세토록 귀신이 공력을 쏟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는가. 출처
동굴의 입구가 워낙 좁아서 무릎으로 4, 5보(步)쯤 기어서 들어가니 조금 넓어지기에 일어나서 걸어갔다. 다시 몇 보를 걷자 이번에는 3장(丈)쯤 되는 단애가 나타났으므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더니 점점 평탄해지는 가운데 공간이 높다랗고 널찍해졌다. 여기서 수십 보를 걸어가자 몇 묘(畝)쯤 되는 평지가 나타났으며, 좌우에 있는 돌의 모양이 매우 특이하였다.
다시 10여 보를 걸어가자 동굴이 또 나왔다. 그런데 들어왔던 동굴의 입구보다 훨씬 비좁아서 아예 배를 땅에 대고 납작 엎드려서 기어갔는데, 그 아래가 진흙탕이었으므로 돗자리를 깔아서 젖는 것을 방지하였다. 7, 8보쯤 앞으로 나아가자 조금 앞이 트이고 널찍해진 가운데, 좌우에 있는 돌의 형태가 더욱 괴이해서 어떤 것은 당번(幢幡)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부도(浮圖) 같기도 하였다. 또 10여 보를 가니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돌이 더욱 기괴해지고 모양이 더욱 다양해졌는데, 당번과 부도처럼 생긴 것들만 하더라도 이전보다 더욱 길고 넓고 높고 컸다. 여기에서 다시 앞으로 4, 5보를 가니 불상과 같은 것도 있고 고승과 같은 것도 있었다. 또 못이 있었는데 그 물이 매우 맑고 넓이도 수 묘쯤 되었다. 그 못 속에 두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하나는 수레바퀴와 비슷하고 하나는 물병과 비슷하였으며, 그 위와 옆에 드리운 번개(幡蓋)도 모두 오색이 찬란하였다. 처음에는 석종유(石鐘乳)가 응결된 것이라서 그다지 딱딱하게 굳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고는 지팡이로 두들겨 보았더니 각각 소리가 나면서 길고 짧은 크기에 따라 청탁(淸濁)의 음향을 발하는 것이 마치 편경(編磬)을 치는 것과도 같았다.
이 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한 경치가 펼쳐진다고 어떤 사람이 말했지만, 내 생각에는 속세의 인간이 함부로 장난삼아 구경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기에 서둘러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 동굴이 많이 뚫려 있었는데, 사람이 한번 잘못 들어가면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동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느냐고 그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동굴 안을 끝까지 탐험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평해군(平海郡)의 해변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거리는 대개 여기에서 20여 리쯤 된다”라고 하였다.
앞서 동굴 입구에서 옷에 훈김이 배고 더럽혀질까 걱정이 되어 동복(僮僕)의 의건(衣巾)을 빌려 입고 들어왔는데, 일단 동굴 밖으로 나와서 의복을 갈아입고는 세수하고 양치질을 하고 나니, 마치 화서(華胥)를 여행하는 꿈을 꾸다가 퍼뜩 잠에서 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물(造物)의 묘한 솜씨는 헤아릴 수 없는 점이 많다고 내가 예전부터 생각해 왔는데, 이번에 국도(國島)와 이 동굴을 통해서 더욱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치는 자연스럽게 변화해서 이루어지도록 한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인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라면, 그 변화의 기틀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오묘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천세토록 만세토록 귀신이 공력을 쏟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는가. 출처
이 외에 김시습이 성류굴을 다녀가며 남긴 시가 전해지며, 정선도 청하 현령 시절 성류굴을 찾아 그림을 남긴 적이 있다. 김홍도의 김홍도필 금강사군첩에도 성류굴의 그림이 있다.
6. 천연기념물 제155호
울진 성류굴은 불영사 계곡 부근에 있으며 길이는 915m(수중동굴구간 포함) 정도이다. 동굴은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색깔은 담홍색·회백색 및 흰색을 띠고 있다.
동굴 안에는 9곳의 광장과 수심 4∼5m의 물웅덩이 3개가 있으며,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鐘乳石)·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石筍)·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石柱) 등 다양한 동굴생성물이 고루 분포하고 있다.
성류굴은 원래 신선들이 한가로이 놀던 곳이라는 뜻으로 선유굴이라 불리었으나 임진왜란(1592) 때 왜군을 피해 불상들을 굴안에 피신시켰다는 데서 유래되어 성스런 부처가 머물던 곳이라는 뜻의 성류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임진왜란 때 주민 500여 명이 굴속으로 피신하였는데 왜병이 굴 입구를 막아 모두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울진의 성류굴에서는 지하 궁전과 같이 화려한 종유석과 석순, 석주 등 석회암동굴에서 볼 수 있는 매우 아름답고 다양한 생성물들을 볼 수 있다.
동굴 안에는 9곳의 광장과 수심 4∼5m의 물웅덩이 3개가 있으며,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鐘乳石)·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石筍)·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石柱) 등 다양한 동굴생성물이 고루 분포하고 있다.
성류굴은 원래 신선들이 한가로이 놀던 곳이라는 뜻으로 선유굴이라 불리었으나 임진왜란(1592) 때 왜군을 피해 불상들을 굴안에 피신시켰다는 데서 유래되어 성스런 부처가 머물던 곳이라는 뜻의 성류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임진왜란 때 주민 500여 명이 굴속으로 피신하였는데 왜병이 굴 입구를 막아 모두 굶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울진의 성류굴에서는 지하 궁전과 같이 화려한 종유석과 석순, 석주 등 석회암동굴에서 볼 수 있는 매우 아름답고 다양한 생성물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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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木+益지만, 폰트 문제로 부득이 약체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