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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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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의 역사에 대한 문서.

2. 건국 이전의 서고트족

2.1. 로마 제국의 봉신

2~3세기 흑해 해안가에 거주하면서 로마 제국을 상대로 침략을 일삼았던 고트족은 3세기 후반 무렵에 드네스트르 강을 사이에 두고 테르빙기(Thervingi) 족과 그뤼퉁기(Greuthungi) 족으로 분열되었다. 테르빙기는 고트어의 트리우(triu)에서 파생된 단어로, "숲 속의 사람들"을 의미하며, 그뤼퉁기는 "자갈이 많은 땅"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주로 그리스 출신이었던 역사가들이 고트족을 구별짓기 위해 자갈이 많은 흑해 해안가에 주로 살았던 고트인들을 '그뤼퉁기'라고 칭하고 숲속에 주로 사는 고트인들을 '테르빙기'라 칭했으리라 추정한다. 테르빙기족은 나중에 'Visigoths(서고트)'라고 칭했는데, 이는 "선한 고트인"이라는 뜻이다. 반면 그뤼퉁기는 'Ostrogoth(동고트)'라고 칭했는데, 이는 "고귀한 고트인"이라는 의미이다.

329년, 테르빙기의 왕 아리아리크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 제국의 모이시아와 트라키아 속주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출격해 이들을 격파하고 고티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받았다. 331년, 그는 사르마티아인들을 침략해 복속시킨 뒤 로마 제국에 속한 발칸 반도로 쳐들어와서 현지 로마군을 격파하고 각지를 황폐화시킨 뒤 돌아갔다.

332년 3월 또는 4월 초,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를 위시한 대규모 야전 기동대가 다뉴브 강에 새로 건설된 석조 다리를 건너 고트족의 영역으로 쳐들어갔다.( 콘스탄티누스의 고트족과 사르마티아 원정) 이들은 고트족 마을들을 불태우고 가축들을 포획했으며, 고트족이 쌓아뒀던 식량을 모조리 빼앗았다. 고트족은 급히 일찍이 복속시켜뒀던 사르마티아인들의 영역인 크림 일대로 도피했지만, 로마군이 거기까지 쫓아온데다 4월 날씨가 비정상적으로 추워서 상당수가 얼어죽자 어쩔 수 없이 로마군과 정면 승부를 벌였다. 4월 20일, 양군은 오늘날 불가리아 바르나 인근에서 격돌했는데, 전투 결과는 로마군의 완승이었다. 오리고 콘스탄티니 칙령에 따르면 10만에 달하는 고트족이 기아와 추위로 죽었고 다수가 전사하거나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로마 황제에게 평화를 청했고,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아들인 아오리크를 포함한 고급 인질을 받고 제국에 매년 공물을 바쳐야 하며, 40,000명의 병력을 로마군에 공급해 제국 국경 방비에 협조하게 하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이리하여 고트족은 제국의 봉신이 되었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원로원으로부터 고티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두 번째로 받았으며, "Debellatori gentium barbararum(야만인 근절자)"라는 새로운 칭호를 추가로 받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진 아오리크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고트족에 돌아왔을 것으로 추정되며, 340년대에 고트족을 이끌고 도나우 강을 건너 모에시아를 침략해 약탈을 자행했다. 두로스토로스의 악센티우스는 아오리크가 이끄는 고트족이 기독교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했다고 기술했다. 350년 콘스탄티우스 2세로부터 고트족의 왕으로 인정받고 보조금을 지불받는 대가로 로마 제국의 영역을 공격하지 않기로 하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아오리크의 뒤를 이어 테오빙기의 왕으로 등극한 아타나리크는 365년 프로코피우스 발렌스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프로코피우스와 손을 잡고 3천 병력을 파견했지만, 프로코피우스는 366년 5월 진압군에게 패한 뒤 부하들의 배신으로 생포된 후 처형되었다. 고트족 부대는 이 소식을 듣고 귀환했지만 도중에 로마군에게 제압당하고 억류되었다. 아타나리크는 발렌스에게 "프로코피우스가 자신을 로마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내세웠기에 콘스탄티누스와 맺은 협약에 따라 보조군을 파견했을 뿐이다"라며 그들을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발렌스는 묵살했다. 3천 명의 고트족 전사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아마도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에 분노한 아타나리크는 트라키아를 침략하며 지방의 농장과 포도밭을 약탈하고 교회를 파괴했으며, 기독교 신자들을 처참하게 죽였다. 발렌스는 이에 보복하고자 367년 봄에 도나우 강을 건너 고트족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아타나리크는 정면 대결은 필패라고 판단하고 험지에 숨은 채 적군이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허점을 찔러 급습한 후 반격이 들어오기 전에 사라지는 전법을 구사했다. 로마군은 일부 고트족을 죽이고 집과 들판, 농작물을 불태웠지만 고대했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발렌스는 367년 가을 카르마티아 산맥에 숨은 적을 박멸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귀환했다.

368년 봄, 발렌스는 원정을 개시하려 했지만 다뉴브 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중단했다. 그 대신, 그는 군대로 하여금 요새를 건설하게 했다. 369년, 강의 수위가 내려가자 원정을 재개했다. 아타나리크는 이번에도 같은 전술을 사용했지만, 로마군은 소규모 기동대를 각지에 파견하여 숨어있는 적을 포착하여 섬멸하는 전술로 맞대응했다. 아타나리크는 적이 분산된 점을 이용하여 지휘부가 있는 적군을 급습해봤지만 격파당했다. 하지만 발렌스 역시 적을 포위 섬멸하지 못했고, 전쟁은 소모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결국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하고 369년 9월 다뉴브 강 한 가운데의 배 위에서 아래의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1. 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모든 로마 인질을 돌려보낸다.
2. 로마인과 고트족의 교역은 도나우 강의 두 지점으로 제한한다.
3. 고트족은 로마로부터 보조금을 지불받는 대가로 보조군을 파견한다.
4. 로마는 고트족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고 더 이상 군사적 침략을 벌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로마 제국과 화해했지만, 여전히 로마 제국에 반감을 품고 있던 아타나리크는 고트족 내부에 스며든 로마의 국교인 기독교를 뿌리뽑고자 했다. 그는 선조들이 믿는 신에게 희생제를 바치고 신성한 형상을 세우라고 명령했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거주지와 함께 불태웠다. 이리하여 많은 기독교 고트인이 살해되었는데, 그 중에는 고트족의 저명한 귀족이었으며 훗날 성인으로 시성된 사바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 정책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프리티게른 알라비부스를 따르면서 고트족 전체가 양분되었다.

이후의 내전 양상이 어땠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지만, 프리티게른이 발렌스에게 아타나리크를 물리치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을 볼 때 아타나리크가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376년, 훈족이 고트족의 영역으로 쳐들어와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동고트족은 훈족에게 복속되었고, 서고트족은 훈족에 맞서 항전했으나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로마로 피신하려 했다. 아타나리크와 프리티게른 모두 발렌스에게 도나우 강 이남으로 이주하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얌전히 살겠으며, 훈족이나 다른 적이 침공한다면 제국의 포이데라티(외원군)가 되어 열심히 싸우겠다고 제안했다.

발렌스는 고심 끝에 지난날 제국을 침략하여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아타나리크와 휘하 고트족은 받아들이지 않고 프리티게른과 그의 추종자들만 제국 내로 진입하게 했다. 그리하여 프리티게른을 따르는 무리가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 제국의 영내로 들어왔고, 아타나리크는 도나우 강 이북의 고트족 영역에 남아 프루트 강과 도나우 강 사이에 방어선을 설치하고, 나중에 '아타나리크 성벽'으로 알려진 요새를 건설했다. 그러나 훈족의 침략은 이 정도 대비로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의 침략이 갈수록 가속화되면서 고트족의 터전이 모조리 파괴되고 수많은 인명피해가 양산되자, 대다수 고트족은 아타나리크를 버리고 프리티게른이 건너간 도나우 강 너머로 달아났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따르는 소규모 전사들과 함께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사르마티아 부족을 정복한 뒤 그곳에서 새력을 재건했다.

2.2. 고트 전쟁 트라키아 정착

모이시아 남부와 마케도니아 일부 지역에 정착한 프리티게른 휘하 75,000 가량의 고트인들은 부패한 관료였던 모이시아 총독 루피키누스와 트라키아 총독 막시무스 등의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발렌스 황제가 고트족을 지원하기 위해 보낸 식량과 재물을 착복했고, 무거운 과세를 매기고 이를 갚지 못한 가정에 쳐들어와서 고트인 여성과 어린이들을 노예로 팔아치웠다. 이에 반감을 품은 고트족 족장들은 황제에 호소하고자 했다. 발렌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본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는 연회를 가장하여 고트족 지도자들을 초대한 뒤 습격했다. 알라비부스 등 일부 지도자들은 현장에서 살해되었지만, 프리티게른은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동족들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프리티게른은 5천 남짓한 군사로 1만에 달하는 루피키누스의 로마군을 상대로 마르키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대파하고 루피키누스를 척살했다. 이때 동방 로마군 주력은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동부 국경에 집중 배치되어 있던 터라 고트족을 막을 여력이 없었고, 고트족은 2년 동안 발칸 전역을 휘저으며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상황이 이렇듯 악화되자, 발렌스는 서방의 황제이자 자신의 조카인 그라티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라티아누스는 자신이 직접 출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때마침 게르만족이 라인강 일대를 대거 도하했기 때문에 이들과 맞서 싸워야 해서 당분간 떠나지 못하고 프랑크족 출신의 부하 프리게리두스, 리코메르 등의 장군들이 우선 동방으로 파견되었다. 서방 지원군과 합세한 발칸 주둔 로마군은 아드 살리스 전투에서 동방의 보병장관 트라야누스와 서방 로마군 장군 리코메르 등의 지휘를 받으며 고트족과 접전을 벌였다. 암미아누스에 따르면, 양쪽 모두 피해가 막심했고 승부는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고트족의 기세는 잠시 주춤했고, 발렌스는 여세를 몰아 시리아 일대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를 떠나 378년 5월 30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378년 7월, 발렌스는 서방 로마군 소속 이탈리아 군대를 지휘한 세바스티아누스 장군을 선발대로 파견해 트라키아 주둔군을 재편성하게 했다. 세바스티아누스는 트라키아군을 재편성하고 2천 규모의 기병대를 이끌며 고트족을 습격해 하드리아노폴리스로 접근하던 고트족을 축출했다. 한편, 그라티아누스는 서방 로마군의 정예부대를 판노니아 일대로 진출시키다가 라인강 일대에 있던 알레만니족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급히 부대를 소환하여 아르겐타리아 근교에서 알레만니족을 격파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라티아누스의 합류가 늦어졌고, 발렌스는 적의 규모를 과소평가하여 자신이 단독으로 고트족과 맞붙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은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발렌스는 주요 지휘관들과 함께 전사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뒤늦게 발칸반도로 군대를 이동했으나 이미 상황은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다. 다뉴브 강 남부 일대는 고트족 무리들에게 파괴되었고 로마의 권위와 군사적 위신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게다가 그가 갈리아를 떠난 직후 게르만 종족들이 또다시 갈리아 침략을 계획하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이에 그라티아누스는 379년 1월 19일 테오도시우스 1세를 동료 황제로 삼아 제국 동방을 맡겼다. 테오도시우스는 고트족과 일전을 벌여 미친듯이 날뛰던 그들을 어느정도 저지했다.

381년 1월, 트란실바니아에서 조용히 지내던 아타나리크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갑작스럽게 방문했다. 6세기 동로마 제국 역사가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그는 테오도시우스와 평화를 협상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고트족이 로마를 위해 싸워줄 테니 정착시켜달라고 요청하러 찾아왔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 조시무스 역시 이에 동의한다. 반면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그는 동족들에 의해 추방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망명했다고 한다. 테미스티우스 역시 그를 난민이자 탄원자로 묘사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아타나리크를 환영식에 초대해 융숭한 대접을 했다. 아타나리크는 2주 후 사망했고, 테오도시우스는 죽은 왕을 위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게 했다. 그의 무덤은 무척 화려했으며 고트족의 방식으로 지어졌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렇듯 자기들의 전 왕에게 융숭한 대접을 한 것에 감명을 받았는지, 서고트족은 382년 테오도시우스 1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들은 모이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보조금을 지원받는 대가로 로마군에 보조병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후 로마군에 고트족 출신 장군들이 대거 기용되어 테오도시우스 1세의 지휘하에 맹활약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알라리크였다.

2.3. 알라리크의 여정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의 유력한 가문인 발티(Balti) 가문 출신으로, 젊을 때부터 로마군에 종군하면서 상당한 역량을 발휘했다. 394년 프리기두스 전투 때 2,000명의 서고트족을 이끌고 서로마 황제 에우게니우스와 권신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의 서로마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로마 제국을 통합했으나, 395년 초 부종으로 사망했다. 이후 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 호노리우스가 각각 다스리는 동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으로 분할되었다. 두 황제 모두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은 법률가이자 재상 루피누스가 섭정을 맡았고, 서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최측근 무장이었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섭정했다.

알라리크는 제국의 정규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되기를 희망했으나 루피누스에게 거부당하자 반감을 품었다. 마침 동족들이 루피누스의 잦은 보조금 미지급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알라리크는 이들의 지도자가 되어 왕을 칭했다. 알라리크는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까지 진격했지만, 탄탄한 방어력을 갖춘 그곳을 공격하진 않고 그리스로 진격했다. 테르모필레를 돌파한 알라리크는 그리스 전역을 휩쓸면서 동로마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때 아르카디우스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스틸리코가 그리스에 상륙하여 알라리크를 저지했다.

루피누스는 스틸리코에게 군대를 넘기고 돌아가게 했지만, 스틸리코가 넘긴 군대에 의해 살해당하고 환관 에우트로피우스가 권력을 장악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휩싸이자, 알라리크는 이 기회를 틈타 그리스로 재진격, 아테네, 아티카, 스파르타, 코린트를 위시해 고대 지중해 문명의 중심지로 알려진 여러 도시를 휩쓸면서 '정복자'라고 자처했다. 그러나 397년 스틸리코가 재차 그리스로 진격해 알라리크를 폴로이 일대에서 포위했다. 자칫하면 섬멸당할 뻔한 위기였지만, 스틸리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철수한 덕분에 포위망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코린트 해안을 거쳐 에페이로스 일대로 진격했다. 이후 동로마 궁정과 협상한 결과 일리리쿰 일대의 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알라리크는 일리리쿰 군 사령관으로서의 직책을 잘 활용해 동로마 제국의 병기창을 마음껏 가동하여 병사들을 무장시켰고,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을 끌여들어 병력을 증강했다. 401년, 그는 마침내 이탈리아 침공을 결심했다. 우선 동고트족 지도자 라다가이소와 동맹을 맺고 갈리아를 먼저 침공하게 했다. 스틸리코가 야전군을 이끌고 라다가이소를 상대하러 간 사이, 알라리크는 곧바로 북이탈리아로 진입해 호노리우스 황제가 머물고 있던 밀라노 인근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스틸리코가 라다가이소의 무리를 섬멸하고 한 겨울의 강행군을 감행해 밀라노로 귀환했고, 플렌티아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알라리크의 군대를 대파했다.

알라리크는 일단 물러섰다가 다른 게르만 부족들과 연합하여 군세를 회복한 후, 스틸리코에게 화의를 청하고 퇴각해 그를 방심시켜 놓은 후 이탈리아를 재침하려 했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이를 간파해 알라리크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비밀리에 추격했다. 그리하여 403년 초 베로나 근교에서 스틸리코에게 또다시 참패했고, 알라리크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일리리쿰으로 물러났다. 그 후 일리쿰에서 병력 회복에 힘을 기울이던 알라리크는 408년 서로마 제국의 동맹자가 되기를 청하면서 그 대가로 금 4,000 파운드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스틸리코는 라인 강을 비롯한 각 전선에서 증대되는 게르만족의 압박을 타개하려면 알라리크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408년 8월, 서로마 제국에서 정변이 일어나 스틸리코가 반역죄로 처형되고 스틸리코를 따르던 게르만 출신 장성과 가족들이 모조리 학살당했다. 이에 로마군 내 게르만 외원군(포이데라티)는 이탈리아를 떠나 알라리크에게 귀순했는데, 그 수가 3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병력 재건을 완료한 알라리크는 친구이자 동맹자인 스틸리코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탈리아를 전격 침공해 408년 9월 로마를 포위했다. 호노리우스는 이를 막을 병력이 없어서 라벤나에서 수수방관했고, 로마 원로원은 알라리크와 협상한 끝에 포위를 풀고 로마의 동맹자가 되는 대가로 금 5,000파운드, 은 30,000파운드, 향료 3,000파운드, 비단옷 4,000벌, 주홍빛으로 염색한 가죽 3,000벌을 바쳤다. 또한 알라리크는 호노리우스에게 물러나는 조건으로 부족민들을 도나우 강 남안과 베네치아 해안에 이르는 영토에 정착시키는 걸 허락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호노리우스는 동로마 제국에서 보낸 원군이 라벤나에 입성하자 안심하고 알라리크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더해 군대를 파견해 고트군의 후미를 치게 했다. 알라리크는 로마군을 가볍게 격파한 뒤 409년 로마로 재포위했다. 그는 호노리우스를 좀더 압박하기로 마음먹고, 원로원을 압박하여 로마 시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치안 장관)이었던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새 황제로 내세웠다. 하지만 로마 시민들이 별로 호응하지 않았고, 호노리우스가 끝까지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서 로마로 들어가던 곡물을 함대로 차단하기까지 하자, 결국 알라리크는 410년 아탈루스를 폐위하고 황제의 의복을 벗겨서 호노리우스가 있는 라벤나로 보내 협상을 다시 하자고 제안했다.

호노리우스와 알라리크는 라벤나에서 12km 떨어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호노리우스가 일방적으로 협상을 깨고 사루스를 시켜 알라리크를 급습하게 했다. 알라리크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뒤, 더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로마 약탈을 감행하여 아우구스투스 영묘를 비롯하여 역대 황제의 무덤을 도굴하고 많은 재물을 약탈한 뒤, 아탈루스, 갈라 플라키디아 등 주요 인사들을 포로로 삼아 끌고 갔다. 알라리크는 여세를 몰아 아피아 가도를 따라 캄파니아로 이동하여 시칠리아로 가려 했지만, 함대가 폭풍우로 침몰하면서 실패했다. 이에 작전을 중단하고 북상하던 중 병에 걸려 코센차에서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부족민들에게 안전한 땅을 찾아 주지 못해 괴로워했다고 한다.

2.4. 험난한 정착 과정

파일:로마 제국 말기 이민족 침략도.png
게르만 민족 대이동 시 서고트족은 불가리아, 그리스, 발칸,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남부 유럽을 헤집고 다녔다. (반달족보다 훨씬 더 많이 움직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isigoth_migrations.jpg
376년에서 418년까지 서고트족의 이동 경로

알라리크 사후, 알라리크의 누이와 결혼하면서 발티 가문의 일원이 되었던 아타울프가 서고트 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앞으로 어찌할 지 고심한 끝에 아우렐리아 가도를 통해 서해안을 따라 행군하면서 캄파니아, 라티움, 에트루리아, 리구리아 일대를 철저히 약탈했다. 로마군은 이에 대해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고, 많은 피난민들이 이들을 피해 이탈리아에서 북아프리카, 심지어 예루살렘으로 도망쳤다.

412년 초, 아타울프는 파다나 평원에 도착한 뒤 토리노 근처에 잠시 정착한 후 이탈리아를 떠날 채비를 했다. 2월 말이나 3월 초에 무리를 이끌고 포 강의 지류인 도라 리파리아 강을 따라 몽제네브르 고개를 통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 갈리아에 진입했다. 이후 아를 인근에 도착한 그는 갈리아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있던 요비누스와 협상하여 거주지를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요비누스는 지난날 알라리크와 아타울프를 죽이려 했던 시루스에게 옹립된 처지였던 터라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급기야 요비누스는 사루스의 동생 세바스티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다.

요비누스로부터 어떤 것도 얻지 못하게 되자, 아타울프는 호노리우스와 손을 잡기로 했다. 그는 호노리우스에게 반역자들을 물리쳐주고 로마와 동맹을 맺겠다고 제안하면서, 그 대가로 아키텐에 정착하고 곡물과 보조금을 받겠다고 요청했다. 호노리우스는 이 제안을 수락했고, 아타울프는 10,000명의 고트군을 이끌고 사루스를 공격해 주살한 후 413년 발렌티아에서 요비누스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요비누스와 세바스티아누스는 포로로 집한 뒤 나르보로 끌려가 참수되었고, 그들의 수급은 8월 말 라벤나에 거주하는 호노리우스에게 보내졌다.

그러나 아프리카 총독 헤라클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곡물 운송이 끊어지면서, 로마 정부는 곡물을 보내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그는 나르보, 톨로사, 보르도를 점령했다. 그해 말 마르세유를 공격했으나 보니파키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퇴했고 전투 도중 부상을 입었다. 이후 향후 거취를 놓고 고심한 끝에 414년 초 갈라 플라키디아와 결혼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황녀와 혼인함으로써 로마인들의 지지를 얻어내어 독립 왕국을 이루길 희망했다. 그해 말 콘스탄티우스 3세가 이끄는 로마군이 아를을 봉쇄하자, 그는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보르도에서 다시 로마 황제로 선임했다. 그러나 해상 봉쇄로 인해 기근이 갈수록 심해지자, 414년 늦여름이나 초가을에 히스파니아로 이동하기로 했다.

아타울프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해안 지대의 도미티아 가도를 따라 이동하여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뒤 그곳에 궁정을 세우고 갈리시아에 정착했던 반달족을 격파하고 세력을 확대했다. 또한 바르셀로나에서 갈라 플라키디아로부터 아들을 낳고 아내의 아버지인 테오도시우스 1세를 기려 '테오도시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아이가 몇 달만에 사망하면서, 로마인들의 협조를 받으려 했던 그의 계획이 틀어졌다. 귀족들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풍요로운 아프리카로 진출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호노리우스와 협상할 여지를 마련하고 싶었기에 거절했다. 이에 아직도 로마와의 협상에 연연하는 그에 대한 반감이 귀족들 사이에서 확산되었다.

415년 8월 14일, 아타울프는 궁전 마구간에서 말을 보살피던 중 두비우스 또는 에버울프라는 이름의 하인에게 살해되었다. 이 인물은 아타울프에게 주살된 사루스의 추종자였다고 전해진다. 그가 살해된 뒤 사루스의 형제였던 시게리크가 서고트족의 새 지도자가 되었다. 시게리크는 아타울프가 첫번째 결혼을 통해 낳은 다섯 아이들을 모두 죽이게 했으며, 아타울프의 두번째 부인이자 로마 제국의 공주 갈라 플라키디아를 학대했다. 그는 갈라에게 말을 탄 자신을 뒤에서 따라가며 성벽 출구에서 도심까지 12마일을 걸어가게 했다. 이는 로마 제국이 이방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개선식을 개최하는 것을 따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415년 8월 22일 왕위에 오른지 7일만에 아타울프를 추종하던 이들에게 살해되었고 왈리아가 새 왕으로 선포되었다.

왈리아는 식량난에 시달리는 서고트족을 구하려면 풍요로운 아프리카 속주로 이주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지브롤터 해협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수송 함대가 강력한 폭풍에 휩쓸려 완전히 파괴되는 바람에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이에 방향을 돌려 416년 서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때 로마의 실권자 콘스탄티우스 3세 갈라 플라키디아 공주를 라벤나로 돌려보내라고 요청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여 갈라를 보내줬다. 이후 북아프리카에서 식량을 운송해온 로마 선박들이 도착하면서, 서고트족의 식량난은 해소되었다.

왈리아는 로마와 군사 동맹을 맺고 416년부터 418년까지 콘스탄티우스 3세의 히스파니아 탈환 작전에 참여했다. 로마-서고트 연합군은 베티카로 진군해 실링기아 반달족을 물리친 뒤 그들의 왕 프레디발을 체포해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압송했다. 이후 알란족을 격파하고 그들의 왕 아다크를 주살했다. 이에 실링기아 반달족과 알란족은 반달 왕국 군데리크에게 복종하고 더 이상 독자적인 왕을 선출하지 않았다.

로마는 작전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서고트족이 아퀴타니아 세군다와 나르본 등 남부 갈리아 일부 지역에 정착하는 걸 허락했다. 이리하여 서고트족은 툴루즈에서 보르도까지 이어지는 일대에 정착했고, 추가로 남쪽의 피레네 산맥에서 루아르까지 이어지는 대서양 연안 지대를 확보했다. 이 지역은 406년 아모리카의 바가우다이(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래 10년간 서로마 제국의 통제에 불응해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417년 엑수페란티우스가 이끄는 토벌군에게 진압된 곳으로, 콘스탄티우스 3세는 로마의 우방이 된 이들을 이 불안정한 지역에 정착시켜서 로마의 안보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로서 알라리크 이래 오랜 세월 각지를 정차없이 떠돌아야 했던 서고트족은 툴루즈를 중심지로 삼아 정착했고, 서고트 왕국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개막했다.

3. 툴루즈 왕국

3.1. 테오도리크 1세 토리스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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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년경 로마 제국. 프랑스 서남쪽의 핑크색이 서고트 족에게 할당된 영토였다.[1]

418년 말, 서고트 족 정착에 성공한 왈리아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사망하고 알라리크의 사생아로 알려진 테오도리크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선대가 확보한 땅에 동족을 정착시키고자 토지 분배에 관한 법전을 반포했다. <심판의 책(Liber Iudiciorum)>으로 명명된 이 법전에서는 서고트인이 전체 토지의 1/3을 받고 나머지는 로마인들이 가지도록 했으며, 로마인과 서고트족 사이의 토지 상속시 서고트족의 권리를 우선시했다. 다수의 학자들은 이로 인해 기존에 땅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 상당수가 토지를 강제 몰수당했으며, 이는 로마인과 고트족간의 갈등을 부추겼다고 본다. 하지만 W.고파르트 등 일부 학자들은 분배된 땅은 전쟁으로 인해 버려지거나 소유자가 없거나 사용되지 않는 황무지였으며, 농사에 익숙하지 않은 고트족이 새로 받은 농지를 로마인들을 고용해 경작하게 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421~422년 카스티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보조군을 파견해 히스파니아의 반달족과 싸우게 했다. 그러나 바이티카 전투에서 도중에 서고트군이 이탈해버리는 바람에 로마군이 패배했다. 볼프람에 따르면, 로마에게 정착을 허락받는 대가로 군대를 지원해야 하고 로마 황제에게 정치적으로 종속되어야 하는 점에 불만을 품은 테오도리크가 전투 도중에 배신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후 서고트군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상당한 영역을 확보했다. 423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후 요안네스 발렌티니아누스 3세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면서 서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그는 이 때를 틈타 갈리아 남부 해안으로 진격하여 425년 나르본과 프로방스를 공략한 뒤 아를 시를 포위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집권한 뒤 파견한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휘하 로마군의 반격으로 아를 공략에 실패하고 툴루즈로 후퇴했다.

그 후 서로마 제국과 재협상한 끝에 아키타니아 세쿤다와 나르보네사 프리마 북서쪽 영역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는 대신 지난 전쟁 때 정복한 땅을 반환했다. 430년 재차 아를 공략을 시도했지만 아에티우스가 개입하자 포기했고, 이후 양자는 한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던 435년 갈리아에서 바가우다이(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436년 부르군트족이 갈리아 벨키카를 침공했다. 이리하여 서로마 제국의 갈리아 패권이 흔들리자, 그는 이 때를 틈타 로마와 동맹을 끊고 나르본을 포위 공격했다. 아에티우스는 훈족으로부터 기병 지원을 받아낸 뒤 437년 아에티우스는 부르군트족을 쳐부수고 평화 협약을 맺어 제네바 호수 인근으로 이주시킨 뒤, 자신은 바가우다이 토벌을 맡으면서 부관 리토리우스를 파견해 테오도리크와 싸우게 했다.

리토리우스는 훈족 분견대의 협력으로 나르본에서 서고트족을 격파하고 툴루즈까지 쳐들어갔다. 테오도리크는 툴루즈에서 농성했으나 무력으로 승리할 가망이 없자 가톨릭 주교에게 중재를 맡겼다. 그러나 리토리우스는 협상을 거부하고 공성전을 이어갔다. 서고트인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끝까지 항전하다가 리토리우스를 생포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고, 테오도리크는 며칠 뒤 리토리우스를 처형했다. 이에 아에티우스는 부관 아비투스를 툴루즈로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고, 그는 로마와 계속 대적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받아들였다.

429년 아프리카 속주를 로마로부터 빼앗은 반달 왕국 가이세리크는 아들 후네리크를 테오도리크의 딸과 결혼시켰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반달 왕국의 지원을 받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442년, 가이세리크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황제의 딸 에우도키아와 자기 아들을 약혼시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가이세리크는 방해가 된 며느리를 제거하기로 하고, 444년 며느리가 아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코와 귀를 잘라버린 뒤 서고트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첫번째 결혼 동맹이 실패하자, 수에비 왕국과 접촉하여 449년 수에비 왕 레치아르와 또다른 딸을 결혼시켰다. 레치아르는 툴루즈로 가는 길에 서고트 분견대의 지원을 받고 사라고사 일대를 약탈하고 일레르다를 공략했다.

451년 훈족의 왕 아틸라가 갈리아를 침략하자, 아에티우스는 아비투스를 툴루즈로 보내 지원을 호소했다. 그는 아틸라가 승리한다면 갈리아에 어렵게 정착한 동족의 입지는 위태로워진다고 판단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에티우스와 합세하기로 했다. 그는 장남 토리스문드를 대동한 채 로마군과 합세했고, 로마-서고트 연합군은 카탈라우눔으로 향했다. 451년 6월 20일, 연합군은 훈족군과 격전을 벌였다.( 카탈라우눔 전투) 이 전투에서 로마-서고트 연합군이 승리하여 적을 진영에 가두었으나, 그는 전투 도중에 전사했다.

뒤이어 서고트군 지도자가 된 토리스문드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어했지만, 아에티우스는 서고트군이 이대로 훈족을 격멸하면 갈리아 내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 테고 자신의 기반이 훈족에 있기도 했기에 "왕위 계승을 확고히 하려면 서둘러 본국에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권유했다. 토리스문드는 이를 받아들여 툴루즈로 돌아가 왕위에 올랐다. 52년 아틸라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와서 아에티우스가 이를 저지하고자 이탈리아로 향한 틈을 타, 루아르 중류 지역에 정착한 로마의 동맹 부족인 알란족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뒤이어 로마인들이 소유한 비옥한 론 계곡을 탈취하고자 론 강 계곡의 중심지인 아를을 공략하려 했다. 마침 도시의 행정관 페르욜이 그를 아를에 초대하여 점심을 제공하자, 그는 이 때를 틈타 도시를 장악하여 서고트 왕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후 아에티우스가 파견한 로마군이 서고트군을 매복 공격해 격퇴하고 아를을 탈환했다.

형제 테오도리크 2세와 프레데리크는 로마와의 평화로운 공존을 깨뜨려서 공연히 전란으로 몰아넣은 그에게 반감을 품고 정변을 꾀했다. 결국 453년, 두 형제의 사주를 받은 아스칼 등 여러 하인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음모자 중 한 명을 죽이고 손에 들고 있던 의자를 휘둘러 여러 음모자들을 제압했지만, 끝내 아스칼이 내지른 단검에 찔러 죽었다. 그 후 테오도리크 2세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고 왕위에 올랐다.

3.2. 테오도리크 2세 에우리크

테오도리크 2세는 왕위에 오른 뒤 서로마 제국과 화해했고, 454년 프레데리크를 시켜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에서 일어난 바가우다이(농민) 반란을 진압했다. 455년 아에티우스를 살해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아에티우스의 부하들에게 피살된 뒤 새 황제에 오른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아비투스를 툴루즈로 파견했다. 그는 스승이자 친구인 그를 정성껏 대접하며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얼마 후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이 로마로 쳐들어왔고, 페트로니우스 황제가 도망치다가 시민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아비투스는 속주민들과 갈리아 주둔 로마군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칭했고, 그는 아비투스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아비투스는 자신을 도와준 그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서고트 왕국이 세력을 히스파니아로 확장하는 걸 용인했다.

이렇게 아비투스의 승인을 얻어낸 뒤, 456년 히스파니아로 진격해 캄포스 파라무스 전투에서 레치아르 왕이 이끄는 수에비군을 격멸하고 브라가를 수에비 왕국으로부터 탈취한 뒤 메리다를 함락시켰으며, 457년에 아스토르가와 팔렌시아를 약탈했다. 수에비 왕국은 서고트 왕국의 맹공으로 수도 브라가를 빼앗겨 지리멸렬한 상태로 전락했다. 그 후 테오도리크 2세는 아키텐으로 귀환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서쪽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수네리크 공작과 키릴라에게 해당 지역의 방위를 일임했다

그런데 456년 10월, 플라비우스 리키메르가 반란을 일으켜 아비투스를 폐위했다. 그 후 리키메르는 1년 가까이 뜸을 들이다가 로마군이 이탈리아에 침공해온 알레마니족을 격퇴하고 돌아오던 마요리아누스를 방패에 올려서 황제로 추대하자 457년 4월 1일에 마요리아누스를 정식으로 로마 황제로 옹립했다. 테오도리크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마요리아누스를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적대했다. 이에 마요리아누스는 서고트 왕국과 맞서 싸우기로 하고 458년 말에 군대를 이끌고 남부 갈리아로 진군했다. 이후 마요리아누스의 군대는 서고트 왕국의 군대를 격파했고 남부 갈리아를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결국 그는 마요리아누스를 황제로 용인하고 마요리아누스가 확보한 영토를 인정해야 했다.

459년, 마요리아누스는 여세를 몰아 히스파니아 탈환에 착수했다. 그는 네포티아누스와 수니에리치 장군을 파견해 히스파니아에 거주하던 수에비족을 격파하게했다. 두 장군은 루쿠스 아우구스티에서 수에비족을 격파하고 스칼라비스를 점령했다. 그 동안 마요리아누스는 사라고사를 거쳐 히스파니아 깊숙히 진군해 카르타기니엔시스까지 나아갔다. 이리하여 로마는 히스파니아에서의 종주권을 되찾았고 서고트 왕국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던 461년, 반달 왕국으로부터 아프리카 속주를 되찾기 위해 카르타고노바에 함대를 집결시켰던 마요리아누스는 반달 왕국의 군주 가이세리크의 급습으로 다수의 함대가 파괴되는 참패를 당했다. 이후 이탈리아로 귀환하다가 리키메르에 의해 긴급 체포되어 폐위된 뒤 며칠간 고문당한 끝에 살해되었다.

마요리아누스가 비참하게 죽자, 그에 의해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던 네포티아누스는 리키메르에 의해 새 황제로 선임된 리비우스 세베루스에게 복종하길 거부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었다. 하지만 얼마 후 테오도리크 2세의 침공으로 축출되었고, 로마 관리 아르보리우스가 새 총독으로 임명되어 서고트 왕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한편 역시 마요리아누스에 의해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아에기디우스도 리비우스 세베루스에게 복종하는 걸 거부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꾸렸다.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그를 제압하기 위해 자신의 추종자인 아그리피누스를 갈리아로 파견하여 아에기디우스의 권력을 대체하게 했다. 아그리피누스는 테오도리크 2세에게 접근해 자신을 도와준다면 나르본 시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안 그래도 나르보 시를 공략하고 싶었던 그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프레데리크를 시켜 아에기디우스를 치게 했다. 그러나 아에기디우스는 오를레앙 전투에서 고트족을 격파했고, 프레데리크는 전사했다. 아에기디우스는 가이세리크와 연합하여 이탈리아와 서고트 왕국에 대한 동시 공격을 계획했다. 하지만 464년 가을 아에기디우스가 역병으로 사망하면서 서고트 왕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테오도리크 2세는 적들이 아에기디우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혼란한 틈을 타 루아르 중류 일대를 공략했다.

466년, 그는 툴루즈에서 살해당했다. <사라고사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부하들에게 칼에 찔러 죽었다고 한다. 세비야의 이시도로스는 동생 에우리크가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했다. 요르다네스는 그는 자연사했지만 에우리크가 지나치게 서둘러서 왕이 되었기에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기술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에우리크는 466년과 467년에 수에비 왕국, 반달 왕국,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들로부터 인정받았다. 다만 467년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과 연합하여 반달 왕국을 공격했을 때, 그가 보낸 사절단은 군대를 따라가다가 도중에 귀국했다. 로마와 반달 왕국과의 분쟁에 섣불리 개입하고 싶지 않은 그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467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안테미우스는 서고트 왕국의 국력이 신장되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부르군트족, 브류타뉴인, 갈리아 총독 아에기디우스, 라인 강 연안 지대의 프랑크족과 연합하여 반 고트 전선을 형성하려 했다. 여기에 히스파니아의 친 로마 세력과 수에비 왕국도 끌여들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에우리크는 반 고트 동맹이 결성되기 전에 행동에 나섰다. 468년, 그는 루시타니아를 장악하고 있는 수에비 왕국으로 쳐들어가 대규모의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수에비 왕 레미스문트는 고트족에 대항하기 위해 안테미우스 황제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얼마 후, 안테미우스는 갈리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을 맡고 있던 아르반두스가 자신을 상대로 반역을 꾀했다는 고변을 접했다. 이에 따르면, 아르반두스는 서고트 왕 에우리크에게 자신이 제위를 차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갈리아를 루아르 강을 경계로 부르군트족과 양분해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했지만, 안테미우스는 즉시 아르반두스를 체포해 처형했다. 이 소동으로 갈리아 방면 로마군이 일시적으로 행동 불능 상태가 된 사이, 브르타뉴의 왕 라이오타메가 1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부르주 인근으로 진군해 로마군과 합세하려 했다. 에우리크는 즉시 이들을 공격해 데올(현재 샤토루 교외)에서 격파했고, 브르타뉴 잔당들은 부르군트족의 영역으로 도피했다.

에우리크는 이제 로마가 장악하고 있는 남부 갈리아로 방향을 돌렸다. 470년 론 강을 건넌 그의 군대는 지중해 연안까지 진군했다. 당시 안테미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권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와 분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서고트 왕국이 남부 갈리아를 전부 차지하는 걸 내버려뒀다간 서로마 제국은 끝장이라고 여기고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 군대는 471년 초여름 에우리크에게 섬멸되었고, 안테미우스의 아들을 포함한 모든 지휘관이 전사했다. 이리하여 서고트군은 리옹, 아를, 아비뇽, 오를레앙, 발랑스, 생폴트루아사토까지 접수했다. 부르군트족이 반격에 나서 발랑스 남쪽의 론 강 좌안 지대에서 고트군을 격퇴했지만, 고트군은 후퇴하면서 초토화 전술을 사용했고, 이 지역에 살던 로마인들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후 도시 주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와 아비투스의 아들인 에키디우스가 버틴 클레르몽을 제외한 아키텐 속주 대부분이 서고트 왕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472~473년, 에우리크가 이끄는 서고트군은 2개 부대로 나뉜 채 히스파니아 남부로 진격했다. 한 부대는 팜플로나와 사라고사를 점령했고, 다른 한 부대는 지중해 해변 도시와 '먼 히스파니아 속주'의 수도인 타라고나를 점령했다. 에브로 계곡의 로마 귀족들이 연합군을 편성해 맞섰지만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리하여 서로마 제국은 히스파니아를 영영 잃어버렸고, 서고트 왕국은 히스파니아 북서쪽의 수에비 왕국과 북쪽의 바스크 지역을 제외한 히스파니아 전역을 차지했다. 히스파니아 정벌을 달성한 뒤, 그는 갈리아로 눈길을 돌렸다. 473년 마르세유를 함락했고, 자신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은 로마인들을 탄압했다. 그는 독실한 아리우스파 신자로, 니케아 공의회가 정한 삼위일체론을 신봉하는 자들을 철저하게 박해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사제들을 감옥에 던져넣고 주교들을 추방하거나 칼로 찔러 죽였으며, 교회 입구에 가시를 심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또한 에우리크가 가혹한 탄압을 가하는 과정에서 보르도, 로데스, 페리괴, 리모주, 자볼스, 코밍게스, 오즈, 바자스, 그리고 오슈 시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475년, 로마 제국의 새 황제 율리우스 네포스로부터 서고트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으라는 지시를 받은 파비아 주교 에피파니우스가 툴루즈에 찾아왔다. 에피파니우스는 서고트 측이 로마가 갈리아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로마의 봉신을 자처한다면, 황제는 그들이 지금까지 확보한 영역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에우리크는 자신은 황제를 '주인'이 아닌 '친구'라고 부를 것이라고 답했다. 에피파니우스는 이에 동의했고, 아키텐 속주에서 유일하게 서고트 왕국의 공세로부터 버텼던 클레르몽이 고트족에게 넘겨졌다. 이제 론 강 동쪽과 뒤랑스 강 남쪽 지역만이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 남았다.

이리하여 남부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대부분의 지배권을 확보한 뒤, 그는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고 내치에 전념했다. 그는 고트족 내부에서 전해지는 관습법들을 엮은 성문법전을 반포했으며, 나르본의 레오 등 저명한 로마인들을 측근으로 기용했다. 또한 정교(카톨릭)를 탄압하는 한편 아리우스파의 교리를 뿌리내리기 위해 점령지 곳곳에 교회를 신설했다. 한편 주변 세력과 사신을 주고받았는데,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에 따르면 사산 왕조의 사절도 이 시기에 툴루즈 궁정에 찾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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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에우리크의 치세 때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히스파니아 북서부의 수에비 왕국은 지리멸렬했고, 프랑크 왕국은 라인강 연안에 국한되었으며, 부르군트 왕국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왕국 역시 서고트 왕국에 한 수 접어야 했다. 그러나 484년 에우리크가 자연사한 후 프랑크 왕국에서 클로비스 1세라는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면서, 강대했던 서고트 왕국은 위기에 직면한다.

3.3. 알라리크 2세 부이예 전투

에우리크 사후 아들 알라리크 2세가 즉위했다. 당시 서고트 왕국의 입지는 탄탄했다. 에우리크의 정복 전쟁으로 히스파니아 대부분과 남부 갈리아를 석권했으며, 로마 제국이 건재하던 시기 우수한 밀 생산지로 정평났던 프로방스 일대는 서고트 왕국의 영역으로 귀속된 후에도 여전한 생산력을 보여 국가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또한 로마 가도는 이 시기에도 건재하여 원활한 물자 운송을 가능케 해주었기에 활발한 상업 활동과 대외무역이 이뤄졌다. 시오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등 여러 연대기 작가들은 서고트 왕국이 지극히 부유했으며 자원이 풍부했다고 서술했다.

그는 이러한 왕국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피레네 산맥의 통행을 보장하고 히스파니아 일대를 통제하기 위해 에흐-슈흐-라두흐(Aire-sur-l'Adour)에 별도로 궁전을 세웠으며, 오도아케르를 꺾고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한 뒤 강성해지고 있는 동고트 왕국 테오도리크 대왕과 동맹을 맺기 위해 대왕의 딸 테오데고타와 결혼하여 아들 아말라리크를 낳았다. 이와 별도로 알려지지 않은 여인에게서 게살레크를 낳았지만 사생아로 취급되었기에 왕위 계승권은 아말라리크에게 돌아갔다.

한편, 그는 아버지 에우리크와 대다수 서고트 귀족들처럼 아리우스파였지만, 정교 신자들에 대한 에우리크의 박해 정책을 중단하고 시게리우스가 아를의 주교로 선임되는 것을 인정했다. 또한 로마인과 고트인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법전을 만들고자 아니아누스가 이끄는 법전 편찬 위원회를 설립해 로마법과 고트법의 장단점을 분석하여 장점을 취하고 단점은 배제한 신법을 제정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506년 2월 2일에 반포된 법전은 <브레비아리움 알라리키아눔(알라리크의 서약서)>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갈리아 북부에서 프랑크 왕국의 세력이 급격히 신장하면서 평온했던 왕국에 전운이 감돌았다. 481년 왕위에 오른 프랑크 왕 클로비스 1세는 486년 수아송 전투에서 로마계 군벌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했다. 시아그리우스는 전장에서 탈출한 뒤 알라리크 2세에게 귀순했다. 이에 클로비스 1세가 시아그리우스를 내놓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자,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그는 시아그리우스를 프랑크 왕국에 넘겨줬고, 시아그리우스는 곧바로 처형되었다. 클로비스 1세는 뒤이어 갈리아 북동부에 있는 튀링겐족을 제압하고, 라인 강 상부와 중부에 부르군트족 알란족을 제압했다. 그러던 중 랭스에서 부하 3,000명과 함께 정교로 개종하면서, 로마 교회와 갈리아 현지민들의 지지를 받고 가톨릭 주교들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았다.

이제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은 서고트 왕국과 국경을 마주할 정도로 강성해졌고, 서고트 왕국 내의 정교 신자들은 클로비우스에게 귀순하기를 희망했다. 비록 알라리크 2세가 그들에게 온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서고트 왕국 수립 이래 수십 년간 천대받았고 에우리크 치세 때 가혹한 박해를 당했던 그들이 그 정도로 회유될 리 없었고, 각지에서 서고트 왕국의 지배에 반항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그는 506년 루아르 강 중류의 한 섬에서 클로비스 1세와 만나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낭트, 앙제, 투르, 오를레앙을 프랑크 왕국에 넘겨준 것으로 보인다. 이 도시들은 루아르 강 하류에 위치한 주요 도시였는데, 주민들은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는 서고트 족에게 지극히 적대적이었다. 알라리크 2세는 아마도 통제가 안 되는 이 땅을 프랑크 왕국에게 넘겨주면서 전쟁을 모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클로비스 1세는 불가침 조약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부르군트 왕국의 군주 군도바트와 군사 동맹을 주선했다. 이는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이 사위인 알라리크 2세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걸 사전에 차단하는 역할을 부르군트 왕국에 맡기려는 계획으로 추정된다. 이후 507년 2월이나 3월 초에 프랑크 왕국 전역에 군대 동원 명령을 내렸고, 이른 봄에 루아르 강을 건너 아키텐으로 진격했다. 알라리크 2세는 프랑크군이 조약을 깨고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푸아티에에 군대를 집결했다. 양군은 507년 8월 부이예 평원에서 결전을 치렀다.

부이예 전투는 서고트 왕국의 재앙이었다. 고트군은 프랑크군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밀려 섬멸되었고, 알라리크 2세는 전사했다. 프랑크군은 여세를 몰아 보르도를 포함한 아키텐 전역을 휩쓸었고, 서고트 왕국의 수도인 툴루즈도 함락하여 왕실의 숱한 보물을 노획했다. 클로비스 1세는 내친 김에 서고트 왕국 전체를 정복하려 했지만, 테오도리크 대왕이 사절을 보내 그러지 말라고 권하자, 아키텐만 얻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3.4. 발티 왕조의 단절

부이예 전투 직후, 서고트 귀족들은 알라리크 2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아말라리크는 아직 어려서 난국에 처한 왕국을 이끌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알라리크 2세의 사생아였던 게살레크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 그는 프랑크군에 의해 함락당한 툴루즈 대신 나르본을 새 수도로 삼았다. 얼마 후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은 부르군트 왕국군이 나르본을 함락시켰고, 그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르셀로나로 도피해 그곳을 새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부르군트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르셀로나를 공격하자, 그는 이에 맞섰으나 참패당하자 히스파니아 내륙으로 도주했다.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은 처음에는 그가 서고트 왕이 되는 걸 용인했지만, 연이은 패전을 당하는 걸 보고 등을 돌렸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클로비스 1세와 협상해 프랑크 왕국이 아키텐을 획득하는 대신 서고트 왕국을 유지하는 걸 동의하게 한 후 군대를 파견해 바르셀로나까지 침입했던 부르군트족을 격파하여 본토로 돌아가도록 강요했다. 그 후 510년 게살레크가 자신에게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서고트 귀족 고야리크를 처형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귀족들은 테오도리크 대왕에게 아말라리크를 새 왕으로 추대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511년 군대를 바르셀로나로 파견했다. 동고트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바르셀로나에 입성했고, 아말라리크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아직 어렸기에 테오도리크 대왕이 '섭정왕'으로서 서고트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를 맡았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이탈리아에 남아 통치를 행사했고, 리우비리투스와 암펠리우스를 민사 감독관에, 테우디스를 군사 담당관에 선임하여 히스파니아를 대신 다스리도록 했다. 또한 히스파니아 신민들은 자신이 정한 로마법을 준수하라고 요구했으며,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두 종족간의 혼인을 후원했다. 한편, 게살레크는 아프리카로 도주한 뒤 반달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반달 왕 트라사문드는 동고트 왕국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기에 군사 지원을 해주지 않았지만, 거액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그는 갈리아 남부로 이동한 뒤 프랑크 왕국이 장악하고 있는 아키텐으로 이동하여 프랑크 왕국의 후원을 받아 복귀를 꾀했다.

당시 클로비스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이 네 아들에게 분할되어 있었다. 이 네 명의 왕들은 권력을 확장해 상대방으로부터 복종을 얻어내길 갈망했지만, 당시 절정의 위세를 떨치고 있는 테오도리크 대왕과 대적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후원을 받으려는 게살레크의 계획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렇게 몇년 간 세월을 보내다가 테오도리크 대왕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몇몇 서고트 귀족들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후 히스파니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513년 바르셀로나 외곽에서 테오도리크의 부관 이바스에게 참패했다. 그는 전장에서 탈출했지만 뒤랑스 강을 건너려다 체포된 후 곧바로 처형되었다.

526년 테오도리크 대왕이 사망한 뒤, 아말라리크는 비로소 실권을 잡았다. 그는 히스파니아 신민들이 동고트 왕국의 수도인 라벤나로 세금을 보내는 것을 중단했지만, 히스파니아로 이주한 동고트 관료들이 계속 머무르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했다. 한편 지역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527년 톨레도에서 정교 사제들이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529년 현치인 출신의 스테판을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세워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군주이며 지난날 부이예 전투에서 아버지를 죽여버렸던 클로비스 1세의 딸 클로틸데를 아내로 삼는 등 프랑크 왕국과 가급적 친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클로틸데는 서고트 궁정 내에서 배척당했다. 왕국에 큰 손실을 입힌 클로비스 1세에 대한 원한이 가시지 않은 데다, 아리우스파를 고수하는 귀족들 입장에서 정교를 믿는 왕비를 곱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아내가 교회에 갔을 때 거름 등 여러 가지 불순물을 그녀에게 던지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아내를 너무 심하게 때려서 코피가 났고, 그녀는 피묻은 손수건을 오빠 킬데베르 1세에게 보냈다고 한다.

킬데베르 1세는 여동생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531년 서고트 왕국의 영역에 귀속되어 있던 나르본을 침공해 서고트군을 격파했다. 아말라리크는 바르셀로나로 도피했으나 그곳에서 곧 피살당했다. <사라고사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베손이라는 이름의 프랑크인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반면 세비야의 이시도르에 따르면, 모두에게 멸시받은 그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나르본 전투 직후 탈출을 시도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잃어버린 보석을 찾고자 나르본 시로 돌아갔다가 한 프랑크인의 창에 찔러 사망했다고 한다. 킬데베르는 여동생과 지참금을 챙긴 뒤 귀환했지만, 클로틸데는 도중에 알려지지 않은 원인으로 사망했다. 아말라리크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친척 역시 알려진 바 없었기에, 알라리크부터 100여 년간 이어지던 발티 왕조는 단절되었다.

4. 톨레도 왕국

4.1. 테우디스

아말라리크 사후, 서고트 귀족들은 몇달 동안 새 왕으로 누구를 세울 지를 놓고 고심한 끝에 테오도리크 대왕에 의해 아말라리크의 군사 방면 후견인으로 선임되었던 테우디스를 새 왕으로 세웠다. 동고트 계열이던 그가 서고트 왕국의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건 오랜 기간 군사 업무를 맡았고 2,000명의 사병을 갖추고 히스파니아의 로마 귀족가와 결혼 동맹을 맺어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한 데다 동고트 왕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프랑크 왕국을 상대로 반격을 개시해 국경지대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프랑크군이 점령한 셉티마니아 일부 지역을 탈환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했고, 나르본을 완전히 떠나 바르셀로나로 천도했다. 다만 수도를 정식으로 정하지는 않았고, 툴레도와 세비야도 임시 수도로서 기능했다. 그리하여 남부 갈리아를 사실상 포기한 그는 그 대신 이베리아 반도 남부 해안 지역 공략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 이베리아 남부 해안 지역은 한때 수에비 왕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5세기 중반 수에비 왕국이 서고트족에게 참패한 뒤 서고트 왕국 역시 이 지역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베티카의 여러 도시는 동로마 제국에 명목상 충성을 바쳤지만, 실제로는 무제한의 자치를 누렸다. 그는 이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지만, 기록이 미비해서 공세의 진행 과정은 알 수 없다. 다만 곡창지인 과달키비르 계곡 일부 지역을 공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중 지브롤터에 이르렀을 때 반달 왕국의 군주 겔리메르로부터 동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침략에 맞서 동맹을 맺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이를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카르타고를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달 왕국은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거절했다.

그 후 서고트군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세우타를 점령했다. 그러나 동로마군이 곧 공세에 착수해 세우타를 공략하고 그곳의 고트 수비대를 섬멸했다. 동로마군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에 따라 세우타에 강력한 요새를 세우고 함대를 배치해 고트군의 상륙을 저지했다. 뒤이어 반달 왕국이 소유했던 발레아레스 제도도 동로마 해군에 의해 공략되었다. 540년, 동고트 왕국의 군주 헬데바두스는 고트족끼리 힘을 합쳐 동로마 제국에 맞서자고 제안했다. 그 역시 동로마 제국의 연이은 공세에 위협을 느꼈기에 지원군을 곧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541년 헬데바두스가 피살당하면서 연합 계획은 중단되었다.

541년 또는 542년, 클로타르 1세 킬데베르 1세가 지휘하는 프랑크군이 이베리아 반도로 쳐들어왔다. 여기에 테우데베르 1세가 두 삼촌을 돕기 위해 지원군을 보냈다. 그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스크인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팜플로니아를 점령한 뒤 사라고사를 포위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프랑크인들은 성 빈센트에게 바치는 마을 사람들의 기도에 겁을 먹고 물러났다고 한다. 그러나 사라고사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크군이 49일간의 포위전 끝에 사라고사를 함락했다고 하며, 사라고사의 교회 유물인 성 빈센트의 튜닉이 프랑크군에 약탈당했고, 킬데베르 1세는 파리의 성문에 튜닉을 갖다대고 못을 박았다는 전승도 전해진다.

그는 보복을 결심하고 테우디기셀 휘하 고트군을 피레네 산맥에 매복시켰다. 프랑크군은 막대한 전리품을 짊어진 채 귀환하다가 산길에 매복하고 있던 고트군의 습격을 받았다. 이에 돌아갈 길이 끊기자, 프랑크군은 테우디기셀에게 뇌물을 줘서 하루 동안 길을 열게 했다. 테우디기셀은 그들이 산길을 지나가는 걸 허용했다가 후위대만 추격해 섬멸했다. 그렇게 프랑크군을 물리친 테우디스는 베르베르 부족들의 습격으로 아프리카 속주가 혼란한 틈을 타 세우타를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547년에 감행된 세우타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세비야의 이시도르에 따르면, 고트군은 처음에는 요새를 맹렬히 공격했지만 주일이 되었을 때 무기를 벗어두고 예배에 전념했다. 동로마군은 이 때를 틈타 적진을 공격했고, 적 함대가 바다를 가로막는 바람에 빠져나가지 못한 고트군은 전원 피살되었다고 한다.

한편, 테우디스는 고트인과 로마인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려 노력했다. 그는 고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우스파였지만, 로마인들이 신봉하는 가톨릭에 온건적인 태도를 보였다. 바르셀로나, 예이다, 발렌시아에 대성당을 세우는 걸 허용했으며, 툴레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 역시 허락했다. 또한 그는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채택하면서 자신의 혈통이 플라비우스 왕조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모든 히스파니아 지방 엘리트들이 로마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이래 히스파니아에서 플라비우스 왕조에 대한 선망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고려한 조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 등 당대 로마인들에게 위대한 군주로 추앙받는 군주들이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체택한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

546년 11월 24일, 테우디스는 로마인과 고트족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률을 반포했다. 이 법은 로마인과 관련된 알라리크 2세의 법전에 추가될 예정이었지만, "모든 신민"에게 적용된다는 문구가 적혀 있어서 고트족에게도 유효했다. 그는 모든 지방 당국과 법원에 이 법전을 보내면서 앞으로 판결을 내릴 때 이를 따르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는 고트족과 로마인들의 법적 통합을 향한 첫 단계였다.

548년 여름, 그는 세비야의 한 궁전에서 살해되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에 따르면, 오랫동안 미친 척하며 사람들을 속인 사내가 광기를 능숙하게 연기하면서 왕에게 접근한 뒤 순식간에 단검으로 등을 찔렀다. 그는 피를 흘리며 지지자들에게 "이것은 지난날 주군을 배신한 것에 대한 신의 징벌일 뿐"이라며 살인자를 처형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도록 강요한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4.2. 왕국의 혼란

테우디스 사후, 역시 동고트 계열 사령관이었던 테우디기셀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일설에 따르면 방탕하고 난폭했으며, 많은 고트 귀족들을 처형할 계획을 수립하고 축제 중에 한꺼번에 죽이려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신빙성은 미심쩍지만, 서고트 귀족들과 심각한 갈등을 벌인 것은 분명하다. 549년 12월, 그는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고 죽었다. 투르의 그레고리에 따르면, 그가 친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던 중 갑자기 등불이 꺼졌고, 얼마 후 누군가가 단검으로 목을 찌르면서 식탁에 기댄 채 죽었다고 한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이 암살은 왕 주변의 많은 권력자들에 의한 음모의 결과였다고 설명했고,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요르다네스는 모든 귀족이 암살에 연루되었다고 설명했다.

테우디키셀 사후 음모를 주동한 이들 중 한 사람인 아길라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550년 군대를 이끌고 코르도바를 공격해 함락시킨 뒤 철저하게 약탈했는데, 시민들의 존경을 받던 아시스클리우스 주교의 묘지마저 파헤쳐지자 시민들이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켜 아길라 1세의 군대를 쫓아냈다. 이때 그의 아들이 여러 병사와 함께 죽었고, 그는 메리다로 도망쳤다. 이 일로 아길라 1세의 인기는 급락했고, 세비야에서 아타나길드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길라 1세가 이를 진압하려 하자, 아타나길드는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동고트 왕국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황제는 이베리아 반도에 개입하기로 했다. 황제는 아타나길드와 모종의 조약을 맺었으나,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552년, 80세의 노장 티베리우스 장군이 지휘하는 동로마군이 스페인 남부 해안가에 상륙한 뒤 아길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지중해 연안과 내륙을 따라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베티가 일대를 동로마 제국의 통치에 귀속시켰다. 554년, 아길라 1세는 메리다에서 반란군에게 피살되었고 그를 따르던 무리는 아타나길드에게 귀순했다.

동로마 제국 덕분에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아타나길드는 서고트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후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에 따르면, 그는 황제의 군대와 많은 전투를 벌였으며 그리스인에게 불법적으로 점령된 여러 도시를 해방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코르도바 등 안달루시아 일대를 굳건히 지켰고, 아타나길드의 코르도바 탈환 작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고이빈타 왕비와의 사이에서 두 딸 브룬힐트와 갈스빈트를 낳았다. 브룬힐트는 프랑크 왕국 시게베르 1세와 결혼하여 아들 킬데베르 2세, 딸 인군트 2세와 클로도신드 2세를 낳았다. 갈스빈트 역시 프랑크 왕국의 킬페리크 1세와 결혼하여 메로베우스 2세를 낳았다. 브룬힐트는 613년 사망할 때까지 프랑크 왕국의 정계를 지배하면서 서고트 왕국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으며, 서고트 왕국은 이 덕분에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567년 12월, 아타나길드는 자연사했다. 생전에 아들을 두지 못했기에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서고트 왕국는 그의 사후 5개월간 왕을 정하지 못하다가 피레네 산맥 북쪽의 유일한 서고트 왕국령 갈리아 영토인 셉티마니아의 공작 리우바 1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지 않고 셉티마니아에 남아 있었다. 당시 프랑크 왕국에서 격렬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 여파가 본거지인 셉티마니아에 미칠 걸 두려워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귀족들이 자신을 용납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고, 건강이 좋지 않아서 먼 길을 갈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568년 말 또는 569년 초에 동생 리우비길드를 공동 통치자로 삼고 이베리아 반도로 가서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 이후 셉티마니아에서 통치를 이어가다 570년~572년 사이에 사망했다.

4.3. 리우비길드의 중흥

형 리우바 1세가 사망하면서 서고트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리우비길드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나라를 구하고자 노력했다. 당시 서고트 왕국의 지방 영주들은 중앙 정부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소국을 세웠으며, 프랑크 왕국, 수에비 왕국, 동로마 제국의 위협은 거셌다. 이중 프랑크 왕국은 자기들끼리 내전을 벌이는 터라 이베리아 반도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수에비 왕국은 일전에 서고트 왕국으로부터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들었고, 동로마 제국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석권하길 희망하며 서고트 왕국 내 정교 신자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는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왕위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부켈라리 등 왕실 근위대와 고트족 자유민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동원했다. 그는 반기를 든 영주를 굴복시키고 그들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근위대와 민병대에게 골고루 나눠줬다. 이에 근위대와 민병대는 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고, 각지에서 할거하던 영주들은 토지를 대거 빼앗겨 몰락했다. 그렇게 내부 문제를 해결한 뒤, 그는 570년부터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568년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략과 하자르의 발칸 반도 침략, 사산 왕조의 동방 속주 침략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었기에 머나먼 이베리아 반도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는 이 기회를 틈타 전쟁을 시작해 베티스 강을 건너 바스테티니아와 말라키타나를 황폐화시켰다. 571년 다시 원정을 감행해 요새화된 도시 아시도나를 공격해 내부 인사의 배신 덕분에 손쉽게 함락시키고 도시에 보관되어 있던 재원을 확보하고 동로마 전사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572년에는 전임 국왕 아타나길드가 여러 차례 탈환을 시도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던 코르도바를 공략했으며, 고트군은 동로마령 이베리아 반도 영토의 수도인 카르타헤나 인근까지 진출했다. 결국 현지 동로마 당국은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고, 해군이 부족했기에 완전 제압은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받아들였다. 협상 결과 베티스 계곡 전체가 그의 통치 아래 귀속되었고, 해안 도시들만이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남았다.

그 후 북서쪽 국경을 위협하는 수에비 왕국 쪽으로 눈길을 돌린 그는 573년 사바리아로 진입하여 단숨에 평정한 뒤 두 아들 헤르메네길드와 레카레드 1세에게 그 땅의 경영을 맡기고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574년 칸타브리아로 진입하여 수에비군을 격파한 뒤 칸타브리아를 왕국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575년 아레게니 산맥(스페인 북서부의 산맥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에서 할거하던 아스피디우스를 복속시키고 그의 가족과 보물을 툴레도로 가져왔다. 576년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수에비군을 또다시 격파했고, 수에비 왕 미로가 평화를 간청하자 친히 그와 협상한 뒤 서고트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577년 다시 남쪽으로 눈길을 돌린 그는 서고트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영역 사이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오로스페다에 진입해 현지 주민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서고트 왕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한편, 그는 그동안 수도가 정해지지 않았던 서고트 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툴레도를 수도로 확정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모델로 삼고 툴레도에 궁전을 세우고 정부 기관들을 잇따라 건설해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제 기능을 수행하도록 힘을 기울였다. 여기에 578년 차남 레카레드 1세의 이름을 따서 레코폴리스를 건설하고, 신도시 주민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레코폴리스는 30헥타르에 달하는 큰 도시로 성장했고, 도시 내 언덕의 가장 높은 부분에 동로마 제국 양식의 대성당이 있는 궁전이 세워졌다.

그는 화폐에도 손을 댔다. 초기에는 동로마 제국의 주화를 모방하여 유스티누스 2세의 이름으로 된 동전을 발행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을 밀어내고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을 확보하게 된 뒤에는 자신만의 주화를 주조했다. 그는 중요한 사건을 화폐에 문구로 담게 했다. 메리타를 공략했을 때는 "메리타의 승리(EMERITA VICTORIA)"를 새겼으며, 세비야를 공략한 후에는 "신과 함께 세비야를 정복했다(CVM DEO SPALI ADQVISITA)"라는 문구가 새겨진 주화를 발행했다.

리우비길드는 법전 편찬에도 힘을 기울였다. 578~580년에 에우리크의 법전과 알라리크의 서약서를 시대의 변화에 맞게 개편한 '개정 법전(Codex revisus)'이 신설되었다. 그는 이 법전에서 딸과 아들 모두 평등한 상속권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규정했으며, 로마인과 고트인 사이의 결혼 금지를 철폐했다. 여기에 고트족의 특별한 지위도 상당부분 폐지되었다. 이는 그가 두 종족이 동등한 관계가 되어서 왕국에 충성하는 신실한 신민이 되기를 희망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리우비길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의 사이에서 헤르메네길드 레카레드 1세를 낳았고, 아내가 사망한 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아타나길드 왕의 미망인인 고이빈타 왕비와 재혼했다. 579년, 프랑크 왕국이 자국에 간섭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장남 헤르메네길드를 프랑크 왕국의 군주 시게베르 1세의 딸 인군타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이 결혼은 오히려 악영향을 가져왔다. 인군타는 어린 나이에도 아리우스파 개종을 단호히 거부하고 남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다. 그의 아내이자 헤르메네길드의 계모이고 독실한 아리우스파 신자인 고이빈타 왕비는 이에 분개해 며느리와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그는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 지 고심했다. 아리우스파를 확고히 믿는 고이빈타 왕비와 고트 귀족들의 분노를 사서는 안 됐고, 그렇다고 며느리를 해꼬지했다가는 강력한 국력을 갖춘 프랑크 왕국의 분노를 살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차선책을 택하기로 했다. 베티카 속주 일부와 세비야 시를 장남에게 떼주고 그곳에서 통치를 행사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조치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 세비야의 주교 레안데르의 설득을 받아들인 장남이 579년 또는 580년에 가톨릭 세례를 받고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은 뒤 'REX'를 칭한 것이다.

헤르메네길드는 일찍부터 공통 통치자로 인정받았지만 'REX'라는 호칭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를 공공연히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동전에 자신의 초상을 새기고 'A DEO VITA(신의 구원)'이란 문구를 덧붙이며, 이단인 아리우스파에 대항하여 가톨릭을 관철시키겠다고 선포했다. 헤르메네길드는 동로마 제국, 수에비 왕국과 손을 잡았고, 프랑크 왕국 내 인군타의 친척들과도 연계했다. 리우비길드는 이런 상황에서도 아들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했다. 그 대신 581년 아들과 동맹을 맺었을 지도 모르는 바스크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개시해 일부 영역을 공략하고 빅토리아쿰(현재 빅토리아)를 건설했다. 이후 피레네 산맥에 강력한 분견대를 배치해 프랑크 왕국이 헤르메네길드를 지원하려고 달려드는 걸 사전에 차단한 뒤, 582년 아들을 향해 진군하여 메리다를 공략하고 수에비 왕국과 세비야 사이의 연락로를 차단했다. 헤르메네길드는 레안데르 주교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해 구원을 간청했지만,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던 동로마 제국은 원군을 보내주지 못했다.

그 후 리우비길드의 토벌군은 세비야를 포위해 1년 이상 공성전을 벌였다. 583년, 수에비 왕 미로가 병력을 동원하여 세비야 구원에 나섰으나 도중에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헤르메네길드는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코르도바로 도망쳤다. 그 후 세비야를 함락시킨 리우비길드는 584년 코르도바를 노렸다. 그는 코르도바의 동로마 총독에게 뇌물을 줬고, 총독은 헤르메네길드에게 더 이상 보호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인군타와 어린 아들 아타나길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했고, 헤르메네길드는 교회로 숨었다가 584년 초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한 명의 하인과 함께 아버지 앞에 찾아갔다. 리우비길드는 아들을 처음에 발렌시아로 유배했고, 나중에는 타라고나로 보냈다. 585년 3월 24일, 시세베르트라는 인물이 헤르메네길드를 살해했다.리라우비길드의 지시가 있었다는 설과 왕의 총애를 얻고 싶었던 시세베르트의 단독 행위라는 설이 제기되나 어느 쪽이 진실에 근접한 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인군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던 중 아프리카에서 사망했고, 아타나길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평생 지내다 사망했다.

헤르메네길드의 반란은 리우비길드 왕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그는 '고트족은 아리우스파를 신봉하고 로마인은 가톨릭을 신봉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언제든지 반란이 터져나올 수 있다는 걸 깨닫고, 히스파노-로마인들을 아리우스파로 개종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툴레도에서 아리우스파 공의회를 소집해 이 문제를 논의했다. 그는 아리우스파 사제들에게 성물과 순교자 공경을 받아들이도록 권고했고, 가톨릭식 세례 성사도 용인하게 했다. 여기에 가톨릭 사제들과 순교자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기도 했다. 그는 이를 통해 로마인들이 감화되어 아리우스파로 기꺼이 개종하기를 희망했다. 그의 이같은 전술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사라고사의 빈센티우스 등 몇몇 저명한 주교들이 아리우스파로 개종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로마인들이 좀처럼 아리우스파로 개종할 기미가 없자, 그는 박해를 감행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에 따르면, 그의 치하에서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심한 박해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유배되거나 재산을 강탈당하고 다양한 형벌로 사망했다고 한다. 다만 박해를 주도한 이는 고이스빈타 왕비였고, 그는 박해의 규모가 커지는 걸 가급적 제지했다고 한다.

585년, 리우비길드는 미로 왕의 전사 후 왕위를 놓고 분란이 벌어진 수에비 왕국의 영역을 침략하여 안데카 왕을 사로잡고 수에비 왕실의 보물을 탈취했다. 안데카 왕은 툴레도로 끌려간 뒤 수도자가 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수에비 왕국을 돕기 위해 상선을 보냈지만, 이 상선은 도중에 갈리시아에서 라우비길드의 명령으로 사로잡힌 뒤 모든 물건을 빼앗기고 선원 대다수가 생포되었다. 말라리크 왕이 수에비 왕국의 잔여 세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라우비길드 휘하 부관에게 진압되었고, 수에비 왕국은 서고트 왕국의 속주로 병합되었다.

한편, 프랑크 왕국은 상선을 탈취한 것에 보복하고자 셉티마니아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프랑크군은 진군 도중에 자기 나라 주민들을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심지어 교회를 강탈하고 성직자들을 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러 민심을 잃었다. 그러다 고트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작전이 어려워지자 자기들이 황폐화시킨 영토를 통과하여 후퇴했고, 그 과정에서 물자 부족과 전염병 창궐, 자국 주민들의 보복 공격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 후 라우비길드는 차남 레카레드 1세를 시켜 반격을 개시하게 했고, 레카레드 1세는 카바레 요새를 점령하고 툴루즈 일대 대부분을 황폐화하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뒤이어 론 강 유역의 잘 요새화된 도시인 우게른을 공략했다. 이렇게 확보된 재산 및 포로들은 님 시로 이송되었다. 586년 레카레드 1세는 재차 공세를 개시해 나르본에 도착하여 여러 전리품을 획득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귀환했다.

4.4. 레카레드 1세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의 개종

파일: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레카레드 1세.jpg
586년 4월 21일, 리우비길드 왕이 사망했다. 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귀환하던 레카레드 1세는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다수의 신민이 신봉하는 가톨릭을 박해하고 소수의 고트 귀족만이 믿는 아리우스파를 고집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며, 로마 교황과 프랑크 왕국 등 주변 가톨릭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면 가톨릭을 국교로 삼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587년 2월 또는 3월에 정식으로 가톨릭 세례를 받고 아리우스파 사제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권고했으며, 그해 4월 툴레도에서 가톨릭을 따르는 성 마리아 교회를 축성했다. 이후 아버지가 몰수한 교회 재산을 전부 돌려주고 파괴된 교회와 수도원을 복원했으며, 형의 명예를 신원하고 형을 죽인 시세베르트를 체포해 처형했다.[2]

589년 툴레도에서 공의회를 개최해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비세우, 투야, 루고, 포르투, 팔렌시아, 토르토사 등 각 도시의 주교들을 불러들었다. 여기엔 48명의 아리우스파 주교와 8명의 전 아리우스파 주교들도 참석했다. 그들은 왕의 권고에 따라 공식적인 자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해 지위를 유지했다. 그는 가톨릭 주교와 전 아리우스파 주교가 각각 한 명씩 별도의 교구를 임시로 다스리게 했다. 이외에도 유대인들은 기독교인 노예를 두는 것을 금지하고 기독교인 여성 사이에서 첩을 두는 것을 금지하고, 첩실에게서 낳은 아이들에게도 세례를 주도록 규정하는 등 전례와 교회법에 관한 일련의 법률이 반포되었다. 비클라르의 요한은 그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정죄한 콘스탄티누스 1세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정죄한 마르키아누스와 동등한 업적을 이뤘다며 극찬했다.

툴레도 공의회 이후 각지에서 지역 공의회가 소집되어 아리우스파 인사가 가톨릭을 개종하는 것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가 결정되었다. 592년에 열린 세비야 공의회에서는 전 아리우스파 사제들이 사제로서 직위를 유지하고 옛 아리우스파 교회를 가톨릭 교회로 개조하는 조건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르본 공의회에서는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은 주교로 세워질 수 없다는 법령을 체택했다. 아리우스식 예배는 고트식 언어를 사용했지만, 이제 아리우스파가 공식적으로 사멸되면서 고트인들은 그들의 언어를 거의 완전히 잃어버리고 히스파니아-로마인의 언어로 전환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정책은 극심한 반발을 초래했다. 많은 고트인들은 아리우스파를 국가 신앙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했으며 이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여러 귀족은 가톨릭이 국교로 확정되면 자신들의 지위가 상실될 것을 두려워했다. 587년 셉티마니아에서 나르본 주교 아탈루크와 셉티마니아 백작 그라니스타와 빌디게른이 반란을 일으키며 프랑크 왕 군트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아탈루크는 곧 죽었고 반란도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588년, 메리다 백작 세가와 아리우스파 주교 수나가 음모자들을 모아 루시타니아 봉기를 꾀했다. 그들은 리우비길드 치세 때 망명했다가 리우비길드가 사망한 뒤 메리다 주교로 복귀한 가톨릭 주교를 살해하고 세가를 왕으로 세워 중앙 정부에 맞서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수나는 망명했으며 세가는 두 손을 잃고 갈리시아로 추방되었다.

더 큰 위협은 리우비길드의 전 왕비이자 독실한 아리우스파인 고이빈타가 지원한 음모였다. 고이빈타는 툴레도에서 반 가톨릭 음모의 주동자 역할을 맡아 아리우스 주교 울디다와 함께 레카레드 1세를 축출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사망했는데, 비클라르의 요한은 "목숨을 멈췄다"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남겼다. 이로 볼 때 그녀는 자연사한 게 아니라 모종의 방식으로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울디다는 추방되었고, 음모에 가담한 무리들은 모조리 처벌받았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프랑크 왕국과 친하게 지내려 했다. 킬데베르트 2세는 그의 형수이자 자신의 여동생인 인군타 공주의 죽음에 대해 10,000솔디를 배상금으로 받는 조건으로 서고트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또다른 프랑크 왕 군트람은 동맹 제의를 묵살하고 레카레드에게 반기를 들려는 자들을 지원했다. 그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군트람을 따르는 모든 상인이 셉티마니아를 통과하는 것을 금지했다.

587년, 군트람의 부하인 데시데리우스가 셉티마니아의 도시 카르카손을 침공했다. 이 공격을 미리 파악한 도시 주민들과 서고트군은 도시 외곽에서 데시데리우스와 맞섰다. 전투가 시작되자 고트군은 미리 계획한 대로 후퇴했고, 데시데리우스는 즉시 추격했지만 적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열의가 지나친 나머지 주력부대에서 떨어져 나갔다. 고트군은 즉시 그를 에워쌌고, 데시데리우스는 자신과 함께 오던 소규모 분견대와 함께 살해되었다. 지휘관이 피살당하자, 프랑크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589년, 군트람의 또다른 부하 보손이 이끄는 대군[3]이 셉티마니아를 침공해 카르카손에 접근했다. 도시 주민들은 대군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못내고 군트람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프랑크군이 승리에 취해 잔치를 벌이고 있던 사이, 레카레드가 파견한 루시타니아의 클라우디우스 공작이 갑작스럽게 습격했다. 프랑크군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했지만 곧 전열을 가다듬고 수적으로 열세한 적을 밀어붙였다. 클라우디우스는 후퇴하는 척 하면서 적군을 미리 준비한 매복 지점으로 유인했다. 프랑크군은 적을 추격하던 중 메복에 걸렸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프랑크군은 약 5,000명을 잃고 2,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으며 모든 보급물자를 상실했다고 한다. 나머지 병력은 고트군의 추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프랑크 왕국으로 도주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일찍이 리우비길드에게 빼앗긴 이베리아 영토를 탈환하기로 마음먹고 코멘티올로스 장군에게 공세를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코멘티올로스는 먼저 동로마 제국의 이베리아 영토 중심지인 카르타헤나 성벽을 복원하고 새로운 성문을 건설했다. 뒤이어 이베리아 남부 도시들을 차례차례 공략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상당 부분 탈환했다. 레카레드는 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동로마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했다.

한편, 리우비길드에게 패배한 뒤 서고트 왕국에 굴복했던 바스크인들이 반기를 들어 독립을 회복한 후 이웃 지역에 대한 침략을 시작했다. 레카레드는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제압하려 했지만, 평원으로 내려온 적을 격퇴했을 뿐 고산 지대로 숨은 적을 결정적을오 물리치지 못했다. 그는 바스크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빅토리아를 기점으로 장벽을 세우게 했다.

레카레드는 클라우디우스 등 이베리아-로마 귀족들을 중용했고, 고트인과 로마인에 대해 통일된 법적 절차가 확립된 법률을 발표했다. 이후 고트족과 이베리아-로마인은 동일한 법원에서 동일한 법규로 재판을 받았다. 또한 그는 로마식 이름인 '플라비우스'를 채택했는데, 이후 역대 서고트 국왕들은 플라비우스를 항상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특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고트족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590년, 아르기문드 공작이 그를 축출하기 위해 반란을 꾀했다. 그는 왕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신하였기에, 기회가 오면 단검으로 레카레드를 찌르려 했다. 그러나 계획은 도중에 발각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쇠사슬에 묶인 채 툴레도로 끌려갔다. 그 후 오른팔이 잘리고 당나귀에 앉은 채 툴레도 광장을 돌며 민중의 비웃음을 샀다.

4.5. 리우바 2세, 위테리크, 군데마르, 시세부트

601년 12월 21일 레카레드 1세가 사망한 뒤 아들 리우바 2세가 1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603년 고트족 귀족 위테리크가 반란을 일으켜 툴레도로 진격했고, 세습 왕조를 거부하고 게르만 관슴에 따른 선출 원칙을 선호하는 귀족들이 대거 호응했다. 리우바 2세는 생포된 뒤 폐위된 군주를 다루는 고트족 관습에 따라 오른손이 잘렸다. 그러나 위테리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603년 여름 감옥에 갇혀 있던 그를 끌어내 처형했다. 그리하여 왕위를 공고히 한 위테리크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면전을 단행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마우리키우스가 폐위된 후 포카스 황제의 폭정과 사산 왕조 샤한샤 호스로 2세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에 별다른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는 이 점을 이용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동로마 영토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의 목표는 베티카 남부 일대를 석권하고 지브롤터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원정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듯하다. 사군툼에서 일부 동로마군을 사로잡은 것 외에는 특별한 승전을 거뒀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가 로마 병사들과 자주 싸웠지만 적절한 영광을 거두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610년 툴레도 공의회에 카르타헤나 인근의 비가스트룸 시 주교가 참석한 것을 볼 때, 비가스트룸 시가 그의 치세 때 서고트 왕국의 영토로 귀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이 시기에 비스크인들의 북방 영토에 대한 약탈전이 수그러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바스크인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원정을 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부르군트 프랑크 왕국의 군주 테우데리크 2세가 그의 딸 예르멘베르다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는다면 득이 된다고 본 그는 흔쾌히 허락했고, 예르멘베르다는 607년 샬롱으로 가서 테우데리크 2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테우데리크 2세의 할머니 브룬힐트가 결혼을 막았기 때문이다. 테우데리크 2세는 1년 후 예르멘베르다를 돌려보냈지만 지참금은 그대로 가졌다. 위테리크는 이에 분노하여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와 테우데리크 2세의 형제인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을 맺었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와도 손을 잡아 테오도리크 2세를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내 벌어지지 않았는데, 기록이 미비해서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610년 4월, 위테리크는 왕궁에서 연회를 베풀던 중 암살당했다. 유해는 별다른 장례식 없이 곧바로 매장되었고, 공모자 중 한 사람이었던 군데마르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그는 에브로 및 도루 강 계곡에 대한 지속적인 습격전을 벌이던 바스크인들을 토벌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가 동로마군을 포위 공격했다고 기술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았다.

군데마르는 동로마 제국 및 바스크족과 전쟁을 벌이면서 네우스트리아-아우스트라시아- 랑고바르드 왕국과 손을 잡아 부르군트 프랑크 왕국을 견제하는 위테리크 왕의 정책을 물려받는 한편, 종교 정책에서는 레카레드 1세의 가톨릭 진흥 정책을 이었다. 610년 10월 톨레도에 공의회를 소집해 일련의 법령을 포고했다. 이 법령에서는 톨레도를 모든 이베리아의 중심 도시로 선언했으며, 카톨릭이 비단 로마인만의 신앙이 아니라 모든 이베리아인의 종교임을 분명히 했다.

한편, 그는 위테리크와 갈등을 벌이다가 자신의 집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불가르를 셉티마니아 공작으로 세우고 프랑크 왕국과의 모든 외교 업무를 일임했다. 그가 불가르와 주고받은 편지 일부가 남아있는데, 이에 따르면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 관계를 굳건히 유지하고 보조금을 동맹국에 대거 보내서 테우데리크 2세와 브룬힐트를 조속히 타도하려 했다.그러나 그의 계획은 생전에 실행되지 못했다.

그에게는 610년경에 사망한 아내 힐도아라가 있었지만 자녀를 두지 못했다. 612년 2월 또는 3월에 툴레도에서 자연사한 뒤 유력 귀족인 시세부트가 왕위에 올랐다. 시세부트가 왕위에 오른 직후, 아스투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리퀼라 또는 티우파디 백작이 즉시 이를 진압하러 출정했는데, 반란군의 기세를 꺾기는 했지만 아스투리아스 산맥이 워낙 험준했기 때문에 완전 제압엔 실패했다. 비슷한 시기, 수인틸라 장군은 칸타브리아 부족 로콘 또는 룬콘 부족을 복속시켰다.

612년 바스크인들이 왕국의 북쪽 지역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시세부트는 613년 최근 창설된 서고트 함대를 친히 이끌고 칸타브리아와 오트리고니아, 바스크, 바르둘리아, 카리스티아 등지의 해안에 상륙하여 칸타브리아-바스크인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바스크인들이 지배하는 산악지대를 평정하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공연 예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우세비오 데 타라스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연극에 관심을 보이는 주교를 질책하고 서신을 전달한 사람을 바르치노의 주교로 봉헌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의 아들 아달랄드에게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권고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신앙심이 투철했다.

612년 8월 2일 부분일식이 이베리아 반도 여러 지역에서 목격되자 각지의 시골에서 이교 관습과 미신이 부활했다. 이에 그는 613년 칸타브리아-바스크 원정 중에 일식에 관한 시를 짓고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에게 보내면서 백성들의 무지와 폭동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또한 614년 1월 13일, 타라코나에서 공의회를 개최해 598년 우에스카 공의회에서 성직자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야 한다는 교리를 확정지었다.

614년과 615년에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여 여러 번 승리했으며, 이 무렵에 말라가를 정복했다. 동로마 총독 카르사리우스가 기독교인끼리 피를 더 이상 흘리지 말자고 호소하자, 그는 이에 마음이 움직여 서로 포로를 교환하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와 카르사리우스 간에 오간 4개의 편지는 당시의 외교 절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한편, 시세부트는 유대인에 대한 박해 정책을 펼쳤다. 그는 레카레드 1세의 "유대인은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다"는 법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이 법령을 관철하기 위해 일련의 조치를 내렸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유대인이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으며, 유대인들이 기독교인 노예와 재산을 기독교인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에 팔아야 하며, 아프리카나 프랑스에 있는 유대인에게 그들을 팔 수 없고, 거주지 근처에서만 판매가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유대인은 기독교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지만, 해방된 노예는 국가에 귀속되며 이전 유대인 주인의 후원은 금지되었다. 거짓으로 판매한 유대인은 가차없이 처형되었다. 이 법령은 612년 7월 1일에 발효되었으며, 이 날짜 이후에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한 유대인이 발견되면 절반의 재산을 몰수하고 노예는 석방되었다.

그는 여기에 더해 기독교인을 유대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을 엄히 금지했다.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이 가톨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엔 공개 장소에서 채찍질을 하고, 끝까지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거나 왕이나 왕이 임명한 사람의 노예로 넘겨졌다. 또한 가톨릭인과 결혼한 뒤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은 평생 추방되지만, 개종한다면 노예를 포함한 재산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낳은 자녀 역시 기독교인으로서 세례를 받아야 했다. 615년경에는 일부 유대인들을 상대로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는 정책을 추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이 피살당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시세부트는 문학에 관한 소양이 뛰어난 군주이기도 했다. 그는 61편의 라틴어 시를 집필했는데, 주요 주제는 천문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시에서 천상에서 발생하는 현상은 신의 의지로 이뤄지는 것이 분명하다며,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게 신실한 신자의 도리라고 밝혔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과학에 대한 관심을 품고 천문학과 지리학에 관한 백과사전을 집필했다.

4.6. 레카레드 2세, 수인틸라, 시세난드, 친틸라, 툴가

621년 시세부트 왕이 사망한 뒤, 아들 레카레드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해 3월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시세부트의 부관이었던 수인틸라가 왕위에 올랐다. 역사가 베르나르드 배크라치는 수인틸라가 어린 왕을 살해했으며, 시세부트의 박해에 원한을 품은 유대인들이 수인틸라를 지원했을 거라고 주장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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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틸라는 즉위 직후 동로마 제국군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 전쟁을 감행했다. 2명의 동로마 총독을 사로잡는 등 맹렬한 공세를 벌인 끝에, 625년경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동로마 요새인 카르타헤나가 함락되었고, 발렌시아에서 카디스까지 이어지는 지중해 연안지대가 서고트 왕국의 영역에 귀속되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가 이베리아 전역을 통치한 최초의 왕이라고 밝혔다. 다만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의 세우타와 발레아레스 제도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남았다.

한편, 그의 통치 초기에 바스크인들이 서고트 왕국 북쪽 지대를 습격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뒤 이들을 상대로 공세를 벌인 끝에 바스크인들이 자신의 권력에 복종하고 인질을 바치게 했다. 이후 바스크인들의 재침을 막기 위해 올리타 요새를 건설하고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세속 귀족과 고위 성직자의 영향력을 제한하려 했다. 그는 후계를 미리 정하기로 하고, 어린 아들 레키메르를 공동 왕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레키메르가 요절해버리면서, 후계 구도를 굳히려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귀족의 권리를 축소하려는 그의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프랑크 연대기 작가 프레데가르는 "수인틸라가 동료들에게 매우 무례했고 왕국의 모든 고귀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라고 기록했다. 한편, 그는 시세부트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지속했지만 강도를 어느정도 누그러뜨렸기 때문에 해외로 망명한 유대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631년, 시세난드가 이끄는 귀족들이 수인틸라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500파운드에 달하는 황금 접시를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이 접시는 훈족과의 전쟁 때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아버지 테오도리크 1세를 잃은 토리스문드에게 위로하는 차원에서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보물이었다. 프랑크 왕 다고베르 1세는 이 제안에 혹하여 시세난드롤 돕기로 했다.

프랑크 왕국이 시세난드를 도우려 한다는 소식이 이베리아 반도 각지에 알려지자, 민심은 급격히 동요했다. 프랑크군이 사라고사에 도착하자마자 사라고사 시민들이 시세난드에게 귀순했고, 모든 군대는 시세난드를 왕으로 선포했다. 631년 3월 26일 시세난드가 툴레도에 입성한 후 수인틸라는 폐위되었지만 시세난드는 그를 죽이지 않고 2년간 감옥에 가두었다가 자신의 왕위가 공고해지자 먼 곳으로 유배보냈다.

프랑크군이 노획한 전리품을 싣고 조국으로 돌아간 뒤, 다고베르 1세는 약속한 접시를 받기 위해 시세난드에게 사절을 보냈다. 시세난드는 약속대로 접시를 건넸지만, 사절들이 귀환 중에 강도떼의 습격을 받으면서 접시를 잃어버렸다. 이후 양자간의 긴 협상 끝에, 다고베르 1세는 200,000솔리디에 달하는 금액을 보상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즉위 직후 그라나다, 메리다 일대에서 유딜라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톨레도 교회에서도 새 정권을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 이견이 오간 끝에 갈라디 대주교가 인근 수도원으로 은퇴한 사건이 벌어졌다. 뒤이어 대주교를 밑은 유스투스는 왕의 지원을 받은 장로 게론티우스와 정쟁을 벌였다. 이렇듯 안팎으로 갈등이 벌어졌지만,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가 시세난드를 지지하자, 명망높은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던 성직자들이 순응하면서 교회의 분란은 잦아들었다.

633년 12월 5일,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가 의장을 맡고 나르본과 이베리아 전역에서 온 66명의 주교가 참여한 제4차 톨레도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 전 왕 수인틸라의 '악행'을 폭로하고 시세난드의 왕위 계승을 확정했으며, 수인틸라를 먼 곳으로 유배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또한 공의회는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지키지 않고 목숨을 노리거나 왕위를 찬탈하려고 시도한 모든 사람들을 저주하기로 결의했으며, 그에게 대적한 사제들은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수도원으로 물러가야 했으며, 외국 교회와 비밀 서신을 주고받은 것 역시 금지되었다. 시세난드는 온건한 군주로서 정당하고 경건하게 통치할 것을 약속했으며, 세습을 포기하고 왕위 계승을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맡기겠다고 밝혔다. 이 공의회가 631년 시세난드가 왕위를 장악한 직후가 아니라 2년 후에야 소집된 것은 633년에 유딜라의 봉기를 진압한 것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세난드는 교회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성직자들의 모든 세금을 폐지했다.

공의회는 시세부트 왕으로부터 개시된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했다. 유대인이 기독교인 노예를 갖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재확인하고, 유대인이 기독교인 여성과 결혼하거나 동거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세례를 받은 유대인 자녀는 부모와 분리되어야 하며, 세례받은 유대인들이 유대교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처형되거나 노예로 팔려갔고, 기독교인이었다가 유대교로 개종한 자는 공개 채찍질을 당했다. 유대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법령을 집행하지 않는 자는 세속인이든 성직자이든 상관없이 파문을 선고받았다.

그리하여 왕위를 공인받은 시세난드는 636년 3월 12일에 사망했고, 친틸라가 귀족과 주교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었다. 636년 6월 30일에 소집된 제5차 톨레도 공의회에서는 왕이 정당하게 취득한 재산은 차기 왕이 상속자들로부터 몰수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또한 왕의 측근과 지지자, 고문 및 측근들은 왕이 죽은 뒤에도 왕이 하사한 선물을 그대로 가질 수 있었으며, 왕의 가족과 친구들의 재산을 침해한 죄를 지은 자는 저주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선출된 왕은 반드시 귀족 출신이어야 하며, 성직가, 노동자, 외국인 중에서 선택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제5차 톨레도 공의회엔 갈리아 나르본에서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참석하지 않은 주교가 많았기에 권위가 떨어졌다. 이에 638년 1월 9일, 제6차 톨레도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번에는 나르본에서 3명의 주교가 참석했으며, 이전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이베리아 주교들도 대거 참여했다. 공의회는 교회 조직에 손을 대는 한편, 살해된 왕의 후계자는 왕을 죽인 자를 처벌하지 않으면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포고했다. 여기에 외국으로 망명한 뒤 서고트 왕국에 해를 끼치거나 특정 범죄의 피고인이나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은 파문되었다. 아울러 가톨릭을 따르지 않는 비기독교인의 국내 거주를 금지하는 법령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유대인을 추방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민중 앞에서 회심을 밝히는 것을 의무화했다.

두 공의회에서 결정한 사안을 볼 때, 친틸라는 왕위를 찬탈당하고 가족이 박해당할까 두려워했던 듯하다. 공의회를 통해 왕위를 보장받은 덕분인지 3년 6개월 만인 639년 12월 20일에 자연사했고, 아들 툴가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익명의 알안달루스 무슬림 역사가가 기술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착하고 고결했다고 한다. 그러나 즉위한 지 2년이 지난 642년, 고트족 귀족들은 79세의 친다수윈트를 새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프랑크 왕국 연대기 작가 프레데가르는 고트족들이 나라를 확고하게 통치하지 못하는 왕을 불안하다 못해 많은 고위 관료와 여러 주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친다수윈트를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고 한다.

반란은 바스크 국경지대에서 시작되어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1세기의 신학자이자 역사가 젬블루스의 시게베르트에 따르면, 친다수윈트는 톨레도로 진군해 툴가를 붙잡아 삭발시킨 후 수도원으로 보내버렸으며, 이후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톨레도의 일데폰스는 친다수윈트가 귀족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냈지만 주교들의 승인이 없었기 때문에 반란군으로 남았다가, 툴가가 가까스로 왕위를 지키다가 사망한 후에야 왕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느 쪽이 사실에 근접한 지는 분명하지 않다.

4.7. 친다수윈트, 레케스윈트, 왐바, 에르위그

친다수윈트를 옹립한 귀족들은 그의 나이가 79세에 달하니 자기들 입맛에 따라 부려먹을 수 있다고 여겼을 테지만, 이것은 오판이었다. 그는 서고트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뒤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먼저 이베리아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곧바로 진압하고 'VICTOR'라고 새겨진 기념 주화를 메리다에서 주조했다. 뒤이어 귀족들을 꺾어버리기 위해 정력을 쏟아부었다. 프랑크 연대기 작가 프레데가르는 귀족의 반란을 영원히 종식시키겠다는 그의 열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스페인에 대한 그의 권력을 확신하고 왕을 전복하려는 고트족의 풍십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는 데 기여했던 모든 자들을 하나씩 죽이도록 했다. 뒤이어 여러 사람이 유배지로 보내졌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과 재산을 가까운 동료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고트 귀족 200명과 하급 귀족 500명을 처형했다. 그는 (군주를 해치는) 질병을 정복했다고 확신할 때까지 의심되는 사람을 처형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트족이 그의 전임자들 아래에서 했던 것과 같은 음모를 감히 자신에게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친다수윈트는 귀족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한편, 지참금을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르면, 지참금은 1,000 솔리디, 노예 10명, 여노예 10명, 말 10마리를 초과해서는 안 되며, 이를 초과하는 지참금은 전원 국가에 귀속되었다. 이는 귀족들이 결혼 동맹을 굳건히 다져서 자신에게 맞설 세력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분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배층을 근본적으로 바꾸려 했다. 왕실로부터 작위를 하사받은 '법복 귀족'이 기존의 귀족들을 대체했는데, 이들은 모든 일을 할 때 왕에게 항상 감사해야 하고, 특별한 충성 서약으로 구속되었으며, 왕의 사람과 항상 동행해야 했다. 그들은 왕에게 봉사하는 대가로 반역자들의 노예와 재산을 챙길 수 있었다. 이에 기존의 귀족들 상당수가 나라를 떠났고, 많은 이는 성직자가 되었다. 643년에는 귀족 억압 정책을 합법화하기 위해 나라와 신민에 반대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특별법을 공포했는데, 이에 해당하는 자들 중에는 외국으로 도피한 자들도 포함되었다. 이 법은 공포 이전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도 소급 적용되었다.

이렇듯 철저한 귀족 탄압으로 왕권을 강화한 친다수윈트는 교회의 권위를 사용하여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교회가 왕권을 넘어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 망명에 대한 권리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르면, 살인자는 교회에 숨어 있어도 처벌받아야 했다. 그는 교회의 일에 간섭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톨레도 대주교 에우제니오 1세가 646년 사망하자, 그는 세비야 주교 브라올리온에게 편지를 보내 브라올리온의 심복인 에우제니오를 수도로 올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브라올리온은 자신에게 충실한 사제를 톨레도에 보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가 자신의 소원은 곧 왕명임을 분명히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했다.

646년 11월 18일, 제7차 톨레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에서는 처음으로 세속 계급 인사들이 의사 결정에 참여했는데, 그중에는 그의 통치 5주년을 축하하는 문서를 읽고 기록을 보관하는 공증인도 있었다. 공의회는 왕의 칙령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강화했다. 6 43년의 특별법을 재차 공인하고, 세속적 형벌에 교회 형벌을 추가했다. 이리하여 왕을 적대시한 자는 잡히면 사형당할 뿐만 아니라 파문되었다. 이 조치는 주교를 포함한 모든 성직자에게 적용되었다. 여기에 왕에 대한 모든 비판은 범죄로 간주하고 재산의 절반을 몰수하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공의회는 수도원 사제들은 교육을 잘 받지 못한 점을 들어 당국에 대한 어떠한 정치적 연설을 금지했으며, 톨레도와 가까운 곳의 주교들은 톨레도에서 적어도 일년 에 한 달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 공의회에는 41명의 주교만이 참석했고, 타라코나 대표는 2명뿐이었으며, 셉티마니아 대표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것은 교회 계층 내에 그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이렇듯 왕권을 다진 그는 법률체계의 완전한 재편을 목표로 삼고 사라고사 주교 브라올리온의 도움을 얻어 신 법전을 만들게 했다. 이 법안은 이베리아-로마인이 사용하는 알라리크 2세의 서약서와 고트족이 사용하는 리우비길드 왕의 법전을 완전하게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왕국의 모든 주민을 민족의 구별 없이 하나의 신민 집단으로 만들려 했다. 이제 하나의 법률 체계가 이베리아 반도와 셉티마니아 전역에서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지속되었지만 생전에 완료되지 않았고, 654년 아들 레케스윈트 치세 때 비로소 공포되었다.

그의 법은 국가의 경제 및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을 다루었으며, 왕의 행동 방식과 목표를 특정지었다. 사형과 재산 몰수는 반국가 음모에 적용되었으며, 반역 계획은 행위 그 자체로 분류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자는 비록 사면을 받더라도 의무적으로 실명형을 받아야 했다. 귀족과 성직자는 왕이 죽은 후에도 이 법을 준수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국가의 적은 절대로 사면받을 수 없었다. 왕의 친구와 가족 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해 왕이 제공한 선물은 향후 몰수될 수 없었다. 거짓 고발을 고의로 한 제보자는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또한 그는 주인이 노예를 임의로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등 하층 계급에도 신경썼다.

친다수윈트는 교육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는 사라고사 주교 타이온에게 로마에서 도덕과 철학에 관한 책을 가져오게 한 뒤, 이를 토대로 신민을 가르치게 했다. 백성들에게 자선 행위를 베풀었으며, 성 로마노스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에 아니 레키베르가를 안장한 후 나중에 그곳에 함께 묻히기를 희망했다.

친다수윈트는 제4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귀족과 주교로 구성된 평의회가 왕을 선출한다'라는 조항을 폐기하고 649년 1월 20일 아들 레케스윈트를 공동 왕으로 세워서 후계자임을 모두에게 공개했다. 653년 9월 30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개인 재산을 빈민에게 골고루 나눠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후 왕위에 오른 레케스윈트는 아버지의 탄압 정책에 숨죽이고 있던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스페인 타라코나 공작 프로이아는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사라고사를 포위하면서 바스크인과 프랑크 왕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사라고사 수비대와 주민들이 완강한 저항을 해서 시간을 잡아먹는 사이, 레케스윈트는 진압군을 편성해 사라고사 성벽 아래에서 프로이아와 바스크 동맹군을 상대로 상당한 손실을 입은 끝에 격파했다.

그리하여 프로이아의 반란을 진압했지만, 아버지의 강경 정책으로 인해 불온해진 분위기를 수습할 필요성을 느낀 레케스윈트는 653년 12월 16일 제8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이 공의회에서 반란군에게 불관용으로 일관하는 이전 공의회의 결정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왕의 의무에 위배된다고 밝히며, 광범위한 사면령을 발표하고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공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다만 몰수된 재산의 반환은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 재산은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왕국의 재산으로 간주했다. 그는 자신과 후손들은 친두스윈트가 즉위하기 전에 가졌던 재산만은 상속받을 수 있고, 왕이 된 후에 얻은 모든 재산은 국고에 헌하며, 왕위에 오른 자는 출신과 상관없이 이를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왕이 사망한 뒤 주교와 최고위 관료들의 동의하에 최대한 빨리 새 왕을 선출하기로 했다.

그는 아버지가 시작한 법전 편찬 작업을 지속해 654년 <Liber Iudiciorum(심판의 책)>을 반포했다. 여기에는 역대 국왕들이 제정한 법 324조항, 친두스윈트의 법 99조항, 그리고 자신이 제정한 법 87조항이 포함되었다. 로마인과 고트인의 구분 없이 동등한 조건하에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노예에 대한 신체적 상해를 금지하고, 주인이나 후원자의 명령으로 범죄를 저지른 자유인 및 노예는 처벌받지 않았다. 이 조항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이 분쟁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익명의 알안달루스 무슬림 역사가가 기술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이후 18년간 혼란이 일어났고 고귀한 이가 많이 죽었다고 한다. 653년 제8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상당부분을 양보했지만, 그는 교회에 더 이상 양보할 의사는 없었다. 655년 제9차 톨레도 공의회와 656년 제10차 톨레도 공의회가 개최되었지만, 오직 교회 문제만 다뤘을 뿐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16년간 공의회는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672년 9월 1일, 레케스윈트 왕이 살라망카 인근의 게르티코스 휴양지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에겐 후계자가 없었기에, 귀족과 주교들은 왕이 사망한 날 긴급 회의를 연 뒤 왐바를 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톨레도의 율리안은 그의 저서 '왐바 왕의 역사'와 '알폰소 3세 연대기'에서 왐바가 처음에는 왕이 되기를 거부했지만 병사들이 계속 거부한다면 찔러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기술했다. 왐바는 즉시 톨레도로 이동한 뒤 9월 19일 성 베드로와 바울 교회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그의 즉위에 반발한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셉티마니아의 님 백작 힐데리크가 현지 주교들의 지지를 받고 왕을 참칭한 뒤 왐바 왕에게 충실한 님의 주교 아레지우스를 체포해 족쇄로 묶어 프랑크 왕국에 보내버린 후 자신을 지지하는 사제 라니미르를 새 주교로 선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왐바는 이베리아-로마 출신의 사령관 플라비우스 파울루스에게 반란 진압을 맡겼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나르본에 입성한 뒤 현지 주교 아르데발트를 몰아내고 왕을 참칭하고 레카레드 1세가 지노라의 성 펠릭스 교회에 기증한 금관을 머리에 썼다. 힐데리크 역시 파울루스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 후 당시 궁정 관료를 맡고 있던 스페인 타라코나 공작 라노신드의 지지를 받았고, 프랑크 왕국 및 바스크인과도 동맹을 맺었다. 그는 왐바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을 서쪽의 왕으로 칭하고 왐바를 동쪽의 왕이라고 칭했다. 이는 파울루스가 왕국을 분할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걸 의미했다.

왐바는 바스크인과의 전쟁을 수행하던 중 칸타브리아에서 파울루스의 반란 소식을 접했다. 그는 7일 안에 바스크인들의 영역을 파괴하고 인질과 조공을 받아낸 채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칼라호라와 우에스카를 거쳐 나르본으로 진격했다. 바르셀로나, 지로나가 잇따라 항복한 뒤, 그는 피레네 산맥에 접근하면서 군대를 3개의 분견대로 나누었다. 한 부대는 카리타니아 지역의 주요 도시인 카스트룸으로 향했고, 두 번째는 아브손 시를 통해 피레네 산맥의 중앙 능선으로 이동했으며, 세 번째는 해안가를 지나가는 로마 가도를 따라 이동했다. 코콜리베라(현재 콜리우르), 불투라리아, 카스트룸을 공략한 뒤, 토벌대는 칼루수라 요새를 공격해 수비대의 저항을 물리치고 함락했고, 뒤이어 사르도니아 요새로 진군하여 비티미르 백작을 물리치고 요새를 장악했다. 이후 평야 지대로 내려가 전군을 규합한 뒤 나르본으로 이동하면서, 별도의 분견대에게 해상에서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파울루스는 왐바의 군대가 나르본에 접근해오자 님으로 후퇴하면서 비티미르에게 나르본을 지키게 했다. 이어진 공성 끝에 토벌대가 성문에 불을 지르고 성벽을 기어올라 도시를 장악하고 반군을 제압했다. 비티미르는 교회로 피신한 뒤 얼마 동안 농성했다가 곧 체포되었다. 비테라(현재 베지에)와 아갈프 시가 뒤이어 항복했으며, 마갈로나 시를 사수하던 후밀트 주교는 왕의 군대가 포위 공격을 준비하는 데다 바다에서 함대가 접근해오는 걸 보고 파울루스에게 달아났다. 지도자 없이 남겨진 마갈로나 시는 곧바로 왐바에게 항복했다.

673년 8월 31일, 왐바의 군대는 파울루스 일당이 숨은 님을 포위했다. 반란군은 프랑크군이 곧 도와주러 올 거라고 믿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다음날, 왐바는 프랑크군이 후방에서 공격할 것을 우려해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도시를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예비대를 공방대에 투입했다. 토벌대는 곧 성벽을 점령했고, 파울루스와 추종자들은 원형 극장으로 피신했다. 도시를 공략한 토벌대는 약탈을 자행하다가 주민들과의 충돌로 큰 손실을 입었다. 한편 원형 극장으로 피신한 반군 사이에서 내분이 벌어졌다. 지역 귀족들은 파울루스와 함께 온 자들이 자신들을 덫으로 유인했다고 비난하면서, 왕의 사면을 받기 위해 파울루스의 추종자들을 공격했다.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한 파울루스는 나르본 주교 아르게바드는 보내 왐바에게 자비를 구했다.

왐바는 약탈을 중단하고 군대를 도시 밖으로 이동하여 전투 대형을 구축했고, 원형 극장에 있던 파울루스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끌어냈다. 이후 파울루스 편에서 싸운 프랑크족과 색슨족을 조국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는 이베리아 반도로 끌고 갔다. 한편, 왐바는 파괴된 나르본의 복원을 수행하고 성벽의 틈을 수리하고 불타버린 성문을 대신할 새로운 성문을 세웠으며, 방치되었던 시신을 묻고 약탈한 재산을 주민들에게 돌려주게 했다.

얼마 후, 루파 공작이 지휘하는 프랑크군이 비테레 일대를 침공하자, 왐바는 즉시 그들을 향해 진군하면서 적의 매복 공격을 격퇴한 뒤 프랑크군 앞에 나타났다. 루파는 그제야 파울루스가 패배했다는 걸 깨닫고 즉시 퇴각했다. 톨레도로 돌아온 왐바는 재판을 거행했다. 단순 가담자는 사면되었고, 파울루스와 52명의 추종자들은 교회로부터 파문을 선고받았다. 왐바는 그들을 죽이지 않는 대신 실명형에 처하기로 했다. 파울루스의 반란을 도왔던 유대인들은 나르본에서 추방되어 해외로 망명했다.

파울루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왐바는 673년 11월 1일 군 복무령을 발표했다. 당시 서고트 군대는 온갖 범죄와 강도, 방화, 폭력을 일삼았고 많은 이들은 군 복무를 피했다. 나르본 공략 때 병사들의 무분별한 약탈을 목격했던 그는 군대를 대대적으로 개혁할 필요를 느꼈다. 그가 발표한 법에 따르면, 군 복무는 왕국의 모든 주민에게 확대되었으며 적의 침공이 처음으로 알려졌거나 내부에서 소란이 발생할 경우 모든 주교, 공작, 백작, 교구 또는 위임받은 자는 즉시 군대를 소집하며 현지의 고위 관리와 왕에게 보고해야 했다. 또한 모든 주민은 자신이 속한 '당'에 관계없이 국가, 군주, 또는 상속인을 보호해야 했다. 이 조항은 반대 그룹에 속한다는 명목으로 외국과의 전쟁 또는 내전에 참여를 회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주교와 다른 사제들도 군 복무를 수행해야 했고, 노예 주인들은 노예들과 함께 군대에 가야 했다. 왐바의 법은 적의 침략이나 내란에 맞서 군사 임무를 수행하지 않은 자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심할 경우 노예로 삼았다. 병역 의무를 면제받는 경우는 오직 심한 질병에 걸렸을 때만 가능하지만, 이 경우에도 환자는 자기 비용으로 부하들을 군대에 보내야 했다.

많은 귀족들은 노에를 군 복무에 참여시키라는 것에 반감을 품었고, 성직자들도 군 복무에 참여하라고 강요받는 걸 불쾌하게 여겼다. 이에 왐바는 반발하는 자들을 가차없이 탄압했다. 왐바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에르위그는 왐바 시대에 이베리아 전역에 폭동이 발발했고 거의 절반의 귀족이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하층민의 수가 너무 줄어들어 법정에서 충분한 수의 증인을 유지한느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는 왐바의 '악행'을 강조하게 위한 수사적 표현이겠지만, 귀족들이 왐바 시대에 큰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왐바는 귀족과 교회의 반발로부터 지지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자유민과 해방노예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주교의 숫자를 늘렸다.

익명의 알안달루스 무슬림 역사가가 기술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왐바는 674년 수도인 톨레도를 개조하여 웅장하고 정교한 건물과 구조물로 장식했다고 한다. 이때 세워진 탑에는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졌으며, 이에 상응한는 비문들도 나란히 세워졌다. 또한 그는 화폐 발행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반란의 온상지였던 나르본의 주조소를 폐쇄하는 등 화폐 주조소를 대폭 줄이고, 오직 톨레도를 포함한 각 지방의 수도에서만 화폐를 주조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주화에 십자가를 새기고 자신의 초상화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이렇듯 왕권 강화와 체제 개편에 열을 올리던 왐바는 675년 제11차 톨레도 공의회와 제12차 브라가 공의회를 잇따라 소집해 왕국의 질서 유지를 위한 법령을 제정하고 주교직을 사고파는 관행을 금지하고 주교의 재산 청구권을 제한했으며, 타락했다고 간주된 주교들을 파문하기로 했다. 공의회가 끝난 직후인 675년 12월, 왐바는 자유민과 교회에 소속된 사제 또느 수녀간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했고, 주교와 관련된 자들이 시골 교회와 수도원을 점유하는 것을 금지했다.

680년 가을, 왐바의 일련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에르위그 등 귀족들이 왕을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음모자들이 탄 독이 든 술을 마신 왐바는 의식을 잃었고, 주변인들은 왕이 곧 죽을 거라고 여기고 관습에 따라 수도자의 옷을 입혔다. 왐바는 몇 시간 후 의식을 되찾았지만, 이미 수도자의 의복을 입었기에 나라를 다스릴 권리가 박탈당했다는 걸 깨닫고 왕위 포기서에 서명한 뒤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에르위그는 왕위에 오른 직후인 681년 1월 9일 제 12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는 셉티마니아와 스페인 타라코나 주교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왐바 왕이 그 지역 교회를 박해한 여파가 가시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공의회에서는 왐바의 퇴위 문서와 에르위그의 왕위 계승 문서를 공인하고 그의 즉위가 정당함을 확인했다. 또한 전 군주가 권력을 되찾으려는 모든 시도를 사전에 차단했다. 에르위그와 위원회의 결의서에는 왐바의 정책에 대한 강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왐바가 창설한 새 주교직을 없애기로 했다. 다만 실제로 왐바에게 임명된 주교들은 직위를 박탈하지 않고 공석인 곳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왕위를 공인받은 그는 법률 제정 정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왐바의 병역법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보고 681년 10월 21일 병역법을 포함한 84개의 법률을 수정한 법전을 반포했다. 병역 기피에 대한 처벌이 완화되었으며, 주교 역시 병역을 수행해야 한다는 조항은 삭제되었다. 한편, 유대인에 대한 28개 조항이 신설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에게 명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유대인에게 그런 자리를 맡긴 귀족은 720 솔리디의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려 하면서, 개종을 거절하는 자는 노역 및 고문에 시달렸다. 하지만 서고트 왕국의 유일한 갈리아 영토인 셉티마니아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태도가 더욱 부드러웠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으로 피신했다.

683년 11월 4일, 에르위그는 제13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번에는 각 지방의 주교와 재판소의 고위 관리 26명이 소집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전 왕 왐바의 탄압 문제를 제기하면서, 플라비우스 파울루스 등 왐바에게 맞서다 처벌받은 정치범들을 완전히 사면하고 몰수된 재산을 돌려주게 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재산을 돌려주는 것은 반대하고, 왐바에게 맞선 자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친다수윈트 왕때까지 왕권에 의해 박해받은 모든 이들을 사면하기로 결의했다. 에르위그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법원과 교회의 최고 관리들을 재판 없이 존엄, 생명, 재산을 박탈할 수 없다는 법령 역시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즉위하기 1년 전부터 체납된 모든 세금을 면제했다. 공의회는 이에 더해 친다수윈트 왕이 도입한 자유민과 해방노예들을 궁정의 주요 직책에 임명하는 관행을 금지했다. 또한 에르위그는 앞으로 왕의 모든 후손의 생명과 재산을 건드릴 수 없으며, 왕실의 과부에게 새 결혼을 강요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특별 법령을 채택했다.

684년 11월, 톨레도 대주교 율리안이 자발적으로 제14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공식적으로는 왕의 명령없이 열린 공의회였지만, 왕국의 모든 대도시 대표가 참석했다. 공의회 소집 이유는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의론을 채택하기로 한 결정을 따라달라는 교황 레오 2세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율리안은 교황의 요청에 따라 단의론을 채택하기로 했다. 왕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 교회의 권력이 왕권에 버금갈 정도로 강대해졌다.

한편, 서고트 왕국의 사정은 점점 악화되었다. 알안달루스 시기 익명의 무슬림 역사가가 저술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이 끔찍한 기근으로 황폐화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자유민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자, 그는 자유민을 지키기 위해 자유민이 노예가 되는 것을 제한했으며, 자유 여성이 노예와 결혼해서 낳은 자식은 노예로 간주되지만 그들이 간섭없이 자유민으로 30년을 살았다면 자유민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한편 에르위그는 군대를 어떻게든 강화하려 했다. 그는 귀족들이 노예의 20분의 1도 병사로 보내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적어도 10분의 1은 군대에 보내고 장비는 주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선포했다.

4.8. 에기카, 위티자

에르위그 왕은 생전에 리우비고토와 결혼하여 딸 시실로를 낳았다. 시실로는 왐바의 친척인 에기카와 결혼했다. 687년 11월 15일 중병에 걸려 임종을 눈앞에 둔 그는 사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왕권을 불법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기 가족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맹세시킨 뒤 눈을 감았다. 이리하여 왕위에 오른 에기카는 688년 5월 11일 제15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에르위그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에르위그가 몰수한 재산이 왕과 가족에게 들어간 것은 정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석자들은 이에 동의했고, 에르위그의 가족을 보호하겠다는 맹세를 지킬 의무를 풀어주기로 했다. 에기카는 이에 더해 아무도 황태후에게 결혼을 강요하거나 간음을 범할 수 없다는 특별법을 마련했다. 겉보기에는 왕비의 명예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전 왕의 미망인과의 교제를 통해 왕위에 오르려는 경쟁자들의 희망을 끊으려는 것이었다.

691년, 사라고사에서 지방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왕의 미망인은 수도원에 즉시 가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로 인해 에르위그의 왕비 리우비고토는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잃고 수도원에 보내졌다. 한편, 사라고사 공의회에서는 특정 지역 주교의 결정에 따라 해방된 이들을 다시 노예로 삼는다는 법안을 채택했다. 이는 주교들의 자의적인 행위를 막아서 그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에르위그의 지지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반감이 커졌다.

693년 봄, 톨레도에서 그를 타도하려는 음모가 일어났다. 툴레도의 대주교 시시베르트는 수니프레드를 왕으로 내세우고 에기카를 타도하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에기카는 시시베르트를 해임하고 세비야의 주교 펠릭스를 톨레도 대주교에 선임했으며, 시시베르트를 따랐던 이들을 모조리 교체하고 새 주교를 세웠다. 그는 교회에 대한 이같은 간섭이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693년 5월 제16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게 했다. 공의회는 왕에 대한 음모를 꾸미거나 스페인 내에서 반란을 일읔킨 사람은 존엄과 지위에 관계없이 재산을 박탈당하고 그 자신과 모든 후손이 결코 궁정에서 일할 수 없다는 결의서를 반포했다. 여기에 귀족과 교회 지도자들을 탄압했던 친다수윈트 왐바의 반역자에 대한 처벌 조항은 유효하다고 명시했다. 여기에 주교들의 잠식으로부터 지방 교회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법령을 채택함으로써 하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694년 11월, 에르위그는 제17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는 왕실의 자손을 보호하는 것에 관한 특별 법령을 채택했다. 시실로 왕비가 자손을 낳은 채 미망인이 될 경우, 아무도 그녀의 자녀가 수도자가 되도록 강요할 수 없으며, 그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교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유대인에 대한 일련의 법률을 반포했다. 유대인이 시장을 방문하고 기독교인과 거래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세례받기를 원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유대인 세금을 내야 했는데, 이 세금은 유대인 공동체가 분담해야 했다. 에기카는 이에 더해 유대인들이 아랍 세력과 내통해 왕국을 팔아먹으려 한다고 비난하며, 내통한 것이 드러난 유대인들을 노예로 삼고, 유대인들이 공직에 참가할 권리 자체를 박탈했으며, 유대인들의 자녀들은 7세 때까지 부모와 헤어진 채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게 했다. 한편, 제17차 공의회는 에기카의 왕비이자 에르위그의 딸 시실로를 "영광스러운 여인"이라 칭했다. 그러나 에기카는 공의회가 끝난 직후 그녀와 이혼해버렸다. 이는 전 왕과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림으로써 자신만의 왕조를 창건하겠다는 의중이 담긴 결정이었다.

698년과 701년 사이, 동로마 함대가 스페인 동부 해안가에 상륙했다가 알리산테 일대를 다스리고 있던 서고트 귀족에 의해 격퇴되었다. 비슷한 시기, 에기카는 셉티마니아에서 프랑크 왕국의 지원을 받은 반란군을 진압하고 프랑크군과 3차례 싸웠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이 반란을 구실로 삼아 벌금, 몰수 및 해임 법령을 발표했다. 당시 서고트 왕국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 금화에 은이 갈수록 많이 첨가되었으며, 몇년 동안 기근이 들어서 많은 이가 굶어죽거나 나라를 등지면서 일꾼이 부족해졌다. 여기에 693~694년 페스트가 침투하여 각지에 전염병이 횡행하면서 인구가 줄어들었다. 특히 셉티마니아의 인구 감소가 심했기에, 셉티마니아 공작은 어떻게든 인력을 모으기 위해 에기카의 반유대주의 법안을 시행하지 않고 유대인들을 보호했다. 이렇듯 인력이 줄어들면서 노예의 도피를 막으려는 귀족들의 욕망이 커지자, 에기카는 귀족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도주한 노예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알폰소 3세 연대기에 따르면, 에기카는 친다수윈트 왕의 아들 테오도프레드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까 두려워하여 눈을 멀게 했다. 그 후 왕실에서 추방된 테오도프레드는 코르도바에서 살다가 리킬로와 결혼하여 아들 로데리크를 낳았다. 에기카는 세습을 이뤄내기 위해 아들 위티자를 공동 통치자로 삼고, 옛 수에비 왕국의 영역을 다스리게 했다. 701년 11월 15일 아들을 톨레도로 불러들여 왕으로 즉위하게 한 뒤, 702년 말에 자연사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위티자 알안달루스 시기 익명의 무슬림 역사가가 집필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불신자들과 유배된 이들을 자비롭게 받아들여 하급 관료의 지위를 회복했고, 아버지가 부과한 세금을 줄여 백성들을 기쁘게 했으며, 아버지가 부정직한 신하들에게 부과한 모든 벌금을 공개적으로 해제시켰다. 그는 무고한 사람들을 강한 속박에서 해방시켰고, 그들의 소유물을 돌려주고 재무부가 몰수한 것을 보상했다고 한다.

반면 <알폰소 3세 연대기>에 따르면, 위티자는 자유분방하고 불경건한 인물로 조언을 좀처럼 듣지 않았으며, 많은 아내와 첩이 있는 것에 대한 추문을 방지하기 위해 주교, 장로, 집사들에게 아내를 맞이할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707년에서 709년 사이에 이베리아 반도에 전염병이 강타하여 많은 이들이 기근과 역병으로 희생되면서, 서고트 왕국의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그가 망명자들을 불러들이고 성직자들이 아내를 들여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어떻게든 인구를 보충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망명자들은 에르위그의 지지자들일 수도 있고, 에기카의 친척인 왐바 왕의 반대자들일 수도 있다.

그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들인 아길라 2세에게 왕권을 넘기려 했으며, 이에 반발하는 귀족들을 가차없이 숙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에는 에기카 왕의 궁정에서 고관으로 일했던 파빌라도 있었는데, 파빌라의 아들인 펠라요는 아버지가 처형된 후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아스투리아스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했다. 위티자는 710년경에 사망했는데, 친다수윈트 왕의 손자로 전해지는 로데리크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제거했다는 설과 위티자가 자연사했다는 설이 제시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4.9. 과달레테 전투와 서고트 왕국의 멸망

로데리크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을 칭하자, 위티자의 아들들은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수도를 탈출해 스페인 북동부로 이동했다. 이후 레퀴잔드, 바야진드를 포함한 일부 고트 귀족들이 위티자의 장남 아길라 2세를 서고트 왕국의 유일한 갈리아 영토인 셉티마니아 역시 아길라 2세를 지지했다. 이리하여 서고트 왕국은 로데리크를 지지하는 남부 세력과 아길라 2세를 지지하는 북부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로데리크는 위티자 2세와 손을 잡고 왕국의 북쪽 경계를 침범한 바스크인들을 토벌하고자 진군하여 팜플로나를 포위했다. 그러나 얼마 후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야 했다. 아랍군이 바다를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아랍 세력은 북아프리카를 평정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우타를 다스리던 동로마 총독 율리아누스가 돌연 아랍 세력에 귀순했다.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율리아누스는 자기 딸인 플로린다 라 카바가 로데리크에게 강간당하자 복수하기 위해 귀순했다고 한다. 반면 알폰소 3세 연대기에 따르면, 플로린다는 로데리크를 현혹시킨 요부였다고 한다. 로데리크가 그녀를 유혹하여 연인으로 만든 것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간에, 율리아누스는 바다를 건널 선박을 제공하고, 서고트 왕국의 지리, 정치, 군사 등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다. 여기에 로데리크에게 반감을 품은 서고트 귀족들이 북아프리카 총독 무사 이븐 누사이르에게 밀사를 보내 로데리크를 타도하려 하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무사는 가장 신뢰하는 장군인 타리크 이븐 지야드에게 7,000명을 맡겨서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했다.

율리아누스의 도움을 받아 바다를 건넌 타리크는 병사들이 탈영하는 걸 막기 위해 상륙하자 마자 배를 불태웠다. 이후 지브롤터에서 출발하여 카르타헤나 해안 일대를 돌며 약탈을 자행했다. 뒤이어 무사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카디스 해협을 건너 15개월 동안 히스파니아에 머무르며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고 전해지지만, 그가 과달레테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로데리크는 이에 맞서 남하하면서 왕국 전역의 귀족들에게 자신에게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타리크는 카르타헤나에서 코르도바로 진군하던 중 과달레테 강 인근에서 로데리크의 군대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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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벌어진 과달레테 전투[4]에서, 서고트군은 완패했고 로데리크는 전사했다. 그 후 타리크는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해 711년 톨레도를 공략하고 각지로 분견대를 보내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이때 율리아누스는 성주들을 회유해서 항복시키거나 타리크가 도저히 점령하지 못하는 철벽 요새에 기독교 지원군으로 위장해서 잠입 후 차지했다. 714년 사라고사를 거점으로 삼아 대항하던 아길라 2세도 무슬림군에게 잡혀 죽었다. 테오도미르 같은 몇몇 귀족은 아예 이슬람군과 동맹을 맺고 자치권을 누리는 대가로 침략자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피레네 산맥 북족의 카탈로니아와 남부 갈리아의 셉티마니아에서는 아르도라는 인물이 서고트 왕을 자처했다. 그는 나르본을 근거지로 삼아 716년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셉티마니아까지 쳐들어오는 아랍군에 맞섰으나, 721년에 아랍군이 나르보넨시스를 초토화시키면서 망국을 막지 못했다. 이리하여 서고트 왕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리하여 무슬림군은 10년도 안 되어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석권했고, 기독교 세력은 서고트 귀족 출신 펠라요 코바동가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격퇴한 뒤 북부 비스케이 만 해안의 산악지대인 아스투리아스에 세운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가까스로 버텨 후세 레콩키스타의 시조가 되었다.

[1] 다만 지도에 훈족의 영토가 너무 과장되어 크게 그려져있는 오류가 있다. [2] 비클라르의 요한에 따르면, 헤르메네길드가 코르도바의 교회로 피신했을 때 레카레드 1세가 아버지에게 귀순하면 목숨만은 보장받을 수 있다며 설득했고, 이를 믿은 헤르메네길드가 귀순했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형의 신원을 회복하고 살인자를 처벌한 것은 형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일조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 서고트 측 기록에 따르면 6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4] 혹은 세레스 데 라 프론테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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