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이야 칼리파국의 명장 타리크 이븐 지야드 | طارق بن زيا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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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하우스만이 그린 타리크 이븐 야지드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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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670년 또는 679년 | |
사망 |
720년 우마이야 왕조 다마스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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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노예→ 장군 | |
종교 | 이슬람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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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 서고트 왕국이 다스리던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명장이다.2. 생애
타리크 이븐 지야드는 우마이야 왕조의 이프리키야(Ifriqiya:우마이야 왕조의 아프리카 속주) 총독 무사 이븐 누사르의 해방노예다.무사와 함께 마그레브 원정에 참가하였으며 705년 하산 이븐 알 누만이 사망한 뒤 아브드 알 말리크에 의해 신임 아프리카 총독에 선임된 무사가 다신교를 섬기는 베르베르인들을 탄압할 때 타리크는 무사의 두 아들과 함께 모든 반란을 진압했다.[1]
타리크의 주군 무사는 동로마 함대의 해안 습격에 대처하기 위해 이비사섬, 마요르카, 메노르카에 해군을 보내 모조리 공략했다. 무사는 탕헤르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하며 무사는 심복인 타리크를 탕헤르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세우타에 거점을 삼고 있던 동로마 제국의 세우타 총독 율리아누스만은 좀처럼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던 711년, 율리아누스는 돌연 무사에게 투항했다. 알안달루스 시기 익명의 모사라베(이슬람으로 개종한 기독교인)역사가가 집필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자기 딸인 플로린다 라 카바가 서고트왕 로데리크에게 강간당하자 복수하기 위해 귀순했다고 한다.
서기 711년( 헤지라 89년) 4월 26일경, 아프리카 총독 무사의 명령을 받들어 주로 베르베르인으로 구성된 7000명의 우마이야군의 지휘관에 임명되었고 율리아누스의 도움[2]을 받아 바다를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에 성공했다. 상륙지점은 타리크의 이름을 따서 자발 알 타리크(Jabal al-Tāriq, 타리크의 산)으로 명명되었다.[3] 타리크의 우마이야군은 자발 알 타리크에서 출발하여 카르타헤나 해안 일대를 돌며 약탈을 자행했다.
북상을 시작하던 타리크는 남쪽에서 이슬람군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내려온 서고트의 왕 로데리크의 군대를 과달레테 강 인근에서 만나게 되었고 타리크는 과달레테 전투에서 서고트군을 격파시켰다. 이후 무사는 타리크에게 편지를 보내 코르도바로 떠나지 말라고 하였으나 타리크는 코르도바로 진격해 3개월 간 포위한 뒤 도시를 점령했고 코르도바를 지키던 서고트 수비대 전체를 학살했다.
이어서 북상한 타리크는 서고트 왕국의 수도 톨레도마저 함락시킨 뒤 무사에게 편지를 보내 부족한 군인의 수와 새로 정복한 도시를 지킬 병력을 보충해달라고 요청했다. 무사는 자신이 합류하기 전까지 톨레도를 벗어나지 말라는 명령이 담긴 편지를 보냈고 타리크는 명령대로 톨레도에 머물면서 사실상 안달루스의 총독이 되었다.
713년(헤지라 91년) 여름, 타리크는 대군을 이끌고 온 무사와 톨레도에서 만났고[4] 칼리프 왈리드 1세가 둘 다 다마스쿠스로 돌아오라고 한 명령도 무시한 채 그들은 각자 군대를 나누어 타리크는 북쪽으로 나아가고, 무사는 동쪽 사라고사를 목표로 출정했다. 이베리아 반도 북부와 셉티메니아, 사라고사에서 승리한 그들은 마침내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되었다.
714년(헤지라 92년) 말, 이베리아 원정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왈리드 1세의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서둘러 다마스쿠스에 도착해 칼리프에게 경의를 표했다.[5]이베리아 원정부터 두 사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격화되었는데 결국 두 사람 모두 직위에서 해임되었다.[6]이후 타리크는 행적을 알기가 어려우며 아마도 그가 해임되고 나서 다마스쿠스에서 여생을 보내다 720년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3. 기타
타리크의 출생과 민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알 이드리시는 타리크가 베르베르인이라는 것을 주장했고, 아바스 왕조의 역사가 이븐 칼리칸은 그가 사다프 부족 출신 아랍인이라는 설을 지지했다.
그의 주군인 무사와의 관계가 이베리아 원정동안 계속해서 우호적이었는지 공을 세우겠다는 질투심에 불타오르며 서로를 견제하게 되었는 지는 학자들 간의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
《알폰소 3세의 연대기》에 따르면, 과달레테 전투에 투입된 무슬림의 숫자는 187,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과장이며, 이슬람측 기록에 따라 실제 병력은 타리크가 당초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다를 건넜고, 무사로부터 5,000명의 병력을 지원받아 총 12,000명의 병력을 갖추고 전장에 임했다고 한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슬람측 기록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으로 추정한다.
타리크가 병사들의 탈영을 막기 위해 타고온 배를 불태우라고 명령했다는 전설이 있으나 이것은 400년 이상 후에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에 의해 처음 언급된 이야기다.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아프리카 켐페인 중에서 타리크 이븐 지야드 켐페인이 존재한다.
[1]
기록에 따르면, 무사는 708년에 대서양 연안에 도착했으며 709년까지 30만 명의 포로를 노예로 삼았고, 이 중 6만 명을
칼리파에게 보냈다고 한다.
[2]
우마이야 왕조에게 귀순한 후 우마이야군에게 바다를 건널 선박을 제공하고, 서고트 왕국의 지리, 정치, 군사 등 유용한 정보를 주었기에 타리크가 이끄는 7000명의 우마이야군은 이에 따라 이베리아 반도 침공을 개시했다.
[3]
이것이 와전되어 후일에
지브롤터라는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4]
타리크가 톨레도에서 무사를 만났을 때 타리크는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말에서 내렸고 무사는 타리크의 머리에 채찍을 얹고 자신의 명령을 위반했다고 경고했다.
[5]
이틀 후 정복군주 왈리드 1세는
알라의 곁으로 떠났다
[6]
무사는
술라이만이 즉위하자 숙청의 1순위가 되며 자신 아들 압둘라와 압둘아지즈를 잃게 된다. 그리고 본인도 두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슬퍼하다가 곧 사망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술라이만을 참고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