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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군트의 왕 Guntram | 군트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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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군트람 |
프랑스어 | Guntram | |
생몰 년도 | 532년에서 534년 사이 ~ 592년 | |
재위 기간 | 부르군트의 왕 | |
561년 ~ 5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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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군트 프랑크 왕국의 왕.2. 행적
2.1. 초기
532년에서 534년사이에 클로타르 1세와 인군트의 아들로 출생했다. 동복형제로 콘티에르, 카리베르 1세, 시게베르 1세, 칼데리크, 클로신드가 있었고, 이복형제(동생)로 킬페리크 1세와 크람이 있었다. 558년, 오를레앙의 킬데베르 1세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킨 크람을 토벌하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키리베르 1세와 함께 진격했다. 두 사람은 리모주에서 크람을 포위했지만, 크람이 클로타르 1세가 색슨족과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는 거짓 소문을 탈영병을 통해 퍼트리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크람은 그 틈에 잃어버린 영토를 확보하고자 노력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뒤늦게 아버지가 건재하다는 걸 알게 된 카리베르 1세는 다시 군대를 돌려 크람을 공격했다. 이후 크람이 진압될 때까지 군트람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데, 아마도 진압에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561년 11월 29일 클로타르 1세가 사망했다. 그의 아들들은 수아송에 안장하고자 떠났다. 그러던 중 킬페리크 1세가 국고를 서둘러 확보한 뒤 병사들에게 금을 나눠줘서 자신에게 충성 맹세를 하도록 했다. 이후 파리에 무혈 입성한 뒤 프랑크 왕을 자처하려 했다. 이에 분노한 군트람은 카리베르 1세, 시게베르 1세와 함께 힘을 합쳐 파리로 진군했다. 결국 킬페리크 1세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과 협상한 끝에 수아송에서 왕국을 조용히 이끌기로 했다.
2.2. 부르군트의 왕이 되다
이렇게 이복동생을 멀리 쫓아낸 뒤, 카리베르 1세, 시게베르 1세와 함께 왕국을 분할했다. 이때 그는 부르군트족이 다스리던 일대를 물려받았고, 북쪽의 멜룬에서 남쪽의 마르세유까지 이르는 프랑크 왕국 동부 전역을 물려받았다. 565년, 시게베르 1세가 군트람에 속한 아를을 공략하고자 클레르몽의 프림과 아도발라 백작의 지휘하에 군대를 파견했다. 아도발라 공작은 아를에 들어와서 주민들이 시게베르 1세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군트람의 군대가 아를에 도착하여 프림과 아도발라를 포위했다. 두 사람은 요격에 나섰으나 패퇴하고 도주했다. 아를을 탈환한 군트람은 여세를 몰아 아비뇽을 점거했다가 시게베르 1세와 화해한 뒤 돌려줬다.567년 11월 또는 12월, 파리 일대를 다스리던 카리베르 1세가 사망했다. 이에 그는 킬페리크 1세, 시게베르 1세와 함께 카리베르의 영지를 분할했다. 그런데 프로방스의 분배를 놓고 시게베르 1세와 분쟁이 벌어졌다. 시게베르는 그의 재산인 아를 시를 기습 공략했다. 이에 부르군트의 파트라케인 켈수스가 즉각 반격해 아비뇽을 공략하고 뒤이어 시게베르가 남겨놓은 부관을 물리치고 아를을 탈환했다. 군트람은 아비뇽을 시게베르에게 돌려주고 화해했다.
568년 서고트 왕국의 공주이자 킬페리크 1세의 아내였던 갈스빈트가 살해되었고 킬페리크 1세의 궁녀이자 정부였던 프레데군트가 킬페리크 1세의 새 아내가 되었다[1]. 이에 갈스빈트의 언니이자 시게베르 1세의 아내인 브룬힐트가 분노하여 남편에게 복수해달라고 간청했다. 시게베르 1세는 아내의 간절한 설득을 받아들여 군대를 이끌고 킬페리크의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군트람이 두 형제에게 자제할 것을 촉구했고, 그들은 569년 전국에서 소집한 대표들이 집결한 궁정 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궁정 회의 결과, 킬페리크는 살인에 관여한 책임을 지고 브룬힐트에게 아키텐의 5개 도시(보르도, 리모주, 카오르, 베른, 비고르)를 넘겨야 했다.
570년 또는 571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갈리아를 침공했다. 그는 켈수스를 파견해 요격하게 했으나, 켈수스는 랑고바르드군에게 참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그 후 랑고바르드군은 약탈을 자행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571년 또는 572년, 랑고바르드족은 갈리아를 두 번째로 침공하여 암브렌 마을 인근의 무스티아에 도착했지만, 군트람의 장군 뭄몰이 숲의 길을 통해 그들의 후방과 측면으로 돌아간 뒤 포위 공격하여 많은 적을 섬멸하고 포로들을 왕의 앞으로 끌고 갔다. 군트람은 이들을 죽이는 대신 자신의 군대에 끌어들여 여러 전선에서 병역을 수행하게 했다.
몇년 후, 이번에는 랑고바르드족과 작센족이 함께 갈리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라에 지역에 숙영지를 세우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번에도 뭄몰이 출격하여 이들을 공격해 많은 적군을 살상했다. 작센인들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요청하면서 생포했던 이들을 풀어주고 시게베르 왕을 위해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평화 협약이 성립된 후 돌아가던 작센인들은 아비뇽으로 가서 생계를 꾸리기 위해 곡식을 수확하던 주민들로부터 곡식을 빼앗았다. 이후 그들은 강을 건너 론 강둑에 접근했다. 이때 뭄몰이 그들과 접촉하여 군트람의 재산을 약탈한 것에 책임을 지고 수천 개의 금화를 지불하도록 강요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이를 지불한 뒤 시게베르 왕의 소유지인 클레르몽에 도착했다.
574년, 3명의 랑고바르드 족장 아몬, 자반, 로단이 갈리아를 침공했다. 아몬은 아비뇽으로 가서 주변 일대를 약탈하고 마르세유 시와 인접한 마을을 싹쓸이하고 인간과 소를 끌고 갔다. 뒤이어 엑상을 포위했다가 주민들로부터 22파운드의 은을 받고 물러났다. 자반은 발랑스로 진군한 뒤 그곳에 숙영지를 세웠고, 로단은 그레노블 시를 점령했다. 뭄몰은 로단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뒤이어 발랑스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자반을 요격하여 제압했다. 이후 로단과 자반이 암브룬으로 후퇴하자 이를 추격해 거의 섬멸했고, 로단과 자반은 소수의 추종자만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아몬은 이 소식을 전해듣고 모든 식량을 챙겨 후퇴하다가 폭설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고 이탈리아에 가까스로 들어갔다.
2.3. 킬페리크 1세와의 대립
575년 시게베르 1세는 라인강 너머 게르만인들을 대거 고용해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뒤 수아송으로 쳐들어갔다. 킬페리크 1세의 장남 테우데베르가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웠다. 군트람은 '군트람 보손'을 보내 테우데베르를 돕게했지만, 보손이 돌연 편을 바꿔버리는 바람에 데우데베르가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후 시게베르는 킬페리크가 숨은 투르를 포위 공격해서 거의 함락시켰는데 이때 시게베르가 프레데군트가 사주한 암살자들에게 피살되었다. 결국 주인을 잃은 시게베르의 군대는 해산해 버렸고 킬페리크 1세는 간신히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이 군트람은 시게베르 1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킬데베르 2세의 후견인을 맡았고 575년 말 또는 576년 초에 후견인 자격으로 마르세유 절반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킬페리크는 측근 한명을 군트람 보손이 숨은 성 마르틴 대성당이 있는 투르에 보내 자신의 장남 테우데베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를 넘기지 않는다면 투르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투르 주교 그레고리우스가 이끄는 투르 주민들은 "성스러운 성당이 스스로 찾아온 죄인을 보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데 이를 위반할 수는 없다"라고 답했다. 이에 킬데리크는 아들 클로비스에게 투르를 응징하게 했다. 클로비스가 명령을 받들어 데시데리우스 공작과 함께 투르와 앙제 일대를 약탈하고 있을 때, 부르군트 왕 군트람이 리모주에 도착하여 이들과 응전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군트람은 5,000명의 전사를 잃었고 데시데리우스는 24,000명의 전사를 잃고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한다. 그 후 군트람은 오베르뉴를 통과하면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부르군트로 돌아갔다.
581년,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가 마르세유 절반의 소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킬데베르 2세가 돌려달라고 청하자, 군트람은 자신이 후견인 자격으로서 그 영토를 점유한 것이며, 자신이 죽으면 그에게 왕국을 넘겨줄 테니 기다리라고 답했다. 킬데베르 2세는 그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해 적대시했다. 킬페리크는 이를 보고 데시데리우스 공작을 불러서 군트람을 괴롭히라고 명령했다. 데시데리우스는 군트람을 따르는 라그노발트 공작을 몰아내고 페리 시를 공략한 뒤 아제네로 진군해 군트람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도시를 점령했다.
583년, 킬페리크의 부하 베룰프, 데시데리우스, 그리고 블라다스트 공작은 킬데베르 2세를 지지하는 오베르뉴 지역을 침공했다. 오브레뉴 측은 1만 5천 병력을 소집하여 대응했고, 양자는 사토메안 요새에서 격돌했다. 데시데리우스는 이 전투에서 7천 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 하지만 베롤프와 블라다사스트는 별다른 저항없이 순조롭게 진군하면서 주변의 모든 것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살육했다. 이에 오베르뉴 주민들이 군트람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군트람은 즉시 진군하여 베롤프와 블라다스트의 군대를 거의 섬멸했다. 킬페리크는 이 상황에 동요해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하지만 군트람은 이 요청을 묵살했으며 이듬해인 584년 킬데베르 2세와 군트람이 연합하여 킬페리크를 공격했다. 킬페리크는 이에 대응해 캉브레로 피신한 뒤 전쟁을 이어가다가 그해 9월 27일 괴한에게 살해되었다.[2] 군트람은 파리에 무혈 입성한 뒤 킬페리크가 캉브레로 피신한 후 프레데군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클로타르 2세의 후견인이 되었고 클로타르 2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킬페리크 1세의 영역을 대신 다스리기로 했다. 다만 야심이 많고 비열한 술수를 자주 구사하는 프레데군트는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파리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고 루앙으로 보냈다.
2.4. 서고트 왕국과의 전투
이보다 앞서 킬페리크 1세는 자신의 딸 리군타를 서고트 국왕 리우비길드의 아들 레카레드 1세와 시집보내기 위해 화려한 보물을 가득실은 수행단을 딸과 함께 보냈다. 수행단 대표 데시데리우스는 여정을 떠나던 중 킬페리크 1세가 살해되었고 군트람이 킬페리크 1세의 영역을 점유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수행단을 해산하고 인군타와 함께 뭄몰에게 도망쳤다. 뭄몰은 데시데리우스와 협의한 뒤 클로타르 1세의 서자 군도발트를 왕으로 옹립했다.그들은 블라다스트 공작, 사가타리우스 주교, 와돈 등 킬페리크 1세의 잔여 세력과 합세한 뒤 툴루즈, 앙굴렘 등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반역 소식을 접한 군트람은 투르와 푸아티에를 약탈하고 도르도나 강에 도착하여 반란 토벌에 착수했다. 군도발트는 코멘스로 도피해 농성했고, 군트람은 코멘스를 즉시 포위했다. 며칠간의 공방전 끝에 블라다스트는 도망쳤고, 뭄몰, 사가타리우스, 와돈은 군도발트를 살해한 뒤 군트람에게 군도발트 수급을 바치며 귀순했다. 하지만 군트람은 감히 왕족을 죽인 그들에게 분노해 뭄몰과 사가타리우스 주교를 처형했고, 와돈은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브룬힐트와 합세했다. 반면에 군도발트 살해에 관여하지 않은 데시데리우스는 용서받았으며 데시데리우스와 함께 뭄몰에게 귀순했던 리군타는 어머니 프레데군트에게 보내졌다.
585년, 군트람은 서고트 왕국의 영역인 셉티마니아로 원정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프랑크군은 진군 도중에 자기 나라 주민들을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심지어 교회를 강탈하고 성직자들을 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러 민심을 잃었다. 그러다가 고트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작전이 어려워지자 자기들이 황폐화시킨 영토를 통과하여 후퇴했고, 그 과정에서 물자 부족과 전염병 창궐, 자국 주민들의 보복 공격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 후 라우비길드는 차남 레카레드 1세를 시켜 반격을 개시하게 했고 레카레드 1세는 카바레 요새를 점령하고 툴루즈 일대 대부분을 황폐화하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뒤이어 론 강 유역의 잘 요새화된 도시인 우게른을 공략했다. 이렇게 확보된 재산 및 포로들은 님 시로 이송되었다. 586년 레카레드 1세는 재차 공세를 개시해 나르본에 도착하여 여러 전리품을 획득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귀환했다.
586년 레카레드 1세의 약탈에 대한 보복으로 군트람의 부하가 된 데시데리우스가 셉티마니아의 도시 카르카손을 침공했다. 이 공격을 미리 파악한 도시 주민들과 서고트군은 도시 외곽에서 데시데리우스와 맞섰다. 전투가 시작되자 고트군은 미리 계획한 대로 후퇴했고, 데시데리우스는 즉시 추격했지만 적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열의가 지나친 나머지 주력부대에서 떨어져 나갔다. 고트군은 즉시 그를 에워쌌고, 데시데리우스는 자신과 함께 오던 소규모 분견대와 함께 살해되었다. 지휘관이 피살당하자, 프랑크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587년 11월 28일 삼촌 군트람과 조카 킬데베르 2세는 안델로트 조약에 서명했다 두 사람은 영원한 우정을 보장하고 아이가 없을 경우 상호 유산을 상속하기로 했고 상대방에게 모반을 꾀한 자는 넘기기로 했다. 또한 두 왕은 왕국의 분할과 경계를 정했다. 군트람은 파리, 토덴, 반도마, 에탐나, 샤르트르를 받았고, 킬데베르는 모, 상리스, 투르, 푸아티에, 아브론테, 에어, 콩세랑스, 라부르드, 알비를 접수했다.
같은 해 셉티마니아에서 나르본 주교 아탈루크와 셉티마니아 백작 그라니스타와 빌디게른이 반란을 일으키며 프랑크 왕 군트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아탈루크는 곧 죽었고 반란도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589년에는 군트람의 또다른 부하 보손이 이끄는 대군[3]이 셉티마니아를 침공해 카르카손에 접근했다. 도시 주민들은 대군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못내고 군트람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프랑크군이 승리에 취해 잔치를 벌이고 있던 사이, 레카레드가 파견한 루시타니아의 클라우디우스 공작이 갑작스럽게 습격했다. 프랑크군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했지만 곧 전열을 가다듬고 수적으로 열세인 적을 밀어붙였다. 클라우디우스는 후퇴하는 척 하면서 적군을 미리 준비한 매복 지점으로 유인했다. 프랑크군은 적을 추격하던 중 메복에 걸렸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프랑크군은 약 5,000명을 잃고 2,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으며 모든 보급물자를 상실했다고 한다. 나머지 병력은 고트군의 추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프랑크 왕국으로 도주했다.
이처럼 프랑크 왕국의 서고트 왕국 공략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후 프랑크 왕국은 당분간 서고트 왕국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하지 않았다.
2.5. 말년
590년, 브르타뉴 브로그웨네드의 군주 와로흐 2세는 낭트와 렌 주변을 약탈했다. 이에 군트람은 베폴렌과 에브라하르 공작의 지휘 하에 군대를 브르타뉴로 보냈다. 그러나 프랑스 군 지도자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서로 독립적으로 군사 행동을 취했다. 그 결과, 베폴렌의 군대는 늪에 빠져들어 많은 사람이 익사했으며 베폴렌 역시 전사했다. 에브라하르는 와로흐 2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브르타뉴를 떠났지만, 와로흐 2세는 곧 협약을 파기하고 아들 카논을 파견해 에브라하르의 잔여 병력을 섬멸했다. 군트람은 이 실패에 분노해 에브라하르가 와로흐 2세로부터 뇌물을 받고 군대를 파멸로 몰아넣었다고 비난하고 추방했다.군트람은 처음에 친척 중 한 사람의 하인이었던 베레난다를 첩으로 삼아 아들 군도발트를 낳았다. 이후 565년경에 마그나하르 공작의 딸인 마르카트루드와 결혼했고, 군도발트를 오를레앙으로 보냈다. 마르카트루드는 아들을 낳은 후 군도발트가 장차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해 566년에 군도발트를 독살했다. 그러나 얼마 후 마르카트루드가 낳았던 아들 마저 질병으로 사망했다.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된 군트람은 몹시 분노해 마르카트루드를 궁정에서 쫓아내고 오스트리아길다와 결혼하여 두 아들 클로타르와 클로도미르, 그리고 두 딸 클로틸다와 클로데베르가를 낳았다. 577년, 군트람은 오스트리아길다와 그녀의 아이들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했다는 이유로 마그나하르의 두 아들을 칼로 찔러 죽이고 재산을 몰수했다. 577년 군트람의 두 아들 클로타르와 클로도미르가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580년 9월 오스트리아길다가 병사했다. 그는 가족을 연이어 잃자 분노와 슬픔에 사로잡힌 나머지 주치의 2명을 살해했다.
592년 3월 23일 숨을 거두었고 성 마르켈리우스 교회에 안장되었다. 생전의 그의 아들들이 모두 사망한 탓에 그의 영지는 사전에 합의했던 대로 클로타르 2세와 킬데베르 2세에게 분할되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잔인한 면모를 보였지만 통치를 훌륭히 했고 교회를 꾸준히 지원했기에 성직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죽자마자 가톨릭 교회는 성인으로 시성하고 축일을 3월 28일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