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로베우스 왕조 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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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텐의 왕 Caribert II | 카리베르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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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카리베르 2세 |
프랑스어 | Caribert II | |
생몰 년도 | 미상 ~ 632년 | |
재위 기간 | 아키텐의 왕 | |
629년 ~ 6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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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의 아키텐 분국의 군주.2. 행적
클로타르 2세와 시킬트의 아들이다. 시킬드는 아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전 왕비가 낳은 아들인 다고베르 1세를 멀리 보내고자 했고, 클로타르 2세는 왕비와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622년 다고베르를 아우스트라시아 왕으로 세웠다. 625년 이복형 다고베르 1세가 어머니의 여동생 고멘트루트와 결혼한 지 며칠 후, 그는 어머니의 오빠이자 자신의 외삼촌인 브로돌프의 시누이인 풀베르트와 결혼했다. 그러나 626년, 시킬트 왕비와 에탐피아 공작 보소가 간통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입지는 불안정해졌다.629년 클로타르 2세가 사망했다. 네우스트리아인들은 아우스트라시아 왕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에 반감을 품고 카리베르 2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하려 했고, 외삼촌 브로둘프가 이 계획을 주도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다고베르는 그들이 미처 왕을 선출하기 전에 재빨리 행동했다. 모든 아우스트라시아 측근들에게 스스로 무장하도록 한 뒤 부르군트와 네우스트리아에 사절을 보내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친히 랭스를 거쳐 수아송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귀족과 주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가 이렇듯 신속하게 움직이자,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다고베르 1세는 브로둘프를 처형했지만, 어릴 때부터 신체가 허약해 오래 살지 못할 게 분명한 카리베르 2세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고 여기고 아키텐의 왕으로 세웠다. 그는 다고베르 1세의 예상대로 재위 3년만인 632년에 사망했다. 그가 알려지지 않은 여인에게서 낳은 아들 킬페리크가 아키텐 귀족들에 의해 왕으로 선포되었지만 얼마 후 다고베르 1세가 파견된 군대에 의해 피살당했다. 아키텐은 다시 다고베르 1세에게 귀속되었다. 그의 유해는 블례아의 생호망 대성당에 안장되었지만 16세기에 개신교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