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2 12:02:49

삭습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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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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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索襲
생몰연도 미상

전량의 은사. 자는 위조(偉祖). 양주(涼州) 돈황군(敦煌郡) 출신.

2. 생애

삭습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고요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여러 주와 군의 관청으로부터 효렴, 현량으로 천거받았으나, 삭습은 병을 핑계로 이를 모두 사양하였다. 그는 은거하면서 음양의 기술과 천문, 지리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책을 10여 편 저술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깨우치게 하였다. 삭습은 세속과 단절되어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았는데, 항상 혼자 있으면서 어떤 때에는 웃었고, 어떤 때에는 길게 한숨을 내뱉다가 흐느껴 울었으며, 어떤 때에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전량의 군주 장무가 양주를 다스리던 시절, 돈황태수 음담(陰澹)이 삭습이라는 기이한 은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직접 방문하였다. 음담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삭습과 대화했고, 대화를 모두 마친 뒤에는 밖으로 나와
"삭 선생은 덕이 높고 이름난 선비이니, 진실로 대의(大義)에 대해 물을 수 있었다."
라며 한탄하였다. 이후 삭습에게 예를 갖추어 부탁하길, 부디 삼로(三老)가 되어 마을의 풍속을 교화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하지만 삭습은 그 자리에서 칼같이 거절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79세.

삭습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음담은 소복을 입고 삭습의 장례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돈 20,000전을 하사하고, 삭습에게 '현거선생(玄居先生)'이라는 시호를 붙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