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02:06:28

대공분실

보안분실에서 넘어옴
파일:/image/277/2012/11/30/2012112912200110396_1_59_20121130132108.jpg 파일:/image/308/2011/04/01/9886_20210_4920.jpg
민주화운동기념관
(舊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보안분실 건물)
서울 홍제동 대공분실/보안분실. 사진 우측 고가도로는 서울 내부순환로다.[1]
파일:/image/002/2011/11/14/10111106151302(4).jpg 파일:/image/277/2012/11/30/2012112912200110396_5_59_20121130132108.jpg
박종철 열사를 고문한 경찰들에 대한 현장 검증을 하는 모습 박종철 열사가 사망한 조사실로 2001년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40px-Gyeonggi_Provincial_Police_Agency_National_Security_Investigation_Squad_IV_-_1.jpg 파일:Jangandong Anticommunistoffice.jpg
2015년에 촬영된 실제 대공분실 건물
(경기도 의정부시 경기북부경찰청 대공분실)
출처는 위키미디어 공용( 사진원본)
서울 장안동 대공분실/보안분실 (2004년)
1987년에 촬영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앞 영상.[2]
기자들이 촬영을 막으려는 전경대원과 실랑이를 벌이자 곧이어 사복경찰관들이 나와서 기자들을 제지한다.
1987년에 촬영된 또다른 남영동 대공분실 앞 영상.[3]
가야호텔[4] 앞으로 가려는 기자들을 사복 경찰관들이 제지를 하자 실랑이를 벌이고,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을 촬영하는 기자들[5]이 촬영을 제지하는 사복경찰관들과 실랑이를 벌인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영상을 찍고 있는 와중에도 저곳 5층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1. 개요2. 역사3. 현실4. 목록5.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6. 대중 매체7. 기타8.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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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공분실()은 경찰청 보안국이 설치했던 기관을 말한다. 보안분실(分室)이라고도 부른다. 유사 기구로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인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

설치 당시 목적은 북한의 남파 간첩과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을 취조하고 심문하기 위한 것이지만 군사 독재가 시작된 후 부터는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린 사람들은 모조리 용공분자라는 명분을 만들어 이곳으로 연행하여(필요하다면 추가 혐의까지 추가해) 당사자가 죄를 자백하거나 인정할 때까지 각종 고문을 자행해 심신을 반신불수로 만들거나 심하면 죽여서 내보내던 곳으로 유명하다.

2. 역사

경찰청 인권센터 홈페이지의 역사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출처. 여기에 약간의 오류가 있는데, 법령정보센터 자료를 보면 치안본부 산하에 대공과가 설립된 것은 전두환 정권인 1981년이다. 정확히 따지면 1976년 4월에 생긴 것은 치안본부 제3부 정보2과이며, 이 정보2과가 1981년 6월 대공과로 개편된다.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1948년 10월 대간첩 수사 업무를 위해 치안국 특수정보과 중앙분실로 발족하였으며, 1970년 10월 정보과 공작분실로, 1976년 5월에는 치안본부 대공과 대공분실로 바뀌었고, 1983년 12월에는 좌경의식 수사 업무를 흡수하고 제4부 대공 수사단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경찰청 대공수사 1단․2단, 대공2부, 보안3과 등으로 직제가 개편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청사는 업무 특성상 ‘부국해양연구소’라는 간판으로 철저히 위장, 1970~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많은 인사들을 취조․ 고문하던 곳으로 특히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의 경우 피고문자의 정신을 피폐하게 하고 공산주의 사상범으로 조작하기 위해 허구의 조서에 담긴 내용을 모두 시인하게 하기 위해 고문실의 내부 또한 특이하게 개조되었다. 바닥과 벽면을 모두 붉은 계열의 페인트로 칠하고 수용자의 자살 방지와 고문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나무보드 흡음재가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2000년 리모델링에 따라 박종철이 고문당한 509호를 빼고 이러한 잔혹한 고문의 흔적을 은폐하기 위하여 바닥과 벽면을 연두색 페인트로 칠하고 본래 욕조가 있던 자리에 세면대와 변기를 놓고 바닥에 나사로 고정되는 의자까지 떼어버렸다. 실제로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실마다 있는 라디에이터를 기울이거나 흡음재의 구멍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래의 빨간 벽면 페인트 자국을 볼 수 있다. 또한 주 고문실로 사용된 5층에는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도 모르는 기이한 구조의 방이 여럿 있다. 2019년부터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서 대공분실을 민주운동기념관으로 변모시키고 폐기되거나 용도변경되어 그 잔혹한 흔적이 감춰진 대공분실의 원형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360도 카메라로 구현한 대공분실 가상체험
화면을 직접 드래그하면서 건물 곳곳과 박종철 조사실을 볼 수 있는데 실제 피해자들이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리모델링이 현재까지 꾸준히 진행된 탓에 박종철 열사 조사실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데, 화면으로 보다 보면 이 건물이 고문과 취조, 보안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됐는지 알 수 있다.

3. 현실

설립 목적은 남파공작원과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취조하여 가려내는 것이지만 국가보안법을 전가의 보도로 휘두른 군사독재 시절에는 헌법상 보장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하거나 정권 입장에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던 악명높은 장소로, 검거된 사람들은 국민들과 언론의 관심이 차단된 밀실에서 엄청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보기관, 군 수사기관, 대공분실 외에 특수수사대 분실과 일반 경찰서 형사과 및 파출소에서도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고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군 수사기관의 경우 대통령 암살사건 주동자급 가해자가 조사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다. 일반 경찰서 형사과와 파출소의 예를 들면 연행된 사람이 여자라면 성고문까지 했었고, 민주화 운동가가 빨갱이로 몰리는 것 말고도 연쇄살인사건이 터졌으면 증거가 없는 엉뚱한 용의자가 살인범으로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간첩조작 사건이 터질 시 일가 친척까지 불고지죄로 줄줄이 끌려와 고문을 당했다. 심지어 1983년에 섬유업과 관련된 대기업 이사가 특수수사대 요원들에게 고문을 당하다 죽기도 했으며 박종철을 고문하다 죽인 수사관도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특수수사대 요원에게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경찰서들과는 달리 간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지도에서도 나와있지 않다. 지번도에서도 정식 명칭은 나와있지 않고 번지수만 나와 있거나 위장명칭, 위장상호가 적혀있다. △△상사, □□산업 등으로 되어있고, 어린이집 명칭이 달린 곳도 있다. 이름 그대로 되어 있는 곳을 보고 일반 회사인 줄로 아는 사람도 있었다. 관련기사 또 소속 경찰관끼리 정식 계급을 붙이지 않고 ☆☆계장님, ○○사장님 식으로 말한다. 물론 굳이 위장을 할 필요가 없는 일부 안보수사대는 청사 내에 태극기를 상시 게양해 간판은 없더라도 최소한 공공청사임을 알 수 있게 해놓는다. 심지어 어떤 곳은 경찰 깃발도 게양해 놓는 곳도 있다.

군사독재 시기에 고문을 가해서 빨갱이로 몰았었던 과거사와 폐쇄적인 환경에 따른 인권침해 이유로 폐지해야 한다거나, 반대로 남북 대치 상황이라 존속이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있는데, 솔직히 지금 와서 굳이 따로 저런 걸 만들어 세울 이유는 없기는 하다. 워낙 정보가 빠른 시대라 저렇게 간판 뗀다고 해서 보안이 되는 시기도 아니거니와, 정작 중요한 보안성은 저런 곳보다는 차라리 국가정보원이나 경찰청사의 으슥한 곳으로 정보공개만 하지 않고 정식 절차대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 요즘은 일반 절차대로 수사해도 워낙 감시·검열·차단 자체가 용이한 시대라 별 문제가 없다. 옛날에 뭘 몰래 수작질해서 사보타주 할 수 있던 시대에나 작당모의해서 경찰서 터트리고 수송차량 박살내고 하는 게 가능하다.

간판도 달지 않고 그나마 몇몇 있던 곳도 간판을 뗀 상황인데, 2015년 간판 30개를 다는 데 3억여 원이 넘는 예산을 신청해 논란이 되고 있다. 간판 1개당 천만 원 수준이다. 관련 기사

2023년 9월 20일 홍제동 대공분실이 대공 수사 전담 조직을 위한 사무실로 지정된 사실이 드러나 큰 충격을 주고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시대퇴행 행태적 행정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6]

4. 목록

2012년 2월 17일 백재현 민주통합당 의원의 요청으로 경찰청이 공개한 전국 보안수사대는 아래의 표와 같다. 부산경찰청[7], 대구경찰청[8]은 별도의 보안분실을 조성하지 않고 본청 내에서 수사하며 광주경찰청은 본청은 아니지만 광주남부경찰서안에 안보수사대의 사무실이 있다. 이후에 상세 위치 및 현황에 대해 재공개하지 않았기에 폐쇄된 곳도 있을 수 있다. 2012년 한겨레 기사 2018년 더팩트 기사

참고로 이 표는 민주열사 박종철 기념사업회 웹사이트 중 대공분실 목록에 당당히 캡처되어 쓰이고 있다.
본청/지방청 실제 명칭 소재지 건축 시기 지도상 명칭
경찰청 안보수사1·2·3대
(경찰청 세검정로 별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세검정로 90-15 (홍제동) 충의회중앙회[9]
서울경찰청 안보수사1·2·3·4·5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8길 31( 내자동) 서울경찰청[10]
안보수사6대[11]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19길 18-6 2021년 개축 # 자하문로별관(과거 부국상사)[12]
안보수사2대[이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장한로12길 62 장한로별관(과거 경동산업)[14]
안보수사3대[이전]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로13길 20 신정로별관(과거 치안연구소)
안보수사4대[이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성산로 494-18 성산로별관
인천광역시경찰청 안보수사1·2·3대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서로105번길 21 (만수동) 인천광역시경찰청 광역수사대 [17]
경기도남부경찰청 안보수사1·2·3·4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금당로 71 (조원동) 경기도남부경찰청 광역수사대[18]
경기북부경찰청 안보수사1대 경기도 의정부시 경의로177번길 6 (신곡동) 만복교회
안보수사2대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강성로 43
대구경찰청 안보수사1·2대 대구광역시 남구 앞산순환로 367 (대명동) 폐지[19]
울산경찰청 안보수사2대[20] 울산광역시 중구 구교로 72 ( 학성동) 1989년 중구 태화동에서 옮김. [21]
경북경찰청 안보수사1대 경상북도 경산시 계양동 경산경찰서
안보수사2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용흥로 32 (용흥동)
안보수사3대 경상북도 구미시 원남로2길 24 (남통동) 경북경찰청 구미원남로별관[22]
경남경찰청 안보수사1대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비음로55번길 18-21 ( 사파동) [23]
안보수사2대 경상남도 진주시 대신로 614-28 ( 초전동) [24]
안보수사3대
대전경찰청 안보수사1·2대 대전광역시 중구 대종로35번길 32 ( 옥계동) 폐쇄추정[25]
충북경찰청 안보수사1·2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단재로 361 ( 방서동)[26]
충남경찰청 안보수사1·2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목천안터2길 18 (신계리) 흑성산업
광주경찰청 안보수사1·2대 광주광역시 남구 용대로74번안길 9-5 (봉선동) 광주남부경찰서[27]
전북경찰청 첨단안보수사계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모래내6길 63 #
전남경찰청 안보수사1대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로 89 (온금동)
안보수사2대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동산길 16-7 [28]
강원경찰청 안보수사1·2대 강원도 춘천시 효자로73번길 4 (효자동) 강원경찰청 효자로 별관[29]
안보수사3대 강원도 강릉시 경강로 2590 (견소동) 영동물산
제주경찰청 안보수사1·2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516로 2927 제주지방경찰학교

5.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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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남영동 분실 설계도
"남영동 5층 구석방에서의 23일, 이것은 지옥이었다. 독가스 대신 전기고문 물고문이 설치는 나치 수용소였다. 시간이 종국적으로 멈춰 버린 영원한 저주의 세계였다."
- 김근태
이 문서의 첫 사진으로 나와있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71길 37( 갈월동)에 소재하며, 경찰청 보안3과로 사용되던 곳으로써, 1976년 당시 내무부장관 김치열이 발주하여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설계, 건축되었다.

2005년 7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경찰청 인권센터로 쓰였다.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건물 운영권을 이전했으며, 경찰청 인권센터는 이태원의 구 정보분실로 이전했다. #1 #2 민주화 운동가를 고문하던 곳으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기도 하다. 영화 1987에서는 부국해양연구소라는 명칭으로 나왔다. 다른 대공분실과 돌려 쓰던 위장명칭 중 하나인 '부국상사'와 적절히 섞은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의 철두철미할 정도로 발주자의 요구사항을 맞춘 치밀한 설계로 악명이 높다. 외관을 얼핏 보면 김수근 특유의 벽돌 기법과 입구 전이 공간을 지닌 것이 상당히 멋들어진데 반해, 내부 구조는 거의 마음 놓고 고문하기 좋게 되어있다는 설이 유력한 사실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다양하고 치밀한 기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걸작 고문시설이다.( 대공분실 탐방 블로그[30] 참조) 건물의 특징적인 사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직원이 사용하는 정문으로 통하는 일반 계단과 수용자를 들일 때 사용하는 건물 뒤의 쪽문이 따로 존재한다.
  • 수용계단이 나선형의 어둡고 좁은 원형의 철제 계단으로 되어있고, 다른 층을 통하지 않고 수용자를 뒷문에서 조사실로 곧바로 데려가는 방식이다. 계단 층수 표시도 없다. 얼굴에 검은 포대자루 같은 것이 씌워지고 몸은 밧줄로 묶인 채로 끌려가는 조사 대상자들은 자연스럽게 방향 감각과 고도 감각을 상실한다. 당시 근무하던 경찰의 증언으로는 이 계단은 끌고 가던 사람들도 불편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중앙 계단을 썼다고 한다. 혼자 올라가더라도 부주의하면 넘어질 위험이 있을 정도다. 공간이 협소하고 경사가 급해 아래에서는 누가 붙들려 올라가는지 알기 어렵다. 이 원형 계단은 1층 쪽문 출입구에서 취조실이 있는 5층의 복도로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 본래는 5층 건물인데, 증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인 7층이 되었다.
  •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로 통하는 비상구나 통로 문도 다른 취조실과 똑같은 모양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빠져나가는 길을 찾기 어렵게 해서 조사받는 사람이 쉽게 탈출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다.
  • 5층 조사실 복도 끝에 거진 80~90도 경사의 철제 계단이 하나 더 있는데, 1층 정문 옆으로 이어져 긴급 상황 발생 시 경찰 탈출용으로 추측된다. 낮에 봐도 정말 소름끼친다.
  • 방마다 문을 엇갈리게 설치했다. 설계도를 보면 알겠지만 문이 열렸을 때 보이는 것은 벽면뿐이다. 고문당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마주쳐서 연락을 주고 받는 상황을 방지하며, 건축적으로 시각적인 불안정을 야기시켜 공포감을 부추기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각된다.
  • 복도의 천장이 높아 구두굽 소리가 크게 울려퍼진다.
  • 조사실의 벽이 흡음판으로 도배되어 있어 조사실 내에서 들리는 고문 소리와 신음 소리가 외부로 전달되지 않는다. 특히 이 흡음판은 4층과 5층에만 설치하도록 했다. 고문 등으로 인해 5층 조사실에서 발생할 소음이 다른 층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미리 조처한 것이다. 그렇지만 흡음판 또한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일부러 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하지 못하는 ‘목재 타공판’을 사용했는데, 목재 타공판이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 새어나간 비명소리는 낮고 음산한 소음이 되어 반대편 벽면으로 전달되곤 했다.
  • 조사실의 문에는 보통 집의 현관문과 마찬가지로 외시경이 달려있는데, 일반적인 외시경과는 다르게 반대 방항으로 설치되어 문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구조다.
  • 조사실 내부의 전등을 켜고 끌 수 있는 전등 스위치는 조사실 밖에 설치되어 있다. 철저히 통제자 위주의 구조이다.
  • 조사실 전등에는 특정한 형태의 철제 덮개를 반드시 씌우고, 전등갓의 외면은 은회색 멜라민 코팅, 반사면은 백색 멜라민 코팅으로 해야 한다고 설계도 상에 일일이 지정했다. 외부 충격으로 전구가 깨질 것에 대비함과 동시에, 집중 조명을 연출하기 위한 목적이다.
  • 위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밖에서 보이지 않게 세로로 길고 좁은 창문으로 되어있는 것이 전부 고문실 창문이다. 창의 폭이 불과 20cm 정도에 불과한데, 창문 유리를 깨더라도 사람이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을 뿐만 아니라, 채광량 자체도 적어 조사받는 사람의 공포감이 극대화된다.
  • 취조실에 샤워기 욕조가 설치되어 있는데, 당연히 물고문을 위한 용도로 쓰인다. 준공된 1976년에는 일반 가정집에 욕조와 샤워기가 결코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31] 더욱이 욕실이나 화장실 용도로 별도로 마련된 공간이 아닌, 철문으로 폐쇄된 방방마다 욕조와 샤워기가 모조리 배치되어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즉 오로지 물고문을 목적으로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한국 건축계는 김수근의 작품 중에서 이 대공분실의 언급을 최대한 피하고 있다. 다만 고객에게서 의뢰를 받고 건물을 설계하면서 이 건물을 이용할 사람들 그들의 목적을 고려한 거장 건축가적인 탁월한 판단은, 그가 명실상부 당대 한국 건축계의 최고 거장이었음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재 정부의 업적 과시를 위한 건축을 도맡아 명성을 쌓은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권력이 인간을 향해 폭력을 행하는 공간의 주목적까지 생각해서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는 것은 직업윤리와 인간적인 양심이 거의 파탄난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혹자는 김수근이 살던 시대는 반대자들에게 억압을 하던 시대로 고문도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독재정부까지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던 수사방식이었기에, 그를 비판하는 것도 오늘날 인권이 보장받는 시점에서 평가하는 시각이며, 오히려 그 당시에는 대공분실이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수감자를 고문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을 것이라고는 본인도 몰랐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김수근의 공간 사무소에서 일한 바 있는 건축가 승효상은 "김수근 선생이 설마 사람을 고문할 용도인 줄 알고 설계를 맡았겠느냐"며 선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당시 김수근은 단순한 일개 건축가가 아니라, 문화예술계의 대표적 후원자이자 당대의 유명인이었으며, 건축계의 '큰 손'이기도 했다. 골방에 틀어박혀서 설계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김수근이 1961년에 자신의 건축 사무소를 차리고 독립한 이후로 그의 건축 사무소에 매년 서울대 건축과 출신의 전도유망한 건축학도들이 줄줄이 입사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특히 1974년부터는 국민대학교에서 건축과 교수로 재임하며 10월 유신과 유신 반대 투쟁을 대학 학내에서 목격했다. 특히 1979년부터는 국민대학교 조형대학의 학장으로 재임하며 서울의 봄 12·12 군사반란을 비롯한 여러 역사적 사건을 모두 가까이에서 경험했음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가 대공분실에서 고문이 행해지는 것을 전혀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를 시대적 상황도 전혀 모르고 살던 바보 취급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특히 김수근은 설계도와 설계도상의 시방서를 꼼꼼하게 작성하기로 유명했는데, 끔찍한 고문을 위해 준비된 이 모든 구조와 장치들이 설계 단계에서부터 그의 손에서 치밀하게 기획됐다.

2018년 (재)진실의 힘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의뢰 하에 당시 보도자료, 재판 기록, 본 분실에 구금됐던 당사자들을 일일이 조사한 보고서 <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피해 실태 기초조사>에 따르면 1976년부터 29년 간 이 곳을 거친 피의자 수는 348명인데, # 이 중 대표적인 예로 1985년 이근안 등 경관 5명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김근태를 칠성판에 묶고 물고문 전기고문 가한 사건 1987년 박종철이 물고문을 당해 죽은 사건이 있다. 저 위에 박종철이 고문당한 방의 사진을 보면 조사실이라는 공간에 욕조와 샤워기가 있다. 그런데도 1988년에 치안본부의 모 대공차장은 대공분실에 욕조를 설치한 이유는 조사받는 사람이 목욕하기 위한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으며 이것은 망언에 가깝다. 당시 기사1, 당시 기사2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이지만 정작 위치는 남영동이 아닌 갈월동인데, 근처에 남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이 쪽도 마찬가지로 소재지는 갈월동. 특히 대공분실 존속 시절에 '남영역에서 평소처럼 지하철을 기다리는 일반 시민과 대공분실에서 고문받는 시국사범'이라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에는 상술했듯이 경찰청 인권보호센터가 2018년까지 들어섰는데, 이는 과거 경찰이 행했던 과거를 반성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 2018년 6월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조성하겠다는 뜻을 밝힘에 따라 경찰청의 대공분실 소유·관리 역할은 2018년 12월부로 종료되었다. 경찰 측이 인권센터를 한남동으로 이전하고 2018년 12월 26일에 이 건물을 경찰청의 상위 조직인 행정안전부에 넘겼다. 행정안전부는 향후 민주인권기념관을 조성해 기념관 관리 권한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맡기게 된다.

해당 건물 리모델링을 통해 2019년 5월 민주인권기념관이 조성되었으며 2024년까지 공사가 진행되었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관련 토론회를 여기서 개최하기도 하는 등 민주인권이라는 표현에 맞는 여러 행사를 진행하였다.

6. 대중 매체

  • SBS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
  • MBC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제5공화국》
  • 웹툰 《 비질란테》: 작중인물의 말에 의하면 지금 운용되는 곳은 아니고 예전에 폐쇄된 곳을 조헌이 개인적으로 활용하는 곳으로 여겨진다. 별다른 생활 시설도 없이 철문 안쪽에 욕조만 있는 구조. 딱 봐도 독재정권시기 남영동과 똑같이 물고문이 행해졌다는 의미. 참고로 걸려있는 간판은 사랑의 치유센터. 과거 사람을 고문하던 곳이 사람을 치유하는 곳으로 간판을 바꾼 것에서 아이러니함이 느껴진다.

7. 기타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캠퍼스에 있는 클럽 이름도 대공분실인데, 해당 캠퍼스가 옛 국가안전기획부 해외파트 건물이 있던 자리여서 그렇게 지어진 듯하다. 이 때문에 귀신을 목격했다는 학생들의 괴담이 속출하기도 했다. 이쪽은 약칭 DGBS라고도 하는데, 이 약칭은 과거 조선펑크의 산실이었던 홍대거리 공연장 드럭( 크라잉넛도 여기 출신)의 리스펙트를 겸하는 듯하다. 홍대거리 드럭은 보통 DGBD로 줄인 영칭이 있었다. 이쪽 대공분실에서는 주로 방송에 나온 적이 없거나 특성상 나오기가 힘든 사회파적 비주류 인디밴드의 공연들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2010년대 말 이후로는 인디밴드의 활동도 줄어들었고 이따금 Lost Air라는 단체가 DJ 공연이나 하는 듯하다.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당시 대공분실 수사관 중 한 명의 진술을 언급했는데 이곳에 한 번 들어온 자들은 똥물을 뱉어낼 때까지 패야한다라는 말이다. 아예 죽도록 패버려서 그에 대한 공포로 대공분실의 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 그러나 1987년 이런 가혹한 폭력으로 한 수감자가 죽게 되고 그로 인해 이 대공분실의 진실이 밝혀지게 되면서 진실을 숨길 수 있을 거란 이들의 생각은 완벽히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8. 관련 자료



[1] 해당 구간은 철망이 깔린 터널 형태의 방음벽이 있는데 화염병 등을 투척할 수 없도록 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2] 출처가 MBC 아카이브인 것으로 봐서 MBC에서 촬영한 영상이다. [3] KBS에서 촬영한 영상이다. [4]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 있는 호텔로, 2017년에 가야라트리호텔로 이름을 변경했다. 가야호텔 앞이 남영동 대공분실의 전면부가 보이는 곳이다. 2006년 박종철 19주기에서 인권연대 사무국장에 의하면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된 연행자 수가 너무 많으면 가야호텔도 빌려쓰기도 했었다고 한다. [5] 기자들 중 1분 41초에 "누구 지시야? 우리가 경찰 지시받고 촬영하는 사람이야?"라고 항의하는 기자는 이선재 기자다. 1986년 입사한 1년차 기자였다. 이후 동사 보도본부 워싱턴지국장, 비서실장, 보도국 취재주간, 보도국장, 보도본부장 순으로 승진했고 전략기획실장을 마지막으로 퇴사하여 현재는 불교방송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6] 경찰 관계자는 청사 내 공간이 없어 대공분실 건물을 사용한다고 청사 내 공간이 있으면 이전 검토할 예정이라고 언급했고 지난 문재인 정부 위원회에서 전국 안보수사대를 지방경찰청 청사로 이전할 것을 권고해 안보수사대를 지방청 본청 또는 일선 경찰서 청사로 이전했다. [7] 부산경찰청은 본래 부산시 초량동 부산역 철길 부근에 내외문화사라는 대외명칭을 가진 2층짜리 대공분실을 운영했었다. 그러나 현재는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8] 2020년 9월 기존 대명동에 위치한 대공분실에서 지산동 본청으로 이동, 민원인 접견실 등을 마련하여 조금 더 인권친화적인 보안수사대 환경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9] 문서 맨 위 오른쪽에 있는 홍제동 대공분실이 이곳이다. [10] 본청과 주소가 일치하는데, 이는 서울청 본청 내에 있다는 뜻이다. [11] 2021년 이전에는 안보수사1대가 사용했다. 2021년 안보수사1대는 서울경찰청 종로 내자동 청사로 이전. [12]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과, 사이버수사과를 간판으로 내세우고있다. [이전] 2021년 서울경찰청 종로 내자동 청사로 이전. [14] 과거 남영동 대공분실과 비슷한 검은 벽돌 건물이다. [이전] [이전] [17] 서울 남영동, 홍제동과 비슷한 검은 벽돌의 건물. 별관에 위치하고 있다. 간판에 지능범죄수사대가 쓰여있었으나 2023년중에 광수대로 간판이 바뀌었다. [18] 과거에는 유치원으로 위장핶었는지 마당에 놀이기구와 미끄럼틀이 설치되어 있다가 2010년도 무렵 철거되었다. 2019년 2월 경기남부청 내에 있던 광역수사대와 부지 맞교환 참고 [19] 과거에는 네이버 지도에 검색하면 '주차장' 이라고 떴다. 안보수사기능이 지산동 대구경찰청 청사로 이전한 뒤에는 여경기동대인 제9기동제대의 임시청사로 쓰다가, 현재는 기동순찰대가 입주해 사용 중. [20] 광역시 승격 이전 및 울산청 개청 이전엔 경남청 소속이었다. [21] 안보수사1대는 본청 청사로 이전 [22] 과거에는 금호산업이라는 위장명칭을 사용했으며, 현재는 경제범죄/반부패수사대가 사용 중. [23] 창원지검,창원지법 뒤편 경남청 어린이집 바로 옆에 단독주택 모양으로 존재한다. 다만 인접한 주택들과 달리 길 방향으로는 나무를 빽빽하게 심어놓고 출입구에는 셔터가 있어 단순히 부유한 사람이 사는 주택으로 보기엔 범상치 않다는 느낌이 있다. [24] 경남도청 서부청사 인근 농경지 가운데에 있다. 2023년 1월 로드뷰 상에서는 정문과 그 주변이 정비되어있고 서부 여청수사팀, 경남청 광역수사대 등의 간판이 붙어있다. [25] 2023년 2월자 카카오맵 로드뷰를 보면 폐허가 된 듯이 건물 1층의 유리창이 없고 내부도 다 뜯겨져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6] 과거 지북동 355-33번지였으나 일대 부지가 동남지구 개발사업으로 인해 방서동 651번지로 바뀌었다. [27] 이 주소는 실제 광주남부경찰서이다. 즉, 대구나 부산경찰청처럼 본청 내에서 수사한다는 뜻. [28] 순천시에 반납 예정 [29] 2025년 강원강릉경찰서 완공시 이전 예정 [30] 현재는 모든 게시글이 삭제되어있는 상태이다. [31] 그래서인지 이 시절 목욕탕 주인은 동네 알부자로 유명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