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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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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사시대~기원전 6세기2. 기원전 5~3세기3. 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4. 2~13세기5. 14~15세기6. 16~17세기7. 18~19세기8. 20세기 이후
8.1. 핵무기

1. 선사시대~기원전 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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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에는 사냥이나 전투가 가능한 성인 남자는 부족 간 싸움에서 전부 보병으로서 활약하였다. 그래서 가장 처음 등장한 보병 병과도 투석병과 투창병으로, 사냥이나 수렵 시에 짐승을 상대로 쓰던 것을 사람한테 그대로 쓰는 것이었다.

나중에 작은 동물들을 잡기 위해 이 발명되자 마찬가지로 사람을 상대로도 사용되었다.

당시 전사들은 활이나 투창, 투석과 함께 냉병기도 같이 사용하였고, 석기시대까지 창과 화살촉은 돌로 만들었으며, 청동기 시대 초기에도 청동은 귀했기 때문에 도끼나 일부 냉병기를 제외하고, 화살촉이나 투창용 창은 돌을 가공하여 만들었다.

인류학자들이 부족 사회의 풍습을 연구한 결과, 이 시기 전쟁은 크게 두 가지의 양상이었다.

하나는 의례적인 전투로, 대개 양측이 사전에 날짜와 장소를 정하는 등 전투를 벌인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어느 정도 안전거리를 두고 활이나 투창, 투석, 부메랑 같은 원거리 무기를 통해 교전했다. 사상자는 매우 적었고[1] 백병전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으며 벌어지더라도 잠시 동안만 벌어졌다. 어느 한쪽이 전멸로 이어지는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

오히려 전투로 인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나오는 경우는 어느 한쪽이 (주로 야간에) 기습한 경우로, 이때는 적극적으로 근접전이 벌어졌고, 기습이 성공했다면 어느 한쪽이 절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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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제11왕조시기(기원전 21세기~19세기) 보병을 표현한 나무 조각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잉여생산물이 생겨나고, 그와 함께 사회계급, 도시와 국가가 등장하고 전쟁의 규모도 커짐에 따라 이나 전차, 과 같은 전쟁도구들이 등장하고, 보병들도 쥐고 있는 무기에 따라 역할이 구분되어 병과가 생겨났다. 보병 병과는 무기에 따라 크게 투석병, 궁병, 방패를 든 창병, 허드렛일을 하는 보조병으로 나뉘었으며, 특히 활은 든 궁병은 고도의 훈련이 필요해서 인류가 주로 수렵과 사냥을 하던 때와 달리 다른 경보병들보다는 고급 병종으로 취급되었다.

이들은 크게 중보병과 경보병으로 나뉘었는데, 경보병은 주로 활을 쏘거나, 투창, 투석을 하면서 본격적인 전투 직전 적의 전열을 약화시키고, 중보병은 창과 방패를 들고 밀집방진을 이루어 직접 적과 맞서 백병전을 펼쳤다. 다만, 나중에는 전장에서 전차가 한참 활약하였으므로[2] 보병은 마치 오늘날처럼 야전에서는 주로 이들 전차를 보조하고 지원하며, 요새나 성을 구축하여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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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탑을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는 아시리아 제국군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왕국인 기원전 20세기 무렵에 나일강을 주변으로 수많은 요새가 쌓였으나, 이때까지 성이나 요새를 직접 점령하거나 포위하는 기술이 모자랐던 탓인지 이들 요새는 단 한 번도 제대로 공격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보병은 요새를 지키는 역할이었지 공성전에 투입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서는 군사강국인 아시리아 제국이 공성기구를 이용하여 요새화된 성을 공격해 무너뜨리는 방법을 터득하였고, 이에 본격적인 요새쟁탈전이 시작되어 공성전이 보병의 주업이 되었다. 주로 엄호사격을하고, 방진을 이뤄 공성무기를 보호하고, 공격활로가 뚫리면 냉병기를 들고 성내에 진입하여 요새를 지키는 적보병과 교전하고, 점령하였다.

반면 지중해에 있던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11세기의 트로이 전쟁 때에도 보병을 비롯해서 중앙아시아나 동아시아의 제국보다 훨씬 원시적으로 싸우는 편이었는데, 전투는 주로 전차를 탄 장교나 지휘관이 차에서 내려 1대1로 싸우고, 보병은 주로 이들의 대결을 투석이나 투창, 화살로 원호 및 지원해주는 역할이었다. 요새화된 성곽은 있었지만 이들을 잘 포위하고, 장비를 이용하여 공략하는 공성전은 거의 없었다.

2. 기원전 5~3세기

  • 고대 지중해 세계 관련 서술은 존 워리(John Warry), 『서양고대전쟁사박물관』 (르네상스라이브러리)를 참고

지중해에서 대규모 병력이 보다 체계적으로 맞붙게 된 것은 훨씬 나중 일로, 어느새부터 도시 간에 무력을 겨루기 위해서 중무장한 보병인 호플리테스들이 방진을 이루어서 대열싸움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면서 팔랑크스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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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팔랑크스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마술이 잘 발달하지 않고, 쇠뿔과 다른 재료를 합쳐 만든 각궁이나, 투창, 투석무기도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전투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생산활동을 오래 못할 위험이 있는 경보병들의 유격전보다는 중보병들간에 백병전으로 단기에(단기라도 해도 전투에는 몇 시간이 소요되었다.) 승부를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몇몇 전투는 경보병이나 기병조차 없이 중보병만으로 치러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요새화된 성곽은 있었지만, 중앙아시아 같은 정교한 포위전이나 중장비를 이용한 공성전은 거의 없었다.

중보병 간 백병전에서는 보통 보병이 전열을 이탈하지 않고 제자리를 끝까지 사수하는 쪽이 승리할 확률이 높았고, 전투의 사상자도 주로 한쪽의 대열에 이탈자가 생겨 붕괴되고, 적에게 추격당할 때 많이 발생하였다. 대열을 유지하기 위해 강도 높은 제식훈련을 하고, 부상을 방지하고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큰 방패와 무겁고 육중한 갑옷 그리고 귀와 얼굴을 모조리 가리는 투구, 정강이 받이 등을 착용하였다.

전쟁에 참여하는 보병은 보통 시민으로 구성되었으며, 시민들은 시민권과 함께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그리스군에 복무했다. 보통 각자 개인 재산으로 장비를 사서 참가하였기 때문에. 장비와 무장수준, 그 밖에 갑옷과 방패의 색이냐 문양에서 개별적으로 약간씩 차이가 났다. 개인장비를 구매할 여력이 없으면 투창이나 투석을 겸해 맨손으로 투입되기도 하였다. 주로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호플리테스가 되여 팔랑크스를 이루고 가난한 시민으로 이루어진 경무장 투창병은 아콘티스타이(Akontistai)라 불리웠다. 이들은 신분도 낮았기 때문에 진지공사 이외에 허드렛일 등 잡일도 도맡아 했고, 또 이들 말고도 오늘날의 헝가리나 불가리아 지역의 트라키아나, 스키타이에서 투창병과 궁병을 용병으로 고용하기도 했으나, 앞서 언급했듯이 그리스에서는 중보병대가 주력이었다.

반면, 동시대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와, 인도는 기병의 기동전과 활, 투석, 투창 등의 투사무기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경보병의 비중이 높았고, 중보병이라도 황제의 주력인 이모탈조차 방패와 창이 고작에 호플리테스처럼 투구와 정강이받이 등 방어구를 잘 갖추지는 못하였다. 원인은 전투의 성패가 주로 경보병과 기병의 사격 및 유격전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많고 중보병의 참여비중이 비교적 크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추후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그중 특히 마라톤 전투에서 원거리 무기를 이용한 유격전이나 사격전으로 방패와 갑옷으로 잘 무장한 팔랑크스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도리어 호되게 당한 이후로는 페르시아제국에서도 그리스 중보병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반대로 그리스에서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전투에서 경보병과, 기병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이들의 비중이 점차 증가하였다. 그리스의 도시국가간에 특히 아테네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에는 경보병과 기병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특히 필로스-스팍테리아 전투 레카이움 전투에서는 중무장한 스파르타의 중보병대가 매복한 아테네의 경보병대와 맞닥뜨려서 지형지물과 투사무기를 이용한 유격전에 격퇴되기도 하였다. 이때 아테네군은 일부로 무기를 쥐어 방패로 보호받지 못하는 스파르타군 오른쪽에서 공격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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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크라테스의 군제개혁 후 아테네 병사들. 큰 그림이 중보병, 작은 흑백그림이 경보병인 펠타스트다.

레카이움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중보병을 격퇴한 아테네의 장군 이피크라테스(Iphicrates)는 이런 전투 경험에 착안하여 보병의 군제를 개혁한다. 중보병대는 기존의 거대한 방패와 정강이받이, 무거운 청동갑옷과, 눈코입을 제외하고 얼굴을 다 가리어 무겁고 청각을 제한하는 투구 대신, 작고 가벼운 방패를 들고, 시야와 귀과 잘 트이는 보다 가벼운 투구를 착용하고, 정강이 받이는 착용하지 않으며, 청동갑옷은 린넨(아마포)으로 만든 가벼운 갑옷으로 바뀐다. 대신 창의 길이가 3.6m로 기존의 창인 도리보다 더 길어져, 백병전을 치룰 때 가까이서 싸우기보단 길어진 창대를 이용해 멀리 싸우게 하여 방어구의 영향력을 덜받게 하였다. 반대로 경보병인 팰타스트는 장기간의 전투에서 생존율을 늘리기 위해 금속투구를 쓰고, 더 커다란 방패를 쥐었으며, 또 투창뿐만이 아니라 백병전에서도 싸울 수 있도록 보다 긴 도검과 찌르는 창이 지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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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이피크라테스의 군제개혁에 영향을 받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 필리포스2세는 마케도니아의 군제를 개혁하여 3.6미터보다 더 긴 4.5~5.5미터 길이의 사리사 장창을 쥔 팔랑크스를 창안하였다. 이피크라테스가 개량한 팔랑크스도 긴 창을 가졌지만, 비교적 덜 촘촘한 대열에서 창대를 양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들고 내려찍는 방법도 썼었으나,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는 양손을 이용해 창을 허리춤으로 잡는 대신, 앞뒤로 5열 이상의 인원이 한꺼번에 정면에서 창대를 이용해 찌를 수 있도록 보다 정교한 대열을 구사하였다. 또한 양손으로 창을 쥐기 쉽게 팔랑크스의 방패에는 목줄이 달려, 왼팔이 방패의 하중을 덜 받게하였다. 단 5개 열이 한꺼번에 정면을 향해 있는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는 방향 전환이 어렵고 측면과 후방을 공략당할 위험이 높았는데, 마케도니아에는 히파스피스트(Hypaspist 혹은 Hypaspistai)라는 병과가 기병과 다른 경보병들과 함께 팔랑크스의 측면과 후방을 보호 및 보조하였다. 정강이받이와 투구, 흉갑, 사리사를 든 병사들 것보다 큰 방패 등으로 비교적 잘 무장한 이들은 3.6미터라는 비교적 짧은 창을 역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쥐고 싸웠다. 마치 더 이전시대의 호플리테스와 비슷한 무장이지만, 히파스피스트 보병들은 주로 측면과 후방에 위치해서 호플리테스들보다 더 넓은 대열로 빨리 그리고 유연하게 움직이며 아군 방향으로 돌입해오는 적의 기병이나 경보병의 진입을 막거나 보호하는 역할로 활동했다. 이밖에도 마케도니아 군에서는 보병으로서 궁병과, 투석병, 투창병을 또 별도로 운용하고, 기병의 돌격전술과 함께 모든 병종을 유기적으로 활용하면서 제병협동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는 이후 알렉산더가 마케도니아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제국과 이집트를 정복함에 따라 이 지역의 군사문화에도 영향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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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병마용갱. 무장수준이 제각각이다. 고대 중국 역시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보병이 개인재산으로 무기를 사기도 해서 한자성어 모순은 창과 방패를 파는 상인에서 유래했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중앙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전차를 중심으로 한 야전에 주력하다가, 춘추전국시대부터 비옥한 농경지와 생산성, 강력한 국가권력을 갖추고 대규모 인원을 징발하여 보병부대를 편성하고 대회전을 이루는 일이 늘어났다. 이 시기 기본적인 보병전술은 중앙아시아나 인도와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지중해나 중앙아시아에 비해 그렇게 상세한 문헌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고, 그나마도 병마용갱이 발견되면서 조금이나마 추정할 수 있는 수준이다. 당시 보병은 창이나, 도검, 도끼말고도 보병용으로 같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거나, 가로로 베고, 찍을 수 있는 장병기도 많이 쓰였다. 지중해나 중앙아시아에서 쓰이던 것처럼 길이가 4~5미터에 달하는 장창은 없고, 창의 길이는 대체로 2~3미터 정도였다. 특히 유목민족인 흉노가 오래전부터 우수한 기마술을 바탕으로 활을 들고 쳐들어오는 일이 많아, 일찍부터 기병부대와 함께 다수의 궁병이 편성되었다. 중국만의 특징은 궁병 중에서도 기계적으로 복잡한 장치를 쓰는 석궁 즉 노를 사용하는 병력이 꽤 많았다는 것인데, 노가 활에 비해 만들기는 어렵지만 배우기는 훨씬 쉬웠기 때문에 진나라 이후 강력한 국가권력을 바탕으로 대량의 수공인들을 동원해 대규모 궁수부대를 양성하여 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 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

  • 유럽 각지역의 서술은 존 워리(John Warry), 『서양고대전쟁사박물관』 (르네상스라이브러리)를 참조하여 작성

알렉산더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4개국으로 나뉘었고, 이들 간에 전쟁도 끊임없이 발생하였는데, 코끼리와 중무장한 기병대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그와 동시에 보병 간의 백병전에서는 장창을 든 팔랑크스끼리 경합을 치루었다. 같은 팔랑크스 간의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보병의 장창인 사리사는 더욱 길어졌고, 갑옷과 보호구들의 무게도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한편, 신생국가였던 고대 로마에서는 주변국이던 에트루리아 그리스를 모방하여 같은 방어구를 하고, 긴 창을 든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 전술을 주로 사용하였으나, 북방의 켈트족의 침입과 주변 야만족 특히 삼니움족과의 싸움에서 기동력이 떨어지는 팔랑크스의 약점으로 인해 공략당하는 일이 많아, 시간이 흐를수록 로마군은 기동성을 중시한 부대로 변모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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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풀라 대열의 포진도와 포진을 구성했던 로마보병 구성원들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의 군제개혁으로 로마군은 장비와 전투력, 경험 등을 바탕으로 보병이 크게 4개의 대열로 앞 뒤로 배치되어 교대로 번갈아가며 싸우는 전술을 구사한다. 처음에는 투창인 필룸으로 원거리 교전을 하다가 백병전을 치루고, 백병전이 교착상태에 이르면 뒷열과 교대하는 식이었다. 이를 마니풀라(manipular) 전술이라고 한다. 당시 보병전투가 속공으로 밀어붙이기 보다는, 주로 투창이나 투석으로 오랫동안 교전하고 백병전에서도 교착상태에 머무는 일이 많아서 생긴 전술이었는데, 처음 한 개 대열의 전투조차도 몇 시간에 걸쳐 오래 진행되었다.

또한 로마군은 그리스 군대와 달리 초기부터 나라에서 급료를 받았으며, 무기와 장비의 일부를 지급받았다. 보통 투창과 함께 큰 방패, 그리고 짧은 검을 소지하였고[3], 무거운 방패에 자신의 왼쪽 팔이 베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도검은 오른손 잡이일 경우 오른쪽에 패용하였다.

그러다가 카로타고와의 포에니 전쟁, 그중에서도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 바르카가 보병을 좌우로 보다 넓게 배치시키고, 기병과 함께 로마군을 포위해 여러 차례 궤멸시키자, 자마 전투에서 로마군의 지휘관인 스키피오는 앞뒤로 대열이 두꺼운 4개열의 보병을 한니발과 똑같이 좌우로 펼치어 맞공을 펼치기도 했다. 이후에도 보병의 편제는 그대로되, 종전처럼 마니폴라르 포진으로 두껍게 배치되는 것보다는 넓게 배치되는 일이 많아졌다.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군사적으로 계속 팽창하여 동쪽의 마케도니아와도 맞붙었는데, 특히 이때 장창을 든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보병과 로마의 군단병이 크게 맞붙어 싸우게 된다. 대표적인 전투로는 키노스케팔라이 전투, 피드나 전투 등이 있다. 이 두 전투에서 긴 창대를 이용해 여러 열이 정면을 압박하는 팔랑크스는 고른 평지에서는 무적의 전투력을 보여주었으나, 울퉁불퉁하고 언덕이 진 지형에서 대열의 빈틈이 발생하여 긴창의 이점을 충분히 살릴 수 없었고, 그사이로 로마 보병이 재 빠르게 접근하거나, 정면으로 뻗어있는 창끝들을 우회하여 측면을 공략당하면서 대패하였다. 이때 당시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는 팔랑크스간의 교전에만 치중하여 중무장한 탓에 기동력도 떨어졌는데, 전시대의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는 후방으로 진입하던 페르시아 군을 상대로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가 후방으로 순식간에 이동하여 대처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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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 군제개혁 후 로마 군단병. 마리우스의 노새(Marius's mules)라고도 불렸다.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군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쓰이던 짧은 검인 글라디우스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이탈리아 내전과 게르만족과의 전쟁 이후 집정관이던 마리우스에 의해 군제가 크게 개편된다. 종전에 4개로 구분되었던 보병부대는 보조병과 군단병으로 통합되었고, 무기와 방어구를 비롯한 모든 장비를 국가에서 지급하고, 더불어 군장과 제식장비를 통일 및 개량하여, 한 명의 보병에게 진지구축을 위한 야전삽과 곡괭이, 도끼는 물론이거니와 간단한 취사도구까지 지급하고 또 이를 기존에 가지고 다니던 군장보다 가볍게하여 행군 시 휴대하게 하였다. 물론 기습이 예상되거나, 짧은 구간을 이동한 뒤 바로 전투에 임해야 할 때는 군장을 내려놓거나, 우마에 싣는 등의 유연성은 있었고, 장거리 행군이 필요한 때가 아니라면 대체로 짐은 우마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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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시아 공방전 당시 포위진지를 짓고 있는 로마군. 기술이 필요한 부분은 보통 전문 토목기술자들이 담당하고 보병은 주로 땅을 파거나 자재를 나르는 등의 허드렛일을 담당했다.

특히 종전부터 보병의 일이었지만, 천막과 진지구축을 위한 야전용 공병장비가 필수지급품이 되고서부터 로마보병은 전투뿐만이 아니라 토목기술자들과 함께 야전축성까지 담당하게 된다.

이때 참호도 등장하는데, 후세의 참호와 달리 총과 포탄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의 전진을 방해하는 장애물로써 보통 보병들은 참호를 파두고 바깥에 배치되었다.

단순히 정해진 임시진지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많은 병력을 상대로 싸울 때는 야지와 야전, 회전에서도 참호를 파서 지리적으로 유리한 이점을 얻는다거나, 짧은 기간 내에 야전진지를 축성해서 거점으로 삼고 야지의 병력과 협동해서 싸웠다.

로마인 중에서는 술라 카이사르가 축성술에 능했으며, 특히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 때 베르킨게토릭스가 지키는 일레시아 요새를 빙둘러 포위하고는 포위망에 그대로 야전진지를 설치하여, 아군보다 몇 배는 많은 적 구원군의 진입을 철저히 차단시키면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 밖에 무기로는 기존의 필룸이 개량되어 아군으로부터 던져진 투창이 적의 방패에 꽂힌 후 잘 파손되게 만들어 적이 방패를 들기 힘들고, 다시 집어들어서 아군을 향해 되돌리기 힘들게 만들어졌다.

투창보다 긴 원거리에서 교전을 하기 위한 투석병이나 궁수는 보통 주변 지역에서 용병으로 고용하거나, 혹은 식민지로 점령한 지역이나 본토에서 보조병으로 차출하여 충당되었는데, 투석병은 보통 용병으로 충당되고 궁병만이 보조병으로 편성되었다. 궁병은 보통 쇠뿔로 만들어 M자로 굴곡이 지고, 활몸 위 아래의 크기가 다른 비대칭형 합성궁을 사용하였는데, 이들 보조병들은 파르티아와의 전쟁과 원정에서 궁기병들을 상대로 크게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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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3세기 켈트족 전사들

반면, 이탈리아 북부와, 현재의 프랑스와 독일, 영국 등에서 로마의 적이었던 다른 세력들은 정교한 사회조직과 함께 체계적인 군사조직이 있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구체적인 군대의 편제나 전술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이들에 대한 묘사라고는 대략 이탈리아 북부와 영국에 이르는 지역에 살고있던 각기 다른 부류의 켈트인들은 공동적으로 로마보다 제철기술이 좋아 길이가 긴 장검을 쓰고, 타원형의 긴 방패, 간단한 투창과 함께 2~3미터의 백병전에서 찌르기 위한 창을 장비하거나, 심리적인 위압효과를 위해 벌거벗은 전사가 있었다거나, 머리칼의 모양을 특이하게 만들었다는 등의 대략적인 특징들 정도다.

그 밖에 브리타니아에서는 전차를 타고 이동하고 전투 지역에서는 하마하여 전투를 치루는 오늘날의 기계화 보병 같은 전차병을 운용했다거나, 게르마니아에는 3.6미터가 넘는 장창을 쓰는 귀족 보병대가 있었다, 다키아 지역에서는 보병들이 팔크스 같은 무기를 사용했다 같은 기록들이나 고고학적 유물들만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유럽에 있던 비 로마군 역시 로마와의 교류로 투구에 뺨가리개를 가진 병사도 있었으며, 방패의 모양이나 크기 등에서도 로마군과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나중에는 게르마니아를 중심으로 로마군 전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에 이른다. 그 외, 중앙아시아의 파르티아는 보병을 양성하려고 노력하다가 보병을 사실상 폐지하고 주로 기병부대를 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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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의 보병대를 표현한 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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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한 전쟁당시 한군 보병 재현도, 오스프리

한편, 중국의 보병은 흉노와의 정복전쟁 중 기병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기병과의 전투와, 아군 기병과의 협조를 위한 성격이 짙어졌다. 그러면서도 이 시대 중국의 보병은 기병을 상대로도 우수한 방어력을 선보였는데, 특히 한의 흉노원정 때 이릉이 보병분견대 5천을 이끌고 흉노의 주력 기병3만 명을 상대로 끈질기게 저항한 것이 유명하다. 비록 전투는 결과적으로 더 많은 주력부대를 이끌고 포위한 흉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당시 이릉은 보급용 수레를 장애물로 삼아 그뒤로 창과 방패를 든 병사, 궁수와 노를 든 병사들을 배치하여 대기병 방진을 짜서 더 많은 수의 흉노기병대를 상대로 꽤 분전하였다. 이후로도 보병이 기병을 상대로 보급용 수레나, 전투마차 등을 쓰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외 전한시대 보병은 밑에 평평한 방패와 2~3미터의 창이나 , , 단병기를 쓰는 병사는 자루에 고리가 달린 환도를 소지했으며, 앞서 진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활을 쏘는 궁수와 함께 노를 쓰는 병사가 많았다. 특이하게도 병마용갱과 마찬가지로 이시대 보병을 표현한 각종 유물과 유적에서는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나 철모는 발견되지 않는다. 병마용갱과 마찬가지로 전한왕조의 보병을 표현한 토우등에서는 가슴과 상반신을 가리기 위한 갑옷을 입었으나, 하반신에는 갑옷을 입지 않고, 정강이 받이도 없었다. 병마용갱의 몇몇 보병들은 어깨까지 가려주는 갑옷을 착용하였으나, 전한시대 토우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4. 2~13세기

  • 로마후기에 관한 서술은 '존 워리(John Warry), 『서양고대전쟁사박물관』 (르네상스라이브러리)'를 토대로 내용을 보다 더 수정

로마제국은 수백 년에 걸친 영토확장과 광활한 방어구역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별탈 없이 국경을 방어할 수 있었으나, 수백 년에 걸쳐 로마제국이 자체적으로 쇠퇴하는 것과 맞물려 게르만족이 서서히 성장하여 로마제국 국경을 돌파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

종전부터 이민족이 로마군에 입대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군생활을 마친 후 로마시민권을 받고 로마인이 되는 식이었으나, 기원후 4세기 무렵 테오도시우스 황제 즉위 전후로 본래 정예군 편제의 절반이 날라가 병력부족을 겪자 부족 단위의 이민족 부대를 재편성하지 않고 그대로 로마군에 편입시키게 되었다. 부족 단위로 동맹군을 통째로 합류 및 편성하는 일은 전에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이들을 제어할 정예 부대가 건재했던 것과 달리 테오도시우스 즉위 이후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병력이 없었다.

로마군의 무장인 글라디우스는 기원후 1세기부터 꾸준히 길어져 이민족의 장검과 비슷한 길이가 되었으며, 창과 장창의 중간쯤 되는 란케아를 쓰는 병사가 점점 증가하였고, 필룸은 본래부터 보급이 시원찮다가 디자인과 형태가 점차 단순해져 일반 투창과 비슷해지면서 덩치는 점점 작아지다가 이게 플룸바타리나 다트 등이 되었다. 당대에는 이걸 주로 필룸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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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350년경 무렵의 로마군 정규병. 코미타텐세스일 확률이 높다.

넓어진 국경 탓에 여러 차례 개혁을 거쳐 제국의 방어방침은 요새화된 곳과 국경선만 수비하는 것에서, 사방에서 출몰하여 침범하는 이민족들을 효율적으로 처치하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적재적소에 병력을 빠르게 이동시켜 격퇴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를 위한 기동력 높은 일종의 기동타격대가 편성되었다. 장비면에서는 사실 정규 로마 군단과 장비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다른 건 보병은 약간 더 경무장에 기마병의 편성 비율이 높았다. 그리고 기존의 크고 사각형이었던 스쿠툼 방패가 서서히 작고 둥근 형태의 방패로 변경되었다.[4]

일단 검신이 점점 길어지자 검을 차는 방식도 차츰 바뀌게 된다. 그전 고대 로마 보병은 방패에 걸리적 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검을 오른손에 장비했지만, 검신이 길어진 이후로는 왼쪽에 걸어 검을 뽑기 쉽게 했다. 한편 동 서로마가 전체적으로 기마병이 많은 이민족과의 싸움을 겪으면서 기병의 편성 비율을 늘리고, 보병 중에서도 기병의 공격을 보조해줄 수 있는 궁수와 투창병 및 경무장병의 편성 비율을 높여갔다.

이후 보병전술은 시기적으로 대체로 큰 변화가 없이 지역이나 세력별로 무기나 환경 등이 다른 특징이 있는 정도고 쓰는 전술에서는 큰 차이점은 없었으나, 정규 보병이 크게 퇴조해버린 서유럽과는 달리 로마 군단을 여전히 고스란히 물려받아 운용하던 동로마는 친위대인 바랑기안 근위대가 보병이기도 한 등, 여전히 서구의 보병보다 높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다만 등자가 발명되기 전부터 세계 각지에서 기마병의 쓰임새가 증가하고 편성비율도 늘어나 대체로 보병은 기병의 보조역할 정도였고, 보병이 백병전을 위하여 사용하는 무기도 대동소이해지고, 보병이 쓰는 창도 대체로 2~3미터 길이의 것이 제일 많았다.

서구 지역은 서로마제국 붕괴 이후에는 사회, 제도적으로 봉건제도가 실시되고, 병력의 동원 역시 지방영주들에게 할당이 되어 보병들의 무기와 보급은 자체적으로 하거나 지역별로 조금씩 달라지는 경향이 보이며, 로마 제국이 건재한 동구 지역은 여전히 그전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무기 보급은 국가에서 구매해주거나 지급하거나, 무기 구입비를 보조하는 식으로 운영되었다.[5]

그외 7세기 무렵 등장한 바이킹 선박과 함께 유럽 각국을 약탈 및 침략하였는데, 함선의 우수한 기동력을 갖추고[6] 주로 보병으로 활약했던 이들은 여러 군데를 이동하는 오늘날의 해병대와 비슷했다.[7] 그러나 기본적인 보병전술은 주로 그리스 시대 호플리테스나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둥근 방패을 들고 뭉쳐 싸우는 방진을 즐겨 사용하였다. 다른 지역도 별반 다를바 없으나, 바이킹족 사이에서는 보병용 무기로는 긴 손잡이를 이용한 양손 도끼 즉 데인액스가 부분적으로 드문드문 사용되다가, 자루가 길어지면서 폴암류의 도끼창으로 발전하게 되어 보병용 창으로 줄기차게 사용된다. 바이킹 소드라는 검도 쓰긴했다. 동양에서는 이미 고대에 으로 일찍부터 사용되던 것이었다. 다만 이 바이킹들도 유럽 국가들의 방어체계가 개선되고, 특히 바이킹이 상륙했다 하면 기사들이 달려와 기병돌격을 박아버리자 그대로 짓밟히는 일이 반복되며 점차 약화된다.

한반도에 있던 신라는 특이하게 길이가 4~5미터에 달하는 장창을 두 명이서 들고 휘두르는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와 얼추 유사한 방진을 사용하였는데[8], 주로 기병을 막거나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였고 이를 이용해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 기병대를 격퇴하기도 했다.

5. 14~1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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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전술은 기원후 3세기 무렵부터 로마군 무장의 변화 외에 큰 변화는 없었고, 야전은 주로 기병의 돌파전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경향이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지만, 14세기경부터 유럽에서는 보병무장이 강화되고,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는 보병들의 활약이 서서히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이미 동아시아에서는 진나라, 한나라 시대부터 두드러졌던 폴암 계열 무기가 유럽에서는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특히 할버드 폴암, 장창 등의 무기를 이용하는 스위스 용병들이 기병과의 교전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하였다.

백년전쟁에서 영국군은 존 왕 시기에 프랑스 영토 상실[9], 웨일즈 롱보우의 발견, 양적 및 질적으로 우수했던 프랑스군에 대처하기위한 방어적 전술 등의 요인이 겹쳐서 잘 무장한 보병대와 우수한 원거리 무기인 장궁을 이용한 방어진을 짜, 프랑스군 기병의 돌격을 저지 및 분쇄하고 제압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당시 영국군은 숲을 등진 주로 언덕이나 고지대에 자리를 잡고, 말뚝과 방책을 세워서 적의 이동을 저지 및 방해하고 장거리 투사무기인 장궁을 쏘아대며 항전하였다. 중앙에는 말에서 하마한 기사들이[10] 중보병으로서 적의 전진을 저지하고, 좌우에는 말뚝과 방책, 보병과 하마 기사들로부터 보호받는 다수의 장궁병이 배치되었다. 성공을 위해서는 우회 돌격을 할 수 없도록 좌우가 비좁고, 또 말이 이동하기 힘든 진흙탕 등의 지형을 선점하는 것이 중요했다.

영국군의 이와 같은 전술이 무려 3차례나 성공해서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다만, 적의 전진을 저지하고 방어하기 좋은 위치에서의 전투에서는 큰 성과를 이루지만, 방어진지를 충분히 구축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기병대의 공격에 보병대가 궤멸한 경우도 몇몇 있었고, 백년전쟁 후반에 이르면 대포가 도입되면서 언덕이나 고지에 위치한 영국군이 프랑스군의 대포에 공격당한 뒤 기병대에게 돌격을 받으면서 종전과 같은 철통방어를 보여주진 못하였다. 여기에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결국 위기의 순간에 가장 커다란 결정타를 가했던 것도 잉글랜드 중기병 돌격이었고 크레시 전투에서도 잉글랜드 기병대의 추격 및 섬멸이 뒷받침되었어야 하는 등 기병은 여전히 막강한 전력이었고, 보병의 무장과 전투력이 종전에 비해 상승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병의 돌격은 보병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한편 같은 시기 장창인 파이크의 사용이 잦아지는데, 개중 스코틀랜드 스위스 용병들의 장창병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스코틀랜드는 1314년에 배넉번 전투에서 장창 밀집방진인 쉴트론(Schiltron)으로 잉글랜드 기병대를 고전시킨바 있고, 플랑드르 백국군이 Geldon이라는 장창을 이용하 프랑스 기사들을 상대로 재미를 보기도 했고, 각지역에서 장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의 밀집방진이 위력을 발휘한 전투는 점점 많아진다.

아예 극단적으로 기병대가 하마하여 기병창인 랜스를 파이크 마냥 들고 맞방진을 짜 보병전을 펼쳐 상대 보병진을 밀어버리기도 했는데, 젬파흐 전투에서 하마한 맨앳암즈기병들이 기병창을 파이크처럼 사용하여 폴암을 든 스위스 용병 보병들에게 우세를 보이기도 했고, 같은 방법으로 이탈리아의 맨앳암즈들이 아르베도 전투에서 스위스 용병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6. 16~17세기

  • 'Keith Roberts , <Pike and Shot Tactics 1590–1660>, Osprey Publishing, 2012'의 내용 참조

유럽에서는 중세 후기를 기점으로 보병의 무장도 좋아지고, 특히 중세 말기인 14세기를 기점으로 장창인 파이크의 사용이 점차 늘어갔다. 스위스 용병들의 파이크 방진은 프랑스를 기점으로 장다름과 함께 정예 보병과 기병으로 유럽에서 맹위를 떨쳤다.

한 편, 스페인 왕국에서는 이탈리아 전쟁을 계기로 그전에는 검을 든 경보병과 투창기병에 의존하는 전투방식을 파이크병과 새로 나온 을 사용하는 총사들을 대거 양성하는 군제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는 점차 발전하여 테르시오라는 보병 전술이 등장한다.

스페인의 군제개혁 이후에 벌어진 파비아 전투에서는 합스부르크 제국군으로 참가한 스페인군 총사들이 스위스 용병과 프랑스 중기병 장다름을 상대로 막대한 살상력을 선보인바 있고, 곧 이나 석궁은 총으로 대체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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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0명일 때 테르시오의 구성과 포진
영화 알라트리스테 로크루아 전투 장면

테르시오는 중앙에 창병을 두껍게 배치되고, 정면과 후방, 측면, 등 사방에 총병이 배치된 보병포진으로 총병이 창병 바깥에 배치되어 처음에는 사격전을 펼치다가 적이 가까워지면 총병이 창병 뒤로 숨어서 빠지고, 창병이 접근해오는 적과 싸우는 전술이었다. 총병이 사방으로 배치된 데다 창병도 정방형으로 포진했기 때문에 대열에 사각이 없었고, 그 때문에 기병이 정면을 피해 우회하여 돌진해올 때도 대처할 수 있었다.

과거 보병에게 총이 보급되기 전까지는 기마병 특히 갑주를 갖춘 기사들의 돌격전술을 분쇄하는 데 한계가 있었지만, 총과 함께 기마병의 돌격을 저지할 창병이 함께하면서 일명 파이크 앤 샷 전술이 대두, 보병이 야전에서도 기마병을 제치고 전장의 주력 병력으로 다시 부상하게 된다.

보병중에서 창병이 백병전의 주축, 원거리 사격전에서는 총병이 주축이고, 방패나 칼, 단병기로 무장한 보병들은 보조병력으로 배치되었다. 단병기를 든 병사들은 창대가 향해있는 정면을 피해, 측면이나 후방에 접근하여 창의 잇점을 살리지 못하는 거리에서 백병전을 걸었다. 르네상스 초기에는 할버드 폴액스, 투핸디드소드, 아밍 소드와 방패 등 다양한 냉병기를 장비한 보병들이 이런 역할로 같이 포진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면에서는 오로지 파이크를 쥔 창병이, 측면이나 후방에서 전투는 원거리에서도 능수능란하게 싸울 수 있는 총병이 검을 쥐고 맡다보니, 나중에는 방패나 다른 냉병기를 든 병사들이 폐지 및 대체되어버린다.

이 시기에는 전쟁도 잦았고, 특히 보병 전술도 몇 차례 변경되었는데, 30년 전쟁에 참전했던 마우리츠 판 나사우가 처음으로 테르시오에서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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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군의 포진.M은 머스켓, A는 아퀘버스, P는 파이크

우선 마우리츠는 병력을 작게 더 세분화하여 특히 대대를 기준으로 하여 550명으로 편성하였는데, 더 많은 장교를 고용하여 명령과 통신, 포진 변경에 용이하게 하였다. 장교는 국민으로부터 징병을 하여 양성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므로 거의 대부분이 용병이었다.[11]

보병의 포진도 기존의 테르시오가 창병 대열만 50열이었던 데 비해, 마우리츠의 네덜란드군은 창병과 머스켓티어가 5~10열, 아퀘버스가 9~12열 정도로 더 넓고 길게 포진하였다. 총병과 창병의 비율은 테르시오가 5 : 5나 5 : 4.5 인 데 비해, 마우리츠는 그 비율을 2 : 1, 즉 총병이 2에 창병이 1로 총병의 비율 대폭 늘렸다. 또한, 깃발, 명령체계등을 정비하고 보병의 제식장비를 통합하여 기본 제식화기와 투구를 비롯한 무병장기를 로마시대 이후로 다시 나라에서 보병에게 지급하기 시작했다. 총병은 평소 창병의 옆에 포진해 적과 사격전을 펼치고, 사격전 시 총병의 포진은 크게 3개의 대열로 나눈 뒤 순서대로 사격하면서 뒷열과 교대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로마시대 마니폴라르 전술을 보고 생각해낸 것이었다.[12] 다만, 실전에서는 사격대열은 크게 2개로 나뉘어서 교차사격할 때가 더 많았다고 한다.

보병을 지원하는 기병의 경우 70%가 총기병으로 배치되면서, 아예 적의 배후 차단과 추격등에 더 집중하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로 바뀌었다. 물론 네덜란드군은 이런 개혁을 바탕으로 니우포르트 전투에서 승전을 거두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는 그 전투에서 스페인군과의 백병전에서 밀려 패전의 위험을 겪기도 하여서 아직 총병에게만 의존하기는 이르다는 결론을 얻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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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대 네덜란드군의 포진. 스웨덴의 영향을 받아 포병배치가 늘었다

마우리츠와 교류를 나누던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도 군제를 개혁하면서 국민개병제와 상비군 제도를 실시, 그 밖에도 대대적으로 군사개혁을 가하며 보병의 장비와 전술을 개량했다. 마우리츠의 포진에서 좌우익에 배치된 총병의 배치를 더 넓게 늘려 배치하는 대신, 총병과 창병의 비율은 마우리츠와 달리 1 : 1로 두고, 창병들의 창을 기존 16피트 4.8미터 이상의 길이에서 3.3미터인 11피트까지 줄이고 총병들이 지니고 있는 총의 무게와 총의 화약 규격도 대폭 줄여 경량화하였다. 대신 청동으로 주조한 소형대포를 말로 운송하여 야전에서 즐겨쓰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화력과 기동력을 중심으로 보병을 운용하였다. 보병의 개개 전투력은 종전의 편제보다 딸렸지만, 포병의 화력과 더불어 기병과 함께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제병협동전술이었다.

1631년 구스타브는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테르시오전술을 구사하는 구교를 상대로 개신교 연합 최초의 승리를 선사했고, 프랑스와 스페인이 맞붙었던 1643년 로크루아 전투에서 최초로 스페인 테르시오가 패배를 경험한다. 그러나 로크루아 전투에서조차 테르시오의 진형이 무너지지 않았기에 프랑스군의 돌격은 매번 실패했고, 병력전체에서 총병의 비중이 커지지만 백병전을 위해 파이크를 든 창병은 다수가 잔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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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원앙진 보병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명나라 때에 서유럽으로부터 화약과 총기, 대포 등을 수입 및 발전시키면서 이를 중심으로 한 보병의 제병전술이 부각되었다. 특히 명나라의 척계광은 해적인 왜구의 소탕을 위해서 대포와 화기는 물론 장창, 당파, 낭선, 등패를 든 보병들의 제병협동 전술인 원앙진을 만들었는데, 이와 함께 휴대옹 박격포격인 호준포를 함께 운용하면서 포병과 보병의 화력을 중심으로 병력을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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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실록에 수록된 후금군과 명군의 전투. 오른쪽이 명군이다.
주로 총과 개인용 화기를 든 보병은 전열 앞에서 사격전을 펼치다 뒤로 빠지고, 뒤이어 백병전을 위해 배치된 병력이 적과 맞서 싸웠다. 궁수는 냉병기를 든 병사 뒤에서 지속적으로 사격을 가하였다.

특이한 점은, 동시대 서유럽과 달리 백병전을 위한 병력이 무기별로 각각 따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오에 같이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데 원앙진에서 방패와 단병기를 쥔 병사들이 창병의 앞에 배치돼서 보호를 하고, 그 뒤에서 창병들이 장창을 내밀어 방패를 든 등패수를 원호해주며 이들 좌우에 낭선을 든 창병이 배치되었다. 굳이 원앙진이 아닌 다른 전투를 묘사한 삽화등에서도 낭선이나 당파는 등장하지 않더라도, 방패수와 창병이 같이 병행 배치되어 전투를 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유독 동아시아에서는 서유럽과 달리 이런식으로 방패수가 끝까지 잔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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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인 병거를 이용하여 방진을 짠 명군

특히 후기의 척계광도 마찬가지지만 명군은 북방의 기마병을 상대로 보병진을 짤 때 유독 전투마차로 대기마 방어책을 자주 구사하였다. 명나라 군대에서도 화기와 총기의 보급이 매우 늘었지만, 총기의 연사속도를 보완하고, 화살의 곡선궤도를 이용하기 위해서인지 궁수가 창병으로 다 대체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 잔존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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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에 뒤이은 청나라 때에는 화기의 도입이나 개발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아, 보병용 화기나 전술에서 그전의 명군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명나라 때에 총검의 일종인 쾌창이 개발되었으나, 잘 쓰이지 않고 여전히 백병전은 단병기를 든 방패수와 창수등에 의존하고, 궁수도 말기까지 계속 존재하였다.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 동일한 역할의 다른 보병 병과들이 모조리 창병과 총병으로 양분된 것과는 대조적인데, 보병전술이 르네상스 초기 유럽 수준에서 정체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밖에 북방에서 청나라와 싸웠던 준가르군은 기마병이 낙타와 함께 다니거나, 낙타를 타고 다니다가 교전 시에 낙타를 엄폐물로 삼아 사격전을 펼치는 전술을 썼는데, 기병이라기 보다는 오늘날의 기계화보병과 비슷한 개념으로 운용된 셈이다.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총을 주무기로 창병과 총병의 제병협동이나 보병전술이 유행하게되었는데, 특이한 점은, 대열의 좌우, 전후 거리가 촘촘한 명군이나 동시대 네덜란드, 스페인군과 달리 창병의 대오가 넓었고, 당시 일본의 창병들은 창을 찌르는 방식이 아니라, 장창을 위로 들었다가 밑으로 내려치는 방식으로 싸웠다. 크기가 큰 말과 마종이 적은 일본열도의 지리적 특성으로 이러한 특징이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7. 18~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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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프랑스군 프로이센군 보병들의 백병전을 재현한 모습. 뒤에는 영국군도 보인다.

서유럽에서는 18세기에 이르면 소총에 총검을 부착하여 사용함으로써, 장창병의 도움없이 총병만으로도 백병전이나 방진을 펼쳐 적의 접근에 방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면서 창병이 점차 사라지고 모든 보병이 총병이 되어갔다. 이들을 흔히 전열보병이라고 한다. 갑옷이 총탄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하고, 또 비용면에서 비효율적이다보니 보병용 갑옷은 이 시대 서유럽에서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영화 패트리어트

보병 간에 교전을 할 때의 주된 모습은 대열을 갖추고 가까이까지 접근한 뒤 소총으로 일제사격을 펼치는 양상이었는데, 이래야만 화력을 모아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고, 또 기병대의 돌격으로부터 보병이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보병 전투는 주로 사정거리 안에서 한두 번의 일제사격 후 총검 돌격을 취해 백병전을 벌이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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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워털루의 한 장면

테르시오의 시대에도 보병만으로 기병의 돌격을 쉽게 방어하기 시작했지만, 이제부터는 창이 없이 총검과 총만으로도 기병에게 충분히 대항이 가능하였고, 이에 맞춰 전열보병용 사각방진이 창안되면서 기병대가 보병방진에 접근해 오더라도 측면이나 후방 어디로도 파고들 수 없게 철저하게 방어막을 칠 수 있었다. 총이 없던 시절의 방진을 몸으로 부술 수준의 기병대조차 총검 밭과 사격에 무력화될 수 있었고, 기병이 투사무기로 방진을 약화시키자니 보병용 화기가 여러모로 월등하여 오히려 기병대가 더 피해를 입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말 위에서 쏘는 것보다 서서 쏘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 애초에 기병보다는 보병이 양성하기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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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피라미드 전투에서는 이집트 맘루크 기병대가 마상 위에서 창과 칼, 총 등을 자유자재로 쓰며 프랑스 보병대와 교전을 벌였지만, 방진의 화력에 못 이겨 격파당하기도 하였다.

물론 여전히 기병이 돌파력을 이용해 보병을 격퇴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발생했지만, 전장에서 올라간 위상과 입지로 인하여, 결정적인 최종 성패를 짓는 보병의 중요성이 대두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 서유럽에는 이전 시대와 달리 보병이 모두 총이라는 한 종류의 무기를 들고 전투에 임하였지만, 그래도 밀집대형으로 집중적인 화력을 투사하는 전열보병과 산개대형으로 정찰 및 게릴라 전술을 수행하는 경보병으로 구분되었다.

특히 경/중보병 전술은 모리스 드 삭스(maurice de saxe 1696 – 1750)백작에 의해 개념이 정립되었다.[13]전열의 중앙에는 두터운 8열 이상으로 구성된 종대형 밀집대형의 중보병이 위치하고, 경보병은 보병진의 날개인 측면에 위치해서 산개대형을 펼친 채 300야드(274.32m) 이내의 거리에서 먼저 사격전을 펼친 뒤 적이 가까워지면 두터운 중보병 사이로 피신하도록 하였다.[14]

주로 포수로 구성된 사격에 능숙한 인원들은 경보병으로 배치되고, 징집되어 훈련과 경험이 부족한 병사들이 전선의 중앙에 위치하는 편이었다. 고대나 중세때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큰 역할은 전과 달라지지 않은 셈. 다만 이때는 갑옷도 없고 총기의 살상력이 냉병기보다 높았기 때문에 전투 별로 희생이 훨씬 커졌고, 산병전을 해야될 때를 제외하고, 전열보병간 싸움에서는 대열의 견고함이나 적과의 거리, 대열유지에서 승패가 크게 결정되었다. 그래서 제식훈련이 더욱 강조되었는데, 지금 받는 제식 훈련은 상당부분이 이때에서 비롯됐다.

반대로 평야에서 전열전투와 대열구성에만 집중하다가 교전에서 밀린 경우도 더러 있었는데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에 벌어진 잘펠트 전투에서 프랑스군 17경보병 연대가 엄폐물과 산개대형을 이용한 산병전술을 사용하여 프로이센 군 보병을 고전시킨 바 있고, 보로디노 전투에서도 숲으로 진군한 프랑스군 우익이 산병전술과 뒤이은 사격으로 러시아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등 전쟁기간 내리 프랑스는 산병전술로 꽤 재미를 보았다. 영국군 역시 라이플 연대등 경보병 부대의 운영으로 유명하였다.

반면,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특히 인도와 청나라에서는 보병의 군사기술과 전술이 16~17세기에서 커다란 변화가 없이 그대로 유지되어, 서유럽처럼 총병을 통한 전열보병 전술로 발전하지 못하고, 냉병기를 든 병종과 활을 든 병종이 뒤늦게까지 계속 있었고, 기본적인 보병전술도 그대로 정체되어 버렸다. 다각적인 원인이 있지만 이 때문에 아편전쟁에서 청군은 전투내리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열강의 군대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는 그림을 보여주게된다.

8. 20세기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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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1차대전 이후에야 보병들은 비로소 밀집대형을 버리고 산개대형을 취하기 시작했다. 1차 대전기에 기관총 앞에서 밀집대형을 구성한 보병대는 수십 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수만 명이 죽어나갔다.

보병은 기관총의 사격을 피해서 땅을 파고 참호를 만들어 엄폐하기 시작했고, 양군이 참호에 몸을 숨기며 참호 쟁탈전을 펼치는 지루한 전쟁양상이 이어졌다. 이른바 참호전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 후기에는 이런 참호전을 벗어나기 위해 전차가 발명되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전후로 분대단위 보병전술이 세분화되어

현대전에서는 첨단무기의 등장으로 보병의 역할이 거의 없다고 판단되어 그 규모를 줄이는 중이었으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을 통해 보병의 가치가 재확인되고 있다. 점령지에서 게릴라전에 대응하거나 치안을 유지하는 데에는 여전히 보병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미국 정부나 국방부가 보병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미군 특유의 현지 민심잡는 데는 영 재주가 없어 삽질만 한 엉망진창의 민사 작전이 실패하면서, 현지인들의 반감을 사 보병 전투 수요를 스스로 늘려버린 탓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국가 간 전면전인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전선 유지의 주력이 다수의 보병인 점을 통해 전면전에서도 보병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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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어느 전장이라도 보병을 꿰뚫는 만고의 진리는 단 하나, 자기 발로 뛰면서 싸운다는 것이다.[15] 사리사 호플론을 들었건, 글라디우스 들고 로리카 입었건, 파이크 츠바이핸더 들었건, 을 꼬나쥐고 찰갑을 입든, 수발식 장총을 들고 붉은 군복을 입었건, 방탄모 쓰고 K2 소총 들었건 모두 다 발로 뛰면서 싸운다. 미군을 비롯해서 기계화율이 높은 군대도 마찬가지. 결국 전장에 도착해서는 하차해서 전투를 벌여야한다.

따라서 보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장도 용맹도 아닌 행군능력. 잘 걷는 보병=좋은 보병이다. 그리고 빠르게, 먼 거리를 걷기 위해 체력 등이 향상되어 자동적으로 정예화되는 부수적(?) 효과도 있어서 잘 걷는 보병은 용맹하기까지 하다.

걷는 것이 얼마나 강조되냐면 한자로도 애초부터 걸을 보 자 써서 보병이라고 부르고 영어에서도 보병을 그냥 몇몇 Foot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5천 보병이면 병력이면 5,000 foot 이라고 부르는 셈. Infantry라는 단어가 있지만 그냥 foot이라고 부르는 게 편한 모양. 음절이 3개나 차이나는데 당연히 foot이 부르기 편하겠지. 기병은 horse라고 부른다. 따라서 5,000 보병 1,000 기병이면 5,000 foot 1,000 horse 라고 한다. 이 경우의 foot은 영어/불규칙 활용에서 보듯 단복동형이다. 그래서 발(feet)하고 보병(foot soldier)은 구분되는 것.

오죽하면 나폴레옹이 보병부대의 기동성을 이용하여 빠르게 진군하여 카스틸리오네 전투와 울름 전투에서 배가 넘는 오스트리아군을 쳐부수고 “최고의 군대는 싸우는 부대보다는 빨리 걷는 부대이다.”라고 말했고 그의 병사들은 “황제는 우리들의 다리로 승리를 얻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8.1. 핵무기

21세기 이후 핵무기가 개발되면서 보병 전투가 입지를 잃고 있다는 견해도 있으나, 핵무기가 예상 외로 약하다는 것이 증명되고,[16] 현재 세계 정세를 볼 때 핵무기는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일단 핵무기가 사용되면 너도 나도 핵쏘는 핵전쟁으로 번지는 상호확증파괴가 일어날 수 있어 핵무기 보유 국가들은 핵무기를 위협 수단으로 활용하지 실전투입은 하지 않고 있다[17]. 설령 핵전쟁이 일어나도 건물과 도로가 파괴되면서, 차량이 기동하는 데 제약이 생기면서 역시 지상에서는 보병 전투를 기반으로 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미 태평양 전쟁처럼, 보병의 점령으로 인한 방식이 아닌 전쟁 종결 사례가 있기에, 앞날은 어찌 될지 모른다. 원폭에 항복 안 했으면 결국 보병이 투입됐을 거 아니냐는 억지 주장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으로, 이 논리대로면 반대로 히틀러를 폭격으로 해치우는 데 성공했으면 보병이 (행정 점령이 아닌)전투해서 베를린 털지 않고도 전쟁 끝냈을 테니 보병은 쓸모없다는 말도 성립한다.

그러나 각종 첨단장비의 개발과 전투방식의 변화로 인해 앞으로의 보병 전투의 모습이 달라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2020년대 이후의 보병은 점차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지형을 공군, 기갑, 포병이 커버하게 되고 보병은 산악지대나 시가지 등 기갑이 들어가기 힘든 특수지형 전투 위주로 특화될 것이다.[18] 이유는 간단하다. 본디 보병이 화력은 적고 인구는 많은 병과인데다 인권의식이 높아지면서 조금이라도 인명피해를 줄이는 전투를 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이렇게 발전할 수밖에 없다.


[1] 로이드 워너가 호주의 원주민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후술할 기습으로 인해 30여 명의 전사자가 나온 반면, 이러한 공개 전투로는 3명의 전사자만 나왔다.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뉴기니 원주민도 이러한 정면 대결에서는 부상자만 발생하거나 적어도 승패가 명백히 가려질 정도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때에도 한쪽이 일부 병력을 숨겨두었다가 기습을 하는 등, 술수를 쓰는 경우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다. [2] 예컨대 고대 중국에서는 전차의 수로 병력을 가늠하였다. [3] 글라디우스 뿐만 아니라 이 시대 검은 주조기술 때문에 대체로 다 짧았다 [4] 다만, 스쿠툼이 상태가 멀쩡하면 안 버리고 계속 썼다. 그러다 망가지고 부서지면 당대의 유행에 따라 둥근 형태, 보다 작은 형태의 방패를 보급받거나 구입하게 되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선 옛날 디자인의 무기를 갖고 싸우는 자도 있었다. 때문에 3세기 초반 카라칼라 시대에 오히려 현대 한국인에게는 좀 낯선 게르만-갈리아식 방패를 쓰는 로마 정규군이 나타나는데 정작 4세기 초반 콘스탄티누스가 이끌었던 부대의 군인들은 그시대 기준으로는 대단히 뒤쳐진 복고풍 로마군의 사각방패 스쿠툼을 많이 들고 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심지어 드물게는 로리카 세그먼타타를 입고있는 빈티지(...)룩을 선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5] 고대 로마 제국 보병들은 무기를 자기 돈으로 샀다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 이후로 국가에서 무구를 구입해서 지급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에도 병역 자원의 대부분은 무산자 계층이다보니 입대 초도보급은 국가에서 지급하도록 되어있었다. 이후부터는 급여에서 공제하는 식이었지만. [6] 심지어 배를 짊어지고 세느 강으로 이동해 파리까지 털어먹었다. 말 그대로 물이 있어서 배들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다. [7] 사실 해병대라기보다는 육상전도 할 줄 아는 수병들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해병대는 상륙은 할 줄 알지만 배를 몰 줄은 모르니까. [8] 중앙군 9서당의 하나인 장창당이 그랬다고 한다. [9] 프랑스 땅은 비옥한 평야가 많고 생산력이 우수하여 질좋은 군마를 얻기 수월했으며 11세기~13세기의 잉글랜드는 매우 강력한 기병 전력을 보유했었다. 이를 잘 활용했던 군주중 하나가 리처드 1세. [10] 허나 이들은 여전히 기병으로서 마상전투 훈련을 고도로 유지했다고 한다. 또한 중보병의 역할을 하면서도 중간에 다시 승마하여 기병으로 전환하는 등 유동적 역할을 담당했다. [11] 1609년 네덜란드군 장교편성을 보면 잉글랜드인이 43명, 프랑스인 32명, 스코틀랜드 20명, 벨기에인이 11명,독일인이 9명에 그중에서 네덜란드인은 17명이었다. [12] "and for the adaptaion of the Roman triplex acies battle order of three supporting lines of infantry units. This combination of ideas led Maurice to reform the Dutch army into smaller, more flexible tactical units with new styles of tactical deployment, employing new fring systems taht eh introduced to better exploit the potential of infantry firearms." - Keith Roberts , <Pike and Shot Tactics 1590–1660>, Osprey Publishing, 2012, p.10 [13] 모리스 백작은 오늘날의 사단과 유사한 개념으로 부대편성을 창립하기도 했다. 예컨데, 부대를 군단(Legion), 연대(Regiment), 대대(Century)로 나누어 220명의 4개 대대를 모아 880명의 한 연대로, 880명으로 구성된 4개 연대를 모아 3580명의 한 군단으로 편성, 군단의 정찰을 위해 대대 병력의 절반가량의 기병과 함께 2인치 대포의 지원용 화기를 함께하였다. [14] James Marshall-Cornwall, Napoleon as military commander, Penguin Books, 2002, p.27 [15] 탈 것을 이용하는 차량화보병이나 기계화보병, 승마보병은 물론이고 해병이나 강습부대, 공수부대 같이 배와 헬기, 항공기를 사용하는 특수임무를 맡은 보병들 역시 작전지역에 도착하면 하차전투가 기본이다. 예외적으로는 일부 초기형 IFV가 탑승전투를 염두에 두어 총안구를 낸 경우가 있으나 별 의미가 없어서 폐지되었고 총안구가 있던 시절에도 하차전투를 기본으로 뒀었다. [16] 매체에서나 핵무기로 인해 인류, 지구멸망 등의 이야기가 나오지 실제로 핵무기는 위력이 매우 과장되어 있는 편이다. 핵무기가 도시에 투하했을 때 건물이 완파되는 건 폭심지 정도고 그 외에는 건물이 부분 파괴되는 수준에 그친다. 또한 전차 역시 폭심지를 제외하면, 정상적으로 기동할 수 있다고 판명났다. 더군다나 양압장치로 방사능 방호 역시 가능해졌다. 전차무용론에 핵 만능주의 부분 참조. [17] 미국만 핵무기를 사용할 능력이 있었던 2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현재는 핵무기 보유국만 이미 9개국가이다. 심지어 핵무기 미보유국들 중에도 핵무기를 만들 기술은 충분히 있지만 강대국의 눈치를 보느라 만들지 않을 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단기간 내에 만들어 발사할 수 있는 국가들이 수두룩하다. [18] 실제로 현재 독일연방군은 일반적인 알보병 병과가 없고, 기계화보병(Panzergrenadier)과 산악보병(Gebirgsjäger) 등으로 나뉜다. 다만 이는 평야지대가 많은 유럽 지형이고 한국은 산악지형이 대부분이고 평지는 대부분 도시화 되어있기 때문에 아직도 기계화보병보다는 알보병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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