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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UNESCO World Heritage |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한국어 | 진시황릉 | |
중국어 | 秦始皇陵及兵马俑坑 | ||
영어 | Mausoleum of the First Qin Emperor | ||
프랑스어 | Mausolée de l'empereur Qin | ||
국가·위치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산시성 시안시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441 | ||
등재연도 | 1987년 | ||
등재기준 | (i)[1], (iii)[2], (iv)[3], (vi)[4] |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
<colbgcolor=#CCC,#666><colcolor=#000,#FFF> 명칭 | 한국어 | 진시황릉 | |
간체 | 秦始皇陵 | ||
번체 | 秦始皇陵 | ||
영어 | Mausoleum of the First Qin Emperor | ||
분류 |
고묘장 (古墓葬) |
||
시대 | 진 | ||
일련번호 | 1-0164-2-003 | ||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 AAAAA급 | ||
등재 | 1961년 | ||
차수 |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 ||
주소 |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시안시 린퉁구 친링베이루 西安市临潼区秦陵北路 |
}}} |
<colbgcolor=#CC0000> 진시황릉 전경 |
병마용갱 |
[clearfix]
1. 개요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중국 산시성의 시안시 린퉁구에 소재한, 진 시황제 영정의 황릉이다[5]. 능 주변에서 병사와 말 등의 모습으로 빚어 구운 토용( 테라코타 모형)인 병마용(兵馬俑)이 발굴된 것으로도 유명하다.2. 역사
2.1. 매장 기록
진시황릉의 조성과 관련하여 가장 신뢰성 높고 자세한 묘사를 한 기록은 사마천의 《 사기》이다. 아래는 《사기》 〈진시황본기〉에 기록된 진시황릉 관련 서술이다.九月,葬始皇酈山。始皇初即位,穿治酈山,及并天下,天下徒送詣七十餘萬人,穿三泉,下銅而致槨。宮觀百官奇器珍怪徙臧滿之。令匠作機弩矢,有所穿近者輒射之。以水銀為百川江河大海,機相灌輸。上具天文,下具地理。以人魚膏為燭,度不滅者久之。二世曰「先帝後宮非有子者, 出焉不宜。」皆令從死, 死者甚眾。葬既已下,或言「工匠為機, 臧皆知之,臧重即泄。」大事畢,已臧,閉中羨,下外羨門,盡閉工匠臧者,無復出者。樹草木以象山。
9월, 시황제를 여산(酈山)에 매장했다. 시황제가 처음 즉위했을 때 여산을 공사했고,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죄수 70만여 명에게 지하수가 3번 돌 정도로 구덩이를 깊게 파게 하고 구리를 부어 외곽을 만들었다. 궁궐과 여러 관리병마용, 진기한 보물들을 가득 매장했다. 장인에게 기계 쇠뇌를 만들게 하여 (묘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쏘게 했다. 수은으로 여러 개울,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했다. 위로는 하늘의 모습을, 아래로는 땅의 형상을 갖추었다. 인어[6]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영구히 꺼지지 않게 했다. 2세 황제가 말하기를 "자식이 없는, 선제의 후궁을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순장,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매장을 끝내자 누군가 말하기를 "장인이 기계를 만들었고, 모든 노예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노예가 많아 (사실이) 누설될 것입니다." 장례가 끝나고 (보물 등을) 이미 다 감추어 놓자, 묘의 가운데 통로를 폐쇄하고 바깥문도 폐쇄하여 장인과 노예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니, 다시는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능에) 풀과 나무를 심으니 (그 모습이) 마치 산과 같았다.
《사기》 〈진시황본기〉 중
9월, 시황제를 여산(酈山)에 매장했다. 시황제가 처음 즉위했을 때 여산을 공사했고,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죄수 70만여 명에게 지하수가 3번 돌 정도로 구덩이를 깊게 파게 하고 구리를 부어 외곽을 만들었다. 궁궐과 여러 관리병마용, 진기한 보물들을 가득 매장했다. 장인에게 기계 쇠뇌를 만들게 하여 (묘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쏘게 했다. 수은으로 여러 개울,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했다. 위로는 하늘의 모습을, 아래로는 땅의 형상을 갖추었다. 인어[6]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영구히 꺼지지 않게 했다. 2세 황제가 말하기를 "자식이 없는, 선제의 후궁을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순장,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매장을 끝내자 누군가 말하기를 "장인이 기계를 만들었고, 모든 노예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노예가 많아 (사실이) 누설될 것입니다." 장례가 끝나고 (보물 등을) 이미 다 감추어 놓자, 묘의 가운데 통로를 폐쇄하고 바깥문도 폐쇄하여 장인과 노예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니, 다시는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능에) 풀과 나무를 심으니 (그 모습이) 마치 산과 같았다.
《사기》 〈진시황본기〉 중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 진시황릉의 위치
- 진시황릉의 건설기간과 동원된 인부의 수
- 진시황릉의 구조와 매장된 내용물
- 후궁과 인부 등 수많은 사람들이 순장의 목적으로 생매장을 당했다는 사실
- 진시황릉의 규모
《사기》의 기록이 비교적 구체적이다. 사마천이 진시황릉 내부를 직접 탐험하여 서술했을 리는 없고,[7] 기존 기록을 참고해서 썼을 터이다. 유방이 함양에 입성하자 소하가 진나라의 문서들을 수집하고 보관했다는 서술이 《사기》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 있는데, 그때 수집된 문서들 중 진시황릉에 대한 것도 있어서 사마천이 참고했으리라고 추정한다.
기록에 따르면 시황제는 기원전 247년, 진나라의 왕으로 즉위한 직후부터 작업에 착수하여 통일 이후부터는 총인원 70만 명(추정)을 동원해서 지었다고 한다. 물론 호왈과 같이 70만이란 숫자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황릉의 규모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조숙한 근대 중앙집권국가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한 진나라의 행정력을 생각하면, 수십만 명 규모로 인원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황릉은 즉위 35년이 넘어서도 완성되지 못했고 기원전 210년에 진시황이 먼저 붕어했다. 이때의 정황은 사구정변 항목 참조. 이후 2세 황제 호해는 여러 동물과 진시황의 후궁 및 그 자녀들, 그리고 인부들을 순장하여 무덤 공사를 끝냈다. 〈이사열전〉에 따르면 호해가 영씨 황족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공자 고(高)는 가족들이 연좌될까 두려워 호해에게 먼저 죽음을 청한 덕분에 호해가 은혜를 베풀어 자살을 허락했으나, 나머지 공자들은 시장에서 참수를 당하고 공녀들은 사지가 찢겨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실제 진시황릉의 배장품(陪葬品) 구덩이에서는 사람이 묻힌 무덤도 여러 곳 발굴되었다. 그중 남자 5명과 여자 2명이 묻힌 무덤에서는 도장[8]이 포함된 금•은 비단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부장품이나 관이 발굴되었지만, 유골은 나이도 젊고 건강 상태도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두개골에 화살촉이 박혔거나 특히 여성들의 시신은 사지가 토막나는 등 잔혹한 처형을 당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2세 황제 호해가 죽인 형제•자매들, 진시황의 후궁들 등 순장된 사람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9] 출처
사마천이 묘사한 진시황릉의 모습 가운데서도 '수은의 강과 바다'를 조성했다는 구절이 특히 유명한데, 상술하듯이 사마천이 직접 무덤 내부를 봤을 리가 없으니 현대 학자들은 이 묘사를 허구적인 상징이나 전승 정도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사회과학원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황릉 봉토의 수은 함유량이 인근 지역 흙보다 무려 7배 이상 높았으므로, 구체적으로 황릉을 어떻게 조성했는지 아직은 모르지만 수은을 대량으로 사용했음은 확실해 보인다.
한편 황릉 조성에 동원된 죄수나 노예들이 완공 후 몰살당했다는 잔혹한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진시황릉에서 황자나 후궁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들이 여럿 나왔음과는 달리, 몰살된 노역자들의 대규모 시체는 능 속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진말 최후의 명장이었던 장한이 여산에서 노역 중인 죄수들을 징병하여 진승, 오광의 반란 진압에 성공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과장 혹은 와전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2.2. 매장 이후
진시황이 사구에서 붕어하고 불과 4년이 지난 기원전 206년에 진나라가 멸망해버렸다.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 군대는 함양(咸陽)에 입성하자 진나라 역대 왕들의 무덤을 도굴했다. 당연히 가장 크고 6국의 원성도 가장 많이 들은 진시황의 무덤이 도굴 1순위였다. 비록 항우가 도굴했어도 항우조차 진시황릉의 엄청난 규모는 미처 파악하지 못하여 상당히 많은 묘실이 도굴되지 않고 남았다.다만 《 사기》의 <항우본기>(項羽本紀) 등에는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 <한고제본기>(漢高帝本紀)에 광무 대치 중 유방이 항우를 비난하고 항우의 죄 10가지를 나열하면서 진시황릉 도굴을 간접적으로 언급할 뿐이다. <진시황본기>[10]에서도 진왕 자영 살해, 함양 학살, 방화, 약탈 등 항우가 함양에서 저지른 오만 범죄를 다 나열했지만 진시황릉 도굴은 일언반구도 없다. 진시황릉을 발굴해봐야 알겠지만 항우가 진시황의 무덤을 도굴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여산 인근에 황제의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만 구전되었을 뿐 진시황릉은 그 후 2천 년 가까이 망각되었다. 항우가 진시황릉을 이미 도굴하고 파괴했다는 소문이 진시황릉의 보존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청대 이후 고증학의 시대에 접어 들어서 《 사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 고전들에 대한 신빙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조가 생겼기 때문에, 학자들은 사마천이 《사기》에서 진시황릉을 설명한 구절이 과연 진실인지 의구심을 품었다. 사마천이 《사기》에 적은 내용들이 옛 사람의 과장이 아닌가 의심스러워한 것이다.
2.3. 현대의 발굴
1974년 3월 29일, 양신만(楊新滿), 양취안이, 양즈파(杨志发) 등 리산(여산) 인근 시양 마을 청년 6명이 우물을 만들고자 땅을 파던 중[11] 도기 조각을 발견했다. 인형 모양의 도기 조각과 쇠뇌, 청동 화살 등을 더 캐냈지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린퉁현의 옌자이 공사에서 수도 시설을 담당하던 팡수민이 우물 작업에 진척이 없자 확인하려고 리산 우물 공사장을 찾아왔다가 흙 속에서 나온 도기 인형들을 봤다. 팡수민은 평소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진나라 시대 도기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박물관에 알린 덕에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얼마 뒤 도기제 병사 인형 수천 점이 묻힌 거대한 공간(병마용)이 발견되었다. 이후 동마차갱ㆍ기마갱ㆍ동물갱ㆍ개갑갱 등 부장품 구덩이 수십여 곳이 발견되어 진시황릉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시기는 문화대혁명이 슬슬 잠잠해지던 시기라 홍위병이 황릉을 파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발굴 당시 저우언라이는 후손들을 위해서 발굴 기술이 완벽해질 때까지[12] 무리하게 능 자체를 발굴하지 않기로 했다.[13] 현재 진시황릉 내부에 거대한 빈 공간이 유지된 채로 남아 있다. 이 빈 공간을 무너트리지 않고 보존하면서 발굴할 기술이 아직 존재하지 않아서 진시황릉의 발굴은 무기한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최초 발견자들 중 한명인 양신만은 인기 스타가 되었다. 국내 모 프로에도 양신만의 당시 근황이 나왔는데, 나름 유명인사로서 관련 책자도 팔고, 기념 사인회까지 열 정도로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으며, 현지 기념품 판매소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발견 당시엔 중국 정부에서 보상으로 경운기 1대를 지급했다고 한다.[14] 진시황릉 발견 전만 해도 그 땅은 작황이 안 좋아 귀신 붙은 땅이라고 불리며 현지 주민들이 기피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진시황의 명으로 황릉에 상당한 양의 수은을 투입한 탓에 무덤 부근 토양의 수은 함유량이 일반적인 토지의 20배에 달한다고 하니 땅이 안좋은 건 사실이다. #
연구 결과에 의하면 병마용갱에서 대규모 방화의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진시황릉 자체에서는 방화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발굴 중이면서 관광객들이 관광하는 부분은 정확히는 진시황릉 바로 옆에 있는 병마용갱이다.
2016년, 진시황릉 주변의 부장갱 400여 곳에서 실제 동물의 유골과 도기, 청동기로 제작된 동물 등 유물 수천 점이 출토되었다. #
3.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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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 기념비 |
흔히 알려진 병마용갱이 나열된 사진들만 보면 납골묘로 오해하기 쉬우나 사실은 기념비 뒤에 보이는 산 전체가 하나의 무덤이다. 사실 시안에 위치한 중국 황제들의 무덤은 지하에 크게 구덩이를 만들어 황제의 시신과 기타 부장품, 병마용들을 집어넣은 다음 봉분을 매우 거대하게 쌓았다. 그중에서 진시황릉은 가장 독보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당장 한나라 황제들의 무덤들만 보더라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지만 진시황릉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작다. 발굴 되기전 수천년의 시간동안 주변 주민들도 원래부터 있던 언덕인줄 알았다고 한다.
4. 부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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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의 내부를 상상해서 만든 모형. |
진시황릉의 부장품은 아직 제대로 발굴을 시작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다. 전세계에서 부장품이 가장 많은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토용(土俑, 사람 모양 흙인형)을 엄청나게 많이 만들었는데, 후술할 병용(병사 인형)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신하들이나 궁중 광대 등 다양한 사람들을 실제 사람 크기로, 사람과 흡사하게 잘 만들어 묻었다. 병마용으로 추정컨대 실제 진나라 궁정에 일하던 사람 수만큼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진시황릉의 주변부에 불과한 병마용갱만으로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판이니, 실제 묘 내부의 부장품은 대체 어떨지 상상조차 안 된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무덤 전체를 발굴하면 투탕카멘의 무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인류 역사상 최고, 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이 될 것이 틀림없다.[15]
병마용은 레고처럼 여러 부분을 만들어 구운 뒤 조립하여 완성했다는 설과, 도자기와 같이 긴 흙막대를 둥글게 쌓아 올린 뒤 같이 만들기엔 크고 무겁고 복잡한 머리나 다리 부분 등만을 따로 붙였다는 설이 있다. 후자의 방식이 더 어렵고 힘들었겠지만 병마용의 크기나 무게를 지탱하고 서 있기 위한 사정상 이쪽이 정설로 통한다.
정부의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품질 관리를 위해서 제작소들은 모든 제작된 물건에 그 이름을 새겨야 했는데, 이 덕분에 역사학자들은 어느 작업소가 병마용의 인형들을 제작하는 데 동원되었는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완성된 토용은 계급과 역할에 맞춰서 당시 진나라 군사 진형(陣形)을 정확하게 따른 형태로 구덩이 속에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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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 제1호갱의 중무장 보병대. |
병용은 키가 184 cm에서 197 cm로 큰 편인데, 장군을 병사보다 크게 만들었다. 병마용은 경무장 보병ㆍ중무장 보병ㆍ 궁병ㆍ전차병ㆍ 기병ㆍ 말ㆍ 장교 등 다양한 병과 군인들을 표현했다. 얼굴은 약 8가지 복제 틀을 사용해 제작했는데, 기본형에 수염 등 세부적인 변형을 가해 하나하나가 전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발굴된 갱도 4곳 중 3곳에 모두 병용 8천여 점, 전차 130기, 말 520점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발굴된 것보다 더 많은 수가 아직 흙 속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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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채색이 남아 있는 토용들. |
원래는 실제 사람과 말을 모델로 채색되었으나, 수천 년이 지나 발굴될 때 외부 공기와 접촉하자 순식간에 옻칠 코팅층이 바스라지거나 탈색되었다고 한다. 제작 당시 채색하고 옻칠로 마감했는데, 오랜 세월 습기를 머금은 토양 속에 보관되다가 발굴 후 건조한 공기와 접촉하자 옻칠 코팅층이 건조되어 채색층과 함께 작은 알갱이로 수축했고, 이 알갱이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색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도 퇴색을 막기 위해 병마용갱 발굴을 미뤄두었다가, 요근래 기술이 개발되어 다시 발굴을 재개했다. 그 외에도 병마용들은 원래 모두 실물 크기의 청동제 무기로 무장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많이 파손되어 무기는 병마용보다 적게 발굴되었다. 그래도 진시황릉의 알칼리성 토양과 유기물 입자가 적은 환경 덕에 꽤 잘 보존되었다.[16]
한나라 시대 몇몇 묘들에서도 토용들이 발견되었으나, 규모도 작고 인형의 완성도도 진시황릉의 토용보다 훨씬 떨어진다. 크기도 진시황릉과는 달리 사람이 한 손으로 집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인형 정도로 작다. 발굴된 한나라 시대 묘들이 전부 황릉이 아니긴 하지만, 진시황릉의 병마용과 비견되는 병마용을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국가 예산을 퍼부어야 하고, 세밀하게 만들려면 시간까지 많이 들여야 함을 감안한다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한나라 시대에 이런 토용을 만들 기술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진시황이 무덤을 짓다가 국고를 탕진하게 만든 진시황릉의 전례에서 교훈을 얻은 한나라 사람들이 어느 정도 만족하는 선에서 끝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토용 말고도 마차의 1/2 크기 청동제 모형(동마차갱),[17] 진시황이 기르던 말(기마갱), 학, 자이언트 판다 등 진기한 동물 수십 마리(동물갱), 부식되지 않도록 돌 조각을 엮어 만든 실물 크기 갑옷과 투구(개갑갱) 등이 현재까지 발굴되었다. 기마갱과 동물갱에는 동물들을 돌보던 하인의 실물 크기 모형까지 함께 묻혀 있었다.
5.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진시황릉/대중매체 문서 참고하십시오.6. 기타
- 흔히 진시황릉하면 떠올리는 병마용갱은 황릉이 아니라 황릉 주변에 있는 부장품이다. 병마용갱은 무덤을 만든 다음 무덤 주변에 구덩이를 파고 병마용을 넣은 후 다시 묻은 것이었다. 현재 1호, 2호, 3호갱은 관람이 가능하고, 산산조각난 병마용을 복원하는 작업도 볼 수 있다. 1~3호 병마용갱의 병마용들을 복원하는 데만 수십 년 이상이 소요될 듯한데, 더 놀라운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거나 최근에 새로 확인된 병마용갱이 아직 많다는 사실이다.
- 병마용갱 덕분에 고대 중국 군대의 무장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동•서양을 막론하여 고중세 군대의 갑옷 착용 비율은 논쟁거리지만, 병마용갱으로 미루어 보건대 고대 중국의 갑옷 착용 비율은 (병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높았으리라 여겨진다.
- 한 번은 시각장애인들이 단체 관람을 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어떻게 병마용의 위대함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특별히 그들에게만 병마용을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한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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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독일인 행위 예술가가 발굴된 토기 병사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병마용에 기어들어가 포즈를 취하는 "예술"을 했다. 이걸 관리 측에서는 눈치를 못 챘다가 나중에 체포하려고 했는데, 너무 분장을 잘 하고 숨어 있는 바람에 예술가를 잡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 유한양행의 숙취 해소제 '내일엔'의 신문 광고에 등장했다. "3,000년만에 숙취에서 깨어나다!"라고. 병마용이 광고에 등장한 것은 '내일엔'의 원료인 황칠나무가 진시황이 찾아헤매던 '불로초'이기 때문이라는 듯하다.
- 진시황릉은 현재까지 발굴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으며, 중국 정부 또한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완전한 발굴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사실 유물을 전부 다 발굴한 뒤 발굴된 수많은 유물과 유적의 뒷처리와 보존 문제 또한 큰 걸림돌이다. 게다가 사마천의 《 사기》에 진시황릉에는 도굴을 막기 위한 각종 함정들이 설치되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무턱대고 파들어갔다가는 자칫하면 인명 피해 발생에 이어, 유물까지 손실되는 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 물론 피라미드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도 오래된지라 자연 파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외에도 수천 년 동안 밀폐된 공간이 산소와 접촉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19], 내부에 수은이 대량으로 있을 가능성이 높아 무작정 발굴하기엔 여러 모로 문제가 많다. 하지만 전세계의 여러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아직까지 거의 밝혀지지 않은 진나라 시대의 유물들이 온전히 매장되었을 진시황릉 발굴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지라서, 문화재들을 보존할 방도를 찾는다면 중국공산당이 공언한대로 완전한 발굴은 안한다고 해도 대부분은 발굴을 진행할 가능성이 크다.
- 미국의 미술사학자인 루카스 니켈은 진시황릉의 발굴품에 고대 그리스의 미술 형식이 도입되었다는 학설을 제안하기도 했다. 또한 유럽인 DNA의 흔적도 근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하기에, 그리스인들이 진시황릉을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일각에선 나왔다. # 실제로 진시황릉 주변에서 유라시안계로 추정되는 노동자의 두개골이 출토되어 이를 영국의 던디 대학교의 체질인류학 연구진들이 분석하여 그 얼굴을 복원하였는데, 전반적으로는 일반적인 한족들과 동일한 동아시아인계 외모에 가까웠으나 골격에서 코카소이드계의 특성이 적지않이 나타났다. 이에 대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때 떨어져나간 일부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라는 설과,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등의 디아도코이로 인해 아시아 각지에 세워진 그리스계 국가들에서 초빙된 기술자들이 동원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인이 직접 연관된 것이 아니라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민족들 중 가장 동쪽에 살았던 토하라인의 DNA라는 의견이 있으며,[20] 미술 형식도 간다라 미술이 전파된 식으로 간접적으로 퍼진 것이 도입된 것이란 의견도 있다.
- 짝퉁의 천국답게 가까운 곳에 짝퉁이 있다. 방문시 주의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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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이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메두사의 머리로 병마용갱을 만들어냈다는 상품 리뷰 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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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의 고조모라는 설도 있다. 재야 고고건축학자 천징위안(陳景元)은 《병마용의 진상》이라는 책에서 근거 60여 개를 제시하며, 병마용의 실제 주인은 진시황의 고조모이자 진 소양왕의 모후로서 강력한 섭정을 펼쳐 '2천 년 전의 서태후(西太后)'라고 불리는 '진나라의 선태후(宣太后)'[21]라고 주장했다.천징위안은 일반 사병들도 갖췄던 투구를 진시황의 친위군단이 착용하지 않았다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의상 역시 빨간색과 보라색이 주조를 이루는데, 진시황은 검은색을 숭상하도록 법령으로 공포할 만큼 검은색을 선호했으므로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뒤 곧바로 화폐와 문자, 도량형을 통일하면서 전술 운용을 용이하게 하고자 전차의 너비도 통일했는데,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차량들의 바퀴 너비가 일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용맹무쌍하기로 이름났던 당시 진나라 병사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무사용들은 수염을 기른 늙은이 형상에 우울하고 기운 없는 표정이란 점도 의문이라고 했다.
1호 용갱에서 발견된 상방 여불위(相邦呂不韋)라고 새겨진 꺾창[22][相邦呂不韋] |
하지만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위 사진처럼 병마용갱의 1호 용갱에서 발견된 꺾창에 여불위의 이름이나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뒤에 설치한 관청의 이름이 새겨진 점, 병마용갱의 바닥에 깔린 벽돌이 진시황릉 곁에서 나온 다른 부장품 구덩이의 벽돌과 동일한 점, 병마용갱 말고도 위에서 설명한 많은 부장품 구덩이가 진시황릉 곁에 있다는 점 등이 병마용갱은 역시 진시황릉의 부속 시설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 채색 문제도, 원래 병마용갱의 토용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채색되었는데, 발굴 과정에서 사라졌을 뿐 색이 남은 일부 인형은 검은색으로 칠한 것이 많다. 천징위안이 보라색이라 주장한 색도 땅 속에서 변색된 것이며, 고고학자들은 칠할 당시에는 검은색이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천징위안이 주장한 투구 문제는 두 가지 설명으로 반박된다. 먼저 진시황릉의 다른 부장품 구덩이인 개갑갱에서는 돌조각으로 만든 모형 갑옷과 함께 투구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병마용들은 전투에 돌입하기 전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춘 모습을 모형화한 것이라, 투구를 아직 쓰지 않은 모습을 형상화했으리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또한 진나라 이후 한나라 시기까지도 무기 및 도구의 주류는 청동기였는데, 청동제 무기로 베면 날이 부러지기가 쉬워서 무기의 대부분이 창 같은 찌르는 것이었다. 이에 근거리에서 머리에 칼 등으로 가격을 당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찌르기 공격이 집중되는 가슴 부위에는 갑옷을 착용하여 방어를 단단히하는 반면, 투구는 구태여 착용하지 않고 대신 관모를 쓰는 정도에 그쳤다는 설명이다.
천징위안이 선태후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병마용갱 바로 옆의 아직 발굴되지 않은 대형 무덤 또한 선태후 시대의 무덤 구조와는 다르고, 오히려 위에 나온 진시황의 자녀 무덤으로 추정되는 배장묘와 구조가 거의 같다는 점도 천징위안이 한 주장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정황 증거이다. 진시황릉 주변에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진한대(秦漢代) 왕릉이 아직도 무수히 있다.
6.2. 후대 중국 황릉과의 비교
상나라 시대부터 청나라 시대까지의 제왕릉들을 비교하면 진시황릉의 능원이 가장 크다고 한다. 서한(전한)시대 황릉도 능원에 도시를 설립하여 유지했을 정도로 거대했으나 진시황릉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했고, 동한(후한) ~ 수나라 건국까지의 제왕릉은 정치ㆍ사회ㆍ경제ㆍ군사적으로 거대하게 짓기가 무리였으나 짓는 경우는 있었다. 허나 새로운 왕조의 건국이나 도굴 및 전쟁 등으로 파괴되는 능묘가 많았다.수나라 때도 문제 양견의 태릉을 제외하면[24] 황릉을 건설하지 않았고, 양제는 황릉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죽어서 부인과 시종이 묻어주었는데, 크기는 일반 민가 수준이었으나 후대에 3 m 정도 높여 주었다고 한다.
이후 당나라 시대에는 다시 진, 한을 본받아서 초대 황제인 고조 이연ㆍ 소종ㆍ 애제 등 말기 황제를 제외하면 주로 거대한 산을 봉분으로 삼아 내부에 굴을 파고, 여러 통로와 함정이 있는 방들을 만들어 부장품을 넣었다. 가장 넒은 능원은 당태종 이세민과 문덕황후 장손씨가 묻힌 구종산 소릉인데, 부장된 황족 및 관료만 200명에 가까울 정도로 크다. 그러나 현재까지 온전한 당나라 황제릉은 고종과 측천무후가 합장된 건릉뿐이고[25], 다른 능은 당나라 말기에 온도(溫韜)가 모두 도굴했다.
송나라 시대는 규모는 작지만 한나라 때처럼 평지에 봉분을 올렸다. 건국 후 시간이 흐르면서 능묘는 화려해지고, 장례식에 동원되는 인원도 많아졌다.
요ㆍ서하ㆍ금나라 때도 규모는 한나라ㆍ당나라 때보다는 작으나 화려했다.
원나라 때는 시조인 태조 칭기즈 칸에서 혜종 토곤 테무르 칸까지 몽골 초원의 풍습대로 봉분이나 석각ㆍ가옥 담벽을 만들지 않았고, 위치도 추정만 할 뿐이다.
명나라 시대는 웅장하고 규모가 크지만, 진시황릉이나 서한ㆍ당대 황릉보다는 작았다. 난징에 묻힌 태조 홍무제를 제외한 나머지 황제들은 수도 베이징 인근에 명십삼릉이라는 황릉 단지를 조성했는데, 장릉ㆍ정릉ㆍ소릉을 제외하면 능은전(사당)은 터만 남거나 부서진 채로 관리를 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다.
청나라 시대의 제왕릉은 청동릉(베이징 동쪽 황실 묘지), 청서릉(베이징 서쪽 황실 묘지), 만주 심양 황릉군 등에 있는데, 명나라 시대보다는 작아도 황릉 하나 하나가 '지하 자금성'이라 할 정도로 조각이 섬세하고 부장품도 많다. 그러나 중화민국 초기 '도굴장군'이라 불리던 쑨뎬잉이 세조 순치제의 효릉을 제외하고[26] 청동릉 지역을 모두 도굴했다. 청대 황실 능침도 자세히 보면 손실된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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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5]
사실 진시황릉으로 매우 강하게 추정되고 있음이 옳다. 역사서에 기록된 위치와 대강 들어맞고 이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황릉을 만들수있었던, 그중에서 아직 릉이 출토되지 않은 황제는 진 밖에 없기 때문이다.
[6]
여기서 말하는
인어는 당연히 진짜 인어가 아니라
듀공이다. 이 동물이 종종 뭍으로 올라와서 쉴 때 머리에 해초를 뒤집어 쓰고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 모습을 해질녘에 멀리서 바라보면 꼭 반인반어의
소녀 모습과 같아서 인어의 모티브가 되었다.
[7]
진 2세 황제는 무덤의 위치나 구조가 알려지지 않도록 건설에 참가한 사람들을 죽였다. 그 때문인지 진나라의 멸망 이후 긴 세월 동안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유방은 항우가 지은 죄를 나열하며 진시황릉을 도굴했다고 주장했지만 프로파간다일 확률이 높다. 게다가 전근대 중국에서도 남의 무덤을 함부로 헤집는 짓은 매우 질 나쁜 범죄로 여겼는데, 도굴꾼도 아니고 긍지 높은 사대부인 사마천이 진시황릉 내부에 들어갔을 리가 없다.
[8]
도장은 귀족 사회에서 고위 계층을 상장하는 물건이었다. 부장품 도장으로 추정컨대 남자 중 한 명의 이름은 榮祿(영록), 여자 중 한 명의 이름은 阴嫚(음만)으로 추정된다.
[9]
그리고 딱 하나의 유해만 처형의 흔적 없이 멀쩡했는데, 이게 공자 고의 유해라고 생각하면 더욱 더 맞아 떨어진다.
[10]
제목은 <진시황본기>지만, 진나라의 멸망까지 다루었다.
[11]
섬서성 지대(황토 고원)는 물을 구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유명해서 지금도 우물을 파는 곳이 있다.
[12]
수천년 동안 밀봉된 무덤이 급히 열렸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병마용의 도색이 바랜 것도 발굴 과정에서 갑자기 외부 공기와 접촉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발견 당시는
문화대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13]
사실 중국의 이런 태도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경주시
대릉원에 많은 미발굴 고분이 있지만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이후로는 대규모 발굴조사를 하지 않는다. 고고학의 태동기였던
일제강점기에 졸속으로 발굴한 곳들을 제외하면 대한민국이 본격적으로 발굴한 대릉원 고분은
천마총과
황남대총 정도인데, 여기서 이미 많은 데이터를 얻었으니 남아 있는 많은 고분들은 후대에 발굴 기술이 더 발달될 때까지 남겨두었다. 예를 들어 최대 규모의 신라 고분인
봉황대는 무덤 위에 얽힌 나무 때문에 지금으로선 원형 훼손 없이 조사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한국이나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1990년대 초반 다카마쓰 고분 발굴에 앞서 내시경으로 구조를 확인했는데, 그 이상 발굴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발굴을 중단했다.
[14]
1970년대 중국은 자동차는 커녕 자전거가 사회인의 상징이었고, 텔레비전은 그야말로 최상류층 일부나 가질 수 있는 물품이었으니 경운기 1대가 결코 작은 보상이 아니었다.
[15]
농담이 아니라 투탕카멘은 어린 나이 때문에 권력이 빈약했고, 무덤 또한 권력에 맞게 다른 파라오에 비해 매우 소박하다. 그 소박한 무덤이 거의 도굴되지 않고 원형대로 발굴된 것이 세기의 발굴이 된 것이다. 당시 중국 역사상 최강의 권력자였던 진시황은 이미 발굴된 무덤 주변만으로도 세계 최대이고, 당연히 부장품도 엄청날 것이다.
[16]
청동기에서 나온 크롬은 따로 처리를 한 게 아니라 옻칠하다 묻은 것(
#)으로, 청동 부분이 아니라 나무 손잡이 등에서 훨씬 많이 검출되었다.
[17]
동주시대 이래로 천자의 수레는 6필의 말이 끌었으므로, 여기서 발굴된 수레 2대는 고위 관리나 황족의 것으로 추정된다. 각종 금, 은 장식품과 톱니바퀴 따위 부품을 비롯해 조각 수천 개로 부서졌으나 수년 동안 작업하여 복원했다.
[18]
꼭 중국뿐이 아니라,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에서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전시품을 만질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 있다.
[19]
상술했듯이, 이미 발굴한 점토상들이 출토될 당시에 알록달록하게 색칠이 되어있던 것이 몽땅 색이 바랜 상태다. 흔히 대중들이
고고학이라고 하면
문화재를 발굴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병마용갱의 사례처럼 발굴된 문화재를 보존하고
박물관에 전시하는 방법까지 고안해내는 것도 고고학의 연구 주제 중 하나다.
[20]
토하라인의 후손이
위구르인이다. 물론 현재는
튀르크인 및
한족,
몽골인들과 혼혈을 이루면서
동아시아인의 형질도 섞였고, 언어적으로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위구르어를 사용한다.
[21]
이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중국 사극이 <
미월전>이다.
[22]
왼쪽이 위쪽이다. 해당 글자는 진나라 무기 생산 등급의 책임자를 나타내는 각인이다. 즉 1등급이란 것이다.
[相邦呂不韋]
가 해당 사진에 직접 새겨있지 않음
[24]
태릉은 부장품이 처음부터 거의 없었다고 한다.
[25]
산의 서쪽 절반을 파도 안 나와서 무기한 중지했다.
[26]
부채와 신발 밖에 없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