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사 전투 Battle of Mursa Major |
||
시기 | 서기 351년 9월 28일 | |
장소 | 판노니아 속주 무르사(현 크로아티아 오시예크) | |
교전세력 |
서로마 제국 프랑크 색슨 |
동로마 제국 |
지휘관 |
마그넨티우스 파비우스 티티아누스 클라우디우스 실바누스→ |
콘스탄티우스 2세 플라비우스 필리푸스 ◎ |
병력 | 불명 | 60,000명 |
피해 | 23,760 ~ 24,000명 | 24,000 ~ 30,000명 |
결과 | 콘스탄티우스 2세의 승리. |
1. 개요
서기 351년 9월 28일, 로마의 서방 정제 마그넨티우스와 동방 정제 콘스탄티우스 2세의 로마군이 격돌한 전투.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양산한 전투로 손꼽힌다.2. 배경
337년 5월 22일,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붕어했다. 그는 307년에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중 세 아들로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를 두었다. 그는 세 아들을 아우구스투스(정황제)로 세워 제국을 3개로 분할하고, 조카인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를 카이사르(부황제)로 세운 후 특정 지역의 영토를 통치하도록 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붕어한 뒤, 세 형제는 유언장에 따라 제국을 3개로 분할하면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달마티우스에게, 폰투스를 한니발리아누스에게 넘겨줬다.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병이 아니라 이복형제들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헛소문이 돌자, 콘스탄티누스 1세를 추앙하던 군인들이 분노하여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를 포함해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거의 모든 남성 구성원을 살해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12살의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와 6살의 율리아누스만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6세기의 이교도 역사가인 조시무스는 헛소문을 퍼트려 군대를 선동하고 학살을 주도한 이를 콘스탄티우스 2세로 지목했다. 자신과 두 형제만이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이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학살을 마무리지은 뒤, 세 형제는 제국을 공식적으로 삼분할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브리타니아 제도, 히스파니아 반도를 다스렸고, 콘스탄스는 이탈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서부 일리리쿰을 다스렸으며,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집트, 시리아, 동부 일리리쿰 등 동방 영토를 다스렸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2세가 자기가 장남이니 선임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콘스탄스에게 북아프리카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콘스탄스가 거부하자, 그는 340년에 이탈리아를 침공했지만 일리리쿰에서 급파된 정예부대의 역공으로 피살되었다. 콘스탄스는 형 콘스탄티누스 2세의 영역을 그대로 가져갔다.
그러나 콘스탄스는 이교도를 심하게 탄압해 수많은 이들의 원망을 샀으며, 사치를 심하게 부리고 사냥에 몰두하느라 정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으며 성격이 잔인하여 많은 이들을 잔혹한 방식으로 해쳤다. 그런 그에게 반감을 품은 장교와 관리들은 마그넨티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350년 1월 18일 밤, 아우구스토두눔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한 마그넨티우스는 황제만이 입는 자주색 토가를 착용하여 황제로 선포되었다. 당시 사냥에 떠나서 며칠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콘스탄스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피레네 산맥의 헬레나라는 작은 마을로 도망쳤지만, 350년 2월 말 마그넨티우스가 보낸 암살단에게 살해되었다. 마그넨티우스는 빠른 시일내에 콘스탄스의 통치 영역이었던 이탈리아 반도, 갈리아, 북아프리카, 히스파니아 반도를 장악했고, 콘스탄스가 관직에 앉혀놓은 귀족들 중 일부를 처단했다. 또한 "로마 세계의 해방자" 같은 문구를 새긴 동전을 주조하고,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손인 유스티나와 결혼하여 부족한 정통성을 보강했다. 다만 동방의 황제인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인정받길 원했던 그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형상이 새겨진 주화를 주조하기도 했다.
당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사산 왕조와 일전을 벌이고 있어서 서방으로 군대를 보내기 힘들었다. 그래서 일단 마그넨티우스와 협상하기로 했지만, 곧 양측의 입장 차이가 협상으로 해결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형제를 살해한 마그넨티우스를 정당화한다면, 이것이 잘못된 선례가 되어서 콘스탄티누스 왕조에 심각한 해악을 미칠 수도 있었다. 또한 마그넨티우스는 콘스탄스에게 탄압받던 이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는데, 이로 인해 그 역시 이교도라는 비난을 받았다. 독실한 아리우스파 신자였던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교도가 활개를 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대군을 일으켜 서방으로 진군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황족 학살에서 살아 남은 갈루스를 동방의 부제로 임명한 뒤 발칸 반도로 진격했다.
3. 양측의 전력
- 마그넨티우스 측 로마군: 로마 보병 및 기병대, 스페인, 갈리아, 프랑크, 섹슨족 혼성군. 총병력 36,000명.
- 콘스탄티우스 2세 측 로마군: 로마 보병 및 기병대, 아르메니아인, 게르만인, 사르마티아 기마궁수대 혼성군. 총병력 80,000명.
4. 전투 경과
351년 7월, 콘스탄티우스 2세의 로마군이 발칸 반도로 진군했다. 그는 대군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광활한 평원, 특히 부친인 콘스탄티누스 1세가 리키니우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치발라에 평원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선봉대가 먼저 도착한 뒤 매복해 있었던 마그넨티우스측 병사들에게 급습당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 후 마그넨티우스는 전투를 산악 지대인 시르미움 인근에서 벌이기 위해 군대를 판노니아로 이동시켰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초전의 패배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필리포스를 사절로 보내 평화 협상을 논의하도록 했다. 그러나 조시무스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 2세는 협정을 맺기 위해 보낸 것이 아니라 마그넨티우스군의 상황을 탐지하기 위해 보냈다고 한다. 필리푸스는 마그넨티우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당신이 누구와 싸우는지 알아야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함께 야만인과 싸워 많은 승리를 거둔 그분과 맞서 싸우는 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 모두에게 큰 영예를 안겼으며, 당신에게 많은 명예로운 직위를 수여했습니다. 당신은 이탈리아를 떠나야 하며, 알프스 너머에 있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마그넨티우스는 이 말에 분노하여 필리푸스를 억류했다. 이후 콘스탄티우스 2세는 장병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한 뒤 사부스 강을 건너려고 했다. 그러나 강 건너편에 이미 주둔하고 있었던 마그넨티우스군의 요격으로, 강을 건너려던 많은 병사가 전사했다. 마그넨티우스는 다시 사절을 보내 황제의 허락 없이 사부스 강을 건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군대를 철수시켜서 마그넨티우스가 강을 건너 평원으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 후 양측간에 사절이 오고 갔는데, 마그넨티우스의 장교인 티티아누스가 콘스탄티우스 2세 앞에서 모욕적인 표현을 쓰면서
"당신은 아우구스투스가 될 자격이 없으니 여기서 떠나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나는 절대 아우구스투스가 되길 포기하지 않으며, 내게 이 운명을 내린 하나님께 감사하다. 동생 콘스탄스의 복수를 위해 계속 싸우겠다."
라고 선언하고, 티티아누스를 돌려보냈다.351년 8월, 마그넨티우스는 사부스 강을 건너 시시아를 공략한 뒤 시르미움을 함락시키기 위해 빠르게 진군했다. 그러나 시르미움 수비대와 주민들이 결사 항전하면서 공략에 애를 먹었다. 이때 콘스탄티우스 2세의 군대가 접근하자, 그는 무르사 평원으로 철수하면서, 도시 앞에 세워진 경기장에 게르만인 병사 4명을 숨겨두고, 콘스탄티우스 2세가 들어섰을 때 암살하도록 했다. 그러나 성벽에 있던 사람들이 이들이 숨어있는 걸 알아채고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알렸으며, 궁수대가 경기장을 둘러싸고 화살을 퍼부어 4명 모두 사살했다. 그 후 양군은 351년 9월 28일, 무르사 평원에서 대면했다. 율리아누스가 콘스탄티우스 2세를 찬양한 연설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 2세는 양익에 중기병 부대를 배치했으며, 중앙 대열의 전면에 보병대를 두고 후방에 궁수대를 두었다고 한다. 율리아누스는 마그넨티우스의 군대는 아무런 전략도 세우지 않았으며, 대군을 앞에 두고 공포에 질린 오합지졸이었다고 비하했지만, 이것은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조시무스는 무르사 전투 직전까지의 상황은 자세하게 설명했지만, 정작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저 양군이 사력을 다해 싸웠다고만 적었을 뿐이다. 다만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프랑크족 출신의 로마 장군 클라우디우스 실바누스가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내통하겠다고 제안했고, 전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마그넨티우스를 배신했다고 한다. 마그넨티우스군은 실바누스의 갑작스런 배신으로 인해 우익이 격파되었고, 좌익 역시 곧 무너지면서 패주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5. 결과
율리아누스는 연설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가 큰 어려움 없이 승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마그넨티우스가 36,000명 중 24,000명을 상실했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80,000명 중 30,000명을 상실했다고 기술했다. 조시무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승리한 건 맞지만 양측 모두에게 비참한 결과였다고 밝혔다. 그는 절반 가까운 병사를 잃은 콘스탄티우스 2세가 사산 왕조의 위협에 무력해졌다고 비평했다.무르사 전투에서 패배한 마그넨티우스는 이탈리아 북부로 퇴각했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피해를 수습하면서 다뉴브 강을 건너온 이민족을 상대로 351년 가을과 겨울 내내 전투를 치렀다. 352년 마그넨티우스는 사절을 보내 제위에서 물러날 테니 콘스탄티우스 2세의 휘하에서 장군으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2세는 거절했고, 다뉴브 강의 안전이 확보되자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마그넨티우스는 갈리아로 퇴각한 뒤 전력을 끌어모아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메디올라눔에 도착한 뒤 이탈리아의 통제권을 확보한 후 353년 7월 3일 갈리아로 진군했다.
353년 7월, 양군은 몬스 셀레우코스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마그넨티우스는 이번에도 패배를 면치 못하고 리옹으로 도주했다. 그 후 콘스탄티우스 2세의 군대가 리옹을 포위하자, 마그넨티우스는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어머니 및 친척들과 함께 자살했다. 당시 원군을 이끌고 그를 도우러가던 동생 디센티우스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8월 18일에 세로나에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을 진압한 뒤 그를 따랐던 추종자들을 대거 숙청했으며, 동방으로 돌아가서 자기가 없는 동안 동방에서 문제를 일으킨 조카 갈루스를 처형했다. 그 후 354년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아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으로 라인 전선이 붕괴되어 게르만족의 침략에 직면한 갈리아를 수습하도록 했다. 그때까지 별다른 군사적 경험이 없었고 상황도 최악에 가까웠지만, 율리아누스는 아르겐토라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갈리아를 구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