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슬라브인 토마스 (영어: Thomas the Slav, 그리스어: Θωμᾶς ὁ Σλάβος) |
출생 | 760년경 |
사망 | 823년 |
직위 | 엑큐비토스 친위 기병 연대장, 아나톨리아 테마 주둔 투르마 사단장 |
반란 대상 | 미하일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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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아모리아 왕조의 반란자. 레온 5세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황위에 오른 미하일 2세를 상대로 동로마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진압당했다.2. 생애
760년경 소아시아 북동부 폰토스의 가지우라에서 가난한 슬라브계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릴 때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대에 입대했다. 이후 탁월한 용력을 선보이며 빠르게 출세하였고, 아나톨리아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를 맡고 있던 바르다니스 투르코스의 보좌관이 되었다. 803년 바르다니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레온 5세, 미하일 2세와 함께 반란에 가담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바르다니스는 반란을 일으키기 전 슬라브인 토마스, 아르메니아인 레온, 그리고 미하일과 함께 봉기의 전망을 알기 위해 필로멜리온의 한 수도자를 찾아갔다고 한다. 수도자는 반란은 실패하고, 토마스도 반란을 일으킬 것이며, 레온과 미하일이 황제가 될 거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이것은 후대에 창작된 이야기일 것이다.바르다니스의 반란군은 한때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까지 진격했으나, 정부군의 강력한 저항과 민중의 호응 부족으로 인해 공략에 실패했다. 그러자 레온 5세와 미하일 2세는 투항을 선택했고, 바르다니스는 항전을 포기하고 제국군에 귀순했다. 토마스는 그때까지 바르다니스를 따르다가 아랍으로 달아나 10년간 숨어지냈다. 813년 즉위한 레온 5세는 토마스를 불러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둔한 엑큐비토스 친위 기병 연대장에 임명했으며, 뒤이어 아나톨리아 테마 주둔 포이데라티족 투르마 사단장에 선임했다. 그렇게 레온 5세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동방 전선을 지키던 그는 820년 12월 25일 미하일이 레온 5세를 잔혹하게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반란을 계획했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되는데, 은인인 레온 5세의 원수를 갚고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을 충족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대관식을 치른 뒤 자신이 콘스탄티노스 6세이며, 23년 전 어머니 이리니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눈을 뽑으려 했을 때 기적적으로 도망쳤다고 주장했다. 또한 성상 파괴주의를 강력하게 규탄했으며, 빈민의 옹호자이자 무거운 세금과 관리의 부패에 신음하는 민중의 대변자로 자처했다. 이후 미하일 2세가 파견한 아르메니아 테마의 군대를 손쉽게 격파했다. 이에 소아시아 전역이 요동쳤고, 얼마 안가서 오피시아 테마와 아르메니아 테마를 제외한 모든 아시아 테마가 토마스를 지지했다. 제국의 동방 군대 3분의 2 이상이 토마스를 지지했으며, 세관원들은 앞다퉈 토마스가 세운 정부에 세금을 바쳤다. 사람들은 문맹인데다 성탄절에 황제를 잔혹하게 죽인 미하일보다는 매사에 정중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고 매력을 발휘하는 토마스가 황제감이라고 여겼다. 토마스는 이와 더불어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마문에게 제국의 영토 일부를 봉토로 바치겠다고 약속하고 상당한 재정 지원을 받았다.
821년 봄, 토마스는 아랍인, 페르시아인,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알란족, 고트족, 훈족과 슬라브족 등으로 구성된 8만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그는 그해 12월에 트라키아로 건너가 콘스탄티폴리스를 포위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 동원된 정부군의 규모는 35,000명에 불과했다. 이렇듯 상황이 자기한테 유리한 만큼, 토마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호응하리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과 수비대는 미하일 2세를 굳건히 지지했으며, 미하일은 군대를 격려하기 위해 어린 아들 테오필로스를 시켜 성십자가와 성모 마리아 동상을 들고 성벽을 따라 행진하게 하였다.
별다른 호응이 없자, 토마스는 수도 주변의 도시들을 정복한 뒤 3면에서 총공격을 가했다. 그는 블라카르나이에 있는 성벽의 북서쪽 방면의 공격을 몸소 이끌었다. 그쪽은 테오도시우스 성벽 중 가장 약한 지점이었다. 그러나 공성무기를 총동원하여 공격을 퍼부었지만, 미하일이 성벽 위에 설치한 대형 쇠뇌와 투석기에 밀려 실패했다. 한편 바다에서도 토마스를 지지하는 함대가 아나톨리아 연안에서 정부측 함대를 격파했지만, 맹렬한 겨울 폭풍으로 인해 해안 가까이 올 수 없어서 금각만의 약한 성벽에 접근하지 못 했다. 결국 토마스는 일단 전투를 중단하고 트라키아의 숙영지에서 겨울을 보냈다. 미하일은 이 틈을 이용해 소아시아에서 증원군을 데려오고 성벽을 보수했다.
822년 봄, 토마스는 도시 외곽에 다시 진을 쳤다. 그는 블라카르나이 지역에 공격을 집중하기로 했다. 공세가 시작되기 전, 미하일은 직접 성벽 위에 올라가 반란군에게 그들의 지휘관을 버리라며, 귀순한다면 사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반란군은 이 요청을 나약함의 증거로 보고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들이 성벽에 가까워지는 순간, 방어군이 일제히 성문을 열고 돌격했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당황한 반란군은 이렇다할 저항도 못하고 패주했다. 한편, 헬라스와 펠로폰네소스에서 파견된 토마스 측 함대는 정부측 함대에게 참패했다. 토마스는 이후에도 수도를 육로로 봉쇄하였지만, 수도를 공략할 방안을 찾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823년 오무르타그 칸이 지휘하는 불가르족이 헤라클케아 부근 케둑토스 평원에서 반란군을 습격하여 막심한 타격을 입히고 약탈했다. 토마스는 어쩔수 없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서쪽으로 30km 가량 떨어진 디아바시스로 후퇴했다.
823년 5월 1일, 미하일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수도에서 출진하여 반란군에게 접근했다. 양군은 아나스타시우스 성벽 근처의 쿠시카야 언덕에서 흘러 내려오는 멜라스와 아티라스의 두 작은 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결전을 벌였다. 토마스는 퇴각을 가장하여 정부군을 유인한 뒤 역공을 시도하려 했지만, 사기가 땅에 떨어진 반란군은 위장 후퇴를 패주로 받아들이고 정부군에 투항했다. 토마스는 소수의 추종자들만 거느리고 아르카디오폴리스(지금의 륄레부르가즈)로 도망쳐서 방책을 치고 버텼다. 정부군이 요새를 포위한 뒤, 그는 5개월간 항전했으나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요새 내의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고 반란군 상당수가 정부군에 투항했다.
823년 10월, 주민들은 토마스를 넘겨주면 용서해주겠다는 미하일의 제안을 받아들여 토마스를 붙잡아 정부군에 넘겨줬다. 미하일은 땅바닥에 처박힌 토마스의 목을 자주색 장화를 신은 발로 누르면서 사형을 선고했다. 토마스의 손과 발은 잘려나갔고, 몸은 장대에 꿰어졌다. 토마스의 양자로 들어갔던 전직 수도사 아나스타시오스는 잔여 반란군을 이끌었으나 곧 잡혀 처형되었고, 아시아 속주에 있던 다른 반란 지도자들도 잇달아 잡혀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용서를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토마스의 반란이 가져온 여파로 인해 제국의 군대와 함대 모두 급격히 약화되었고, 아랍군은 이 기회를 틈타 시칠리아와 크레타를 공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