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4-04 16:59:24

바르다니스 투르코스

이름 바르다니스 투르코스
(Bardanes Tourkos)
출생, 사망 미상
직위 트라키아의 스트라테고스, 아나톨리아의 스트라테고스
반란 대상 니키포로스 1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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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니키포로스 왕조의 반란자. 니키포로스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다.

2. 생애

바르다니스는 아르메니아계 성씨이며, 투르코스(Tourkos)는 별명으로, ' 투르크인'이라는 뜻이다. 이로 볼때 아르메니아 출신인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다. 795년 스콜라리 근위대 사령관을 맡았고, 콘스탄티노스 6세 테오도테의 재혼을 반대한 사쿠디온의 수도자 플라톤을 체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797년 트라키아의 스트라테고스를 역임하였으며, 이리니 황후가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를 폐위시키는 걸 지지했다. 799년 4월 1일 부활절, 그는 니케타스 트리필리오스, 시시니오스 트리필리오스, 콘스탄티노스 보라스와 함께 이리니의 마차를 이끌고 궁전에서 사도 교회로 가는 개선 행렬을 이끌었다.

한편, 그는 돔니카라는 여자와 결혼하여 자녀 몇 명을 두었는데, 그 중 두 딸을 미하일 2세와 또다른 조력자와 결혼시켰다. 미하일 2세와 결혼한 첫째 딸의 이름은 테클라이다. 동로마 제국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워렌 트레드골드 교수는 바르다니스의 두번째 딸은 레온 5세의 첫번째 아내인 바르카이며, 813년 레온이 테오도시아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와 이혼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이 사실인지는 불확실하다.

802년 10월 31일, 이리니가 니키포로스 1세에게 축출되었다. 당시 트라키아의 스트라테고스를 맡고 있던 그는 니키포로스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아나톨리아의 스트라테고스로 부임했다. 803년 니키포로스는 아바스 왕조에게 매년 바치던 공물을 거부했다. 황제는 바르다니스를 원정군 사령관으로 삼아 아랍에 대항한 전쟁을 준비하게 했다. 그러나 딴마음을 먹고 803년 7월 19일 아나톨리아 옵티니콘, 트라키아, 부체라리아 테마의 부대로부터 황제로 추대받았다. 워렌 트레드골드 교수는 이리니의 심복이었던 바르다니스가 이리니를 폐위시킨 니키포로스를 몰아내고 이리니를 복위시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을 거라고 주장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반란을 일으키기 전 슬라브인 토마스, 아르메니아인 레온, 그리고 미하일과 함께 봉기의 전망을 알기 위해 필로멜리온의 한 수도자를 찾아갔다고 한다. 수도자는 반란은 실패하고, 토마스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할 것이며, 레온과 마하일이 황제가 될 거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이것은 후대에 창작된 이야기일 것이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 마을인 크리소폴리스로 진군하여 8일간 진을 치며, 수도에서 자신에 호응하는 봉기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별 소식이 없자, 그는 거대한 군대 기지가 있는 말라기아로 철수했다. 반란에 동참했던 레온 5세 미하일 2세는 반란이 실패할 것을 직감하고 니키포로스 1세에게 귀순했다. 이에 위축되었고, 진압군과 맞붙기 전에 협상을 시도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타라시오스와 몇몇 원로원 대표들은 그에게 서한을 보내 그와 부하들이 항복해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도록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니키포로스 1세 역시 이를 보장하겠다는 서신을 보내는 한편 자신의 금 십자가를 보냈다.

결국 803년 9월 8일 항복하였고, 키오스에 있는 헤라클레이오스 수도원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프로테 섬으로 이송되어 사바스 수도원에서 수도자로 살아갔다. 황제는 약속대로 그를 처벌하지 않는 듯 했으나, 803년 12월 또는 804년 초, 라카오니아 병사들이 프로테 섬에 상륙하여 그의 눈을 멀게 했다. 니키포로스 본인은 원로원 앞에서 이 사건은 자신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선언했지만, 그가 언제 다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위험인물을 제거하려고 비밀 지령을 내렸을 거라고 보는 이들이 많았다. 이후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바르다니스의 외손자인 테오필로스부터 테오도라까지의 황제는 대부분이 바르다니스의 후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