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6:58:28

김동광

김동광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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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광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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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챔피언 결정전 우승 반지
2001
(감독)

{{{#!wiki style="margin: -5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1658><tablebgcolor=#001658> 파일:한국농구연맹 로고 화이트.svg KBL
역대 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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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f2023,#ddd
<rowcolor=#fff> 1997 시즌 1997-98 시즌 1998-99 시즌 1999-2000 시즌 2000-01 시즌
최인선
기아
신선우
현대
신선우
현대
최종규
삼보
김동광
삼성
<rowcolor=#fff> 2001-02 시즌 2002-03 시즌 2003-04 시즌 2004-05 시즌 2005-06 시즌
김진
동양
김진
동양
전창진
TG삼보
전창진
TG삼보
유재학
모비스
<rowcolor=#fff> 2006-07 시즌 2007-08 시즌 2008-09 시즌 2009-10 시즌 2010-11 시즌
유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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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유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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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진
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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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희
동부
문경은
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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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유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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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승균
KCC
<rowcolor=#fff> 2016-17 시즌 2017-18 시즌 2018-19 시즌 2019-20 시즌 2020-21 시즌
김승기
KGC
이상범
DB
유재학
현대모비스
이상범
DB
전창진
KCC
<rowcolor=#fff> 2021-22 시즌 2022-23 시즌 2023-24 시즌 2024-25 시즌 2025-26 시즌
전희철
SK
김상식
KGC
김주성
DB


<rowcolor=#fff> 2026-27 시즌 2027-28 시즌 2028-29 시즌 2029-30 시즌 2030-3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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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광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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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d70029> 파일:안양 정관장 레드부스터스 엠블럼 적색배경.svg 안양 정관장 레드부스터스
역대 감독
}}} (SBS-KT&G-인삼공사-KGC 시절 포함)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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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2c,#d3dade
<rowcolor=#ffffff> 초대 2대 3대 4대
김동광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7)
감독 대행
강정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7~1998)
강정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8~1999)
김인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2002)
정덕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2~2004)
<rowcolor=#fff>
5대
6대
7대
김동광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4~2006)
감독 대행
김상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6~2007)
유도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7~2008)
감독 대행
이상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8~2009)
이상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9~2014)
<rowcolor=#fff> 7대 8대 9대
10대
감독 대행
이동남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4~2015)
전창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5)
감독 대행
김승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5)
김승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6~2022)
김상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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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 align=center><table width=320><table bordercolor=#074ca1> 파일:서울 삼성 썬더스 엠블럼(유색배경).svg 서울 삼성 썬더스
역대 감독
(수원 시절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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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074ca1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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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cc33> 초대 2대 3대 4대
최경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7)
감독 대행
김현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7~1998)
김동광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8~2004)
안준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4~2011)
김상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1~2012)
<rowcolor=#fff> 5대 6대 7대
김동광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2~2014)
감독 대행
김상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4)
이상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4~2022)
감독 대행
이규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2)
은희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2~2023)
7대 8대 파일:서울 삼성 썬더스 엠블럼.svg
감독 대행
김효범 파일:캐나다 국기.svg
(2023~2024)
김효범 파일:캐나다 국기.svg
(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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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fff> 파일:Korea Basketball National Team.png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1982 뉴델리 AG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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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023a82> 13대 14대 15대 16대 17대
방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인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방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인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이인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rowcolor=#002a5b> 18대 19대 20대 21대 22대
최인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동광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최부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전창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rowcolor=#002a5b> 23대 24대 25대 26대 27대
최부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남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유재학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허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이상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rowcolor=#002a5b> 28대 29대 30대 31대
김동광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허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감독 대행
김상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상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상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rowcolor=#002a5b> 32대 33대 34대 35대 36대
추일승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안준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1982년 뉴델리 AG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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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농구협회 이사
KOREAN BASKETBALL ASSOCIATION
파일:/image/065/2012/02/13/500kdg_0.jpg
김동광
金東光
<colbgcolor=#D0B068> 출생 1951년 12월 2일 ([age(1951-12-02)]세)[1]
경상남도 부산시 수영출장소
(現 부산광역시 해운대구)[2]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신장 184cm| 체중 90kg
직업 농구 선수 ( 포인트 가드 / 은퇴)
농구 감독
가족 아들 김지훈
종교 불교
학력 인천신흥초등학교 (졸업)
송도중학교 (졸업)
송도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이학부[3] (학사)
실업 입단 1975년 기업은행 농구단
소속 <colbgcolor=#D0B068> 선수 기업은행 농구단 (1975~1983)
코치 기업은행 (1985~1987)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1994~1997)
감독 바레인 농구 국가대표팀 (1983~1985)
기업은행 (1987~1992)
서울방송-안양 SBS 스타즈 (1994~1997)
수원-서울 삼성 썬더스 (1998~2004)
안양 SBS-KT&G (2004~2006)
서울 삼성 썬더스 (2012~2014)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2015~2016)
해설자 SBS / SBS Sports (2007~2008)[4]
MBC SPORTS+ (2011~2012)
MBC SPORTS+ (2014~2018)
행정가 한국농구연맹 (2007~2008 / 기술위원)
한국농구연맹 (2008~2011 / 경기이사)
한국농구연맹 (2011 / 경기위원장)
한국농구연맹 (2018 / 심판위원장)
한국농구연맹 (2018~2021 / 경기본부장)
대한민국농구협회 (2014~ / 이사)
대한민국농구협회 (2021~2022 / 경기력향상위원장)

1. 개요2. 유년기3. 선수 경력4. 지도자 경력5. 방송해설위원 시절6. KBL 경기본부장7. 스타일
7.1. 작전타임
8. 기타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농구인. 現 대한민국농구협회 경기력향상위원장 겸 이사. 한국프로농구에서 감독과 행정가까지 했던 이력이 있다.

현역 시절 포인트 가드로 두각을 나타냈고 지도자로서도 여러 구단을 두루 거치면서 성공했다. 직설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화끈한 성격과 카리스마가 부각되면서 팬들 사이에서는 '광뽀대'와 귀화혼혈 출신인지 모습이 마치 만화의 두치와 뿌꾸에 나오는 ' 드라큘라'라는 별명을 가진 열혈남아로 불린다.

2. 유년기

학창 시절은 꽤 암울한데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아버지 조지 E. 프레츠는 한국 전쟁 당시 부산 미 공군 기지에서 복무했던 미군이었고, 어머니 김옥련씨는 진남포 출신의 실향민으로 무남독녀로 자랐으나, 6.25 전쟁 때 부모와 헤어져 부산까지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임신 사실도 모른 채 전출 명령을 받아 한국을 떠났고 이후 그가 바레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인 1983년까지 30여년 동안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에 의해 홀로 키워졌고 학창 시절에는 운동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별 감정도 없었다고 한다. 바레인에서 처음 아버지를 만났을 때도 의외로 별 감정 없이 무덤덤했다고. 그러나 97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또 자녀를 키우면서 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00년 이후에 다시 아버지와 만나고 있다고 한다.[5]

부산에서 태어나서 어머니에 의해 홀로 키워졌다. 출생 신고도 거의 2년이나 늦게 했는데, 1950년대에는 워낙 혼혈에 대해 그토록 좋지 않았던 정서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그랬다는 아픈 사연도 있다. 그의 어머니는 황해도 출신인데 혼자 월남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가족이나 친척도 없는 처지였다고 한다. 그랬던 어린 시절을 그는 야생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6살 때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쭉 자랐는데 어린 시절 어머니와 단칸방에서 살면서 매우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감독과 해설자로서의 모습만 본 젊은 농구팬들은 조금 튀게 생긴 사람 정도로 여기기 쉬우나, 선수 시절에는 장발 아프로 스타일로 누가 봐도 혼혈 티가 확 나는 외모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밖에서 친구들에게 맞지 말고 이겨서 오라고 강하게 키웠고 실제로 싸움을 잘했기 때문에 학창시절 혼혈이라고 따돌림당하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생활력을 키워주기 위해 너무 강하게 키우려 했고 때문에 학창 시절에는 어머니가 어려웠고 어머니에 대한 정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자식을 키우게 되면서 학창 시절 어머니가 어려워서 어머니께 잔정을 드리지 못했던 점을 슬퍼하게 되었다고 한다. 1997년 평생 아들 하나만을 위해 살아오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3. 선수 경력

중학교 시절 같은 혼혈인 문영환을 만나게 되고 이 둘은 절친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야구를 하려 했으나 야구부에 떨어지고 문영환과 농구부 주위를 배회하다가 송도중학교 농구부의 전규삼 감독이 둘 다 서양 혼혈이니 나중에 신체조건이 크게 좋아질 거라는 기대로 둘을 스카웃했다. 이후 수십년간 대한민국 농구를 떠받치는 전규삼표 가드의 첫 시작이었다.[6][7] 김동광 본인은 혼혈로서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기살기로 운동만 했다고 한다. 물론 남들보다 신체 능력이 나았기 때문에 유리한 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취직 등에 있어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배는 노력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각오와 더불어 남들보다 운동을 잘 하게 되니까 스스로 더 열심히 운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더 커질 것으로 생각했던 키는 좀처럼 자라질 못해 고등학교 졸업 시점까지도 178cm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대학교 입학 후 멈췄던 키가 갑자기 커져서 184cm까지 컸으니 당시를 생각하면 좋은 체격이었다.

이후 순탄할 것 같은 대학 생활은 지병인 빈혈이 찾아오면서 위기를 맞았는데, 너무 훈련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토록 훈련이 세기로 유명한 고려대 농구부에서 당시 코치가 김동광의 훈련을 막아가면서 몸 관리를 하게 했고 병원 치료를 하면서 몸을 추스른 김동광은 2학년 때부터 레귤러가 된다. 그 후 대학 무대를 정복하게 된다. 이 때 동시대에 활동한 라이벌로는 박수교가 있다. 김동광과 박수교는 이후 1970년대 명 포인트 가드로서 라이벌이 되었다.

혼혈로서의 장점을 이어받아서 운동 능력이 뛰어났고 포인트 가드이면서도 몸싸움에도 강했으며 천부적인 농구 센스와 포인트 가드로서의 리딩은 당시 최고로 평가받았다. 국가대표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이 때 중국과의 경기 중 228cm짜리 목철주[8]한테 파울했다가 맞을 뻔한 적도 있다.[9] 현역 시절 그의 별명은 불멸의 가드, 코트의 마술사, 탱크가드, 코트의 야생마 등등. 별명만 봐도 최고로 평가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대학교 졸업 후 기업은행의 간판선수로 맹활약했다. 최인선도 있었지만 보통 올드 농구 팬들은 기업은행하면 김동광을 더 기억한다. 당시 기업은행 농구 팀에서 김동광 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이름이었고 그 시절 잘 생긴 얼굴까지 더해 인기도 대단했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삼성 & 현대 등의 대기업들이 잇따라 농구 팀을 창단하면서 기업은행은 선수 스카웃에서 돈빨이 받쳐주지 못해 밀리기 시작했더니 기업은행의 행보 또한 김동광을 실망시키면서 그는 1983년을 끝으로 돌연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4. 지도자 경력

파일:김동광 감독 열정지시.jpg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김동광/지도자 경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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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 방송해설위원 시절

이게 웬일입니까??[10]
멋있는 게 하나 나왔네요

과거 SBS SPORTS와 지상파인 SBS에서도 방송해설을 했지만 실제로 방송해설의 인기는 MBC SPORTS+에서 시작되었다.

참고로 MBC SPORTS+는 고려대 스포츠부 출신을 살리는 대표 스포츠 전문 채널로 과거에도 직설적인 해설로 유명세를 탔지만 KBL 주관방송사가 된 이후 즉시 영입을 결정하면서 농구인기를 올리기 시작한다.

MBC SPORTS+는 현재 대한민국 스포츠채널 중에서 최고봉으로 KBO 프로야구와 MLB도 중계하는 등 선진적인 케이블 스포츠 채널이다.

"야구에 허구연이 있으면 농구에는 김동광이 있다"는[11] 어록까지 나올 정도로 최고의 해설을 자랑한다.

2011년부터 MBC SPORTS+에서 해설을 하였는데, 해설로서 상당히 직설적인 스타일을 드러냈다. 가끔 무개념 판정을 하는 심판 디스하기도 하는 등 프로농구판 모두까기인형의 위엄을 보이고 있어 해설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일부 팬들은 자기팀 선수를 디스한다고 별로 좋아하지 않을 때도 있다. 농구팬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편. 감독 시절에도 외국인 선수가 전술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자 카메라 앞에서 아 진짜! 하면서 위엄을 보였던 전력이 있었는데 해설에서도 그 성향이 확실히 나타난 듯.

2011-2012 시즌 방송해설일 때 주로 3팀에 대한 편파(?) 해설이 있지만 이 팀들의 장단점에 대한 분석은 거의 역대급이었다.

자신이 SBS 스포츠에서 해설을 하면서 SBS가 포함된 안양에서 감독직을 했는지 SBS 스타즈-KT&G 카이츠의 후신인 안양 KGC인삼공사에 대한 분석이 정확했고 부산이 고향이지만 실제 농구고향인 인천 연고와 역시 아들이 매니저를 맡았던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에 대한 애정이 있는 해설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을 명장으로 만들었던 서울 삼성 썬더스 경기의 해설도 당시 김상준 감독이 몰락을 했는지 역대급 디스에 가까운 혹독한 비판의 해설을 하면서 모두까기인형의 위엄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외 자신이 고려대 출신인지 고려대 농구부가 주축이었던 창원 LG 세이커스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에 대한 해설도 냉철한 분석가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에서 사퇴한 이후 2014-2015 시즌에 MBC SPORTS+에 돌아오면서도 이 분석력은 변함이 없었다. 4년간 방송해설을 다시 맡았다.

자주 쓰는 표현으로는 "왕왕"이 있는데 익숙지 않지만 "시간 간격을 두고 이따금씩"이라는 뜻의 표준어다. 자신이 가드 출신이라 그런지 리딩가드의 중요성도 심심치 않게 강조한다. 또 백보드를 이용한 뱅크샷 자유투는 성공률이 높지 않다고 좋지 않게 보는 편이다.[12]

해설 성향은 뒤지고 있거나 스쿼드가 빈약한 팀을 응원하는 편이 많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편파해설이라고 까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2015-16 챔피언결정전 6차전. 이 경우에는 KCC가 배수의 진을 쳐도 모자랄 상황에 정규시즌 1위팀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2쿼터부터 가비지 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더 나은 경기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런 듯 하다. 생각해 보자. 3쿼터 종료 시점에서 상대에게 무려 98점을 헌납했다는 건 팀을 응원하러 온 원정팬들에게도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당 경기의 해설 내내 KCC의 형편없는 수비력을 시종일관 깠는데도 이게 편파로 불릴만한 해설인지도 의문이다.

그 여부와는 상관없이 2015-2016 KBL 플레이오프 챔피언이 된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는 찬사를 보냈고 모교 출신의 새 스타인 이승현 선수에게는 거의 극찬을 했다. 바로 수비와 열정이었다.

2016-2017 시즌 KBL 첫 농구영신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그 마이크를 잡은것도 김동광이었다.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서울 SK 나이츠의 2016-2017 시즌 고양체육관에서 처음으로 열렸던 농구영신 경기에서 당시 야구 최고의 캐스터인 한명재 아나운서와 야구 최고의 해설위원인 허구연 해설위원과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2017-2018 시즌까지 MBC SPORTS +의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다가 MBC SPORTS+가 중계권을 반납하기 이전이었던 2018-2019 시즌은 다시 KBL 심판위원장과 KBL 경기본부장으로 복귀하면서 중계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6. KBL 경기본부장

2017-2018 시즌까지 MBC SPORTS +를 맡은 뒤 갑작스럽게 KBL 한국프로농구연맹의 호출을 받게 된다.

2018년 07월 26일 KBL 경기본부장으로 선임되었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KBL 경기 이사라는 행정을 맡은 이후 7년 만에 다시 KBL에 돌아오게 되었다.

주요 업무는 심판 오심문제를 줄이는 일이다.

이 부분은 방송에 보도되기도 했다.

2020년 01월 21일에는 KBL 경기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지만 대한민국농구협회 기술위원장으로 선임되면서 떠나게 되었다.

7. 스타일

한마디로 신사다. 그리고 코트에서 직접 뛰는 선수 마냥 땀도 많이 흘리는 열혈 감독이다. 작전타임때 험한 말을 입에 담지 않으며 답답한 상황에서도 침착한 어투로 선수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의 플레이를 독려한다. 선수들을 질책할 때 목소리 톤이 높다는 특징이 있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꼭 필요한 작전이나 잘못만 지적한다. 이는 역시 목소리 톤이 높은 허재, 전창진 등 다혈질 감독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두 감독은 독설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로 질책 수위가 강하지만, 김동광은 톤은 높지만 뼈있는 충고나 일침을 자주 던져주며[13] 선수들의 입장을 공감해 주는 경우가 많다.

미국인이었던 아버지와 학창시절 농구 외에 학업도 중요시했던 전규삼 송도고 농구부 감독의 영향을 받아 나름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바레인에서 오랜 기간 감독으로 일해서인지 외국인 선수들과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데[14] 혼혈이라는 혈통을 떠나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바레인 감독이 되기 전까지 30여년간 한국에서만 살아온 네이티브 한국인으로서 영어 회화 실력을 그 정도로 갈고 닦았다는 것은 스스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당시에는 영어 회화 학습 여건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 외국인 선수들과 거침없이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면 왜 광간지인지 실감이 난다. 아래에 서술된 것처럼 대리언 타운스를 향해 "Come on, man~!"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가히 압권.

아들인 김지훈에게도 마치 농구인의 모습 그대로 엄격함과 냉정함을 가졌다. 이건 허재보다 더하고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김진보다 더 심했다. 김윤은 생각보다 성장하지 못한 모습으로 2년만에 은퇴를 하게 된다. 이 부분은 김지훈 선수도 부상으로 인해 2년만에 은퇴 이후 매니저를 한 모습과도 평행이론이다. 하지만, 그 속에 따뜻함도 있다. KT&G 감독 시절 경질이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당시 회고할 때 부자선발을 본인은 인정하셨고 삼성 감독 재복귀 때 전자랜드 매니저였던 김지훈 선수에게도 교사자격증이 있으니 다른일을 찾으라는 모습을 보였다. 부자보다 농구인으로서 서로를 위해 쿨하게 인정하면서 개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농구에 대한 간절함이었는지 김지훈 선수는 결혼 이후 휘문고 코치로 제2의 농구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7.1. 작전타임

다른 감독들에 비해 조명이 크게 되지 않았지만, 엄청난 어록제조기다.

특히 지나칠 정도로 언행 수위가 높아 불쾌감을 조성하는 전창진이나 허재와 비교했을 때 훨씬 수위가 양호하며, 직설적이면서도 정도를 넘지 않은 쓴소리로 농구인들의 정신을 깨우면서 농구팬들에게 감동을 남긴 편이다. 모교 후배인 강을준처럼 사투리가 심하지 않은점도 호평을 받는다.

아래는 작전타임 당시의 어록. 김동광 플레이어
"반칙을 하려면 강을준 같은 애한테 해야지, 자꾸 김현준한테 하면 어떡해?"
경기 막판 파울 작전으로 나온 작전타임에서[15]
게임을 진지하게 해. 거저 되는거 하나 없어 니들. 그냥 거저된다고 생각하지 말아.
안양 SBS 14연승 경기 당시 2쿼터에 역전 당하고 나서 작전타임때 선수들을 독려하며
정석아. 너 정규전 많이 해봤지? 위축될 거 하나 없어. 이런 게임을 즐겨봐. 그래야 플레이오프 가서도 할 것 아냐.
안양 SBS 14연승 경기 당시 4쿼터 작전타임때 선수들을 독려하며
지금 문제는 지금 뭐야? 수비가 뭐야? 우리, 누가 셋 하라 그랬어? 난 셋 하라고 한 적이 없어. 아 돌겠네. 맨투맨이야.
수비는 열정이야. 수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야.
야 동준이, 송영진이 데리고 못하면 어떻게 해, 에어포스트를!
야 이동준! 그렇게 무서워서 무슨 농구를 할래? 난 농구 하면서 여기 들어오는 데 피해주는 사람 처음 봤어. 그럼 넌 인삼공사 팀이냐? 아 이런 참...
2012년 11월 16일, 2R 안양 KGC인삼공사와의 홈경기 4쿼터 1분 남은 상황에서 작전 타임.[16]
동준아 슛이 안 들어갔지? 그지? 여기 들어가서 파워가 지나가 너는 여기 있으면.. 그냥 나가 줘야지.. 가만히 구경할 바엔 앉아서 구경하라니깐! 나와서?
이관희! 볼이 뜨겁냐? 잡은 볼을 왜 놓쳐 이 사람아!
주고 다시 받아야지 얼루 들어가~! 언제 어려운 거 가르쳤냐? ... 아이 참 답답한 놈이네.[17]

야 차재영이! 너 가서 여기 걸라고 그랬는데 딴청 하고 앉아 있어!
차재영의 플레이를 질책하며
내가 짧게 협력 수비하는 척하면서 돌아오라고 몇 번을 말해? 아~이. 야 선수는 부저가 울릴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돼! Come on man![18]
타운스를 혼내며
아니 농구에서 박스 아웃을 가만히 서서 하는게 어딨어? 아냐 이 사람이 앞으로 붙어 주고 나오는 그게 농구야! 그렇잖아!
심판에게 항의하며
여기서 골밑까지 들어가면 무슨 수로 막을거야? 이건 아냐! 전쟁이야! 이안엔 전쟁! 싸워! 5 파울 나와도 좋아!
여기 지금 수비가 있는데 이걸 왜 니가 가, 여기 있으면 되지! 그리고 지금 리바운드 싸움인데 누가 리바운드를 남한테 맽길 게 아냐! 너는 얘한테 맡기고, 너는 얘한테 맡기고, 누가 리바운드를 하란 얘기냐! 이 안엔 전쟁이야 이 사람들아! 무슨 얘긴지 알어?
야, 너가 지금, 네가 한 행동이 뭐냐 하면, 게임 하다 침도 뱉을 수 있고 욕도 할수 있어. 너도 똑같이 해야지! 너는 놀아나는 대로 하니까 얼마나 손해냐? 넉 점을 거저 주고 공격권까지 줘, 머리를 써야지! 너도 똑같이 욕해! 걔가 욕한다고 발길질 해야 되냐? 농구장에서 발길질 해야 돼? 정신이 없어.
2012-13시즌 5라운드 KCC전 홈경기 4쿼터 8분 20초 남을 때, 46:58 지고 있는 상황[19]
다 한번씩 해야 되냐? 너 왜 안 되는 줄 알어? 잡으면 일대일만 하려 그래! 일대일 능력도 안 되는데 일대일만 할라고 그래! 어떻게 해야 돼? 스크린을 걸어서 플레이를 해야지! 일대일로 해결 하면 아무 소리 안 할게. 그러고 에러 나고 백코트 나면 어떻게 하잔 얘기야? 어? 너, 너, 뭐 어떻게 할라고?
몸싸움 해주라고 유성호! 맨날 웨이트는 뭐하러 해?
몸싸움에서 밀리는 유성호에게)
(선수들 플레이가 맘에 안드는지) 리바운드 하나 잡어 임마, 일메타 구십 몇이야 너. 서 있을려면 여기 나와서 서있어.
야 니들 눈엔 맨날 안 보이냐? 왜 우리 편만 안 보여 쟤네 건 다 보이고?
심판에게 항의하며
그런 파울 하지 말라고, 무슨 얘긴지 알어? 인텐셔널 파울 같은거 하지 말라고, 대답을 해야 내가 알아들어, 어?
김동광: 비디오 판독 해봐!
최한철 심판: 맞으면요?
김동광: 아 얘기해! 내가 감독 관둘게!
최한철 심판: 아니 그게 아니고 제가 볼게요.
4쿼터 종료 직전 남은 시간 문제를 두고
여기 전주 아니야 이 사람아! 여기 우리 홈이야! 죄송하긴 뭘 죄송해!
KCC와의 홈경기에서 자꾸 석연찮은 판정이 내려지자
야, 수비를 그렇게 해선 안되지.. 뭐 하는 거야 도대체? 어?? 아... 승현아 니가 보기엔 어떠냐? 어떻게 해야 해? # (이후) 올라가 수비해. 끝까지 하라고 끝까지.
13-14 시즌 2014년 1월 18일 4R LG전 홈경기 3쿼터 후반부터 터무니없는 점수차이로 지고 있다가 수비에 대한 질책을 하고 황당함에 벤치에 있던 김승현에게까지 던진 말이다. 사실 목이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할말은 끝까지 했다. 이후 8연패로 인해 성적부진과 함께 자진사퇴를 하고 말았다.

8. 기타

광간지라는 별명이 유명하지만 실제로 혼혈 출신인지 모습만 보면 드라큘라 백작에 가깝다. 즉,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잡아먹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규섭은 김동광 감독의 호된 질책과 함께 눈물을 흘렸지만 사실 많이 아끼기도 했다.

아들인 김지훈도 고려대를 졸업하고 프로농구선수로 잠시 뛰었으나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3번이나 하면서 큰 활약은 하지 못하고 은퇴하게 된다. 2010년부터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매니저로 활동하기도 했다. 프로 지명을 아버지가 감독으로 있던 KT&G로 받아 낙하산 인사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 사실은 허재의 아들 허웅이 아버지에게 지명을 받지 않고 원주 동부 프로미에 입단하자 경기 해설 도중에 몇 번 언급한 적 있다.

2012년 삼성 썬더스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김동광 감독 배수진 "농구명가 재건위해 아들도 잘랐다"라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본인이 고려대 출신이다 보니 수위급 물망에 오른 고대 후배들이 드래프트에 뛰어들 때마다 고대 가드들을 지명했으나, 그 후배들은 믿거고 정신들을 증명하듯 감독 커리어 말년을 망치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 대표적인 선수가 박재현.[20]

야구해설위원이자 현 KBO 총재인 허구연과는 고려대학교 동문으로 친분이 상당하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1951년 동갑내기지만, 김동광의 고려대 학번이 더 빠르다. 2016년 12월 31일, 고양실내체육관에서 열린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서울 SK 나이츠의 사상 첫 KBL 프로농구 농구영신 경기에서 허구연 야구 해설위원이 특별 해설을 할 때 옆에서 많이 도와주기도 했다.

사실 야구로 보면 SUN인 선동열을 연상하면 쉽다.

잭 니콜슨을 닮았다.

9. 관련 문서



[1] 공식 생일 1953년 1월 5일로, 이 공식 생일엔 좀 아픈 사연이 있다. 자세한 건 후술. [2] 출생 당시 舊 수영비행장(現 센텀시티) 부근이다. 출생은 부산에서 했지만 6세 이후부터는 인천광역시에서 자랐다. [3] 전공은 불명. 체육교육과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4] 2006-2007 & 2007-2008 KBL 파이널 특별 해설 포함 [5] 2001년 아버지를 한국으로 초청했을 때 아버지 프레츠씨는 독일 명문 귀족이었던 가문의 족보를 가져왔고, 가문의 반지를 일곱 자녀 중 장남인 김동광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6] 그 이후 전규삼의 손에서 강동희, 신기성, 김승현, 김현중 같은 많은 명품 가드들이 숱하게 나왔다. [7] 강압적인 지옥 훈련부터 욕설, 구타, 똥군기 등으로 얼룩진 대한민국 학원 스포츠에서 전규삼 감독은 대단히 이례적인 존재, 더 깊게 보자면 한국 학원 스포츠가 지향해야 할 바를 분명하게 제시한 명지도자였다. 1996년에 완전히 은퇴할 때까지 36년 동안 송도중학교, 송도고등학교 감독을 역임하면서 단 한 차례도 선수들을 때리지 않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부터, NBA 고급 플레이들을 연구해서 직접 선수 개개인 맞춤형 훈련 프로그램을 짜줬다는 후문까지.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진적인 발상을 가지고 계신 셈이다. [8] 중국명 무톄주 (1949-2008). 중국의 전설적인 농구선수로, 16세때 이미 2미터를 넘었다. 포지션은 센터. 군팀인 바이 로케츠에서 뛰었으며, 현역 대령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바이 로케츠는 워싱턴 위저즈(당시명 불릿츠)과 친선경기를 치렀고, 그때 인상적이었던지 NBA에서 관심을 가지기도 했으나, 당시 중국은 거의 북한급으로 폐쇄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NBA진출을 할 수 없었다. [9] 당시 중국과의 경기 중 목철주를 도저히 정상적인 수비로는 잡을 수가 없어서 돌아가면서 논개를 시전하고 거의 폭력 수비를 하다시피했는데 이때 김동광이 목철주를 세게 쳤다가 친 목철주가 김동광을 찢어죽일 기세로 맹렬하게 달려드는 걸 당시 한국 대표팀에서 제일 컸던 하동기가 막느라 죽을 힘을 다했다고 한다. 하동기는 이때 당시 죽음의 공포를 느꼈대나 뭐래나...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하동기는 하승진의 아버지이다. [10] 선수가 일반적인 상황에서 나오기 힘든 플레이를 많이 했을 때 이 대사가 항상 나온다. 선수가 이지샷 특히 노마크 상황의 골밑슛을 넣지 못했을때의 반응이 가장 많다. 물론 접전상황에 선수가 외곽에서 말도 안되는 터프샷을 성공시키는 경우도 이 대사가 나온다. [11]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고려대 동문이다. [12] 실제로 농구 교본같은 것을 보면 뱅크샷은 정면이 아닌 대각선 위치에서 쏘라고 권하는 경우가 많다. 정면에서 쏠 경우 방향이 조금만 빗나가도 슛이 실패하기 때문이다. [13] SBS 14연승 당시 SK에게 고전하며 패배 위기에 몰렸을 때 당시 신인 포인트가드인 이정석에게 "너 농구 얼마나 했어? 경기를 좀 즐겨봐. 플레이오프 가서도 잘해야 할 것 아니야."라며 격려하기도 했다. 2쿼터 초반 16점차를 역전당했을 때도 선수들을 몰아붙이지 않고 "농구는 거저 하는 것이 아니야. 욕심 부리지 말고 여유롭게 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14] 프로 원년부터 통역 없이도 외국인 선수들과 격의없이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비슷한 케이스로는 김 전 감독처럼 해외 생활을 오래 했던 최종규 당시 인천 대우증권 제우스 감독이 있다. [15] 팀 파울 상황에서 파울이 나오면 상대팀에 자유투를 내줘야 하는데 강을준은 슛 정확도가 약해서 오히려 상대팀 입장에서는 반길 만한 입장이었다. 반대로 김현준은 던지는대로 백발백중으로 들어가버리니 상대팀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 [16] 이동준이 마크가 숭숭 뚫리고 파틸로가 드라이브인을 해오자 비켜주는 등 올스타전스러운 플레이를 보여주자 내뱉은 말. [17] 알다시피 차재영은 바닥을 기는 BQ로 유명했다. 현역 시절 별명이 괜히 차재앙이 아니다. [18] "I said short hedge back, how many told you? 아~이. 야 must be player, ended buzzer. You know, you try your best. Come on man!" 문법에 맞게 수정한 문장은 "I said short hedge back, how many times did I tell you? You must be a player till the buzzer ends"정도 [19] 이동준 전주 KCC 이지스 정희재의 트래쉬 토크(이동준의 입모양을 봐 짐작컨대 "뭐라고? 양키새끼라고?"로 추정)에 흥분해 그를 가격하고 테크니컬 파울을 얻자 작전타임의 상당 부분을 이동준을 추스르는데 썼다. 이동준은 이 경기 후 자신이 혼혈이라 게임 중 여러 불이익을 받는다면서 격한 감정을 토로했는데, 김동광 본인도 혼혈인지라 남 일 같지 않았던 모양. [20] 사실 신인 한 명의 문제라기보다는 삼성이라는 팀 자체가 그야말로 안준호 이후 바닥을 기는 스쿼드였기에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임동섭은 한창 부상으로 앓고 있었고, 이동준, 차재영으로 대표되는 포워드진의 BQ야 뭐 이규섭이 은퇴하고 김동욱마저 오리온으로 보내버린 마당에 제대로 된 승률이 나올 리가 없다. 이상민은 김상준보다 더한 성적인데도 이름값으로 인해 살아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