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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 𒆍𒀭𒊏𒆠 𐤁𐤁𐤋 Bābili / Bāḇ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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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라비 시기 바빌론 제1왕조의 판도[1] | |||||
기원전 1894년 ~ 기원전 1595년 | |||||
위치 | 서아시아 | ||||
수도 | 바빌론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왕 | ||||
민족 | 아모리인 | ||||
언어 | 아카드어 | ||||
종교 | 메소포타미아 종교, 마르두크 신앙 | ||||
주요 사건 |
기원전 1894년 건국 기원전 1595년 바빌론 함락 기원전 1595년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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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이전 | 이신-라르사 시대 | ||||
멸망 이후 | 카시트 왕조 |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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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드어 | 𒆍𒀭𒊏𒆠 | (Bābilim, Bābili) | |
아람어 | 페니키아 문자 | 𐤁𐤁𐤋 | (Bāḇel) |
아람 문자 | 𐡁𐡁𐡋 | ||
영어 | Babylon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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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메르와 아카드, 우르 제3왕조에 이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석권한 고대 국가. ' 바빌로니아'(Βαβυλωνία, Babylonia)라는 국가명은 수도였던 바빌리( 바빌론)에 접미사를 붙여 그리스- 라틴식으로 부른 것이었다. 훗날의 신바빌로니아(바빌론 제10왕조)와 구분하여 고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 제1제국, 바빌론 제1왕조로도 부른다.국가로서의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1894년에 세워졌으며, 건국 초기에는 서셈계 아모리인들이 주도하는 그저 그런 도시국가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제6대 국왕인 함무라비 재위기에 주변의 엘람, 아시리아, 마리, 라르사 일대를 정복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석권하면서 강력한 제국으로 떠올랐고, 수도인 바빌론은 한때 '세계의 수도'라고 불릴 정도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했다. 그러다 함무라비 사후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기원전 1595년에 인근 히타이트 왕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2. 역사
2.1. 건국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처음으로 생겨난 수메르 문명을 정복하고 최초로 거대한 제국을 이룩한 것은 기원전 24세기 사르곤 대왕의 아카드 제국이었다. 그러나 아카드 제국은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나람신 대왕 사후 빠른 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자그로스 산맥 인근에서 넘어온 유목민족인 구티인들의 공격으로 기원전 2154년경 결국 멸망했다. 아카드 제국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우르의 수메르계 우르 제3왕조였다. 우르 제3왕조는 거대한 지구라트를 짓고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기틀을 확립하는 등 여러 치적들을 남겼으며, 인근의 엘람 지방의 왕족들과 결혼 동맹을 통하여 국경 지대를 안정시키기도 했다.함무라비 이전의 바빌론 제1왕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바빌론 유적이 있는 지방의 지하수 수면이 높아서 많은 진흙 점토판 기록들이 실전되어버린 탓에 현대까지 멀쩡히 보존된 기록들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자료들을 모아 조사해본 결과, 당시 바빌론은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는 여러 지방들 중 그나마 힘이 강한 지방들 중 하나에 속하기는 했으나 그뿐이었고 특별히 두각을 드러내거나 주변에 패권을 휘두르는 강대국에 속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빌론을 세운 초대 국왕은 수무아붐이라고 전해진다. 북서 셈어파 언어를 사용하던 아모리인들의 수장이었던 수무아붐은 바빌론을 세우고 조금씩 조금씩 힘을 불려 나갔으며, 키시와 딜바트 지방을 정복하면서 바빌론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의 뒤를 이은 바빌론의 제2대 국왕인 수무라엘은 바빌론의 성벽을 완성했으며 복속된 지방들에서 꾸준하게 일어나는 반란들을 진압했다.
제3대, 제4대, 제5대 왕인 사비움, 아필신, 신무발리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기껏 알려진 것이라고 해봐야 주변의 몇몇 지역들을 추가적으로 정복했다는 것과, 운하와 신전들을 재정비한 것이 있을 뿐 딱히 특기할 만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제5대 왕인 신무발리트가 업적이 있는 편으로, 그는 인근의 도시인 라르사의 림-신이 바빌론을 침략해 들어오는 것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면서 바빌론의 멸망을 피했다. 신무발리트 왕은 기원전 1813년부터 기원전 1792년까지 재위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 그의 아들인 함무라비에게 왕좌가 넘어갔다. 이전까지 메소포타미아의 한 도시에 불과했던 바빌론은 바로 이 함무라비 대왕의 시기에 본격적인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2.2. 함무라비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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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D853F> 함무라비 | 함무라비의 궁정 |
함무라비의 업적은 정복 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대인들에게 함무라비의 가장 큰 업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문법 중 하나인《 함무라비 법전》이다. 이 법전은 대략 2m 25cm 정도 되는 거대한 흑색 섬록암에 새겨져 있으며, 비석 꼭대기에는 함무라비 대왕이 태양신 샤마쉬로부터 법을 전달받는 부조가 묘사되어 있다. 그 유명한 "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나온 곳이 바로 이 《함무라비 법전》이다.[2] 참고로 《함무라비 법전》에는 상법, 군법부터 시작해서 간통죄, 채무, 이혼 등 다양한 내용에 관한 조항들이 나열되어 있다. 아직 신분제가 명확했던 고대 사회였던 만큼 같은 죄를 저질렀더라도 신분에 따라 처벌이 달랐다. 예를 들어 평민이 귀족의 눈을 쳐서 빠지게 하였다면 그 평민의 눈을 빼버리는 벌을 내렸으나, 반대로 귀족이 평민의 눈을 쳐서 빠지게 만들었다면 은 1 미나(약 454g)만 치르면 되었다. 이 《함무라비 법전》의 의의는 당시로서는 굉장히 체계적인 조항들을 통하여 국가 통치의 기본 질서를 잡았으며, 미리 법 조항을 정해놓는 것을 통해서 성문법의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현대 고고학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함무라비 왕이 무너뜨린 도시인 마리에서 출토된 기록들을 토대로 함무라비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바빌론 유적에 남아 있던 점토판 유물들은 대부분 바빌론 일대의 높은 지하수 수면 때문에 다 녹아 사라져버렸기에 고고학자들이 이를 통해 연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의 경우, 함무라비 왕이 모조리 무너뜨려 땅에 통째로 묻어버렸기 때문에 점토판들이 많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고고학자들은 마리의 왕실 유적에서 온전하게 보존된 수많은 점토판들을 발견했고, 이를 바탕으로 함무라비 이전과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상황을 연구하고 있다.
2.3. 쇠퇴
함무라비 대왕 사후의 바빌로니아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의 추정으로는 함무라비가 죽은 이후부터 점차 바빌로니아, 즉 바빌론 제1왕조의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함무라비 대왕 사후 왕위에 오른 제7대 국왕인 삼수일루나는 인근 도시국가들의 도전을 꺾어놓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왕국의 분열 자체를 막는 데에는 실패하면서 동쪽의 엘람 등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용인하고야 말았다. 삼수일루나 왕 이후 즉위한 왕들의 상황도 비슷해서 바빌로니아의 힘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결국 제11대 왕인 삼수디타나 왕 재위기인 기원전 1595년경에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발흥한 히타이트의 침략을 받으면서 결국 서셈계 아모리인이 주도하는 고바빌로니아는 완전히 멸망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히타이트인들은 원정으로 바빌로니아를 침공한 입장이라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바빌론을 지배하기는 어려웠고 수도인 하투샤에서 반란까지 일어나자 바빌론을 지배하지는 못하고 약탈하기만 하고 철수했다.아모리인들의 고바빌로니아가 멸망한 이후에도 바빌론 지방에는 여러 왕조들 즉, 바빌론 제2왕조에서 제10왕조까지 들어섰다. 이들 역시 바빌로니아라고 부르기는 한다. 함무라비 대왕이 세운 바빌로니아를 이들과 따로 구분해서 고바빌로니아, 혹은 바빌로니아 제1제국이라고 부르고, 고바빌로니아가 멸망한 이후 바빌론 일대에 카시트인들이 세운 왕조를 카시트 왕조, 즉 바빌론 제3왕조라고 부른다. 카시트 왕조는 기원전 1595년부터 기원전 1155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결국 엘람에게 멸망했다고 한다. 그 사이에는 시랜드 제1왕조라고도 불리는 바빌론 제2왕조가 있는데, 이 왕조는 고바빌로니아가 멸망하기 전부터 독립하여 메소포타미아 남쪽 지방에 자리잡아 기원전 1457년까지 존속했다. 바빌로니아가 다시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되는 시기는 고바빌로니아의 멸망으로부터 한참 뒤인 기원전 6세기에 들어서야 도래한다. 신바빌로니아 참조.
3.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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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수무아붐 | 수무라엘 | 사비움 | 아필신 | 신무발리트 | |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함무라비 | 삼수일루나 | 아비에슈흐 | 암미디타나 | 암미사두콰 | |
제11대 | |||||
삼수디타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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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D853F> 역대 | 이름 | 재위 시기 |
초대 |
수무아붐 (Sumu-abum) |
기원전 1894년~기원전 1881년 |
제2대 |
수무라엘 (Sumu-la-El) |
기원전 1881년~기원전 1845년 |
제3대 |
사비움 (Sabium) |
기원전 1845년~기원전 1831년 |
제4대 |
아필신 (Apil-Sin) |
기원전 1831년~기원전 1813년 |
제5대 |
신무발리트 (Sin-Muballit) |
기원전 1813년~기원전 1792년 |
제6대 |
함무라비 (Hammurabi) |
기원전 1792년~기원전 1750년 |
제7대 |
삼수일루나 (Samsu-iluna) |
기원전 1750년~기원전 1712년 |
제8대 |
아비에슈흐 (Abi-Eshuh) |
기원전 1712년~기원전 1684년 |
제9대 |
암미디타나 (Ammi-Ditana) |
기원전 1684년~기원전 1647년 |
제10대 |
암미사두콰 (Ammi-Saduqa) |
기원전 1647년~기원전 1626년 |
제11대 |
삼수디타나 (Samsu-ditana) |
기원전 1626년~기원전 1595년 |
4. 문화
남성이 돈을 주고 여성과 결혼할 수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결혼을 희망하는 여성이 경매 시장에 나가면 남성이 값을 불렀을 때 가장 높은 값을 부른 남자를 여성이 선택할 수 있었다. 여성이라고 반드시 경매 시장에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희망자들이 자발적으로 신청하면 나가는 방식이었으며, 값을 높게 불러도 남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인신매매와는 다르다.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이 시대에 자유 연애로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자유 연애는 근대에 들어서야 등장한 개념이며 근대 이전 결혼이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자 상속권의 배분이었으므로 중매 결혼이 대부분이었다. 경매혼 시장은 어떤 관점에서는 중매보다도 더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서로 협상할 수 있으므로 사실상 현재의 결혼정보회사와 비슷한 셈이다.
또한 남편과 아내 양측의 합의하에 이혼이 가능했고, 몇 가지 조건이 만족된다면 일방적으로 결혼을 무효로 돌릴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남편의 불륜이 심하거나, 아내를 멸시하고 폭력을 사용하는 등의 이혼 조건이 충족되면 법에 따라 일방적으로 결혼을 무효로 돌리고 다른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었으며, 이혼 사유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자는 배우자에게 위자료를 지불해야 했다.
이제 바빌로니아의 가장 수치스러운 풍습에 관하여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 나라의 모든 여인들은 일생에 한 번씩은 무조건
이슈타르의[3] 거리 앞에 앉아 이방인에게 몸을 팔아야 한다. 거리에서 몸을 파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받기를 원하는 여인들은 한 쌍의 말이 끄는 막을 친 마차를 타고 수많은 일행들을 거느린 채 신전으로 향한다. 이슈타르의 성소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머리에 끈을 묶은 채로 앉아 있다; 일부는 들어오고 일부는 나간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든 방향으로 줄을 서서 여자들 사이를 드나든다. 줄 선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여자를 고른다.
여자가 한번 신전에 들어와 앉으면 남자가 무릎에 은화를 던져주고 신전 밖으로 나가 몸을 섞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남자가 여자 무릎에 은화를 던질 때에는 "밀리타 여신의 이름으로 너를 원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밀리타는 아시리아인들이 아프로디테 여신을 부르는 이름이다. 던져준 은화의 값어치는 높을 수도 낮을 수도 있지만 여인은 남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 은화를 던지는 행동으로 이미 은화가 신성해졌기에 거부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인은 자신에게 가장 먼저 은화를 던진 남자를 따라가 관계를 맺은 뒤에야, 여신이 내린 신성한 의무를 완수한 채로 집으로 돌아간다. 의무를 끝낸 여인을 다시 사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아름다움과 지위를 갖춘 여인들은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가나, 못생긴 여인들은 의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선택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한다. 일부는 3~4년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키프로스 일부에도 이와 비슷한 풍습이 있다.
- 헤로도토스 1:199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바빌론의 모든 여성들은 종교적 이유로 일생에 1번은 의무적으로 신전에 가서
매춘 행위를 할 것이 강제되었다고 한다. 신분을 불문하고 정해진 구역에서 남성들을 기다리고 있으면 남성이 와서
화대를 치르고 관계를 가졌는데, 아름다운 여성은 순식간에 일을 치르고 '의무에서 놓였지만' 못생긴 여성은 아무도 찾아주지 않아서 몇 날이고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풍요의 여신 신앙이 있었던
중동에서 흔했던 이른바 '신전 매춘' 풍습이다. 그렇다고 이런 풍습 때문에 신전이 속된 취급을 받는 건 아니어서, 《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여
사제의 명예를 훼손하는(
허위사실유포 및
명예훼손) 자는 얼굴에 문신을 하는 엄형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여자가 한번 신전에 들어와 앉으면 남자가 무릎에 은화를 던져주고 신전 밖으로 나가 몸을 섞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남자가 여자 무릎에 은화를 던질 때에는 "밀리타 여신의 이름으로 너를 원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밀리타는 아시리아인들이 아프로디테 여신을 부르는 이름이다. 던져준 은화의 값어치는 높을 수도 낮을 수도 있지만 여인은 남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 은화를 던지는 행동으로 이미 은화가 신성해졌기에 거부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인은 자신에게 가장 먼저 은화를 던진 남자를 따라가 관계를 맺은 뒤에야, 여신이 내린 신성한 의무를 완수한 채로 집으로 돌아간다. 의무를 끝낸 여인을 다시 사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아름다움과 지위를 갖춘 여인들은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가나, 못생긴 여인들은 의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선택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한다. 일부는 3~4년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키프로스 일부에도 이와 비슷한 풍습이 있다.
- 헤로도토스 1:199
5. 기타
- 기원전 1750년경 고바빌로니아 시대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잘못된 등급의 구리가 도착한 것에 대한 항의문 점토판이 우르의 어느 건물의 한 방에서 발견된 바 있다.[4] 이 항의문을 받아서 보관한 사기꾼은 Ea-nasir라는 인물인데, 말 그대로 상습 사기꾼이었다.[5] 방에서는 이 자가 구리 사기 친 것에 대한 항의문 외에도 조리 도구 거래, 부동산 거래, 헌 옷 거래 등등 별의별 분야에서 사기를 치고 받은 항의서들이 무려 수백 통씩 발견되어, 덕택에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이 바빌로니아 시대 경제에 대해 쉽고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달리 생각하면 바빌로니아 경제 전반에 사기를 친 것도 모자라, 자신에 대한 욕이 적힌 항의서 몇백 통을, 따로 방까지 만들어서 수천 년 뒤의 후손들도 꼼꼼하게 읽을 정도로 정성 들여서 보관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점토판은 파피루스, 양피지 등의 매체에 비해 무진장 무겁고 크며, 보관성이 좋다는 장점도 어디까지나 그 당시에 귀하디 귀한 연료로 구웠을 때나 발휘된다. 본인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참다 못해 불지른 덕에 잘 구워져 보관된 게 아니라면 매우 희귀한 경우이다. 이외에도 점토판들을 이용한 서간들은 오랜 보존이 가능한 유물이기 때문에 바빌론을 포함한 여러 고대 문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현대에도 각종 민형사 소송 및 행정 체계가 발달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는 서류 및 일상의 시시콜콜한 인간적 모습들, 궁정의 왕족들의 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재미있는 서간문들이 다수 보존되어 있다. 아버지에게 귀중품을 사달라고 떼쓰는 철딱서니 없는 아들이나 갑작스레 자신도 모르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걸려서 동생에게 다급히 도움을 청하는 형, 자신을 임신시키고 도망친 주인에게 먹고 살 길이 없으니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노비 등. #
[1]
아수르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속국화하여
지중해에 이르는 영역을 지배했으므로 속국들까지 포함하면 실제 영역은 더 크다.
[2]
이 원칙은 '동해보복의 원칙'이라고 한다. 자칫 야만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당시는 아직
인권의 개념이 제대로 성립되지도 못한 고대였음을 상기해야만 한다. 신분의 차이가 극심하고 폭력이 난무했던 고대에 이 법전은 신적 권위에 기댄 중재자의 기능을 해주었다. 즉 이 법전의 골자는 "상대방이 내 팔을 부러뜨렸다면 똑같이 팔을 부러뜨려 복수를 하라"가 아니라 "똑같이 상대방 팔까지만 부러뜨릴 수 있고, 그 이상 나가 죽일 수는 없다"라는 뜻인 것이다.
[3]
본문에는
아프로디테 여신이라고 쓰여 있다.
[4]
이 점토판 유물은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5]
오히려 이때는 사기 치기가 더 쉬웠다. 사람의 전과를 알아보거나 전문가를 찾기 쉬운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징역형이 없던 시절이다 보니 어지간한 중범죄는 다
사형이라 엄청난
인맥을 등에 업거나, 그게 아니면 진짜 목숨 걸고 사기를 쳐야 했다. 이 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어지간한 범죄는 무마해줄 정도로 엄청난 인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