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09 20:21:33

경희궁 융복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5
무덕문
계상당 춘화각 영취정
서암 덕유당 상휘당 광명전 어조당 용비루 장락전 봉상루
영렬천 자정전 집경당 회상전 융복전 융무당 집희당 경선당
위선당 태령전 자정문 영선당 사현합
태령문 향실 숭정전 정시합 흥정당 청한정 지효합 상의원
내삼청 숭양문
숭정문 승휘전 흥원문
직조청 내각( 규장각) 예문관 서방색 궁방 사옹원 사은원 양덕당
일영대 금루 호위청 선부관청 경현당
기상청
국립기상박물관
무겸청 연화문 광달문 화경문 경헌문 승화문
숭의문 서울특별시교육청 금상문 서울역사박물관 건명문 금천교 흥화문
남소 옥당( 홍문관) 약방( 내의원) 약원 도감군사대직청 빈청 전설사
오위도총부 정원( 승정원) 덕응방 내구 마구
개양문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경복궁 강녕전
景福宮 康寧殿
창덕궁 대조전
昌德宮 大造殿
창경궁 통명전
昌慶宮 通明殿
덕수궁 함녕전
德壽宮 咸寧殿
경희궁 융복전
慶熙宮 隆福殿
경복궁 교태전
景福宮 交泰殿
경희궁 회상전
慶熙宮 會祥殿
정문 · 중문 · 금천교 · 정전 정문 · 정전 · 편전 정문 · 편전 · 내정전 · 동궁 · 선원전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271호 경희궁
<colbgcolor=#bf1400> 경희궁 융복전
慶熙宮 隆福殿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 신문로2가)
건축시기 1620년 (창건) / 1865년 ~ 1868년 (철훼)
파일:경희궁 융복전 CG.png
파일:경희궁 융복전 CG 2.png
<colbgcolor=#bf1400> CG로 재현한 융복전 정면의 서쪽과(왼쪽) 동쪽(오른쪽)
1. 개요2. 역사3. 구조4. 부속 건물
4.1. 회장각
5. 여담

[clearfix]

1. 개요

경희궁의 침전으로, 왕비가 거주하는 내전 구역에 있었다. 그들도 사람이니만큼 먹고, 자고, 입고, 사람도 만나며 쉬면서 여러 활동을 하는 자신만의 생활 공간이 당연히 필요한데 이 곳이 바로 그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다.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로 융복전 서쪽에 위치한 회상전(會祥殿)이 있다.

이 곳이 의 침전인지, 아니면 왕비가 머물렀는지 명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이는 같은 기능의 회상전도 마찬가지이다.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慶熙宮志)》에는 ‘ 융복전 경희궁의 정침(正寢)이며 회상전은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이라 적혀있는데, 《궁궐지(宮闕志)》에는 '회상전이 궁궐의 정전(正殿, 여기서는 내전의 정전을 의미한다.)이며 융복전은 단지 회상전 동쪽에 있는 건물' 정도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회상전보다 동쪽에 위치한 점, 그리고 《 조선왕조실록》 등에 왕비, 대비 등이 거처했단 기록이 전해지는 회상전과 달리, 융복전은 임금 외에 사용한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의 침전’으로 추정된다.

이름은 '(福)이 융성(隆)한다'는 뜻이다.

2. 역사

1620년( 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때 지어졌으며 침전으로 기능을 처음 시작한 것은 1624년( 인조 2년)부터이다. 현종 시기 승하한 인선왕후 장씨의 빈소로도 사용했으며, 숙종 시기 1693년(숙종 19년)에 수리한 것 이외엔 별 일 없이 19세기까지 제 기능을 했다. 숙종은 이 곳에서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펼치기도 하는 등 가장 많이 활용했다. #

1829년( 순조 29년) 10월에 회상전에서 일어난 화재 경희궁 내전 일곽 대부분이 불 탈 때, 함께 소실되어 1831년(순조 31년) 4월에 재건했다. 순조가 승하한 이후 즉위한 들인 헌종 철종 경희궁보다는 창덕궁에 오래 머물면서 융복전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들의 90%를 헐어다 경복궁 중건의 자재로 쓸 때, 철거되었다.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경복궁의)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경복궁 중건일기》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l_2016081501001812600150601_99_20160814220805.jpg
<colbgcolor=#bf1400> 융복전, 회상전 자리에 일제가 만든 방공호
그리고 태평양 전쟁 당시 경성 중앙 전신국의 피폭 대비하여,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콘크리트로 만든 방공호를 옛 융복전과 회상전 자리에 만들었다. 독립 이후 2000년대에 철거하고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하려 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그대로 냅둔 채 현재에 이른다.

3. 구조


파일:서궐도 내전1.png }}} ||
<colbgcolor=#bf1400> 〈서궐도안〉을 채색한 〈서궐도〉 내전 영역. 주황색 원이 융복전, 보라색 원이 회상전, 초록색 원이 집경당이다.
융복전의 옛 모습을 보려면 〈서궐도안〉과 《서궐영건도감의궤》(이후 편의상 의궤로 부름)를 보아야 하는데 서로 묘사한 외관이 약간 다르다. 〈서궐도안〉에는 정면 5칸에 측면 3칸으로 되어있지만, 《 의궤》를 보면 정면이 6칸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경희궁 내전 건물 대부분이 1829년(순조 29년)에 소실되고 다시 지은 것으로, 〈서궐도안〉은 화재 이전, 《의궤》와 사진은 그 이후의 모습이 담겨있는 것이라 중건할 때 건물의 형태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의궤》와 사진을 보면 정면 가운데 2칸은 툇마루가 밖으로 돌출되게 하고 분합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했는데 〈서궐도안〉에는 돌출된 툇마루가 없고, 서쪽 가장자리 칸과 가운데 칸, 그리고 그 바로 동쪽 옆 칸으로 출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서궐도안〉에 따르면 겉면의 은 (남쪽에서 바라볼 때) 왼쪽에서 2번째와 동쪽 면 제일 끝 칸에 두었고,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내고 나머지 부분은 으로 막았으나 《의궤》에는 머름 위에 전면창호를 단 모습으로 나온다.

공통적인 부분은, 1층[1]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에다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각 기둥을 세운 뒤, 쇠서[2] 2개를 둔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짓고,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을 놓아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궁궐 침전 건물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또 건물 앞면엔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폭이 좁은 돌판을 얹어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다. 넓은 월대를 정면에서 약간 서쪽으로 틀은 다음 놓아 침전의 위엄을 살림과 동시에 행사가 있을 때, 보다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계단은 월대의 동, 서, 남쪽에 각각 1개씩, 그리고 건물 정면의 동쪽 끄트머리에 5단의 계단을 하나 놓았다.
  • 주변 행각과 담장에 다섯 개의 을 달아 융복전 영역으로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동쪽은 금명문(金明門), 서쪽은 연경문(延慶門), 연경문의 서쪽에 청상문(淸商門), 그리고 남쪽은 일영문(日永門), 북쪽은 개경문(開慶門)이라 했다.

4. 부속 건물

4.1. 회장각

파일:경희궁 회장각 3D.png
<colbgcolor=#bf1400> CG로 재현한 회장각
慶熙宮 會臧閣

융복전의 서쪽에 있던 부속 전각이다. 회상전 영역과 이어져 있었으며 평면은 ‘열 십(十)’ 자 형태였다. 역사는 융복전과 같다.

5. 여담

  • 1720년( 숙종 46년)에 숙종이 이 곳에서 승하했다. 숙종은 바로 옆 회상전에서 태어나 여기서 눈을 감았으니 경희궁에서 생애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셈이다.
  • 경종 시절 《선원보략》[5] 가운데 숙종의 어첩에서 '융복전'의 '전(殿)'이 '당(堂)'으로 잘못 적혔으므로 먼저 고치고 세제궁에 올린 책자도 내려주면 함께 고쳐서 들일 것을 교정청이 청한 일이 있었다. #

[1]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 [2] 모양의 부재. [3]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4]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 [5] 조선 왕실 족보인 《선원보첩》을 간략하게 적은 .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0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0 ( 이전 역사)
문서의 r314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