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전기의 중앙군이다. 조선 초기 중앙군이었던 10위가 10사로 바뀌는 등 중구난방적 개편을 겪다가 세조때 이르러서야 명칭을 오위로 확정하고 오위도총부에서 관할하게 하였다.2. 역사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직후 병권을 장악하기 위해 기존에 중앙군을 통솔하던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1393년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편하였다. 의흥삼군부는 시위를 담당하는 10위(十衛)[1]의 상급기관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각 위의 절제사가 실무를 관장하였다.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는 정종 때 삼군부(三軍府)로 개칭되었다가 태종 1년(1401) 승정원(承政院)과 통합되어 승추부(承樞府)가 되었다. 이후 태종 5년(1405) 왕명 출납 기능과 군무 기능이 분리되면서 다시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로 개칭되어 군정, 군령 업무를 관장하는 최고기구로 격상된다. 이후 군정권은 병조로 귀속되고, 기구 명칭도 의흥부(義興府), 진무소(鎭撫所) 등으로 여러차례 바뀌다가 세조 12년(1466)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로 개편되면서 조선 전기 중앙군 제도가 확립된다.한편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 예하 실질 전투 병력이었던 10위(十衛)는 태조 3년(1394) 10사(十司)로 개편되었는데 10사는 4개의 시위사(侍衛司)와 6개의 순위사(巡衛司)로 나누어졌다.
- 의흥친군좌위 →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
- 의흥친군우위 → 충좌시위사(忠佐侍衛司)
- 응양위 →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
- 금오위 → 신무시위사(神武侍衛司)
- 좌우위 → 용양순위사(龍驤巡衛司)
- 신호위 → 용기순위사(龍騎巡衛司)
- 흥위위 → 용무순위사(龍武巡衛司)
- 비순위 → 호분순위사(虎賁巡衛司)
- 천우위 → 호익순위사(虎翼巡衛司)
- 감문위 → 호용순위사(虎勇巡衛司)
이후 태종 9년(1409) 신무시위사를 충무순금사로 개칭하고 나머지 순위사를 전부 시위사로 개편하여 9개의 시위사와 1개의 순위사로 개편되었다. 세종 1년(1418)에는 좌군에 용분사(龍奮司)를, 우군에 호아사(虎牙司)를 추가하여 12사로 확대되었다가 1424년에는 10사로 다시 축소되는 등 여러차례 개편을 겪었으며, 문종 1년(1451) 오사(五司)로 정리되었다. 오사(五司)는 의흥사(義興司), 충좌사(忠佐司), 충무사(忠武司), 용양사(龍驤司), 호분사(虎賁司)를 예하 부대로 두고 있었다. 오사(五司)에는 기존 12사(十二司)를 제외하고도 금군이었던 별시위(別侍衛), 총통위(銃筒衛)도 포함되었는데, 여기에는 오사(五司)를 번상 시에는 경군으로, 부방 시에는 지방군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3. 구성
- 의흥위(義興衛): 중군(中軍)으로, 예하에 갑사[2]와 보충대[3]가 편성되었다.
- 용양위(龍驤衛): 좌군(左軍)으로, 예하에 별시위[4]와 대졸[5]이 편성되었다.
- 호분위(虎賁衛): 우군(右軍)으로, 예하에 족친위,[6] 친군위,[7] 팽배[8]가 편성되었다.[9]
- 충좌위(忠佐衛): 전군(前軍)으로, 예하에 충의위,[10] 충찬위,[11] 파적위[12]가 편성되었다.
- 충무위(忠武衛): 후군(後軍)으로, 예하에 충순위,[13] 정병,[14] 장용위[15]가 편성되었다.
4. 각 지역의 중앙군의 편성
각 지역에서 번상한 중앙군들은 소속 진관에 따라 오위 중 한 부대로 편성되었다. 단 한양 지역 군사들은 오위 전체에 골고루 편성되었다.- 의흥위(義興衛): 경기, 강원, 충청, 황해
- 용양위(龍驤衛): 경상
- 호분위(虎賁衛): 평안
- 충좌위(忠佐衛): 전라, 제주[16]
- 충무위(忠武衛): 함경
5. 유명무실화
조선 초기까지 유지되었던 오위 체제는 중기에 들어가 방군수포(放軍受布)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군이 병역뿐만 아니라 요역에도 투입되는 일이 빈번해지자 군역 대상자인 농민들이 해당 관청이나 군 지휘관에게 포를 주고 군복무를 면제받은 것이다. 그 결과, 임진왜란 당시 오위 소속 병력은 서류상으로는 수만 명에 이르렀지만 실제 있는 병력은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임진왜란이 끝나고 오위는 유명무실해졌고[17] 한양과 도성의 경비 임무는 오군영에게 넘어가게 된다.6. 기타
품계 | 관직 | 총원 |
정2품 | 도총관(都摠管) | 겸직 |
종2품 | 부총관(副摠管) | 겸직 |
정3품 당상 | 장(將) | 겸직 |
정3품 당하 | 상호군(上護軍) | 9명 |
종3품 | 대호군(大護軍) | 14명 |
정4품 | 호군(護軍) | 12명 |
종4품 | 부호군(副護軍) | 54명 |
정5품 | 사직(司直) | 14명 |
종5품 | 부사직(副司直) | 123명 |
정6품 | 사과(司果) | 15명 |
종6품 | 부장(副將) | 25명 |
종6품 | 부사과(副司果) | 176명 |
정7품 | 사정(司正) | 5명 |
종7품 | 부사정(副司正) | 309명 |
정8품 | 사맹(司猛) | 16명 |
종8품 | 부사맹(副司猛) | 483명 |
정9품 | 사용(司勇) | 42명 |
종9품 | 부사용(副司勇) | 1,939명 |
- 인원 수는 만기요람에 따른 숫자이다.
-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5위의 옛 제도가 모두 없어지고 오직 관명(官名)만 남았다. 장(將)과 부장(部將)이 번을 나누어 입직(入直)ㆍ순경(巡更)하게 하고, 호군(護軍) 이하는 군함체아(軍銜遞兒)에 속하게 하여, 녹(祿)을 줄 자리를 비워놓고 여러 관아의 사람들이 승진하거나, 강등하여 전직(轉職)해 오는 것을 기다렸다.
- 결국 조선 전기 무관직이던 오위가 임진왜란 이후 오군영이 생기고 문관들의 밥그릇 챙겨주기용 자리로 전락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오위도총부가 멀쩡히 돌아가던 조선 전기에도 문관들을 오위 도총부이 주요 직책에 임명한 사례들이 많다. 문관들 관직은 두고 병력만 빼버린 모양.
- 오위의 부사과(종6품)에 있는 사람이 문반계 정3품 당상관 품계인 통정대부를 가자 받을 정도다. 실록 통정 가자를 받을 정도면 이미 정3품 당하 통훈대부 자급으로 종6품 부사과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무반계 어모장군에 절충 가자를 받은 것도 아니다.
- 이처럼 품계가 높은데 실직이 없는 자를 행대호군에 임명하는 식으로 오위는 문관차지였다. 행(行)이란 품계보다 관직이 낮은 경우에 붙은 접두어이다. 대호군을 하다가 정승으로 뛰어오를 정도다.
- 위(위장)-부(부장)-통(통장)-여(여수)-대(대정)-오(오장) 편제로 이루어졌다. 괄호 안의 명칭은 각 부대의 지휘관 명칭이다.
- 근대적인 편제로 가깝게 본다면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연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기술행정부대 혹은 병과 부대, 또는 기능별 특성화(돌격, 보충, 정보수집 등) 또한 초보적이나마 시도한 것도 보인다. 즉 조선 정부는 지역 연대 중심의 오늘날 군단급 상비 병력으로 두고 있었다고 보면 이해가 올 것이다. 오위도총부는 이 오위를 총괄하는 작전사령부에 가깝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오위 체제의 상비 병력이 각개격파 당하면서 붕괴하고, 전쟁이 지속되면서 지휘해야 할 병력의 수가 폭증하자 이를 총괄할 도원수 체제를 신설하는데, 오늘날로 치면 합동참모본부와 통합방위본부를 신설했다고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원수부 위하에는 도순변사(육군본부)와 삼도수군통제사(해군본부)를 신설하여 지역 상관없이 대량으로 징병된 병력을 통합 지휘하는 직제를 만들어 내었다.
7. 같이 보기
[1]
의흥친군좌위, 의흥친군우위, 응양위, 좌우위, 금오위, 신호위, 비순위, 천우위, 감문위, 흥위위
[2]
'취재'라는 전문시험을 보고 통과한 자원들로만 구성한 병력으로, 현대의 부사관과 유사하다.
[3]
천민이 일정기간 이곳에서 복무하면 양인이 될 수 있었다.
[4]
양반의 자제로 구성된 부대로, 주로 기병이었다.
[5]
천민들 중 힘이 센 사람들로 구성된 부대.
[6]
왕실과 혈연관계가 있는 종친들이 편성되는 부대.
[7]
함경도 출신 군사들로 구성된 부대이다. 시위뿐만 아니라 정보수집 기능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8]
팽배수들로 편성된 부대로 초기에는 최정예 부대였으나, 성종 때는 이미 요역에 동원되는 등 잡병화되었다.
[9]
사병 혁파 때 해체된
이성계의 사병이었던
가별초의 유산을 물려받은 부대다.
[10]
공신 자손으로 이루어진 부대로, 실제로 시위 업무를 수행한다기보다는 공신 자제들이 벼슬길에 올라가기 전 밟는 단계로 여겨졌다. 당연히 전투력은 형편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1]
앞서 서술된 충의위와 마찬가지로, 공신 자제들로 구성되었다.
[12]
세조 때 보병이 부족하다고 해서 창설된 부대.
[13]
고급관리의 자제 중 충의위나 충찬위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자들로 편성된 부대.
[14]
양인 출신 병사들로, 지방에서 번상하여 한양과 궁궐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번상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입직 근무에 잘 투입되지 않았다. 기병과 보병으로 나뉘었다.
[15]
천민들로 구성된 부대로, 후일 양인의 입대도 허락된다.
[16]
당시 제주도는 전라도 소속이었다.
[17]
실권은 없어졌지만 명목상 벼슬자리로 남아 있었다. 왕족이 맡는 명예직이 되었다.
[18]
갑사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