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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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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납치된 비행편 |
<colbgcolor=#ffffff,#1f2023> AA11 · UA175 · AA77 · UA93 | |
납치 오인 비행편 | KE085 · DL1989 | ||
충돌 | 구 세계무역센터( 붕괴) · 펜타곤 | ||
관련 정보 | 최후의 메세지 · 노란 리본 작전 | ||
관여 인물·단체 | 알카에다 · 오사마 빈 라덴 ·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 · 모하메드 아타 | ||
테러 피해자· 영웅 |
베티 옹 · 키스 A. 글래스코 · 릭 레스콜라 · 토드 비머 | ||
관련단체 | 뉴욕 경찰국 · 뉴욕 뉴저지 항만청 · 뉴욕 소방국 · 미국 연방항공청 · 윈도우즈 온 더 월드 · 아메리칸 항공 · 유나이티드 항공 | ||
테러 이후 | 반응과 여파 · 테러와의 전쟁 · 애국자법 · 9.11 메모리얼 & 뮤지엄 · 세계무역센터( 트윈타워즈 2) | }}}}}}}}} |
아메리칸 항공 11편 테러 사건 American Airlines Flight 11 |
||
|
||
<colbgcolor=#be0b04> 발생일 |
2001년
9월 11일 오전 08시 46분 30초 오후 21시 46분 30초(UTC+9) |
|
발생 위치 |
아메리칸 항공 11편 기내 제1 세계무역센터[1] |
|
유형 | 하이재킹 / 자살 테러 | |
인명피해 |
탑승자 87명[2] 전원 사망 제1 세계무역센터 상주자 수백여 명[3] 사망 |
|
기종 | 보잉 767-223ER | |
항공사 | 아메리칸 항공 | |
승무원 |
기장 존 오고노프스키 부기장 토마스 맥기니스 사무장 베티 옹 외 8명 |
|
기체 등록번호 |
N334AA | |
출발지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 |
|
도착 예정지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
|
사고 23일 전, 스톡홀름 알란다 국제공항에서 찍힌 사고 기체 |
[clearfix]
1. 개요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6분에 발생한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4] 사건.2. 항공편 정보
|
사고 이전 댈러스 러브필드에서 택싱 중인 사고기의 모습 |
3. 조종사 및 승무원
- 기장: 존 오고노프스키(John Ogonowski, 50세)
- 아메리칸 항공의 베테랑 조종사로, 생전 농업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직 공군 조종사 대위 출신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공군 기지에 배치되어 C-141 수송기로 미군 시신을 수습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이후 전역하고 아메리칸 항공에 입사해 23년간 비행하였으며 재직 중에는 연합군 조종사 협회에 회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매우 직업 사명감이 깊고 비행에 대한 애정도 깊은 인물이었다. 존은 2001년 9월 11일, 정말 여느때와 다름 없이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에서 오전 7시 59분에 이륙해,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으로 향하던 중, 예기치 않은 갑작스런 테러범들의 공격에 의해 칼로 잔혹하게 살해당한 후 조종석을 내어주고 말았다. 사실상 9.11 테러 당일의 가장 최초의 희생자 중 한 명이다.[5]
- 부기장: 토마스 맥기니스(Thomas McGuinness, 42세)
- 아메리칸 항공 11편의 부조종사로, 2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였다. 아내와 함께 자녀들이 지금보다 더욱 폭넓은 기회를 맞이할 수 있도록 거주지인 캘리포니아를 동쪽 뉴햄프셔주 포츠머스로 이주하기로 결정할 정도로 자식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아빠였다. 주위 사람들은 토마스가 신념 깊은 종교인이라 생각하였으며 그의 가족들은 초교파 기독교 교회에 항상 예배를 갔다고 한다. 토마스는 2001년 9월 11일, 기장인 존과 함께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에서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아메리칸 항공 11편을 조종하던 중 그 역시 갑작스런 테러범들의 공격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 당하고 말았다. 존과 함께 9.11 테러 당일의 최초의 희생자.
- 사무장: 베티 옹
- 하이재킹된 이후 비상 전화를 취해 관제소에 연락을 한 중국계 미국인 여성 승무원. 그녀는 조종실이 잠겨 진입이 불가능하며, 비즈니스 승객 중 한 명이 칼에 찔렸다고 보고했다. 해당 교신이 있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연락마저 끊겨 버렸다. 결국 오전 8시 46분 모하메드 아타가 고의로 기체를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에 충돌시킴으로서 폭발과 동시에 사망하고 말았다.[6]
- 승무원: 캐런 마틴, 바바라 아레스트기, 제프리 콜먼, 사라 로우, 캐슬린 니코시아, 진 로저, 다이앤 스나이더, 에이미 스위니(Karen Martin, Barbara Arestegui, Jeffrey Collman, Sara Low, Kathleen Nicosia, Jean Roger, Dianne Snyder, Amy Sweeney)
4. 하이재커(테러리스트)
- 모하메드 아타(محمد اعطا, Mohammed Atta) (당시 33세)
- 이 아메리칸 항공 11편의 하이재킹을 주도적으로 이끈 행동대장이자, 알카에다의의 "비행기 작전 대원" 리더. 4편의 항공기 납치범들중 가장 연장자이며, 사건 몇 개월 전에는 테러의 세부적인 계획을 최종적으로 브리핑할 정도로 이 테러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농약 살포용 비행기를 구매해 뉴욕 상공에 탄저균을 투하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공중 납치를 감행한다. 그가 평소엔 인망도 두텁고 넉살도 좋은 성격이라 그의 정체가 테러리스트였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는 비행기를 납치한 후 오전 8시 24분 경 기내 방송을 하려던 것을 잘못하여 관제소에 교신을 한 적이 있었다. 내용은 '공항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아무도 움직이지 마라.'의 내용이었다. 그는 이 교신 이후에도 한 차례 더 실수를 범하였고, 결국 몇 십분 뒤인 46분에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에 그대로 충돌 시켜 폭발과 함께 즉사하였다.
- 압둘아지즈 알 오마리(عبد العزيز العمري, Abdulaziz al-Omari) (당시 22세)
- 왈리드 알 셰흐리(وليد الشهري, Waleed Mohammed al-Shehri) (당시 23세)
- 와일 알 셰흐리(وائل الشهري, Wail Mohammed al-Shehri) (당시 28세, 왈리드의 형)
- 사탐 알 수카미(سطام السقامي, Satam Muhammed Abdel al-Suqami) (당시 25세)
하이재커 5명은 2001년 즈음에 미국으로 입국하였고 그 중 한 명은 GPS를 소지하고 있었다.
5. 테러 진행 과정
오전 5시 41분 모하메드 아타와 측근 압둘아지즈 알 오마리는 사우스 포틀랜드에서 비행기를 타고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미리 예약해 둔 아메리칸 항공 11편 게이트에 도착했다.오전 7시 40분경 나머지 3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차례로 탑승했다.
7시 59분에 AA11편은 탑승자 92명[7]을 태우고 평소와 다름없이 이륙을 했다. 당연히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렇게 8시 13분까지 AA11편은 관제소와 정상적으로 교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8시 13분 이후, 이륙한 지 10분 정도 지났을 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행동대장인 모하메드 아타를 필두로 한 5명의 테러범들이 승객으로 위장하고 있다가, 기내를 급습하여 비즈니스석의 승객 1명을 칼로 찔러 죽이고, 조종실로 침투해 기장인 존(John Ogonowski)과 부기장 토마스(Thomas McGuinness)를 잔혹하게 살해한 후[8] 조종간을 잡았다.[9] 그와 동시에 관제소와의 교신도 끊겼다. 보스턴 항공 노선 관제 센터는 응답이 없는 AA11편을 향해 계속해서 교신을 시도했다. 그러던 중 그들이 항로를 이탈했다는 사실을 인지했고, 끊임 없이 응답을 요청했지만 11편은 10분이 넘도록 끝내 무전을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오전 8시 24분경 갑자기 수상한 목소리의 한 남성이 관제소를 향해 교신을 걸어왔다.
Buddy. We have some planes. Just stay quiet and you'll be okay. We are returning to the airport.
친구. 비행기'들'은 우리가 접수했다. 조용히 있으면 해치지 않겠다. 공항으로 돌아가고 있다.[10]
친구. 비행기'들'은 우리가 접수했다. 조용히 있으면 해치지 않겠다. 공항으로 돌아가고 있다.[10]
이는 연방 항공국과 공군에게 보고되었지만 납치 자체가 불확실한 상황이었던 데다 당시까지는 미국 내에서 공중납치가 대형사고로 연결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큰 위협이 아니라고 보고 있었다.[11]그러나 AA11편의 사무장이었던 베티 옹[12]이 기내 전화로 비행기의 납치와 그 과정에서 승객이 칼에 찔렸다는 것을 알렸다. 잠시 후 AA11편은 뉴욕 상공에서 레이더에서 사라졌고 동시에 베티 옹의 전화도 끊겼다. 녹취록 스크립트, 녹취록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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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레이션[13]: 오전 8시 46분[14]이었습니다. It was eight forty-six in the morning. 조지프 파이퍼[15] 서장[16][17]: 맨해튼 가에서는 듣기 힘든 비행기 소리가 들렸죠. 그것도 아주 크게요. And then we heard, a plane come over. And in Manhattan, you don't hear planes too often. Especially loud ones. (비행기가 날아오는 소리) (폭발음) 주변 사람들: 이런 젠장! Holy Shit! 한 소방관[18]: 직감했죠. 소방관으로서 최악의 날이 되리라는 걸요.[19] Right then and there, I knew this was gonna be the worst day of my life as a firefighter. |
결국 오전 8시 46분 30초 AA11편은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1번 타워) 93~99층을 정면 충돌하였다. 이 사건으로 비행기에 타고 있던 탑승자들은 전원 사망했다.[20] 물론 테러를 감행한 테러범 5명도 즉사했다.[21] 이때까지 관제당국을 제외한 지상에서는 항공기가 모종의 이유로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하는 단순 대형사고인 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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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 지니 카의 녹음 테이프[22] | 스티븐 맥카들의 녹음[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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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스테흘레의 웹캠 영상[24] | WNYW 뉴스 영상[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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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흘라바의 영상[26] |
쥘 노데의 다큐멘터리[27] |
위의 6개의 영상들이 첫 번째 충돌을 기록한 자료들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고화질 CCTV가 널리 보급된것도 아니었고, 휴대전화가 널리 보급된 현재와 달리 달리 2001년에는 호출기와 공중전화, 필름 카메라가 주류였다. 때문에 현재라면 실시간 CCTV 녹화 영상이나 SNS에 실시간 중계 영상이 넘쳐났겠지만 WTC에 충돌한 AA11편의 자료는 위의 6종류만 남아 있으며 사실상 제대로 촬영된 것은 쥘 노데의 영상뿐이다. 게다가 건물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벌어진거냐 묻거나 대피를 하면서도 그저 소형 프롭기가 충돌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블랙베리처럼 스마트폰의 역할을 조금이나마 할 제품들은 있었지만 거의 대중화되지 못했다. 거기다 사건 당시는 평일인 데다 무역센터가 관광객들에게 개장하기 전이라 관광객들도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테러범들이 하필 이 날 아침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AA11편을 납치 목표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총 3가지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1. 기체 항로가 장거리에다가 국내선이기 때문이다.
항로가 장거리일수록 기체에 실어야 할 항공유량은 많아지고 항공유가 많이 담겨 있을수록 충돌 시의 폭발력은 극대화된다. 게다가 LA행 노선은 장거리 노선이면서도 상대적으로 보안이 허술한 국내선이라 타겟으로 잡기에 매우 적절했다.[28]
항로가 장거리일수록 기체에 실어야 할 항공유량은 많아지고 항공유가 많이 담겨 있을수록 충돌 시의 폭발력은 극대화된다. 게다가 LA행 노선은 장거리 노선이면서도 상대적으로 보안이 허술한 국내선이라 타겟으로 잡기에 매우 적절했다.[28]
2. 목적지인 뉴욕과 최대한 인접한 지역 공항에서 출발하는 항공편이었기 때문이다.
기체 내에 실린 항공유량을 가장 최소한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항공유량을 소비하면 소비할수록 폭발력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그저 추측이지만 납치와 동시에 충돌하기까지의 이어지는 시간이 최대한 짧아야 미국이 대응에 나서기 전에 테러를 먼저 완수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이재킹 시간을 오래 질질 끌게 되면 그 사이 관제소나 미군들이 그만큼 대항할 수 있는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테러의 시작과 납치, 충돌 과정이 전부 속전속결로 진행되어야 했을 것이다.
기체 내에 실린 항공유량을 가장 최소한으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항공유량을 소비하면 소비할수록 폭발력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그저 추측이지만 납치와 동시에 충돌하기까지의 이어지는 시간이 최대한 짧아야 미국이 대응에 나서기 전에 테러를 먼저 완수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이재킹 시간을 오래 질질 끌게 되면 그 사이 관제소나 미군들이 그만큼 대항할 수 있는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테러의 시작과 납치, 충돌 과정이 전부 속전속결로 진행되어야 했을 것이다.
3. 이륙하는 시간대가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이다.
테러범들의 주요 타겟은 관광객이 아닌 미국 시민들이다. 따라서 여행객들보단 현지 시민들이 출근 혹은 출장 등으로 많이 이용하던 이른 아침 시간대를 주요 타겟으로 노렸다. 게다가 오전일수록 기내에 탑승한 승객들이 적기 때문에 혹시 모를 승객들의 저항도 최소한으로 감소시킬 수 있었다.
테러범들의 주요 타겟은 관광객이 아닌 미국 시민들이다. 따라서 여행객들보단 현지 시민들이 출근 혹은 출장 등으로 많이 이용하던 이른 아침 시간대를 주요 타겟으로 노렸다. 게다가 오전일수록 기내에 탑승한 승객들이 적기 때문에 혹시 모를 승객들의 저항도 최소한으로 감소시킬 수 있었다.
6. 기타
- 이 테러로 인해 안소니 퍼킨스의 아내이자 모델 겸 사진작가였던 베리 베렌슨[29], 당시 미국에서 프레이저 등 여러 TV 쇼로 명성이 높았던 시나리오 작가 데이비드 에인절도 세상을 떠났다.
- 테러로 인해 파괴된 사고기의 잔해 중 일부는 현재 9.11 뮤지엄에 전시되어 있다.
- AA 11편에 실려있던 구명조끼와 비행기 시트가 인근 도이체방크 빌딩 옥상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 정황상 승객들이 추락에 대비하여 구명조끼를 막 꺼내입으려던 찰나에 충돌이 일어난것으로 일각에서는 보고있다. 이 구명조끼와 비행기 좌석 역시 메모리얼에 전시되어있다.
- 세스 맥팔레인과 마크 월버그가 이 비행기에 탈 뻔했다지만 세스는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숙취가 심해 지각해서 비행기를 놓쳤고 마크 월버그는 비행기에 타기 전 토론토에 열리는 영화제에 가기로 일정을 바꿔서 타지 않았다. #
7. 관련 문서
- 9.11 테러 - 사건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면 이 문서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 제1세계무역센터(붕괴 이전)
-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 테러 사건
- 아메리칸 항공 77편 테러 사건
- 유나이티드 항공 93편 테러 사건
- 아메리칸 항공
- 유나이티드 항공
[1]
줄여서 ‘1 WTC’라고도 부른다.
[2]
승객 76명, 승무원 11명. (테러리스트 5명 제외)
[3]
충돌 직후의 사망자만을 기준으로 한 기록이다. 충돌층 전층이 마쉬 매클레넌 컴퍼니 입주층으로 상주자 358명이 전원 사망했으며 정중앙에 충돌한 만큼 95~96층은 충돌하자마자 거의 다 사망했고 92~93층과 98~99층은 붕괴 전까지는 상당수가 살아 있었다.
[4]
아메리칸 항공 11편 기체를 납치하여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충돌하였다.
[5]
나머지는 부기장인 토마스와, 위화감 조성을 위해 위협 살해를 한 비즈니스 승객 정도가 있다.
[6]
베티 옹 그녀를 포함해, 테러범들은 물론이고,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 역시 비행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아타가 직접 조종간을 잡았으니 멀미도 심했을 것이고, 저항의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 계속해서 페퍼 스프레이를 뿌려댔을 테니 정신 없는 와중에 창밖까지 확인할 여유가 없었을 테지만, 충돌 직전 기체가 뉴욕의 쌍둥이 빌딩으로 급강하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면 그 허탈함과 공포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당연히 못 들었겠지만, 아마 충돌 직전의 기체 내엔 엄청난 비명 소리가 함께했을 것. 애초에 테러범들부터가 충돌 직전에 알라신을 찬양하는 문구를 외쳤다는 말도 있으니 비행기 내부는 굉장히 시끄러웠을 것.
[7]
92명 중 하이재커 5명, 승무원 11명을 제외하면 76명이 된다.
[8]
테러범들이 기장과 부기장을 살해한 이유는 혹시 모를 테러 실패에 대비해 조종이 가능한 조종사들을 사전에 처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만일 본인들이 계획에 실패하고 진압당했다면 조종간을 탈환한 조종사들은 당연히 비상 착륙을 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본인들은 경찰에 체포되어 중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수를 애초에 제거하고자 조종사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조종사들이 없다면 진압당하더라도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테러범들 입장에서는 그나마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이라도 주요 표적으로 돌리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반증으로 4번째 마지막 비행기였던 UA93편은 승객들의 반격으로 계획에 실패를 거듭하자 곧장 기수를 내려 그대로 허허벌판에 비행기를 의도적으로 추락 시켜 폭사한 바 있다. 즉, 주요 표적인 건물에 타격을 주지 못하더라도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을 모두 죽이는 것만으로도 일부는 성공했다라고 생각한 셈이다. 다만 3번째 비행기인 AA77편의 테러범들은 조종사들을 살해하지 않기는 했다.
[9]
조종석은 9.11 테러의 실질적인 핵심 인물 모하메드 아타와 그의 측근 압둘아지즈 알오마리가 맡았고 나머지 3명은 승객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10]
당시 녹취록. 이 말은 테러리스트들이 승객들에게만 들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무전기 조작 실수로 관제사가 듣게 된 것이다. 당연히 공항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11]
일반적인(?) 항공기 납치의 경우 비행기를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금품이나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밝힌 뒤 납치범들은 탈출하고 비행기를 비상착륙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문제는 이 납치범들의 목적은 금품따위가 아니라 자신들이 탄
비행기 그 자체였기에 비행기를 비상착륙시킬 생각도, 자신들이 탈출할 생각도 없었다는 것.
[12]
Betty Ann Ong, 鄧月薇(한국 한자음: 등월미), 1956.2.5.~2001.9.11., 광동계 화교 3세인
중국계 미국인 승무원이었다.
[13]
나레이션도 당시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의 소방관 중 1명이던 제임스 핸론(James Hanlon) 소방관이 맡았다. 9월 11일이 비번이어서 테러가 일어난 것도 모르다가 뒤늦게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14]
한국시각 오후 9시 46분
[15]
Joseph Pfeifer (1956 ~)
[16]
당시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의 소방서장.
2018년에 정년퇴직했다.
[17]
9/11: One Day in America(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2021) 타워1에 가장 먼저 도착한 서장이었고, 추후에 도착한 서장들과 함께 소방대원들을 사건초기 타워 1 상부로 보내는 명령을 내렸다. 그 중에는 그의 남동생 케빈 파이퍼도 포함돼 있었다. 안타깝게도 케빈은 북쪽 타워에서 타워가 붕괴되는 순간까지 대피를 돕다가 순직했다.
[18]
존 오닐(John O'Neill) 소방관. 그 역시 당시 Engine 7/Tower Ladder 1/Battalion 1 대대의 소방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얼굴도 원본동영상에 나온다.
[19]
이 발언은 원본동영상에 나온다. 원본동영상과 한국어 번역동영상은
유튜브에 각각 '9/11(documentary, 2002)',
9/11(소방관 다큐멘터리, 2002)라는 제목으로 올라와 있다.
[20]
더불어 세계무역센터 1동 93~100층에 입주하고 있던 마시&매클래넌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당시 상주자들도 충돌로 인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원인도 모른 채 허무하게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그나마 충돌과 동시에 기체가 폭발하였기 때문에 95~96층 중심부에 있던 사람들은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즉사했을 것이나 문제는 테러로 인해 출입구가 막힌 92~93층과 충돌 고층부와 그 상층부인 98~110층에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충돌 직후에도 상당수 살아 있었으나 엘리베이터는 물론 계단조차 92층 이상은 완전히 막혀버린 탓에 92층과 그 위에 있던 사람들은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투신하거나 건물 붕괴와 함께 동시에 전원 사망했다.
[21]
애초에 테러 방법이 자살 테러였기 때문에 이들은 처음부터 죽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니 이런 사상초유의 전무후무한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22]
당시 세계무역센터에서 1블록 떨어진 곳에서 업무 회의를 녹음 중이던 지니 카(Ginny Carr)의 테이프다. 37초에 첫 충돌이 녹음됐으며 7분 20초에 2번째 충돌이 녹음돼 있다.
[23]
FBI의 정보원이었던 스티븐 맥카들(Stephen McArdle)이 세계무역센터 바로 아래에 있던
3WTC에서 비리 혐의를 받고 있던 시 공무원을 취조하면서 녹음한 테이프다. 첫 충돌을 기록한 자료 중 가장 가까이에서 기록한 것으로 세계무역센터 내에 있던 사람들의 생생한 반응을 볼 수 있다. 1:10:42에 첫번째 충돌이, 1:27:29에 두번째 충돌이 녹음되어 있다.
[24]
디지털 아티스트인 볼프강 스테흘레(Wolfgang Staehle)가 자신의 전시회 목적으로 사건 당일 아침부터 세계무역센터의 모습을 온라인으로 생중계한 영상이다. 다만 웹캠이 4초 간격으로 촬영되는 방식이어서 제대로 된 충돌 장면은 담기지 못했다.
프레임을 부드럽게 바꾼 영상도 존재한다.
[25]
WNYW 뉴스 채널의 리포터가 생방송을 준비하면서 잠시 바닥에 내려놓은 카메라에 촬영된 충돌 장면이다. 역시 직접적인 충돌 장면은 촬영하지 못했지만 사고 이전 시민들의 평화로운 모습과 사고 이후 충격에 빠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뒷부분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26]
체코인인 파벨 흘라바(Pavel Hlava)가 브루클린-배터리 터널(Brooklyn-Battery Tunnel)에 들어서기 전 멀리 있는 세계무역센터의 모습을 담기 위해 캠코더로 촬영하다가 포착한 영상이다. 정작 Pavel Hlava 본인은 매우 작은 LCD 스크린을 통해 세계무역센터를 찍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충돌 순간을 촬영한 걸 알아채지 못했고 몇 주뒤에 아들이 알려줘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흘라바는 세계무역센터로 가서 사고 현장을 계속 촬영했으며 두번째 충돌까지 촬영하여 유일하게 2개의 충돌을 모두 촬영한 사람이 되었다.
[27]
이 영상은
뉴욕시의 신참 소방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던
프랑스 출신 영화 제작자인 쥘 노데(Jules Naudet)가 찍은 것으로 사실상 첫 충돌을 제대로 기록한 유일한 영상이다. 가스 냄새가 난단 이유로 출동한 소방관이 배수구 점검하고 쥘 노데는 연습을 겸해서 촬영감독 대신 현장에 동행하다 촬영한 장면으로, 아주 평화롭고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이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서 테러 현장으로 화면이 바뀌기 때문에 분위기가 더욱 대비된다. 이후 제작자는 소방관과 함께 현장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다큐멘터리는 신참 소방관을 다루는 주제에서 9.11 테러로 방향성이 전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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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자료 영상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충돌 당시의 화력은 AA11편보다 UA175편이 더욱 강력했다. 그 이유는 애당초 기체의 속력이 AA11편은 790km/h, UA175편은 950km/h로 더 빠르기도 하였고 기내에 실린 항공유량도 UA175편이 더욱 많았게 때문이다. 심지어 UA175편은 건물의 측면을 넓은 면적으로 들이받았으니 빈 라덴 입장에선 이보다 더한 성공은 없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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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니 퍼킨스와는 이미 1992년에 사별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