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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28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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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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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f0f0><colcolor=#0d164a> 선거 일시 | 11월 6일 5시 ~ 11월 7일 6시[UTC] | |||||
선거인단 | 531명 | |||||
투표율 | 56.9% (▲ 8.0%p) | |||||
선거 결과 | ||||||
후보 |
[[공화당(미국)| 공화당 ]] |
[[민주당(미국)| 민주당 ]] |
||||
홈스테이트 | 캘리포니아 | 뉴욕 | ||||
승리 주 | 40 | 8 | ||||
선거인단 | ||||||
444명 | 87명 | |||||
전국 득표 | ||||||
58.2% 21,427,123표 |
40.8% 15,015,464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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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wiki style="margin: -5px -10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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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와 배경
1928년 11월 6일 치러진 미국의 대통령 선거.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허버트 후버와 부통령 후보 찰스 커티스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앨 스미스와 부통령 후보 조지프 T. 로빈슨을 크게 꺾고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및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광란의 20년대의 막바지를 장식하는 선거였으며, 금주법과 20년대의 경제적 호황, 개신교-가톨릭 종교 분쟁, 워싱턴 해군조약, 정부 청렴성 등이 주요한 화두가 되었다. 또한 이 선거는 민주당이 가톨릭 신자인 앨 스미스를 후보로 지명하면서 이신론자 토머스 제퍼슨 이래 처음으로 비(非)개신교도가 주요 정당의 후보로 출마한 선거이기도 했다. 한편 재건 시대 이후 민주당의 견고한 텃밭으로 남아있던 미국 남부가 처음으로 공화당의 손을 들어줘, 수십년 후의 남부전략의 전조를 알리기도 했다.
2. 배경
관련 문서: 광란의 20년대제1차 세계 대전과 스페인 독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뇌졸중 등으로 1910년대가 마무리된 후 광란의 20년대가 도래했다. 미국은 10년에 이르는 큰 호황을 맞이하였으며, 소비와 투자가 폭등했고 문화는 그 어느때보다도 융성하였다. 대중적으로 라디오가 대대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스윙재즈가 유행하였고 찰스 린드버그가 대서양 횡단에 성공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 경제는 타락으로 물들었고 이는 워런 G. 하딩의 티포트 돔(Teapot Dome) 스캔들로 절정에 이르렀다. 하딩 대통령의 급서 후, 그의 직위를 승계한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청렴성의 회복을 목표로 대대적인 백악관 인사 개혁을 통과시켜 큰 지지를 받았다.
그 직후의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양당이 분열된 선거였다. 민주당은 농촌 및 금주법 찬성파의 지지를 받는 윌리엄 깁스 매커두(William G. McAdoo)와 도시 거주자 및 금주법 반대파의 지지를 받는 앨 스미스로 분열된 끝에 무명의 존 W. 데이비스를 대선 후보로 내보냈다. 공화당은 당 내 주류인 구 우파(Old Right)의 지지를 받는 보수파 캘빈 쿨리지와 진보파의 지지를 받는 로버트 M. 라폴레트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1924년 대선에서 라폴레트가 알아서 공화당을 깨고 나간데다 민주당 데이비스 후보가 겨우 24% 밖에 못받는 대참패를 당하며 1924년 양당 분열의 최종적인 승자는 캘빈 쿨리지가 되었다. 캘빈 쿨리지는 1920년대 경기 호황과 부패 청산, 인종 평등의 분위기 속에서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으며, 1928년 3선에 도전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하지만 캘빈 쿨리지는 1924년 아들이 사망한 후 실의에 빠져있었으며 이로 인해 1928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고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 워싱턴 이래 지켜진 2선 제한의 원칙을 지키고 싶었다. 이 때문에 1927년 중순, 휴가를 보내던 쿨리지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기자들에게 전달했다.
I do not choose to run for president in 1928.
나는 1928년에 대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서 전문. 쿨리지 대통령은 이것을 타자로 친 다음 가위로 잘라 기자들에게 쪽지처럼 나누어주었다.
1928년 대선은 "조용한 대통령"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있던 쿨리지 대통령의 시기를 지나, 광란의 20년대를 마무리하고 30년대를 맞이할 대통령을 선출하는 중요한 선거였다. 이 시기 미국은 그 어느때보다도 경제적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곳곳에서 위험 요인이 발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착취에 시달렸고 농촌 붕괴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알 카포네로 대표되는 마피아 세력은 부패한 정치가와 결탁해 힘을 키우고 있었다. 결국 이런 호황은 오래 갈 수 없었으며 붕괴될 가능성이 컸던 것이었다. 하지만 1928년 당시, 극소수의 경제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정치가와 국민들은 이 사실을 몰랐고 그렇게 쿨리지 대통령의 호황을 이어나갈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러지게 된다.나는 1928년에 대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서 전문. 쿨리지 대통령은 이것을 타자로 친 다음 가위로 잘라 기자들에게 쪽지처럼 나누어주었다.
3. 정당 별 상황
3.1. 공화당
캘빈 쿨리지가 급작스럽게 3선을 포기하자,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것은 허버트 후버 상무장관이었다. 허버트 후버는 1921년 하딩 정권에서 상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쿨리지 대통령 시기에도 유임되어 총 7년동안 상무장관을 지냈다. 그전에 그는 윌슨 행정부 하에서 유럽 구호 활동을 벌인 것으로 잘 알려져있었고, 주 48시간 근무제 옹호, 아동노동 금지 주장, 최저임금 제도 신설 등의 조치를 옹호하여 일부 진보주의자들로부터도 지지를 얻고 있었다. 비록 캘리포니아 주 예비선거에서 하이럼 존슨에 밀려 일찍 후보직을 사퇴하긴 했지만, 이미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된 바 있었다. 쿨리지가 퇴임을 선언한 1928년 대선은 후버에게 그 어느때보다도 대통령이 될 절호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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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후버 상무장관 |
그러나 1924년 대선에서 로버트 M. 라폴레트의 낙선으로 몰락이 확실해진 공화당의 진보파는 허버트 후버의 입후보에 저항할 수 없었다. 도리어 공화당의 가장 저명한 진보주의자였던 윌리엄 보라는 그의 초당적인 성향을 옹호하며 그를 지지하기까지 했다. 하이럼 존슨 등 일부 진보파는 후버에 반대했으나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낙선 운동을 벌이지도 않았다. 당의 중진 의원들은 캘빈 쿨리지의 부통령이었던 찰스 G. 도스나, 재무장관 앤드루 멜런을 지지했고, 혹은 아예 캘빈 쿨리지를 다시 대통령 후보로 옹립하자는 움직임("Draft Coolidge" 운동)도 보였다. 하지만 쿨리지는 명시적으로 자신을 대선 후보로 옹립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앤드루 멜런은 고령의 나이[3] 때문에 대통령으로 출마하기는 어렵다며 보수파의 제안을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도스 부통령은 캘빈 쿨리지 대통령에게 미움을 받고 있어서[4] 출마가 거의 불가능했다. 앤드루 멜런은 자신을 대신해 찰스 에번스 휴즈가 다시 출마하는건 어떻겠냐고 했는데 휴즈가 이를 거절해 역시 무산.
결국 당 내에서 공식적으로 후버에 대항한 후보는 1920년 대선에서 두각을 드러낸 바 있던 프랭크 O. 로든(Frank Orren Lowden) 일리노이 주지사와 당 내 보수파를 대표하는 찰스 커티스 상원 원내대표 뿐이었다. 하지만 로든은 1920년과 달리 1928년 대선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반후버 운동의 주도자였던 커티스 역시 많은 표를 얻지 못했다. 그 결과, 1928년 공화당 전당대회 표결은 단 한차례의 표결로 끝났으며 후버가 전체 대의원의 76%인 837표를 쓸어가며 후보 지명은 쉽게 끝나버린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공화당원들은 후버의 애당심(愛黨心)에 대해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이에 후버는 서부 공화당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길 기대한 윌리엄 보라의 신임을 얻고 자신의 중도개혁적인 입장 때문에 투표장에 나오기를 꺼리는 공화당 보수파를 규합시키기 위해 자신의 반대자였던 찰스 커티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다.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은 좌우로 스펙트럼이 넓어 부통령 후보로 자신과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진 후보를 지명하는 것이 놀랍지 않은 것이었고, 또 커티스도 후버의 부통령 후보직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그를 위해 열정적인 선거운동을 벌였다.
3.2. 민주당
1924년 대선에서 무려 103번(...)이나 전당대회 표결을 거치며 당내 좌우파, 금주법 찬성-반대파, 도시-농촌파의 분열을 겪으며 본선에서 참패하고 만 민주당은 1928년 대선에서도 승리할 가능성이 극히 낮았다. 현직 쿨리지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았던데다, 허버트 후버는 1차 대전 때의 명성도 있고, 기본적으로 당내 구보수파(Old Right)에 속했지만 쿨리지나 하딩에 비해 더욱 중도적인 성향을 보여 유권자들에게 호감을 얻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4년 대선에서 유력한 프론트러너였던 윌리엄 깁스 매커두 전 재무장관 등은 1928년 대선에서 일찌감치 불출마를 선언한 상태였다.민주당에서 출마를 선언한, 그나마 대통령감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인사는 앨 스미스 뉴욕주지사와 코델 헐 테네시주 상원의원, 월터 프랭클린 조지(Walter F. George) 조지아주 상원의원 정도 뿐이었다. 코델 헐과 월터 F. 조지 역시 앨 스미스의 저명도에는 비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앨 스미스는 다른 모든 후보를 제치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849.67표를 획득, 52.50표를 얻은 월터 조지와 50.83를 얻은 코델 헐을 간단하게 제압하고 1차 투표만에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
앨 스미스(왼쪽)와 프랭클린 루스벨트(오른쪽) |
4. 최종 후보
4.1. 공화당: 허버트 후버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 ||||||
대통령 후보 지명자 | 부통령 후보 지명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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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0px" |
허버트 클라크 후버
미국 제3대 상무장관 |
찰스 커티스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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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but Hoover?
후버가 아니면 누구를?
A chicken in every pot and a car in every garage.
모든 솥에는 닭고기를, 모든 차고에는 자동차를.
1928 후버-커티스 티켓 슬로건
1928년 7월 15일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RNC)에서
허버트 후버 상무장관은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어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찰스 커티스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비(非) 유럽계 부통령 후보자로, 어릴때 원주민 보호 구역에서 자란
아메리카 원주민 혼혈 출신이었다. 후버 후보는 1920년대의 호황을 유지시키며
금주법을 지속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며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선거 운동을 시작한다.후버가 아니면 누구를?
A chicken in every pot and a car in every garage.
모든 솥에는 닭고기를, 모든 차고에는 자동차를.
1928 후버-커티스 티켓 슬로건
4.2. 민주당: 앨 스미스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 ||||||
대통령 후보 지명자 | 부통령 후보 지명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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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0px" |
앨프리드 이매뉴얼 스미스
제42대 뉴욕 주지사 |
조지프 테일러 로빈슨
아칸소 주 연방 상원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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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est. Able. Fearless.
정직한, 능력있는, 용기있는.
1928 스미스-로빈슨 티켓 슬로건
1928년 6월 28일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DNC)에서
앨 스미스 뉴욕주지사는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며,
조지프 T. 로빈슨 상원의원은 1,035.17표의 동의를 얻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앨 스미스 주지사는
금주법 폐지와 인종평등, 사회적 진보주의, 친기업 노선 등을 기치로 출마하였다. 찰스 커티스가 최초의 비 유럽계 부통령 후보였다면,
앨 스미스는 미국 헌정사 최초로 양당의 대선 후보로 출마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개신교 우위 국가인 미국에서 앨 스미스의 종교적 신념은 엄청난 논란이 되었으며 후버의 높은 지지에 뒤쳐진 스미스는 큰 열세 속에서 어려운 선거전을 치러야 했다.정직한, 능력있는, 용기있는.
1928 스미스-로빈슨 티켓 슬로건
4.3. 기타 후보자
- 노먼 토머스 (Norman Thomas) - 미국 사회당
- 윌리엄 Z. 포스터 (William Z. Foster) - 미국 공산당
- 프랭크 T. 존스(Frank T. Johns) - 미국 사회주의노동당
- 윌리엄 F. 바니 (William F. Varney) - 금주당
- 프랭크 E. 웹(Frank E. Webb) - 농민노동당
- 윌리엄 더들리 펠리 (William Dudley Pelly) - 무소속
5. 선거 진행
5.1. 금주법: 유지론 대 폐지론
1922년 8월 8일 <리터러리 다이제스트> 지의 금주법 폐지 찬반 여론조사[6] | ||||
계층 | 금주법 현상안 지지 | 금주법 수정안 지지 |
금주법 폐지 반대 (현상+수정 지지) |
금주법 폐지 지지 |
전체 |
302,515 (38.42%) |
322,328 (40.93%) |
624,843 (79.35%) |
162,632 (20.65%) |
여성 |
22,716 (40.97%) |
21,019 (37.91%) |
43,735 (78.89%) |
11,709 (21.11%) |
노동자 |
914 (7.72%) |
7,598 (64.25%) |
8,512 (71.98%) |
3,315 (28.02%) |
A large responsibility rests directly upon our citizens. There would be little traffic in illegal liquor if only criminals patronized it.
금주법이 작동하지 않는 큰 책임은 우리 시민들에게 있습니다. 극소수의 범죄자들만이 음주를 한다면 진작에 불법 주류 거래가 근절되었을 것입니다.
금주법에 찬성한 허버트 후버 공화당 후보
금주법이 작동하지 않는 큰 책임은 우리 시민들에게 있습니다. 극소수의 범죄자들만이 음주를 한다면 진작에 불법 주류 거래가 근절되었을 것입니다.
금주법에 찬성한 허버트 후버 공화당 후보
I believe in temperance. We have not achieved temperance under the present system.
저는 절제의 힘을 믿습니다. 하지만 금주법 하에서 절제는 달성될 수 없었습니다.
금주법에 반대한 앨 스미스 민주당 후보[8]
민주당에서는 1924년에 금주법을 찬성파의 지지를 받은
윌리엄 깁스 매커두 전 재무장관이 1928년 대선에는 출마하지 않으면서, 금주법 반대론자인
앨 스미스가 민주당의 후보로 결정되었다. 앨 스미스는
뉴욕주의 주지사를 오래 지낸 경력을 토대로 음주를 금지했더니 오히려 이탈리아계 마피아들이 날뛰며 뉴욕주의 음주 실태가 더욱 악화되었음을 부각하며, 이것을 헌법을 통해 고정하기보다는 "각 주의 형편에 맞게끔" 음주를 허락하거나 금지하는 수정안이 나와야한다고 주장했다. 앨 스미스는 뉴욕주지사를 지낼 때부터 금주에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그는 뉴욕주 내에서 술의 유통 및 판매를 금지하는 뉴욕주법이었던 뮬런-게이지 법(Mullan-Gage Act)을 4주동안 검토한 후 1923년 폐지한 바 있으며, 자신의 관저를 방문한 손님에게 술을 선물로 줄 정도로 금주법 폐지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었다. 스미스는 선거 슬로건으로 "당신의
젖은 꿈을 현실화시키세요!"(Make your wet dreams[9] come true)를 내세우기도 했다.저는 절제의 힘을 믿습니다. 하지만 금주법 하에서 절제는 달성될 수 없었습니다.
금주법에 반대한 앨 스미스 민주당 후보[8]
스미스를 비롯한 도시의 진보파는 금주법 폐지에 대한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마피아들의 영향력 확장에 금주법이 너무 명백하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마피아의 영향력이 덜하고, 밀주 유통도 그만큼 적을 수 밖에 없는 남부와 서부의 시골에서는 금주법 폐지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10] 이미 1924년 대선에서 금주법 찬성파의 지지를 받은 매커두도 그 점을 지적하며 농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바 있다. 이 때문에 도시 거주자가 주를 이룬 북부 민주당 조직은 금주법에 반대를, 농촌 거주자가 주를 이룬 남부 민주당 조직은 금주법에 찬성 의사를 표했는데 일부 정치 평론가들은 제2차 남북전쟁이냐며 이를 비꼬기도 했다.
반면, 허버트 후버는 꾸준히 금주법에 대한 찬성 의사를 표시했고, 이를 통해 남부 민주당원에게 일부 지지를 받기도 했다. 도시민의 입장을 대변한 앨 스미스는 금주법 자체가 마피아 범죄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한 반면, 허버트 후버는 앨 스미스와 같이 은밀하게 음주를 지지하는 부패한 정치가들이 마피아와 결탁해 처벌을 느슨하게 해 범죄가 판을 치는 것이라며 자신이 당선되면 더욱 강경하게 음주를 처벌하는 엄벌주의 기조를 내세우겠다고 공약했다.
5.2. 신앙심: 개신교 대 가톨릭
금주법 존치 논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면 은밀하게 이루어진 또다른 논쟁인 개신교 대 가톨릭의 문제였다. 미국은 종교박해를 피해 넘어온 칼뱅교도들이 만든 국가였다. 물론 헌법 1조는 국교를 정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으나,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은 실질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의 국가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 폴란드 분할, 1848년 헝가리 혁명 등을 거치면서 아일랜드, 폴란드, 헝가리, 이탈리아, 루마니아, 독일 바이에른 등지에서 넘어온 가톨릭계 이민자들이 폭등했다.이미 1850년대, 가톨릭계 이민자들의 범람을 우려해 무지당이 창당되었을만큼 주류 청교도 잉글랜드계 미국인들의 가톨릭계 미국인들에 대한 공포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특히 그 수가 많았던 이탈리아계, 아일랜드계, 폴란드계 가톨릭 이민자들은 "하얀 흑인"이라 불리며 차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인구 수는 멈출줄 모르고 증가했는데, 1928년 기준 미국 내 가톨릭 인구 수는 전체 인구 수의 17% 정도로 집계되었다. 특히 이민자들의 도시인 뉴욕은 이탈리아계와 아일랜드계의 거점이 되었는데 이곳의 주지사를 오래 지낸 앨 스미스도 이런 민족적 배경에 속해있었다. 브루클린 토박이인 앨 스미스는 아버지가 이탈리아계 미국인, 어머니가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매우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고, 그는 민주-공화 양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최초의 가톨릭 신도였다.
앨 스미스의 주요 지지층이었던 대도시 거주자들은 보스턴이나 뉴욕, 시카고 등 주요 도시에 이미 아일랜드-폴란드-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가톨릭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지만,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 즉 미국 남부의 민심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남침례회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개신교 사상이 사회문화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는 지역이었다. 또 쿠 클럭스 클랜과 같은 개신교 근본주의 성향의 단체들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
앨 스미스의 가톨릭 신앙을 공격하는 풍자화[해석] |
I'll tell you, brother, that the big issue we've got to face ain't the liquor question. I'd rather see a saloon on every corner of the South than see the foreigners elect Al Smith president.
형제 여러분,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금주법 폐지나 유지냐가 아닙니다. 물론 금주법 폐지는 혐오스러운 행위이나, 차라리 저는 남부에 술집이 들어서는게 외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앨 스미스를 대통령이 되도록 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전도사 밥 존스의 설교 中
형제 여러분,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금주법 폐지나 유지냐가 아닙니다. 물론 금주법 폐지는 혐오스러운 행위이나, 차라리 저는 남부에 술집이 들어서는게 외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앨 스미스를 대통령이 되도록 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전도사 밥 존스의 설교 中
The whole Puritan civilization which has built a sturdy, orderly nation is threatened by Smith.
튼튼하고 질서정연한 이 나라를 건국한 청교도 문명의 정신이 앨 스미스 단 한명에 의하여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언론인 윌리엄 앨런 화이트[12]
밥 존스와 같은 남부 거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개신교 복음 전도사들은 종교 전쟁에서 비롯되는 개신교도들의 가톨릭에 대한 불안감을 은근히 부추겼다. 더 나아가 그런 이유 때문에
개신교를 믿는 퀘이커교도
허버트 후버를 밀어줘야한다고 노골적으로 선동하기도 했다. 이들은 앨 스미스가 당선되면 국교를 가톨릭으로 정하고, 교회를 폐쇄하고 남부의 모든 마을에 성당을 지을 것이며, 백악관을 교황에게 봉헌하고, 성경 읽기를 금지[13]하고, 예배의 자유를 금지할 것이며 결국 나라 전체를 교황에게 넘기고 말 것이라는 황당한 음모론을 주장했다. 이것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가톨릭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많은 백인 개신교도들이
허버트 후버를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허버트 후버는 압도적인 격차로 앞서있는 상황에서 앨 스미스를 종교 문제로 공격하는 것은 좋은 선거 전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말을 삼갔다. 하지만 허버트 후버도 내심 앨 스미스의 가톨릭 신념이 두려웠는지, 편지에서는 앨 스미스의 가톨릭 신념을 공격하는 것은 종교적인 박해라기보다는 근거가 있는 타당한 의심이라고 주장했다.
앨 스미스는 이러한 선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는데, 내용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어떻게 반박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다.튼튼하고 질서정연한 이 나라를 건국한 청교도 문명의 정신이 앨 스미스 단 한명에 의하여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언론인 윌리엄 앨런 화이트[12]
물론 보스턴과 같이 가톨릭계 이민자의 비율이 높은 일부 도시에서는 앨 스미스가 가톨릭 신자였던 것이 스미스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많은 아일랜드, 폴란드,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은 오랫동안 소외받았던 자신들이 앨 스미스에 의해 비로소 대표되고 있다고 생각해 그에게 몰표를 던졌다. 하지만 그들의 비율은 미국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잉글랜드계 백인 개신교도들, 즉 WASP에 비하면 턱 없이 적었다. WASP들이 가지고 있던 가톨릭에 대한 공포감은 앨 스미스가 엄청난 격차로 1928년 대선에서 패배하는데 큰 원인이 되었다.
5.3. 앨 스미스의 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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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하고 있는 앨 스미스 |
남부의 고위 정치가들도 이런 앨 스미스의 북부 도시민 이미지에 불편함을 느꼈다. 특히 텍사스 주 정계에서의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댄 무디(Dan Moody) 텍사스 주지사는 일단 앨 스미스를 지지하긴 하였으나, 스미스의 가톨릭적 배경과 금주법 찬성이 민주당에 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성적으로 스미스를 돕지 않았다. 부부가 쌍으로 텍사스 주지사를 지낼 정도로 텍사스 정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제임스 퍼거슨(James E. Ferguson)과 미리엄 퍼거슨(Miriam A. Ferguson) 부부는 앨 스미스의 지지를 거부했다.
앨 스미스의 발목을 잡은 또다른 것은 뉴욕시의 정치 조직 태머니 홀(Tammany Hall)이었다. 태머니 홀은 17세기 뉴욕시가 팽창하고 있을 때 설립된 동아리와 비슷한 개념이었는데, 뉴욕시가 발전하면서 뉴욕 정계를 지배하는 사조직으로 변질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뉴욕으로 밀려 들어오자 태머니 홀은 아일랜드계에 문을 열고 이들의 표를 이용해 뉴욕시의회 의석 15석을 차지할 정도로 뉴욕 정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피오렐로 라과디아가 당선되기 이전까지 태머니홀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서 뉴욕시장에 연임했던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을 정도로 뉴욕시의 정치는 태머니 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0세기에 들어 태머니 홀의 이미지가 엄청나게 악화되자, 태머니홀은 자신들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청년 진보 정치가들을 대거 영입하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앨 스미스였다.
앨 스미스는 비록 태머니 홀의 부정부패에는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으나, 태머니홀의 지원을 얻어 뉴욕시의원, 뉴욕시 보안관을 거쳐 뉴욕주지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태머니홀 그 자체와의 연관은 부인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앨 스미스가 뉴욕 신사 이미지를 내세운 것은 엄청난 역풍을 몰고왔고 뉴욕과 북동부 일부 주에서는 표가 많이 나왔지만 태머니 홀의 부정부패에 분노하고 있던 절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앨 스미스에 반대하였다. 앨 스미스는 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고, 이 순간 앨 스미스의 참패는 사실상 확정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5.4. 허버트 후버의 선거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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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후버의 선거송 - "허버트 후버 만세!" |
당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맥너리-호겐 농장구호법 등 여러 의제가 선거 기간 도중 주목을 받았지만 허버트 후버는 이러한 의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표하지 않고 캘빈 쿨리지 시절의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겠다는 통상적인 약속만을 반복했다. 허버트 후버는 그런 문제에 대한 입장을 대중에게 능숙하게 표현할 수 있는 정치가가 아니었으며, 또 쿨리지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후버를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입장을 바꿔 쿨리지를 자극할 이유도 없었다. 쿨리지 대통령의 인기가 높았던 만큼, 이전 행정부의 업적을 다음 행정부에서도 똑같이 반복하겠다는 것은 그 당시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입장이기도 하였다. 물론, 헨리 A. 월리스 등 일부 농촌 정치가들은 후버의 맥너리-호겐 농장구호법 반대에 실망해 앨 스미스를 지지하기도 했지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허버트 후버는 이처럼 은밀하게 " 침묵하는 다수"를 앞세워 압도적인 리드를 이어나가는 선거 전략을 구사했는데, 이는 미국 남부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가톨릭 신자이자 흑인 민권 문제에서 진보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던 앨 스미스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격분한 쿠 클럭스 클랜의 단원들은 전국에서 십자가 화형식을 치렀고 앨 스미스의 사진을 불태우는 집회를 벌였다. 남부는 북부 도시 출신의 反금주법, 흑인 민권 지지자인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라는 앨 스미스의 모든 배경과 정책에 반대하고 있었고 남부 민주당은 그 어느때보다도 분열되어있었다. 허버트 후버는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공화당은 에이브러햄 링컨과 공화당 급진파 이후 "노예 해방의 정당"을 이미지로 내세웠고 그만큼 남부에서 부진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흑인 민권 이슈가 관심이 없고 남부에서 커지는 흑인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백인 공화당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 19세기 후반 인두세 도입으로 인한 흑인 참정권 박탈로 흑인 공화당이 엄청나게 몰락하며 이런 움직임은 20세기 초반 들어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이를 백합 운동(Lily-white movement)이라고 부른다. 허버트 후버는 백합운동 세력을 끌여들여 남부에서 이점을 취하려 하였다.
허버트 후버는 명시적으로 인종차별주의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흑인 린치 금지법 등 흑인들에게 유리한 이슈를 적극적으로 내세우지도 않았다. 물론 시어도어 빌보(Theodore G. Bilbo)와 같은 남부 민주당의 극렬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허버트 후버가 흑인 소녀와 댄스를 췄다는 등 유언비어를 퍼트렸지만 오히려 후버는 이를 역이용했다. 후버는 남부 민주당의 극우 인종주의에 반대하면서, 앨 스미스의 일부 흑인 민권 정책에도 반대하고, 한편으로는 흑인을 위한 교육 시설을 확충하겠다고 공약하는 등 남부의 흑인과 백인 모두가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사를 사용했다. 그 결과 앨 스미스를 꺼리던 많은 백인 남부 민주당원들이 후버에 교차투표하였으며, 대다수의 흑인들도 여전히 후버를 공화당 후보라며 지지해주었다. 그렇게 허버트 후버는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표와 백인 남부 표에서 모두 앞선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물론 월터 화이트, W. E. B. 듀보이스와 같은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들은 후버의 속내를 간파해 그를 공격했지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6. 선거 결과
<rowcolor=#000> 1928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대통령 후보 | 득표수 | 비고 | |
부통령 후보 | 득표율 | ||
정당 | 선거인단 | 당락 | |
허버트 후버 (Herbert Hoover) |
21,427,123 | 1위 | |
찰스 커티스 (Charles Curtis) |
58.21% | ||
|
444명 | 당선 | |
앨 스미스 (Al Smith) |
15,015,464 | 2위 | |
조지프 T. 로빈슨 (Joseph T. Robinson) |
40.80% | ||
|
87명 | 낙선 | |
- | 그 외 후보 | 364,425 | 낙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0.99% | ||
계 | 총 투표수 | 36,807,012 |
유지 |
전국 득표 | 선거인단 | ||
후버 | 스미스 | 후버 | 스미스 |
<rowcolor=#000,#fff> 58.21% | 40.80% | 83.62% | 16.38% |
이 선거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남부의 변화였다. 남부는 184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마틴 밴 뷰런이 윌리엄 헨리 해리슨에 의해 패배한 이래 단 한번도 민주당에게 패배를 안겨준 적이 없는 지역이었다.[14] 그러나 이 선거에서는 남부 전체 지역을 통틀어 보았을 때 후버가 53%를, 스미스가 47%를 차지하면서 꽤 큰 격차로 스미스가 남부 지역에서 후버에게 패배했다. 또 재건 시대 이후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많은 주가 후버에게 넘어갔고 텍사스주는 이 선거에서 처음으로 공화당의 손을 들어줬으며, 딥사우스 주의 상징인 앨라배마 주에서는 양 후보가 51% 대 48%로 접전을 치렀다.그만큼 스미스의 가톨릭+금주법 반대+태머니홀 논란이 남부 주민들에게 혐오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반대로, 이번 선거에서 앨 스미스는 공화당이 분열되어 어부지리로 민주당이 이긴 1912년을 제외하고는 남북전쟁 이후 단 한번도 이기지 못한 주인 매사추세츠 주와 로드 아일랜드 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더 나아가, 공화당의 지지 기반이었던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무려 46%나 얻는 엄청난 선전을 거두었고 보스턴에서는 60%가 넘는 몰표를 받았다. 뉴잉글랜드 지역은 전통적으로 WASP의 거주지였지만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유입되며 가톨릭을 믿는 주민들이 늘어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스미스가 승리하고 뉴욕에서도 몇만표 차이로 접전패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다만 이민자가 많아 민주당이 약진한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과 달리 메인, 뉴햄프셔, 버몬트에서는 여전히 공화당 세력이 굳건했다. 뉴잉글랜드 지역을 제외하고도 스미스는 뉴욕시, 시카고, 필라델피아 같은 대도시에서 득표수를 대폭 늘렸다.
그러나 가톨릭계 이민자들의 몰표와 대도시에서의 선전은 선거 판세를 뒤집을 정도는 되지 않았고, 1920년과 1924년에 이어 민주당은 3연속 참패하는 참담한 결과를 세우고 만다. 이로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워런 G. 하딩(60.3%)에 이어 양당제 정착 이후 초임 대통령으로서 2번째로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후버는 미국에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앨 스미스는 선거 참패에 충격을 받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나, 1932년 대선을 앞두고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정계 은퇴 선언을 번복한다. 1924년 대선에서 엄청나게 싸워댔던 윌리엄 깁스 매커두[15]와 손까지 잡았지만 결과는 폭망. 그나마 루스벨트의 2/3 대의원 확보는 막았지만 이마저 존 낸스 가너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개입으로 루스벨트와 타협하며 물거품이 되었고, 이는 앨 스미스와 윌리엄 깁스 매커두의 당내 영향력이 사실상 상실되었음을 뜻했다.[16] 앨 스미스는 죽을때까지 알프 랜던 등 공화당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뒤끝을 보인다.
6.1. 지역별 결과
|
권역별 후보 득표[17] | |||||||
<colcolor=#000,#000> 지역 구분 | 후버 | 스미스 | 기타 후보 | ||||
<rowcolor=#000,#fff> 서부[West] 3,856,452 |
2,455,873 (63.68%) |
1,356,117 (35.16%) |
44,462 (1.15%) |
||||
<rowcolor=#000,#fff> 중부[Midwest] 14,699,324 |
8,921,666 (60.82%) |
5,626,333 (38.35%) |
121,325 (0.83%) |
||||
<rowcolor=#000,#fff> 남부[South] 6,214,638 |
3,300,140 (53.10%) |
2,889,298 (46.49%) |
25,200 (0.41%) |
||||
<rowcolor=#000,#fff> 동부[Northeast] 12,066,598 |
6,749,444 (55.93%) |
5,143,716 (42.63%) |
173,438 (1.44%) |
||||
<rowcolor=#000,#fff> 전국 36,807,012 |
21,427,123 (58.21%) |
15,015,464 (40.80%) |
364,425 (0.99%)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기타 권역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color=#000,#000><rowcolor=#000,#fff> 태평양[Pacific] 2,617,438 |
1,703,508 (65.08%) |
880,360 (33.63%) |
33,570 (1.28%) |
|||
<rowcolor=#000,#fff> 대평원[Prairies] 4,941,471 |
3,026,031 (61.24%) |
1,883,151 (38.11%) |
32,289 (0.65%) |
||||
<rowcolor=#000,#fff> 딥사우스[DeepSouth] 914,271 |
304,295 (33.28%) |
609,293 (66.64%) |
713 (0.08%) |
||||
<rowcolor=#000,#fff> 뉴잉글랜드[NewEngland] 2,962,167 |
1,575,433 (53.19%) |
1,370,105 (46.25%) |
16,629 (0.56%)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경합 지역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colbgcolor=#EEE><colcolor=#000> 주 | 후버 | 스미스 | |||
로드아일랜드 |
117,522 (49.55%) |
118,973 (50.16%) |
||||
◁ 1,451 (0.61%p) ▶ | ||||||
매사추세츠 |
775,566 (49.15%) |
792,758 (50.24%) |
||||
◁ 17,192 (1.09%p) ▶ | ||||||
뉴욕 |
2,193,344 (49.79%) |
2,089,863 (47.44%) |
||||
◀ 103,481 (2.35%p) ▷ | ||||||
앨라배마 |
120,725 (48.49%) |
127,797 (51.33%) |
||||
◁ 7,072 (2.84%p) ▶ | ||||||
텍사스 |
367,036 (51.77%) |
341,032 (48.10%) |
||||
◀ 26,004 (3.67%p) ▷ |
7. 평가 및 탐구
허버트 후버의 압승과 앨 스미스의 완패로 끝난 선거이긴 했지만, 정치 공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처음으로 공화당이 남부에서 승리했고 반대로 민주당이 도시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즉, 향후 한 세기동안 서서히 뒤바뀌게 될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지 집단 이동이 이 선거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7.1. 허버트 후버의 남부전략
재건시대 이후 미국 남부는 공화당에게 있어 가장 큰 험지로 여겨졌다. 북부의 자유주의적 정서에 반발해 남부가 반동적으로 우경화되었으며 그나마 남은 공화당 지지 집단은 흑인 유권자 배제의 움직임으로 궤멸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루이지애나, 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시피 등 많은 남부 지역에서는 공화당 조직이 태동조차 할 수 없었고, 오랜 기간동안 민주당은 남부 주에서 많아야 2~3개 정도만을 공화당에 넘겨주는데 그쳤다.그러나 허버트 후버는 앨 스미스가 KKK단에 대한 반대, 가톨릭 신자라는 배경 때문에 남부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점을 노려 남부로 공화당의 지지 기반을 크게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허버트 후버는 흑인을 위한 인프라 투자를 약속하면서도, 동시에 흑인 민권에 반대하는 남부 공화당의 보수적인 파벌 "백합파"의 지지를 구애하면서 남부 흑인과 보수적 백인의 표를 모두 확보하였다. 그 결과 공화당은 남부의 많은 주에서 승리한 것은 물론 단 한번도 공화당의 손을 들어준 적이 없는 텍사스를 차지하고 앨라배마에서도 아주 작은 격차로만 패배하였다.
이런 점은 수십년 후 리처드 닉슨이 시도한 남부 전략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했다. " 침묵하는 다수"를 내세워 확보한 백인 중산층 유권자 집단, 일부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면서도 인종주의자들을 이용한 선거 전략, 상대 후보의 취약 지점[26]을 공격하는 소수 유권자 집단 포위전략 등 1972년 닉슨과 1928년 후버의 선거 전략은 굉장히 비슷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민주당 정치가들이 앨 스미스를 지지했으며, 진성 인종주의자들은 후버가 너무 인종평등적이라는 이유로 지지를 거부하였다. 이 때문에 남부 지역은 후버로 많이 넘어갔지만 딥사우스 지역 만큼은 그래도 앨 스미스에 투표하면서 지지 기반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남부에 깃발이라도 꽂아본 것은 후버가 처음이었기에, 후버의 선거 전략은 이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나 리처드 닉슨 같은 정치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7.2. 앨 스미스의 대도시 공략
<-5> 미국 주요 대도시 민주당 대선후보 득표율 변화 | ||||
<rowcolor=#fff> 도시명 | 카운티 |
1920년 J. 콕스 |
1928년 A. 스미스 |
변화 |
<colcolor=#000,#fff><colbgcolor=#f5f5f5,#222>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
서포크 (Suffolk) |
36.30%
|
66.84%
|
+30.54%p |
뉴욕주 뉴욕시 |
뉴욕 (New York) |
29.12%
|
60.82%
|
+31.70%p |
킹즈 (Kings) |
25.88%
|
59.48%
|
+33.60%p | |
퀸즈 (Queens) |
25.70%
|
53.43%
|
+27.73%p | |
브롱스 (Bronx) |
24.42%
|
67.67%
|
+43.25%p | |
리치먼드 (Richmond) |
33.17%
|
53.37%
|
+20.20%p | |
총합 |
26.98%
|
60.04%
|
+33.06%p | |
뉴욕주 버팔로 |
이리 (Erie) |
25.63%
|
44.87%
|
+19.24%p |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로스앤젤레스 (Los Angeles) |
21.59%
|
28.71%
|
+7.12%p |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
샌프란시스코 (San Francisco) |
22.13%
|
49.44%
|
+27.31%p |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
필라델피아 (Philladelphia) |
21.50%
|
39.48%
|
+17.98%p |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
앨러게니 (Allegheny) |
20.07%
|
42.39%
|
+22.32%p |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
해너핀 (Hennepin) |
20.63%
|
38.79%
|
+18.16%p |
워싱턴주 시애틀 |
킹 (King) |
16.21%
|
31.77%
|
+15.56%p |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
세인트루이스 시티 (St. Louis City) |
37.52%
|
52.01%
|
+14.49%p |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
볼티모어 시티 (Baltimore City) |
39.40%
|
47.94%
|
+8.54%p |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
해밀턴 (Hamilton) |
39.40%
|
42.58%
|
+3.18%p |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
쿠야호가 (Cuyahoga) |
30.49%
|
45.64%
|
+15.15%p |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
웨인 (Wayne) |
17.55%
|
36.80%
|
+19.25%p |
1928년 대선에서 앨 스미스에 집중적으로 투표한 아일랜드계 미국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폴란드계 미국인, 가톨릭 신자, 대도시 거주자 집단은 본래 민주당의 핵심 지지 기반이라고 할 수 없었다. 물론 19세기 후반부터 가톨릭 신자들의 80% 이상이 민주당에 투표하긴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민주당의 기반은 남부였지 도시의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1928년 대선에서는 민주당이 남부 지역에서 대참패를 하는 와중에, 대도시 가톨릭 신자에게는 이전보다도 더 높은 득표를 거두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를 토대로 일부 역사학자들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동맹" 유권자 그룹이 이때 이미 등장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조지 맥거번이나 로버트 F. 케네디가 구상한 "소수 인종 - 대도시 거주자" 유권자 그룹이 이때 나타났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민주당이 보수적인 남부 농민들에게 지지를 받는 것을 떠나, 대도시의 소수자 유권자 그룹을 노리게 되면서 민주당 선거전략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이 선거에서도 여전히 후버를 더 많이 지지했으며, 흔들리는가 싶었던 남부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전략으로 향후 20년간은 민주당 지지 성향으로 굳건히 남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선거를 통해 완벽한 유권자 그룹 재편성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8. 여담
- 1976년, 2004년 대선과 더불어, "차라리 패배해서 다행인 선거"로 회자된다. 1928년 앨 스미스가 당선되었더라도 세계대공황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안 그래도 1920년대 공화당에 비해 열세였던 민주당은 존속 위기 수준까지 내몰렸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27] 실제로 공화당은 세계 대공황 이후 1952년 대선에서 대권을 탈환하기까지 20년을 버텨야 했는데, 공화당보다도 기반이 취약했던 민주당이 대공황을 맞닥트렸다면 1850년대의 휘그당처럼 당이 완전히 해체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28]
9. 관련 문서
[UTC]
[2]
당시 후버를 민주당으로 끌어오려고 애를 쓴 대표적인 정치가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였다. 참으로 기묘한 인연인 셈.
[3]
1855년 생으로 이미 73세였다. 멜런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조 바이든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이전까지 미국 역대 최고령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4]
내각회의를 자주 빼먹었고, 상원 의사진행 방식에서 쿨리지와 불화가 컸고, 결정적으로 쿨리지가 2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한 맥내리-호겐 농장구호법(McNary–Haugen Farm Relief Bill)을 옹호했다.
[5]
아일랜드인이나 폴란드인 등은 "하얀 흑인"이라 불리며 다른 유색인종 못지 않은 차별을 당하고 있었다.
[6]
다만 현대와 같은 과학적인 표본 기반 여론조사가 아니라, 잡지 구독자들을 상대로 답장을 받아 수를 세는 매우 원시적인 방식의 여론조사였다. 이 때문에 실제 민심과 왜곡되어있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기어이 이 문제로
몇년 후에 대형사고를 치고 폐간된다(...).
[7]
또한 쿨리지보다는 제한된 자유방임주의를 지지한 후버와, 친기업 진보주의 노선을 내건 앨 스미스의 경제 공약이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정부가 경제 정책에 거의 개입하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기도 했고.
[8]
1928년 민주당 전당대회 후보직 수락 연설 中
[9]
wet dreams는 말 그대로 "술을 마시는 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속어로는
몽정을 의미하는 섹드립이다.
[10]
1922년 "리터러리 다이제스트" 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뉴욕에서는 금주법 유지 25,345 대 폐지 24,343으로 호각세를 이루었지만, 앨라배마 주에서는 유지 2,847 대 폐지 881로 확연히 금주법 유지 지지 여론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해석]
중절모를 벗고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
앨 스미스고 절 받고 있는 사람은 미국 주재 교황대사를 지낸
조반니 본차노 추기경이다. 문구 해석은 "(교황의 대사는) 앨 스미스를 대통령으로 뽑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절을 받는 본차노 추기경은 이탈리아인인데, 절을 하는 앨 스미스는 미국인이라니요?"
[12]
그는 극우 성향이 아니었으며 도리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진보당을 지지하고 이후에도
뉴딜정책을 찬양하는 진보 성향의 언론인이었다. 즉 좌우를 가리지 않고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앨 스미스의 신앙심에 대한 근거 없는 우려가 퍼져있었던 것이다.
[13]
가톨릭도 개신교도 성경의 내용을 믿는 기독교의 범주에 들어가므로, 스미스가 당선된다고 해서 성경을 읽는 것을 금지했을 리가 없다. 당시의 우려가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 보여주는 예시 중 하나.
[14]
재건시대의 두 선거였던 1868년과 1872년의 경우, 전자는 호레이스 시모어가 근소하게 이겼고, 후자는 민주당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존 낸스 가너를 지지했다.
[16]
게다가 가너-루스벨트 타협 도중 매커두마저 앨 스미스의 뒷통수를 치고 루스벨트 쪽에 붙는다.
[17]
미국 상무부 휘하 연방 인구조사국 지정 권역에 따른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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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
알래스카,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하와이, 아이다호, 몬태나, 네바다, 뉴멕시코, 오레건, 유타, 워싱턴, 와이오밍
[Midwest]
일리노이, 인디애나, 아이오와, 캔자스, 미시간, 미네소타, 미주리, 네브래스카, 노스다코타, 오하이오, 사우스다코타, 위스콘신
[South]
앨라배마, 아칸소, 델라웨어, 플로리다, 조지아, 켄터키, 루이지애나, 매릴랜드, 미시시피, 노스캐롤라이나, 오클라호마, 사우스캐롤라이나, 테네시, 텍사스, 버지니아, 웨스트버지니아
[Northeast]
코네티컷, 워싱턴 D.C., 매인, 매사추세츠, 뉴햄프셔, 뉴저지, 뉴욕, 펜실베이니아,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Pacific]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하와이
[Prairies]
콜로라도, 아이오와, 캔자스, 미주리, 몬태나, 네브래스카,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와이오밍
[DeepSouth]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NewEngland]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매사추세츠,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
[26]
앨 스미스의 가톨릭 신앙 / 조지 맥거번의 반전좌파-히피로부터의 지지-의료용 마리화나 합법화 공약 등등.
[27]
1976년 대선은 오일쇼크로, 2004년은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세계금융위기로 인해
제럴드 포드와
존 케리가 차라리 패배하는 것이 행운이었다고 여겨진다.
[28]
앨 스미스는 진보주의자였지만 경제 문제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이라, 기업과 정부가 상호협조해야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경제적 자유주의, 기업진보주의 성향을 내세웠다. 앨 스미스가 당선되었더라도 뉴딜 정책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