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러시아 제국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제창하여 세계 평화 도모를 위해 열린 두 차례의 국제 회의. 헤이그 평화 회의, 헤이그 회담 등으로도 불린다.2. 배경
당시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 국가들의 치열한 군비 경쟁 속에서 끊이지 않는 국제 분쟁의 불안감이 속출하였고, 이는 소중 규모의 여러 군사적 충돌로 점점 더 가열되어 가고 있었다.왜 하필 헤이그였냐면 당시 네덜란드는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해양 진출 활발로 인한 신흥 해양 강국이었고, 중립국으로서 여러 차례 평화 회의를 개최한 경험이 있으며, 또 국제법의 아버지 후고 그로티우스를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3. 제1차 회의
19세기 후반, 세계 전반적으로 군사비가 급증함에 따라 각 국가별로 재정 부담이 커지는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899년 5월 18일[1]부터 7월 29일까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26개국이 모여 제1차 회의가 진행되었다. 1년 전인 1898년 8월 24일 니콜라이 2세가 회의를 제안하였고, 이후 니콜라이 2세와 당시 외무 장관인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무라비요프 등이 회의 개최에 기여한 바가 컸다.[2] 본 회의를 통한 협약은 동년 7월 29일에 서명되었고, 이듬해인 1900년 9월 4일부터 공식 발효되었다. 제1차 회담을 통하여 국제 분쟁의 평화적 처리 조약이 체결되었고, 유독 가스 및 덤덤탄[3] 등의 특수 탄환의 사용 금지 선언 등이 조인되었다. 또한 상설중재재판소가 국제 분쟁의 평화적 처리 협약에 따라 헤이그에 새로이 결성된다.[4]총 32개국이 서명하였으며, 이는 기존 회원국인 24개국에 추가 회원국 8개국을 포함한 숫자이다.
- 아메리카: 미국, 멕시코, 엘살바도르, 페루, 우루과이, 과테말라, 온두라스,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 유럽: 영국, 이탈리아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네덜란드, 그리스 왕국,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스페인, 세르비아 왕국, 독일 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불가리아 왕국, 벨기에, 포르투갈 왕국, 몬테네그로 공국, 루마니아 왕국, 룩셈부르크,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 아시아: 시암, 일본 제국, 이란 숭고국, 대한제국[5]
당시 헤이그 협약을 통해 언급된 것은 3개의 주요 조약과 부가적인 3개 선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3개 주요 조약
- 3개 선언
4. 제2차 회의
제2차 회의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미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제안으로 소집되어 44개국[6]의 대표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회합, 군비 축소와 평화 유지책을 협의하였다. 원래 루즈벨트는 1904년 즈음하여 제안하였으나, 당시 러일전쟁이 터지면서 결국 미뤄지게 된 것이다. 제2차 회담은 1899년의 제1차 회담 일부를 수정하고 새로운 항목을 추가함으로써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해전에 대한 초점을 확장하려 하였고, 영국이 주축이 되어 군비 제한을 확보하려 시도한다. 허나 이는 독일 함대의 성장을 중단시키려 하는 것 아니냐는 독일의 우려로 결국 다른 열강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외에도 독일은 강제적 중재 제안에 대해서도 거절하여, 회의 결과 군비 축소에는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회담은 자발적 중재에 대한 기구를 확대하였고, 채무 수집과 전쟁 규칙, 그리고 중립국의 권한과 의무에 대한 협약을 확립했다. 조약과 선언, 그리고 제2차 회담의 최종 법안은 1907년 10월 18일 서명되었고, 이듬해인 1910년 1월 26일 실효되었다.총 44개국이 서명하였고, 기존 회원국 43개국에 추가 회원국 1개국이 추가되었다.
- 아메리카: 미국,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쿠바, 과테말라, 콜롬비아, 엘살바도르, 칠레, 도미니카 공화국, 니카라과, 아이티, 파나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브라질, 베네수엘라, 페루, 볼리비아, 멕시코
- 유럽: 영국, 이탈리아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네덜란드, 그리스 왕국, 스위스, 스웨덴, 스페인, 세르비아 왕국, 덴마크, 독일 제국, 노르웨이, 프랑스 제3공화국, 불가리아 왕국, 벨기에, 포르투갈 왕국, 몬테네그로 공국, 루마니아 왕국, 룩셈부르크,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 아시아: 시암, 일본 제국, 이란 숭고국, 청나라[7]
당시 협약은 13개 조약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중 12개는 비준되어 실효되었고 나머지 하나만 선언의 형태로 남게 된다.
-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협약[8]
- 계약 채무 회복을 위한 군 고용 제한에 대한 협약
- 선전포고에 대한 협약
- 육상전에 대한 법규와 관습에 대한 협약
- 육상전 시 중립국 및 중립인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협약
- 개전 시 적국 상선 취급에 대한 협약
- 상선의 전함 개조에 대한 협약
- 자동잠수함 기뢰 부설에 관한 협약
- 전시 해군의 포격에 대한 협약
- 1906년 7월 6일 제네바 원칙의 해상전 적용에 대한 협약
- 해전에서 포획권 행사 제한에 관한 협약
- 국제 전리품 법정 발족에 관한 협약
- 해전에서 중립적 지위의 권한과 의무에 대한 협약
- 기구를 통한 사출물과 폭발물 방출 금지에 대한 선언
5. 헤이그 특사
특히 제2차 회의 때는 한국에서 고종의 밀령으로 그의 신임장을 든 이상설· 이위종· 이준 일행이 파견되었다. 이들을 통해 일본의 부당한 간섭을 호소하고 한국이 회의 참가 통보를 못 받은 것을 항의하는 밀서를 전달하려 하였고, 또 을사조약이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닌 일본의 강압이었음을 폭로하여 파기시키려 하였다. 허나 당시 영일동맹으로 동맹국 관계였던 영국과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결국 좌절하게 된다. 이 때문에 그곳에서 이준은 화병으로 객사하였고, 이 일의 여파로 고종은 강제 퇴위당했다. 자세한 경과는 문서 참조.
[1]
니콜라이 2세의 생일.
[2]
이 때 러시아 측 대표로 표도르 마르텐스(Fyodor Martens)라는 인물이 참석했는데, 그가 주장한 일명 "마르텐스 조항"(Martens Clause)은 육전 협약 전문에 명시되었으며 현대까지 국제법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마르텐스 조항은 "법률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더라도 국가들은 공공 양심의 요구에 따라 민간인 보호 등 기존의 인도적 관습에 구속된다"는 것이 골자로, 쉽게 풀어 쓰자면 "법률에 안 나와 있다고 해서 그게 선 넘는 짓을 정당화하진 않는다. 고로 최소한의 인도적 고려는 해라 이 전쟁광 놈들아"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3]
인체나 동물의 몸에 명중하면 보통의 탄알보다 상처가 크게 나도록 만들어진 특수 소총탄. 19세기
영국이 식민지
인도의 내란 진압을 위해 공업 도시 '덤덤'의 무기 공장에서 제작한 총탄이라 덤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의
할로 포인트의 원형.
[4]
이때 크게 공헌한
네덜란드 법학자
토비아스 아세르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1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이후에도 아세르는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 일행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1913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 등의 설립을 도운 명예로운 인물.
[5]
1903년, 당시 주권 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을 적에 가입한다.
[6]
라틴아메리카의 제국들이 추가됨.
[7]
이미 1차 회의에 참석한 바가 있으며 두번 다 훗날 2대, 6대 국무총리를 지내는
루정샹이 참석했다.
[8]
1899년 회담 때의 1번째 협정을 확정하고 또 확장한 것.
2014년 기준으로 본 협정은 99개국에서 실효되어 있고, 115개국이 본 항목이나 제1차 때의 항목을 둘 다 또는 그 중 하나를 비준했다. 또, 이는 모두 영구 중재 재판소의 기반 문서로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