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샤오셴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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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칸 영화제 | |||||||||||||||||||||||||||||||||||||||||||||||||||||||||||||||||||||||||||||||||||||||||||||||||||||||
심사위원상 | ||||||||||||||||||||||||||||||||||||||||||||||||||||||||||||||||||||||||||||||||||||||||||||||||||||||||
제45회 ( 19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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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 199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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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회 ( 19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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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에리세 (햇빛 속의 모과나무) 비탈리 카네프스키 (눈오는 날의 왈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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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셴 (희몽인생) 켄 로치 (레이닝 스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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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 셰로 ( 여왕 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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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상 | ||||||||||||||||||||||||||||||||||||||||||||||||||||||||||||||||||||||||||||||||||||||||||||||||||||||||
제67회 ( 20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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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8회 ( 20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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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회 ( 20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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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넷 밀러 ( 폭스캐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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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셴 ( 자객 섭은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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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아사야스 ( 퍼스널 쇼퍼) 크리스티안 문지우 ( 엘리자의 내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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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베니스 영화제 | ||||
황금사자상 | ||||
제45회 ( 19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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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 198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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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회 ( 1990년) |
에르만노 올미 (영험한 애주가의 전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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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센 ( 비정성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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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스토파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 |
역대 대만 금마장 시상식 | ||||
감독상 | ||||
제25회 ( 19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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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 198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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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 1990년) |
뤄치루이 ( 칠소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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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셴 ( 비정성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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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호 ( 홍진) |
제31회 ( 19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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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 199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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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 1996년) |
차이밍량 ( 애정만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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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셴 ( 호남호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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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 햇빛 쏟아지던 날들) |
제51회 ( 20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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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회 ( 20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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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회 ( 2016년) |
허안화 ( 황금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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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셴 ( 자객 섭은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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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 샤오강 ( 나는 반금련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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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셴 侯孝賢 | Hou Hsiao-hsi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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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허우샤오셴(侯孝賢 , Hou Hsiao-hsien) |
국적 | 대만 |
출생 | 1947년 4월 8일 ([age(1947-04-08)]세) |
중화민국 광둥성 메이현(현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 메이저우시 메이셴구) | |
학력 | 국립 대만예술대학 (B.A.) |
데뷔 | 1981년 영화 <귀여운 여인(就是溜溜的她)> |
가족 | 부인 차오파오펑, 딸 허운화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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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만의 영화감독. 리안, 차이밍량 등과 함께 국제적인 명성을 인정받는 대만 영화계의 거장으로, 에드워드 양 감독, 차이밍량 감독과 더불어 대만 영화의 뉴웨이브를, 나아가 80년대 아시아의 영화를 이끌었던 감독이다.나이로는 임권택(1936년생), 이창동(1954년생) 두 감독 사이에 해당한다. 한국식 한자 발음으로는 이름이 '후효현'인데, 예전 영화 팬들은 후효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면 90년 초. 영화 월간지 로드쇼는 후 시아오시엔이라고 발음하여 표기한 바 있다.
2. 생애 및 활동 연대기
2.1. 데뷔와 성장기 4부작, 1980년대
1947년 4월 8일 중국 본토 광둥성 매현의 객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동료 에드워드 양도 객가 출신이다. 태어난 이듬해 가족들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하여 대만 가오슝 현 펑산 시(현 가오슝 시 펑산 구)에서 생활했다. 즉 외성인이다. 본인 고백에 따르면 10대 시절은 동네 건달처럼 지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도 제대로 안 했다고. 초기작 <펑꾸이에서 온 소년>은 이 시절을 반영하고 있는 영화다.군 복무를 마친 1969년 대만 국립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영화 연출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1972년 졸업한 후 여러 직업을 거치고서 영화계에 본격 입문했다. 처음엔 배우가 되고 싶어했으나, 시나리오를 쓰면서 감독으로 전향했다. 감독 데뷔 후 젊은 시절 배우로써 활동했는데 대표작으로는 타이페이 스토리가 있다. 그러나 연기는 남을 위해 하는 거라고 생각해 더이상 하지 않는다고 한다.무난한 흥행작들을 발표하다가 1980년대에 유학파 감독들과 교류하면서 '뉴웨이브' 계열에 합류하였다. 중국어로는 '신랑차오'(新浪潮. 새로운 물결)로 불린다. 뜻은 똑같다.
1983년에는 성장기 4부작의 첫 작품이자, 감독 스스로가 자신의 진정한 데뷔작이라고 고백하는 <펑꾸이에서 온 소년>을 발표한다. 감독의 자전적인 작품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소년이 도시에 살며 겪는 어려움을 담아낸 작품으로 1984년 낭트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인 황금열기구상을 수상했다.
1984년 <동동의 여름방학>과 1985년 <동년왕사>를 완성했다. 한 소년의 비극적 성장기를 통해 190~1960년대 대만 현실을 그린 <동년왕사>는, 유년기의 절망과 시적 감정, 역사의 무게를 담아낸 작품으로, 1986년 베를린 영화제 국제비평가상을 수상했다.
1987년 성장기 4부작의 마지막으로, 광산촌에서 살다 대만으로 건너온 두 남녀의 슬픈 이야기 <연연풍진>은 1987년 낭트영화제 최우수촬영상을 수상했으며, 토론토 영화제 선정 세계 100대 영화 69위로 선정되었다.
2.2. 현대사 3부작과 1990년대
1989년에 대만 현대사의 비극 2.28 사건을 다룬 영화 대만 현대사 3부작 첫 시작인 < 비정성시>를 발표하여 국내외의 찬사를 받았다. <비정성시>는 그해 베니스 국제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아시아 영화로서는 31년만에 수상하고, [2] 스크린 선정 20세기 100대 영화 30위로 선정되는 등 1980년대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나아가 역대 아시아 최고의 영화로도 손꼽힌다.양조위는 해당 작품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아 벙어리 사진사를 연기했는데, 대사가 한마디도 없음에도 눈빛 만으로도 감정을 전달하는, 신인답지 않은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면서 국내 영화 팬들에게 양조위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3]
한국에서는 개봉 당시 상영시간이 길다고 40분이 넘게 잘려나가는 탓에 흥행에서 참패했으나 비디오로 나오면서 잘려나갔던 부분들이 전부 다 나오고 비디오 대여에서 꽤 히트를 친 바 있다.
1993년 대만 현대사 3부작인 <희몽인생>으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처음으로 초청되어,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전통 인형극 장인의 삶을 통해,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순간까지를 다룬 영화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에도 선정된 작품이다.
1995년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며, 대만 2.28사건을 다룬 대만 현대사 3부작인 <호남호녀>로 제48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 받았다.
1996년 감독의 두번째 데뷔작이라고 말하는 < 남국재견>으로 제49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았다. 현대 대만의 생활을 다룬 영화로 초청 당시에는 기대 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그 이후로 작품성을 재평가를 받은 명작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 잡지 카예 뒤 시네마에서는 1997년 올해의 영화 2위로 선정하고, 1990년대 결산에서 공동 1위로 선정했다.
1998년 양조위, 이가흔, 유가령과 함께 한 작품 < 해상화>로 제51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19세기 말 상하이의 유곽에 관한 영화로, 이 영화의 전체 쇼트수는 38개로 엄청난 롱테이크로 이뤄진 영화이기 때문. 그래서, 부산국제영화제 초청 당시 부산극장 1관 1300석을 매진시킨 관객들 중 상당수가 매우 괴로워 해야만 했다. 그러나 카예 뒤 시네마에서는 1998년 올해의 영화 1위로 선정하며, 감독의 영화 미학을 높히 평가했다.
2.3. 2000년대
2001년 서기를 세계적인 배우로 만들어준 '현대를 위한 3부작'의 첫 작품인 < 밀레니엄 맘보>로 제54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았다.요즘 젊은이들이 속한 세상은 굉장히 빠르다. 그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시간 속을 살아간다. 그들에게 젊음은 피자마자 시들어 버리는 꽃과 같다.< 밀레니엄 맘보>는 시간을 통해 그 젊음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 허우샤오셴
2003년에는 일본에서 아사노 타다노부, 히토토 요와 함께 촬영하여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 < 카페 뤼미에르>를 발표한다. 도쿄 진보쵸 고서점가를 배경으로 한 고즈넉한 풍경을 잘 잡아내었다.
2005년 장첸과 페르소나 서기와 함께한 < 쓰리 타임즈> (원제: 최호적시광:가장 아름다운 순간)로 제58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았다. 세쌍의 청춘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다룬 영화로 <연애몽>, <자유몽>, <청춘몽> 이야기로 나열된다.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도 선정되었다. 원래는 3명의 감독이 각각의 에피소드을 연출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에드워드 양 감독이 타계하여, 허우샤오셴 감독이 세편 모두 연출하게 되었다.
2007년 처음으로 감독의 작품에 서양 배우가 출연하여 화제가 된 작품 < 빨간 풍선>으로 제60회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부문에 진출했다. 프랑스 배우 줄리엣 비노쉬가 출연했는데,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개관 20주년을 맞아 , 박물관장의 특별제안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파리판 <까페 뤼미에르>라고도 불리며, 파리의 소소한 일상을 아름답게 담아낸 작품이다. 프랑스의 특별 프로젝트에 왜 대만 감독이 발탁되었는지 진가를 확인 할수 있다.(코리아필름 편집부 기사 인용). 당시, 프랑스가 지목한 대만의 거장 감독과 프랑스 최고의 여배우가 함께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영화팬을 설레게 했으며, 파리의 일상을 가장 파리답게 담아냈다는 극찬을 받았다.
2.4. 2010년대
< 자객 섭은낭>으로 2015년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모습 |
2015년에는 본인의 첫 액션/무협 영화이기도 한 사극 < 자객 섭은낭>(刺客聶隱娘)을 발표하였다. 이 영화로 그해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여 대만, 더 나아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 거장으로서의 명성을 재확인시켰다.
2.5. 은퇴
2023년에 차기작 준비 중에 치매 진단을 받으면서 은퇴 선언을 했다. # 이변이 없는 한 자객 섭은낭이 생전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이후 가족들의 성명에 따르면 본디 차기작 수란 강은 예정대로 작업 진행했으나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병세는 있지만 가족들하고 잘 있다고. 출처
3. 영화 감독으로서의 특징
그의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나 나루세 미키오, 미조구치 겐지 등의 영향을 받아 정적이고 느린 컷과 롱테이크로 사회와 인생, 역사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동년왕사>, <동동의 여름방학>, <연연풍진> 같은 초기작들은 자신의 청춘 시절을 소재로, 역사의 격랑에 휘말리는 대만인들의 희로애락을 담아냈다면 비정성시를 기점으로는 좀 더 다양한 팔레트로 역사와 인생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초기작은 리얼리즘적인 경향이 강했다면 후기작으로 갈수록 형식을 강조하고 있다. 1999년에 발표한 해상화가 러닝 타임 130분에 컷이 38개로 이뤄져있다는건 유명한 사실로, 제작사가 편집컷을 보고 절망했다고 한다.때문에 동아시아 영화 감독들에게 영향을 많이 미쳤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같은 경우는 데뷔작 < 환상의 빛>부터 허우샤오셴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실제로 감독이 허우샤오셴은 내 영화의 아버지라고 언급한 적 있다. 한국에서도 이창동 감독과 허진호 감독에게 일부 영향을 미쳤다. 동시기 감독으로는 에드워드 양 (양덕창)하고 그 색채가 유사한 편이지만 조금 다르다. 에드워드 양은 훨씬 현대적인 감각으로 동시대 대만인들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었다.
반대로 영화 특징 때문에 '존경은 받되, 흥행은 안 되는' 감독이기도 하다. 때문에 최근엔 프랑스나 일본 자본의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건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기반을 받쳐줄 상업영화의 몰락으로 악순환이 이어지는 셈. 한국에서도 비정성시 이후로 1990년대 만든 영화는 정식 개봉되질 못했다가, 밀레니엄 맘보 이후 다시 소개되고 있다.
4. 필모그래피
연도 | 제목 | 연출 | 각본 | 제작 | 출연 | 비고 |
1980 |
귀여운 여인 就是溜溜的她 |
O | O | 장편 데뷔작 | ||
1981 |
바람이 춤춘다 風兒踢踏踩 |
O | O | |||
1982 |
고향의 푸른 잔디 在那河畔青草青 |
O | O | |||
1983 |
해탄적일천 海灘的一天 |
O | 에드워드 양 감독작 | |||
1983 |
샌드위치 맨 兒子的大玩偶 |
O | ||||
1983 |
펑꾸이에서 온 소년 風櫃來的人 |
O | [4] | |||
1984 |
동동의 여름방학 冬冬的假期 |
O | O | |||
1985 |
타이페이 스토리 靑梅竹馬 |
O | O | 에드워드 양 감독작 | ||
1985 |
동년왕사 童年往事 |
O | O | [5] | ||
1986 |
연연풍진 戀戀風塵 |
O | [6] | |||
1987 |
나일의 딸 尼羅河女兒 |
O | ||||
1989 |
비정성시 悲情城市 |
O | [7] | |||
1991 |
기왕 棋王 |
O | [8] | |||
1993 |
희몽인생 戱夢人生 |
O | [9] | |||
1995 |
호남호녀 好男好女 |
O | [10] | |||
1996 |
남국재견 南國再見,南國 |
O | [11] | |||
1998 |
해상화 海上花 |
O | [12] | |||
2001 |
밀레니엄 맘보 千禧蔓波 |
O | O | [13] | ||
2003 |
카페 뤼미에르 咖啡時光 |
O | O | [14] | ||
2005 |
쓰리 타임즈 最好的時光 |
O | O | [15] | ||
2007 |
그들 각자의 영화관 中 전희 영화관 電姬电影院 |
O | 옴니버스 영화 참여, 단편 | |||
2007 |
빨간 풍선 Le voyage du ballon rouge |
O | O | [16] | ||
2011 |
10+10 中 아름다운 시절 |
O | 옴니버스 영화 참여, 단편 | |||
2015 |
자객 섭은낭 刺客聶隱娘 |
O | O | [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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舒蘭江 |
O |
5. 기타
부산국제영화제 초창기부터 내한하면서 한국 영화계, 감독들하고도 많은 친분이 있는 편이다. 가장 최근 내한은 자객 섭은낭의 한국 정식 개봉을 앞둔 2016년 1월 프로모션 차원으로 내한한 것.
2003년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 헌정영화 카페 뤼미에르로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2001년 밀레니엄 맘보를 기점으로 서기를 빠짐없이 캐스팅하고 있다. 예외로 빨간 풍선에서는 줄리엣 비노쉬를 캐스팅했다. 2016년 시점 허우샤오셴 영화에 출연한 유일한 서양 배우. 서기가 워낙 가식없고 털털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2000년 자신과 처음 만났을때도 유명한 감독이라는 걸 알면서도 전혀 기죽거나 두려워하지 않아했다는 점에 큰 인상을 받았다고. 서기도 허우 샤오셴과의 협업을 통해 연기에 대한 매력을 깨우쳤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밀레니엄 맘보가 칸에서 상영 직후 호텔에 가서 울었다고 한다. 서기는 배우 생활 초기부터 섹스심벌 이미지를 좀처럼 벗어나질 못해 고생했는데, 허우샤오셴을 통해 연기 실력이 급상승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당당히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로 발돋움할 수있었다.
기타노 다케시와 친하다. 기타노는 의외로 중화권 감독들과 친분이 많은 편이다. 다른 중화권 감독인 자장커도 오피스 기타노의 도움을 받아 영화를 제작했을 정도. 2000년대 초에는 기타노 다케시를 캐스팅해 일본 야쿠자가 대만에 와서 겪는 일을 그리는 영화를 찍을 뻔 했으나 무산되었다.
정치적인 언급은 거의 하지 않으나,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하고 대만-중국 통일을 지지하는 쪽이라 한다. 친통일 좌파에 가깝다고. 1992년에는 중화사회민주당 소속으로 국민대회 대표 선거에 출마했고, 2005년에는 민주행동연맹 소속으로 임무형 국민대회 선거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1]
미국에서 미술을 전공했다고 한다.
[2]
1950년 아시아 최초로 서구권 국제영화제 대상인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는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인데,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라쇼몽 다음으로 39년동안 베네치아 황금사자상을 받은 아시아 영화가 없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80년대 국내 영화 월간지도 '39년만에 수상' 이라고 보도했으며
비정성시 항목에 링크된 금성비디오 표지에도 39년만의 수상이라고 적혀있는데 사실 1958년 일본 영화 <무호마츠의 일생>(감독: 이나가키 히로시, 1905~1980)이 황금사자상을 받았기에 '31년만의 수상'이 맞다.
[3]
사실 이 벙어리라는 설정은 당시 홍콩 출신으로서 광동어만 죽 써오던 그가
민남어를 제대로 할 줄 몰라서 허우샤오셴 감독이 그러한 설정을 넣은 것인데, 오히려 양조위의 눈빛 연기를 돋보이게 하는 설정이 되었다.
[4]
낭트 영화제 황금 열기구상 수상
[5]
베를린 국제 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상 수상
[6]
낭트 영화제 최우수촬영상 수상,
토론토 영화제 선정 세계 100대 영화 69위
[7]
제46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157위
[8]
대만의 엄호 감독과 홍콩의
서극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했고, 배우
양가휘와 엄호 감독이 각본을 맡았다. 문화혁명기를 거친 중국대륙의 천재 장기왕과 80년대 후반을 살아가는 어린 장기왕이 시청률 지상주의에 찌든 현실을 겪는 이야기로 2024년 현재까지 중국 대륙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어있다.
[9]
제46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10]
제48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11]
제49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카예 뒤 시네마
1997년 영화 베스트 2위,
1990년대 결산 공동 1위
[12]
제51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225위,
카예 뒤 시네마
1998년 영화 베스트 1위
[13]
제54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필름 코멘트 선정 2000년대 영화 베스트 100 44위,
카예 뒤 시네마
2001년 영화 베스트 3위
[14]
제6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필름 코멘트 선정 2000년대 영화 베스트 100 37위,
카예 뒤 시네마
2004년 영화 베스트 공동 9위
[15]
제58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필름 코멘트 선정 2000년대 영화 베스트 100 36위, 필름 코멘트
2006년 영화 베스트 11위,
카예 뒤 시네마
2005년 영화 베스트 공동 4위
[16]
제60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초청,
필름 코멘트 선정 2000년대 영화 베스트 100 65위
[17]
제68회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100편' 50위, 사이트 앤 사운드
2015년 영화 베스트 1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