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6:28:00

허명회

KD운송그룹 명예회장
허명회
許明會
파일:허명회.jpg
출생 1931년 8월 5일 ([age(1931-08-05)]세)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現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colbgcolor=#8b008b> 학력 초월초등학교 (졸업)
서울농림고등학교 (졸업)
신흥대학 (정치외교학 / 중퇴, 명예학사)
세명대학교 (경영학 / 명예박사)
가족 아들 허상준[1]

1. 개요2. 생애
2.1. 경기여객 시절2.2. 대원여객 출범2.3. 경기여객 - 대원여객 사장2.4. 인수 목록2.5. 지금의 KD 운송그룹2.6. 계열사 (2024년 현재)2.7. 교육2.8. 현재
3. 여담4. 수상5.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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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D 운송그룹의 창업주이자 1대 회장 그리고 명예회장이다.

2. 생애

1931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농사일을 하던 부모의 슬하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2] 서울농림고등학교 입학 후 재학 중 6.25 전쟁의 발발로 입대하여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참전했다.

전역 후 1956년 결혼해 신흥대학 정치외교학과(현 경희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4학년까지 재학하다가 갑자기 "돈을 버는데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지 않다"라는 생각에 자퇴를 했다고 한다.

이후 주한미군 부대에서 일하다 당시 우리나라의 산업화 서울특별시의 인구가 증가하고 서울특별시 시내버스가 그에 맞는 중요한 역할을 하자 1961년, 경기여객(지금의 경기고속)에 임시직 말단 사원으로 입사하여 을지로 영업소에 배차로 배치되었다.[3]

2.1. 경기여객 시절

당시 허명회는 자신의 일에 열정과 자부심을 가지며 조수에게 정비 등의 여러가지 일들을 배웠고, 결국 윗선의 눈에 띄어 입사 6개월 만에 계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듬해 과장으로 진급하여 숭인동영업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발령받은 뒤에도 배차 일부터 버스 청소와 정비 등의 버스 관리 등의 세부적인 사항도 무엇이든지 나서서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자회사 차량이 대형사고가 발생했는데 영동고속도로가 개통하기 전 1960년대 영동지역으로 가는 도로는 모두 비포장도로인 관계로 특히 서울특별시에서 화천군, 철원군 등의 오지로 가는 버스 노선은 항상 대형사고가 많았고, 게다가 눈 앞의 이익만 생각해 버스 회사에서 제대로 된 정비도 하지 않고 운행을 시켜 자칫 사망사고까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두가 안 하려고 하는 사고 수습에도 직접 나섰고, 어느 날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의 자회사 직원의 사망으로 사후 협상을 위해 조문했다가 상주들에게 욕설과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 당시 그렇게 맞고 나니까 오히려 사고 수습 협상이 잘 되었다"라고 회상했다.

몸을 아끼지 않는 일에 대한 열정으로 1965년 신설동영업소 소장으로 발령되어 업무 도중 1967년 차주로 진급하였는데, 직급이 올라갈 수록 담당하는 버스가 1968년 2대, 1969년 5대, 1970년 5대가 추가 되어 차주 진급 3년 만에 자신이 담당하는 버스가 13대로 증가되었다. 1969년 영업상무로 승진하였다. 임시직 말단 사원으로 입사한 지 8년 만에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상무로 초고속 진급한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1970년에 13번(구 12번 급행) 단 한 개의 노선을 운행하던 한진버스로부터 종로구 의정부시를 잇는 시내버스 30대를 인수하지 않겠느냐는 뜻밖의 제의를 받게 되어 허명회는 일주일 간 13번 버스를 타보게 되었다. 당시에는 등산 열풍이 불어 서울특별시에서 도봉산, 수락산에 올라가는 등산객들이 많아 황금노선으로 불렸는데 버스 회사의 정비 불량과 차량의 노후로 항상 미아리 고개만 올라가면 엔진이 파손되기 일쑤였고, 그만큼 고객들의 불만은 엄청났다.

13번 버스는 2004년 대개편때까지 13번 번호로 잘 다니다가 서울 버스 106이 되었다. KD와 역사를 함께한 노선이지만 2024년 폐선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2.2. 대원여객 출범

인상되지 않는 시내버스 요금으로 어느 버스 회사든지 시내버스에 투자를 하지 않았고, 13번 단 한 개의 노선을 운행하는 한진버스를 인수할 생각이라는 허명회의 말에 "뭐하러 그걸 힘들게 하느냐"라는 주변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13번 버스 30대를 인수하여 새롭게 <대원여객>이라는 이름으로 1971년 12월 24일 공식 출범하였다. 그에게 사실상 첫 사업이었다.

출범 직후 13번 노선의 최대 난제였던 엔진 파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차례로 노후 차량을 신차로 교체하였고, 자신이 직접 신입사원 시절부터 배워 온 정비를 하면서 당시 심각했던 정비 납품 직원들의 비리를 막았다.

당시 버스 안내양들의 요금 빼돌리기로 버스 회사들이 버스 안내양들의 주머니 검사와 소지품 검사로 사회 문제가 되었는데, 허명회는 다른 방법을 택해 종사원들과의 대화와 교육을 자주 실시하고, 회사 내에 예배당을 설립하고 목사님들을 초청해 예배를 드림으로 종사원들이 양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독려했다.

또한 종사원들의 처우를 개선해 영업소 내에 무료식당을 개설하고 회사 곳곳마다 돌아다니며 문제점들을 꼼꼼히 점검하고 확인했다. 또한 해군 장교 정복과 유사한 깔끔한 디자인의 제복과 정모를 기사들에게 지급하였는데, 이것이 시초가 되어 다른 회사들도 이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2년 4월 드디어 35원이던 시내버스 요금이 40원으로 인상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돈이 물밀듯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기사에게서 요금통을 받다가 요금통이 허명회의 발등에 떨어져 발등이 부어올라 병원에 갔는데 그는 일하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 치료를 미루고 업무에만 집중하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통증이 심해져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는 수술을 하고 5~6일 정도 병원에서 입원해야 한다고 했는데, 허명회는 날마다 처리할 업무도 촉박한데 자신이 다친 것 때문에 회사에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된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의사에게 "마취없이 수술을 하면 혹시라도 좀 더 빨리낫지 않겠느냐"라는 풍문에 도는 말을 의사에게 했다. 의사는 근거없는 얘기라고 했지만 허명회는 빨리 나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 의사에게 그냥 마취없이 바로 수술을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이것으로 허명회는 마취없이 수술을 받았으며 그가 세상에서 최고로 고통스러운 아픔을 겪는 순간이였다고 한다.

당시 허명회는 처음 칼이 수술부위에 닿을 때는 멀쩡했지만 칼이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특히 다친 부분에 칼이 깊이 파고들어 뒤집어내는 순간이 정말 말로 표현할수 없을 만큼 아파 수술하는 내내 연신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1976년 조양관광 소속 버스 17대를 인수해 "대원관광"으로 새롭게 출범시키며 관광버스 사업을 시작하였고, 1978년에 대원여객 52대, 대원관광 47대로 총 99대의 차량으로 확대 운영하였다.

그러나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과 1980년 서울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면서 점점 버스업이 약화되기 시작하였고,[4] 1978년 경기여객을 인수하게 된다. 당시 경기여객은 인력 부족과 차량 노후, 임금 체불 등으로 위기에 몰려 도산 위기에 몰려있었는데 허명회는 1978년 9월 12일 비상총회를 소집하고, 현직 사장 및 모든 임원들의 사표 제출을 요구하였으나 임원들은 "니가 무슨 주제로 우리보고 사표를 제출하라고 하느냐" 라며 허명회에게 집단 구타를 했다.[5] 결국 당시 사장 및 전임원들은 줄줄이 회사를 떠나고, 이듬해 10월 (주) 경기여객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2.3. 경기여객 - 대원여객 사장

100대 이상의 대형 운수업체가 된 (주)경기여객 - 대원여객의 사장이 되자[6] 다음과 같이 회사 내부적으로 개혁을 단행하였다.

1. 구조조정 단행: 결재보고 체계는 담당 - 부장 - 사장 3단계로 대폭 축소
2. 조수 폐지: 당시 버스에는 버스 요금을 받는 차장이 따로 있었으나, 버스 요금 외에도 승객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고 욕설도 서슴치 않는 조수가 너무 많다보니 정비사로 전환시킨 몇 명만 빼고 모든 조수를 퇴사시켰다.

무엇보다 사원 복지를 우선으로 여겼다. 당시 가장이 월급을 타오면 오는 길에 술 마시느라 월급을 탕진하는 일이 항상 있는 일처럼 되었는데 이런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허명회는 사원 부인들을 모아놓고 "이런 악습이 기사들의 안전운행을 방해한다. 이제부터 월급날엔 사모님들이 직접 회사에 오시어 월급을 수령해 가시라"고 말해 사원 배우자들의 대환영을 받았다.

또한 회사가 아무리 어려워도 월급과 상여금만은 약속한 날짜에서 단 하루도 늦추지 않았고, 최대의 복지 시설로 직원들의 사기를 올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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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 운송그룹 직원식당의 주요 식단표 #REF! 직원식당에 차려진 식사 중 하나

이러한 영향으로 KD운송그룹의 식사는 버스업계 중에서는 최고로 꼽힌다. 사원 급식을 부실하게 주는 업체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본받을 일이다. 특히 2021년 들어서 준공영제라는 서울시내버스에서도 일부 업체들의 부실한 식단이 문제가 되는데 KD운송그룹의 식단은 준공영제인 서울시내버스의 그 어떤 회사보다도 아득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대신 밥이나 반찬을 절대 남기지 못하는 규칙이 있고, 항상 식당에 허 회장이 지키고 서 있었다고 한다. 이 규칙은 지금도 적용되고 있다고 하는데[7], 뼈 있는 생선이나 뼈찜,뼈해장국 등 살을 발라내고 남는 먹을수 없는 것들 때문에 어쩔수 없이 잔반이 생기는 날을 제외하고는 잔반통을 두지 않는다.[8]

1980년대 초 동양고속 계열사였던 '남일여객'과는 중복 노선이 많아 경쟁이 과열되는 사이였다. 운행중 기사 간의 다툼도 잦았고 과도한 경쟁이 회사에도 이익이 되지 않고 승객들에게도 피해가 갈 것이라 판단한 허 회장은 남일여객을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일단 양쪽 버스를 직접 타보는 과정에서 양측 회사 모두 공통적으로 타이어 파손이 잦고 버스 업계에서 관행적으로 재생타이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파악하게 된다. 이에 허명회는 무려 1000본의 신품 타이어를 사들이도록 지시했고, 새 타이어를 장착하고 타이어 파손 문제를 크게 줄인 경기여객이 갈수록 승객 점유율에서 앞서나간 끝에 남일여객과의 인수 협상이 시작되게 만든다.

1984년 1월 29일 오후 6시 신라호텔에서 임원들이 회동하여 인수 협상을 시작하였는데, 처음에 인수금액을 터무니없이 높게 부르자 허명회는 협상이고 뭐고 다 없던 일로 하자는 패기를 보였다고 한다. 이 때의 남일여객은 동양고속의 계열사였던 걸 생각해보면 상당한 패기였던 셈. 결국 이 강수가 통해서 진지한 협상이 시작되었고, 긴 협상 끝에 1월 30일 오전 3시, 남일여객의 제의로 3억 원을 지불하여 남일여객 소속 차량 166대와 동마장터미널을 비롯한 시설, 괴산, 점촌, 충주를 기반으로 하는 운행 노선 등을 인수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후 인수 차량들과 기존 차량들을 합쳐 대원여객으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이로써 1984년 당시 시외버스 업체인 경기여객은 시내버스 업체인 대원여객과 관광버스 업체인 대원관광으로 구성된 그룹 운수업체로 성장하였다.

1996년 운행 기록과 차량 관리를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마을버스부터 공항버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량에 운행 기록기를 설치하였다.

1999년에는 대원고속과 경기고속, 새로 인수한 명진운수의 남양주권 노선을 모아서 대원운수로 분할 조정하였고, 2003년 경기교통 노선과 대원고속, 경기고속의 성남권 노선 일부를 모아 대원버스로 분할했다.

2008년에는 경기고속과 대원운수의 구리시, 도농동 노선들을 경기여객으로 분할했다. 또한 공항버스 사업에 진출해서 대원공항을 설립했지만, 계열사 중 유일하게 2012년 8월 1일 해체되었다.

경기도 화성시 수원시에서 운행하는 화성여객은 본래 화성운수에 인수 제의를 했으나 피인수사측이 가격을 너무 높게 부름에 따라 인수협상이 결렬되어 결국 계열사인 화성여객을 설립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2000년에는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 출연하여 자신의 성공 비결과 경영 철학, 생활 모습을 소개했고, 재연 파트에선 배우 윤동환이 허명회 역을 맡았다.

2.4. 인수 목록

인수연월 사명 차량대수
1982년 4월 서울버스공사[9] 11대
1982년 6월 21대
1984년 1월 남일여객 166대
1986년 10월 영주여객 4대
1988년 3월 동신운수 3대
신일여객 18대
1989년 9월 영남여객 5대
1990년 1월 삼안여객 27대
1991년 2월 온양교통 24대
1994년 6월 승원여객 41대[10]
1995년 12월 삼성여객 24대
1996년 1월 금성교통 79대
1997년 7월 명진여객 43대[11]
1997년 8월 경남여객 6대
1997년 11월 36대
1998년 3월 31대[12]
1998년 9월 대신여객 20대[13]
1999년 1월 삼성여객 32대[14]
1999년 5월 명진운수 36대[15]
1999년 5월 남양여객 32대[16]
2005년 평안운수, 세진버스 [17]
2006년 용일여객 [18]
2008년 연천교통 [19]
명진여객, 진명여객
센트럴시티, 공항고속 [20]
2009년 12월 선진상운, 유성운수 [21]
선진여객, 하남시내버스 [22]
2010년 선진고속 [23]
동부고속 [A]
2012년 삼화고속 [A]
2018년 5월 삼흥고속 90대[26]
2018년 12월 경북고속, 진안고속, 대성고속, 동부고속, 선진고속 [A]

본격 버스계의 진공청소기

2.5. 지금의 KD 운송그룹

2021년 현재 17개 계열사, 약 6,000대의 버스가 전국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2000년 다큐멘터리 <성공시대> 방영 당시 3,000대의 버스로 표시된 것에 비하면 20년 간 규모가 2배 이상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운행중 사고 시 가장 중요한 보험에 관련하여 운행 승무원들의 보험요율이 100%이며 , KD투어나 공항버스 같은 곳은 105~155%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회사 자체로 100% 직영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직영 체제를 유지하는 이유는 원가절감 및 회사 운영에 있어 효율적이고 원활한 운영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부적인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유니폼 제작 (KD 어패럴)[28]
  • 차량 정비소 (KD 정비공장)
  • 유류 보급 (KD 에너지텍)
  • 식료품 보급 (KD 푸드피아) - 전국 53개 직영 식당에 공급한다. 콩나물을 직접 키우고, 예하 공장에서 김치를 따로 만든다.
    • 김치공장 (KD 김치공장) - 푸드피아 예하 공장
  • KD 상조회 - 직원의 부인상, 자녀상 또는 부모상 시 장례 지원

타이어는 안전사고 위험으로 재생 타이어를 쓰지 않고 사용기한을 정하여 수시로 교체하고 있으며 한국타이어의 제품만 사용한다.

타이어 관련 일화로 KD 운송그룹 소속 버스 운행중 경쟁사 소속 버스가 고장으로 운행을 중단한 일이 있었는데, 경쟁사의 버스 기사가 자신의 승객을 태워달라는 요청을 하자, 허 회장은 "우리 손님들에게 불편을 끼치게 할순 없다"라고 하며 승객인수를 거부한 사례가 있었다.

또한 경쟁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잔고장이 심한 차량들의 원인을 파악해보니 타이어가 문제가 많아 한국타이어에서 1,000개의 타이어를 대량으로 구매했다. 그 결과 잔고장 횟수가 대폭 줄어들고 승차감도 안정되어 자연스럽게 경기여객 측 이용객들이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한국타이어의 제품만 사용한다.

차량 부품은 허명회 회장이 한 때 직접 자동차 매장에 나가 구입하며 관리 감독하였다.

2.6. 계열사 (2024년 현재)

2.7. 교육

창립 당시 동업자였던 전 국회의원 권영우 씨가 교육 재단을 담당했다. 대원교육재단, 민송학원, 세명학원 크게 3개의 교육 재단이 있다. 세명대학교, 대원대학교, 세명고등학교, 성희여자고등학교, 세명컴퓨터고등학교 총 5개의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2.8. 현재

2014년에 부인상을 당했다. 2024년 현재도 [age(1931-08-0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일 한결같이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KD 운송그룹 홈페이지에서 사보를 열람하다 보면 사내 각종 시상식에서 상을 수여하는 사진과 각급 임원들과 화상회의를 진행하는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다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경기고속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의 대표이사직을 아들인 허상준 사장에게 승계했다. 근데 아들도 환갑이다.

2024년 6월을 끝으로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명예회장이 되었다. 허상준 사장이 회장으로 승진하면서 2세 경영이 시작되었다.

3. 여담

아들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사원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아들의 요양을 위해 사표를 냈다. 몇 년 뒤에 그 사람은 재입사 신청을 하면서 '허 회장과의 학연 및 지연 관계를 생각해달라'며 간곡하게 복직을 요청했지만 허 회장의 지시[30]를 거쳐 인사부에서 냉정히 거절당했다.

그런데 허 회장은 경기도 광주에 있던 그 사원의 집을 예고 없이 직접 찾아갔고, 아들을 목욕시키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원 부부를 봤다. 이후 시간이 흘러 안전운전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허 회장은 그를 직권으로 다시 고용하고 위로금도 지급하였다.

지독한 일 중독으로 유명한데, 50년 넘게 근무하면서 단 16일 밖에 쉬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자녀 결혼식에 참석하고 바로 현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무마취수술까지 할 정도로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탓인 듯.

1977년 부친상 당시 5일, 1979년 조모상 3일, 1986년 백내장 수술 3일로 총 16일, 그리고 2014년 부인상 3일이다.[31] 거기에다 1986년 백내장 수술 당시 의사가 최소 열흘은 쉬어야 한다는 권고도 무시하고 3일 만에 출근했다가 실명할 위기까지 놓여서 지금도 보라색 빛이 도는 보안경을 쓰고 다닌다.

경영면에 있어서는 본사에서 진두지휘하는 것이 아닌, 전국 각지의 영업소, 공장 등의 현장으로 내려가서 지휘하는 현장경영 방침을 고수했다. 2020년 코로나19로 그러한 방식의 근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본사 회장실에서 화상회의를 통해 진두지휘하는 등의 방식으로 업무를 보고 있다.[32]

어찌 보면 일중독의 연장 선상이기도 한데, 비행기 조차 한 번 타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제주도에 가본 적도 없으며, 해외여행도 가본 적도 없고 호화 유흥업소 출입은 물론 골프도 치지 않는다고. 심지어 기업 회장들 다 가지고 있다는 그 흔한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 같은 고가의 서구 외산차 하나 없다고 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오래된 차를 타고 다닌다고.[33]

여행이라곤 아내와 공주 마곡사에 다녀온 것이 전부라고 한다.

승무사원 중에서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직원한테는 5만원을 부모님한테 직접 보내줬다.

4. 수상

  • 1981년 국민포장
  • 1982년 대통령 표창
  • 1987년 새마을 훈장 근면장
  • 2001년 철탑산업 훈장
  • 2005년 대통령 표창
  • 2005년 금탑산업 훈장
  • 2006년 노사문화대상 대통령장
  • 2009년 대통령 표창
  • 2011년 국무총리 표창
  • 2013년 6.25전쟁 정전 60주년 기념 호국영웅장

5. 관련 자료


[1] 경희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가업을 이어 KD 운송그룹에서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2] 광주군 초월면으로 광주에서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라고 한다. [3] 당시 '배차'라는 직책은 터미널에서 출입하는 버스의 주차 정리와 발차 버스를 외치고 다니던 직책으로, 회사 직원은 물론이고 버스 기사와 조수에게도 무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의 부인조차 다른 직장을 알아보라고 설득까지 했었다. [4] 일본에 갔다온 지인들을 통해 일본에는 지하철이 속속 개통하면서 버스업계가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고 들었다. [5] 허명회는 대원여객에서 경기여객 버스 60대까지 인수해 지분이 55%였다. [6] 이 당시에 안동 출신의 자본가인 권영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권영우는 경기여객-대원여객의 설립 과정에서 많은 자본금을 내서 회사의 최대주주였으며 대표이사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경영 자체는 허명회가 주도했지만 결과적으로 권영우는 KD 운송그룹의 최대주주가 되었고 회사의 규모가 갈수록 커지면서 국회의원도 하고 운송업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으로 대원대학과 세명대학교를 설립하여 사학까지 운영하게 되었으니 윈윈인 셈. [7] 물론 잔반을 남기나 안 남기나 감시를 하는건 아니고, 잔반이 계속 나오게 되면 사내식당에 잔반이 계속 나오고 있다면서 공지를 하는 편이다. [8] 사실 이렇게 해도 차마 먹지 못한것들은 국그릇에다가 담아가지고 퇴식구에다가 그냥 두고 간다. [9] 현재 서울고속(충북) [10] 승원여객 의정부 영업소 인수.따라서 이후 12, 13, 712번을 대원여객이 단독 배차했다. [11] 명진여객의 하남ㆍ광주 노선을 인수해왔다. [12] 60번, 65번, 500번 등 인수 [13] 서울( 남부)~안성간 직행노선 인수. [14] 수원~성남간 700번 인수 [15] 이 때 인수받은 36대를 토대로 대원운수가 설립되었다. 이후 2002년 삼용버스가 도산하면서 대원운수는 더욱 성장하게 된다. [16] 720번을 인수해왔다. [17] 마석 강동구 길동을 연결하는 1-4번 남양주시 진접읍 강변역을 운행하는 1, 1-5, 1-8등의 일부 노선 인수 [18] 일부 시외버스 노선 인수. 인천광역시 광역버스는 인강여객이 되었다. [19] 서울 진출입 노선 39번 등 인수 [20] 이를 바탕으로 대원공항을 설립했으나 적자만 보고 2012년 해산. [21] 각 경기버스, 경기운수로 사명 변경. [22] 경기상운으로 사명 변경 [23] 강원도 철원군 동송터미널, 와수리터미널발 노선 운영 [A] 일부 고속/시외노선 인수 [A] [26] KD그룹 최초의 비 수도권 회사 인수 [A] [28] 회사 유니폼의 디자인은 앙드레 김이 손수만든 작품이다. 5년간의 허 회장의 설득 끝에 만들었으며, 앙드레 김이 생전에 유일하게 디자인한 회사 유니폼이라고 한다. 허명회와 앙드레 김 두 명 모두 철저한 자기관리와 경영으로 자신만의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를 이룬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성공시대에 2주를 두고 출현하기도 했다. 또한 KD 운송그룹이 운영하는 경기도 공공버스 제복도 이곳에서 제작되는것으로 추정된다. [29] 공식적으로 세진버스 법인은 2005년에 파산했다. 현 법인은 물적자산만 승계받은 법인이다. [30] 당시 집안이 불안정한 사람은 고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고 한다. [31] 이 때 KD 운송그룹 내 상조회인 KD 상조회에서 허 회장의 장례에 관련된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고 전해진다. KD 운송그룹의 경우에는 모든 직원의 가족 장례 행사의 경우에도 그룹 내 상조회에서 업무지원을 하고, 가족 장례 행사도 회사 업무의 연장이라고 한다. [32] 사옥을 이전하면서 집기를 새로 구매한 것으로 추정. 그 이전에는 대원여객 창립때부터 사용하던 집기들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과거 성공시대에 나왔던 성수동의 그 집기들이 자양동까지 그대로 이어져 온 셈. 다시 성수동으로 돌아갈 때는 새 것을 구매하였다. [33] 벤츠 S클래스를 탄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조옥환 부산교통 대표이사도 오래된 구형 체어맨을 타고다닌다. 자신을 다룬 성공시대 방송분에서 당시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포니1을 차 바닥이 다 벗겨질 정도로 탔었다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