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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계 멕시코인은 한국 혈통의 멕시코인을 말한다. 시초는 1905년에 국제 이민 브로커인 한 영국계 멕시코인[1]과 인력 송출 회사에서 근무하는 일본인 관계자의 감언이설에 속아 멕시코로 건너간 애니깽으로 볼 수 있다.2. 역사
당시 멕시코에서 이민노동자 모집알선 업무를 담당했던, 멕시코 국적을 소유한 국제 이민 브로커 존 마이어스(John G. Myers)는 가장 먼저 중국인과 일본인 노동자를 모집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멕시코 이민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아 모두 실패로 끝났는데 이는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 유카탄의 잔혹한 노예생활에 관한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성공적으로 투입된 한인 노동자들에 대한 소문을 들은 마이어스는 에네켄 농장주들과 함께 조선에 눈독을 들였다.
한인과 일본인의 멕시코 이주 - 20세기 초기 계약이민의 비교 -
한인과 일본인의 멕시코 이주 - 20세기 초기 계약이민의 비교 -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던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의 열강이나 망국의 상징이자 반면교사로 여겨진 베트남[2]과는 달리 멕시코는
북미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水土)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나쁜 병질이 없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바이다. 그 나라에는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근년에 일(日)·청(淸) 양국인이 단신 혹은 가족과 함께 건너가 이득을 본 자가 많으니,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1904년 12월 17일부터 이듬해 1월 13일까지 황성신문에 7차례 실린 멕시코 한인 노동자 모집 광고 문구 #
1904년 12월 17일부터 이듬해 1월 13일까지 황성신문에 7차례 실린 멕시코 한인 노동자 모집 광고 문구 #
광고 내용과는 다르게 당시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 당시 멕시코는 가난한 나라였던 건 둘째치고, 강도가 들끓어서 러시아 출신 이민자들조차 멕시코로의 이민을 기피할 정도로 국토의 대부분이 무법지대인 국가였다. 가난한 나라에 해당되는 멕시코가 이민을 받았던 이유는 노동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3] 당시 멕시코의 디아스 정권이 원주민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족의 노예 등급은 5~6등급,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낮은 값이다. 조각난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도다. 통탄, 통탄이라.
1905년 7월 29일 황성신문 사설
1905년 7월 29일 황성신문 사설
1905년 대한제국에서 멕시코로 약 1천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이주했다. 그러나 1차이민자들이 모집 광고 내용과는 정 반대로 노예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실상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멕시코 이민은 중단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추가 사기이민은 막았으나,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라 이미 멕시코로 인신매매된 사람들은 따로 구출하거나 처지를 개선시킬 방법이 없었다.
멕시코 내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의 경우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자 상당수가 본국으로 귀환하였으나 1910년 경술국치로 애니깽들이 들고 왔던 대한제국 여권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결국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멕시코 현지인들과 동화되었다. 비교하자면 멕시코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상당수가 인종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고향으로 귀환한 반면 조선인들은 돌아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성비가 남자 7 여자 3인 상황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현지인들과 결혼하게 되었다.
애니깽 1세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한글학교를 세우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자금을 마련하면서 자금을 보내기도 했다. 1921년 멕시코내 한인들이 그나마 멕시코보다는 낫던 쿠바로 이주하기도 했고 미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4]
1960년대에 한국과 멕시코가 수교하면서 멕시코로 출장, 체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일부 한국인들이 멕시코에 정착했다.
3. 문화
3.1. 언어
20세기 초반 이주한 한인 후손들은 멕시코인들로 동화되어 스페인어가 모국어이지만, 2000년대 이후, 대한민국/경제가 멕시코를 압도하면서 한국어를 다시 배우는 경우가 늘고 있다.20세기 후반 사업차 혹은 유학차 체류하는 사람들은 한국어와 영어, 스페인어가 다 가능한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미국 텍사스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태권도를 가르치려고 멕시코에 와서 정착한 문대원 관장이 있다.
4. 규모
오늘날에는 멕시코 측에서 애니깽 후손 수가 3~5만여 명은 될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는데, 2020년 기준으로 멕시코의 인구가 10배, 미국이주민까지 합치면 13배 정도 늘어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냥 모계쪽까지 합산해서 포함된 수치로 보인다. 원래 라틴아메리카의 인구 관련 통계는 선진국 출신인 경우면 다소 부풀려진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5]미국의 경우 응답자가 독일계 미국인인지 혹은 영국계 미국인인지 관련한 통계를 낼 때 자가응답에 기초하여 통계 결과를 발표하는 반면,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대표적으로 브라질의 경우는 흑인 인구는 최대한 축소해서 발표하지만 독일계나 이탈리아계, 레바논계 브라질인[6] 인구 통계를 낼 때는 정치외교적 목적으로 아마도 몇백, 몇천만 명 아닐까 라는 식으로 최대치에 가깝게 때려 맞추는 편이다. 물론 이런 점에서는 아르헨티나나 멕시코도 별반 이와 다르지 않다.
비교하자면 멕시코에서 1921년 쿠바로 다시 이주한 한인 인구는 288명이었고 2021년 기준 이들의 후손이 1~2천여 명이라고 한다. #
5. 관련 문서
6. 외부 링크
[1]
구한말 당시 한인들의 멕시코 이민 관련 기사에서 언급되는 존 마이어스가 해당 영국계 멕시코인 이민 브로커의 이름이다.
[2]
이 당시에 병인양요 이후로 베트남의 사례가 주목받아 지식인층사이에서
월남망국사라는 책이 히트쳤고, 민중들 사이에서도 월남하면 국력자강에 실패해서 프랑스에 병합된 나라라는 이미지였다. 그로부터 75여 년 후 베트남 민주공화국(현 베트남의 전신)에 의한 베트남 공화국의 멸망으로 한국 사회에 또 다른 경고성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3]
물론 이 당시 멕시코의 인구는 대한제국보다 적었고,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땅을 많이 빼았겼어도 남은 땅도 상당히 넓어 미국, 캐나다, 호주만은 아니지만 땅이 많이 널널하기는 했다. 그걸 잘 써먹지 않아서 문제였던 것.
[4]
다만 1960년대 쿠바 공산화 이후 쿠바 이주 애니깽들은 쿠바에 발이 묶이게 된다.
[5]
애니깽 후손 인구가 5만여 명이나 된다면 주멕시코 한국대사관 등의 주최로 애니깽 후손 초청 행사를 할 때 적어도 수천수백명이 모여야 정상인데, 행사 관련 사진을 보면 많아야 수십명 정도만 모여있다.
[6]
브라질에서는 브라질 내 레바논인 인구가 700만명이라 레바논 본토 인구보다 많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통계를 놓고 보자면 1884년부터 1933년까지 13만여 명 정도의 레바논인들이 브라질로 이민하였고, 13만명이 하레디처럼 애를 마구 낳지 않는이상 수십년만에 700만 명으로 불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도 혼혈된 사람을 포함하면 최대치로 700만 명도 될 수 있다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