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프랑스 군주들의 정보이다. 보통 프랑크 왕국 때 군주들도 프랑스 군주들에 포함된다.
1. 프랑크인의 왕
군주 이름 | 재위 | 비고 |
파라몽 | 410? ~ 426? |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 |
클로디오 | 426? ~ 447? | |
메로베우스 | 447? ~ 458? | 메로빙거 왕조의 창시자 |
킬데리크 1세 | 458 ~ 481 | |
클로비스 1세 | 481 ~ 511 | 프랑크 왕국 건국, 메로빙거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 |
킬데베르 1세 | 511 ~ 558 | 프랑크 왕국 일시 분열 - 테우데리크 1세 등 |
클로타르 1세 | 558 ~ 561 | 프랑크 왕국 재통일 |
카리베르 1세 | 561 ~ 567 | 프랑크 왕국 파리 분국의 분국왕 |
분 열 기 (567 ~ 584) - 킬페리크 1세, 킬데베르 2세, 테우데리크 2세 등 | ||
클로타르 2세 | 584 ~ 629 | 프랑크 왕국 재통일 |
다고베르 1세 | 629 ~ 639 | 프랑크 왕국 재분열 - 킬데베르 3세 등 |
클로비스 2세 | 639 ~ 658 | |
클로타르 3세 | 658 ~ 670 | |
킬데리크 2세 | 673 ~ 675 | |
다고베르 2세 | 675 ~ 679 | 아우스트라시아 분국왕 |
테우데리크 3세 | 679 ~ 691 | |
클로비스 4세[1] | 691 ~ 695 | |
킬데베르 4세 | 695 ~ 711 | |
다고베르 3세 | 711 ~ 715 | |
킬페리크 2세 | 715 ~ 721 | |
테우데리크 4세 | 721 ~ 737 | |
카롤루스 마르텔 | 737 ~ 741 | 국왕 대행 |
킬데리크 3세 | 741 ~ 751 | 메로빙거 왕조 종식 |
피핀 3세[2] | 751 ~ 768 | 카롤링거 왕조 개막 |
카롤루스 대제 | 768 ~ 814 | 대제 |
루도비쿠스 1세 | 814 ~ 840 | 사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 분열, 경건왕 |
2. 서프랑크인의 왕
군주 이름 | 재위 | 비고 |
샤를 2세 | 840 ~ 877 | 서프랑크 국왕으로 현 프랑스의 시조, 별명 대머리왕 |
루이 2세 | 877 ~ 879 | 별명 말더듬이왕 |
루이 3세 | 879 ~ 883 | |
샤를로망 | 882 ~ 884 | 루이 3세와 공동왕 |
샤를(3세)(비정통) | 884 ~ 888 | 동프랑크의 왕, 샤를 3세와 구분하기 위해 별명 뚱보왕을 붙임 |
외드 | 888 ~ 898 | 파리 백작, 서프랑크의 귀족들에 의해 추대 |
샤를 3세 | 898 ~ 922 | 별명 단순왕, 루이 2세의 아들 |
로베르 1세 | 922 ~ 923 | 파리 백작, 외드의 동생 |
라울 | 923 ~ 936 | 로베르 1세의 사위 |
루이 4세 | 936 ~ 954 | 별명은 도래왕, 별명 그대로 잉글랜드에서 프랑스로 건너와 왕이됨 |
로테르 | 954 ~ 986 | |
루이 5세 | 986 ~ 987 | 별명 무위왕, 카롤링거 왕조 종식 |
3. 프랑스 국왕
군주 이름 | 재위 | 비고 |
위그 카페 | 987 ~ 996 | 로베르 1세의 손자, 카페 왕조 개막 |
로베르 2세 | 996~1031 | 별명 경건왕 |
앙리 1세 | 1031~1060 | |
필리프 1세 | 1060~1108 | 별명 단려왕(端麗王) |
루이 6세 | 1108~1137 | 별명 비만왕 |
루이 7세 | 1137~1180 | 별명 작은 루이 |
필리프 2세 | 1180~1223 | 별명 존엄왕 |
루이 8세 | 1223~1226 | 별명 사자왕 |
루이 9세 | 1226~1270 | 제6차, 제7차 십자군 지휘, 별명 성왕(聖王) |
필리프 3세 | 1270~1285 | 별명 용담왕(勇膽王) |
필리프 4세 | 1285~1314 | 아비뇽 유수를 일으킴, 별명 단려왕 또는 미남왕 |
루이 10세 | 1314~1316 | 별명 완고왕 |
장 1세 | 1316 | 유복자로 태어나자마자 즉위하나 생후 5일 만에 사망, 별명 유복자왕 |
필리프 5세 | 1316~1322 | 별명 장신왕 |
샤를 4세 | 1322~1328 | 카페 왕조 종식, 별명 단려왕, 미남왕 |
필리프 6세 | 1328~1350 | 발루아 왕조 개막, 백년전쟁 발발 |
장 2세 | 1350~1364 | 자크리 반란과 브레티니 화약, 별명 선량왕 |
샤를 5세 | 1364~1380 | 군사, 경제, 문화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김, 별명 현명왕 |
샤를 6세 | 1380~1422 | 별명 친애왕(親愛王) |
샤를 7세 | 1422~1461 | 백년전쟁 승리, 별명 승리왕 |
루이 11세 | 1461~1483 | 프랑스 절대 왕정의 기반을 튼튼히 다짐, 별명 신중왕 |
샤를 8세 | 1483~1498 | 이탈리아 전쟁 시작, 발루아 왕조 직계 단절, 별명 정중왕 |
루이 12세 | 1498~1515 | 발루아-오를레앙 왕조[3] 개막 및 종식, 별명 인민의 아버지(Père Du Peuple) |
프랑수아 1세 | 1515~1547 |
발루아-앙굴렘 왕조 개막,
카를 5세와 패권 다툼 군사적으로는 콩라인이었으나, 문학, 경제, 교육, 건축 등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성군 별명 기사왕 |
앙리 2세 | 1547~1559 | 마상창시합에서 사고사 |
프랑수아 2세 | 1559~1560 | 스코틀랜드 메리 1세의 첫 남편 |
샤를 9세 | 1560~1574 |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로 위그노 전쟁 발발 |
앙리 3세 | 1574~1589 | 발루아 왕조[4] 종식 |
앙리 4세 | 1589 ~ 1610 |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사위,
부르봉 왕조 개막 위그노 전쟁의 뒷수습을 훌륭히 하여 앙리 대왕이라고 불림, 별명 선량왕, 대왕 |
루이 13세 | 1610 ~ 1643 | 앙리 4세와 두 번째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의 아들, 별명 공정왕 |
루이 14세 | 1643 ~ 1715 | 대왕, 별명 태양왕[5] |
루이 15세 | 1715 ~ 1774 | 루이 14세의 증손자, 별명 친애왕 |
루이 16세 | 1774 ~ 1792 | 루이 15세의 손자, 프랑스 혁명로 부르봉 왕조 일시 종식 |
( 루이 17세) | - |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들 정식 즉위는 안 했으나,[6] 삼촌 루이 18세가 섭정을 자처하여 국왕 목록엔 포함 |
4. 프랑스인의 황제 (제1제국)
군주 이름 | 재위 | 비고 |
나폴레옹 1세 | 1804 ~ 1814 | 보나파르트 왕조, 프랑스 제1제정 시작 |
5. 프랑스 국왕 (1차 왕정복고)
군주 이름 | 재위 | 비고 |
루이 18세 | 1814.4.11 ~ 1815.3.20 | 부르봉 왕정복고, 루이 16세의 동생 |
6. 프랑스인의 황제 (백일천하)
군주 이름 | 재위 | 비고 |
나폴레옹 1세 | 1815.5.20 ~ 1815.6.22 | 엘바 섬 탈출로 복위, 백일천하 |
( 나폴레옹 2세) | 1815.6.22 ~ 1815.7.7 | 나폴레옹 1세의 아들 |
7. 프랑스 국왕 (2차 왕정복고)
군주 이름 | 재위 | 비고 |
루이 18세 | 1815.7.8 ~ 1824 | 복위 |
샤를 10세 | 1824 ~ 1830 | 루이 16세의 막내 동생으로 7월 혁명으로 퇴위 |
( 루이 19세) | 1830.8.2 | 명목상의 국왕으로 20분간의 왕. 루이 16세의 딸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의 남편 |
( 앙리 5세) | 1830.8.2 ~ 1830.8.9 | 명목상의 국왕, 샤를 10세의 손자로 샤를 10세와 함께 해외도피, 부르봉 왕조 직계 단절 |
8. 프랑스인의 왕
군주 이름 | 재위 | 비고 |
루이필리프 1세 | 1830.8.9 ~ 1848.2 | 부르봉-오를레앙 왕조 개막 및 종식, 7월 혁명으로 즉위했으나, 1848년 혁명(2월 혁명)으로 퇴위 |
9. 프랑스인의 황제 (제2제국)
군주 이름 | 재위 | 비고 |
나폴레옹 3세 | 1852 ~ 1870 | 프랑스 제2제정 |
[1]
클로비스 3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프랑크 전체의 왕이 되지는 못했으나 넘버링은 이어졌다.
[2]
피핀 1세와
피핀 2세는 각각 피핀 3세의 증조부, 조부이다.
[3]
발루아-오를레앙 왕조, 발루아-앙굴렘 왕조 모두 발루아 왕조로 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발루아 왕조의 분가이다.
[4]
정확히는 발루아-앙굴렘 왕조
[5]
자칭이라는 설이 있다.
[6]
즉위를 하고 싶어도 못한 게 본인이 탕플 탑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루이 16세가 사망한 다음 날 일단 왕당파에 의해 명목상의 국왕으로 옹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