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4:40:34

태평양 전쟁/경과




1. 개요2. 개전 이전
2.1. 중일전쟁2.2. ABCD 포위망2.3. 코 창 해전
3. 1941년4. 1942년5. 1943년6. 1944년7. 1945년

1. 개요

태평양 전쟁/경과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개전 이전

2.1. 중일전쟁

중일전쟁은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 본토를 침략하며 시작된 전쟁으로, 아시아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초전이였다. 전쟁은 1937년 7월 7일에 발생한 루거우차오 사건(루거우차오/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에서 촉발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군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군대 간 충돌로 인해 확전되었으며,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해 본격적인 중국대륙 침공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대규모 공격을 퍼부었고, 이때 난징 대학살이라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사건에서 수십만 명의 중국 민간인이 학살당하고 잔혹한 범죄가 자행되었으며,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본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전쟁의 초기에는 중국이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국민당 정부와 중국 공산당의 협력 아래 항일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운다.(국공합작)

미국, 소련 등 주요 열강들도 중국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고, 1941년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곧 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아시아 전선으로 확대되었다.

2.2. ABCD 포위망

ABCD 포위망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일본의 군사적 확장과 경제적 야망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America), 영국(Britain), 중국(China), 네덜란드(Dutch) 등 네 나라가 결성한 포위 정책을 말한다. 일본은 1930년대 이후 만주 사변과 중국 침략 등으로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연합국들은 일본의 확장을 막기 위해 경제적 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가하게된다.

ABCD 포위망의 주요 내용은 일본에 대한 석유와 철강 등 주요 자원의 금수 조치였다. 당시 일본은 국내 자원이 부족하여 해외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에 이러한 금수 조치는 큰 타격을 주었고, 이에 일본은 자원 확보를 위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침략의 범위를 넓히려 했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석유가 풍부한 지역으로, 네덜란드령이었던 이곳을 확보하는 것이 일본의 전략적 목표가 되었다.

이 포위망은 일본의 경제를 고립시키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 확보를 어렵게 만들어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게.된다. 결국 일본은 이러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1941년 12월 7일,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아시아 전선이 본격화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2.3. 코 창 해전

코 창 해전은 1941년 1월 17일, 태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재 베트남)의 해상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당시 동남아시아는 유럽 열강의 식민지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럽 전선이 복잡해지자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도 여러 갈등이 발생했다. 당시, 태국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영토 야망을 품고 있었고, 프랑스는 일본과의 협정을 통해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전투는 태국 해군이 코 창 섬 인근에서 프랑스 해군과 충돌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 해군은 항공기와 구축함을 동원하여 태국 해군을 공격했고, 태국 해군은 열세에 놓여 결국 패배하게 된다. 코 창 해전에서 프랑스군은 주요 해군 전력을 과시하며 태국을 제압했고, 이를 통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나갔다.

이 해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진 해상 충돌 중 하나로, 태국이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3. 1941년

태평양 전쟁은 일본 제국이 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었으며, 특히 1941년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전쟁이 본격화된다. 전황은 초기 일본군의 공세에서 점차 연합국의 반격으로 전환되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일본 내 긴급 속보 방송[1]
臨時ニュースヲ申シ上ゲマス。臨時ニュースヲ申シ上ゲマス。大本榮陸海軍部、12月8日午前6時發表。帝國陸海軍ハ、本8日未明、西太平洋ニ於ヒテ、アメリカ、イギリス軍ト戰鬪狀態ニ入レリ。帝國陸海軍ハ、本8日未明、西太平洋ニ於ヒテ、アメリカ、イギリス軍ト戰鬪狀態ニ入レリ。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본영 육해군부에서 오전 6시 발표. 제국 육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서태평양에서 미국, 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섰음. 제국 육,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서태평양에서 미국, 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섰음.
1941년(쇼와 16년) 12월 8일 오전 7시, 라디오 임시 뉴스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의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한다. 이 공격으로 인해 미국 태평양 함대의 주요 전함과 항공기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진주만 기지에 주둔하던 미군의 방어력은 악화된다. 또한, 미국의 태평양 지역 군사력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에 12월 8일 진주만 공격의 여파로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 연합국은 일본에 대해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다.
 
일본군은 12월 8일 새벽에 공격을 시작하여, 신계와 카오룽 반도를 빠르게 점령한다. 홍콩 섬으로 후퇴한 연합군은 계속된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방어를 시도했지만, 물자와 인력 부족으로 인해 점차 고립된다. 일본군은 점차 홍콩 섬으로 진입하면서, 연합군의 방어선을 압박하였고, 연합군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항복하게 되었으며, 홍콩은 일본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2]

홍콩을 잠령한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남방작전을 개시한다. 먼저, 일본군은 말레이반도를 공격하여 영국군을 격퇴하고 싱가포르로 진격하여, 교전끝에 함락시킨다.[3] 다음으로 필리핀을 향해 진격한다. 당시 필리핀은 미국령이었으며, 일본군은 필리핀에서 미군과 필리핀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필리핀 역시 함락된다.[4]
그 뒤, 일본은 자바, 수마트라, 보르네오 등 섬 지역을 공격하여 네덜란드군을 물리치고 인도네시아 점령과 함께 자원을 확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일본군은 버마(미얀마)를 통해 인도로 가는 경로를 확보하려 했고, 이로 인해 버마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버마 역시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태평양 방면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괌의 해군 기지와 해안 지역을 폭격하며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괌의 방어군은 소수였으며, 방어 시설도 빈약했던 탓이라 일본군의 공습에 큰 피해를 입게 되고, 12월 10일자로 일본군은 함선을 이용해 괌의 해안에 상륙하여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한다. 현지 해병대와 방위군이 저항했으나 병력과 장비에서 열세였기에 짧은 전투 끝에 괌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게 된다. 전투는 일본의 신속한 승리로 끝났다.[5]

또한, 일본은 웨이크섬의 방어 시설과 비행장 역시 공습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섬에 주둔한 항공기의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웨이크섬 방어에 큰 어려움이 발생했고, 일본군은 해상에서 웨이크섬에 상륙을 시도했으나, 해병대와 해안포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한다. 일본의 첫 번째 상륙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치루면서 첫 승리를 얻게 된다. 12월 23일, 일본은 두번째 상륙을 시도한다. 일본군은 병력과 장비를 보강한 후 다시 상륙을 시도했고, 항공 지원과 함께 공격한 덕에 웨이크섬을 점령하게 된다.

일본은 그 뒤에도 승기를 잡아나간다. 콜롬보를 공습하면서 실론 해전이 벌어지며, 일본 제국 해군은 항공모함 5척을 포함한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실론의 콜롬보 항구를 공습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 항공대는영국 순양함 도르세트셔(HMS Dorsetshire)와 코넬월(HMS Cornwall)을 격침시켰다. 4월 8일에는 트린코말리 공습이 이루어 진다. 일본은 실론 동부의 주요 항구인 트린코말리도 공습했고, 이 공격으로 항구와 항공 시설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영국 항공모함 허미즈(HMS Hermes)와 호위 구축함 뱀파이어(HMAS Vampire)도 격침되었다. 이렇게, 영국 함대는 큰 타격을 입고, 궤멸당하게 된다.(대영동양함대궤멸)

4. 1942년

1942년 초에는 일본군이 우세하였으나, 1942년 말부터 연합군은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본격적으로 반격을 개시하여 점령된 지역을 차츰 탈환해 나간다. 이러한 연합군의 성공적인 반격은 일본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며, 전세를 연합국 쪽으로 유리하게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42년 2월 19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를 발표한다. 당시 미국 본토에 대한 일본의 공격 가능성과 안보 위협에 대한 우려 때문에 시행되었고, 이 명령을 통해, 미국의 군사 당국은 특정 지역을 군사 보호 구역으로 설정할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서부 해안에 거주하던 일본계 미국인 약 12만 명을 강제 수용소로 이주시키는 계기가 된다.

1942년 4월 18일에는 미국은 일본 도쿄와 주요 도시를 공습하였다. 이 공습은 진주만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이루어졌으며, 미국의 항공모함 *호넷*(USS Hornet)에서 16대의 B-25 폭격기가 이륙해 일본 본토를 폭격했습니다. 작전의 지휘관이었던 지미 둘리틀 중령의 이름을 딴 "둘리틀 특공대"는 성공적으로 폭격을 마무리하게 되며, 일본에게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안겨다 준다.[6]

그 뒤, 1942년 5월 4일부터 5월 8일까지는 태평양 전쟁 중 호주 북동쪽 산호해에서 미국 해군과 일본 해군 간에 벌어진 해전이 벌어진다. 전투는 주로 항공기를 통해 공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본은 포트모르즈비(뉴기니 남부)를 점령해 남태평양에서의 군사적 영향력을 넓히려 했지만, 미군과 호주군의 저항에 부딪치게되고, 이 해전에서 미국은 항공모함 렉싱턴(USS Lexington)을 잃고 요크타운 (USS Yorktown)이 크게 손상되는 피해를 입게 된다. 일본 또한 항공모함 쇼카쿠(Shokaku)가 큰 손상을 입고, 즈이카쿠(Zuikaku) 항공모함의 항공기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렇게, 산호해 해전은 일본의 포트모르즈비 점령 계획을 저지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연합군에게 중요한 승리로 간주된다.[7]

그 뒤, 1942년 6월 4일부터 6일까지 태평양에서 미국 해군과 일본 해군 간의 미드웨이 해전이 벌어진다. 일본은 미드웨이 제도를 점령하여 태평양에서의 군사적 우위를 강화하려고 하였으나, 미국은 일본의 공격 계획을 암호 해독을 통해 사전에 파악하고, 방어 작전을 준비했다.

6월 4일, 일본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미드웨이 섬을 공격했지만, 미군은 잘 준비된 방어로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역으로 일본의 항공모함 아카기(Akagi), 카가(Kaga), 소류(Soryu), 헤이류(Hiryu)가 미군의 공격으로 격침되면서 일본 해군은 큰 손실을 입게 된다.
[8]

미드웨이 해전에 패배한 일본은 조그마한 성과라고 올리기 위해 고분군투한다. 이에 일본군은 1942년 알류샨 열도의 키스카와 아투섬을 점령한다.[9]

파푸아 뉴기니에서도 전투가 벌어지는데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호주 군대와 연합군이 싸운 전투로, 험준한 지형과 악천후 속에서 벌어졌으며, 극심한 고통과 희생을 동반되었다. 결국 연합군은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전선에서 일본의 전략을 약화시킨다. 앞서 언급한 코코다 트랙 전투의 일환으로 일본군과 연합군 사이에 부나 - 고나 전투가 벌어지게 되며, 연합군은 일본군의 방어선을 뚫고 부나와 고나를 탈환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 전투는 극심한 고립과 열악한 식량 상황 속에서도 계솓해서 이어졌으며, 결국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과달카날 전역에서도 치열한 전투들이 벌어진다. 1942년 8월부터 진행된 연합군과 일본군 간의 치열한 싸움으로, 과달카날 섬에 위치한 헨더슨 비행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 전투는 항공 및 해상 통제를 목표로 한 전략적 요충지 확보를 위해 연합군이 일본군과 맞섰던 일련의 전투들로 구성되어진다. 이 전역은 미군과 연합군이 최초로 일본군의 점령 지역을 탈환한 전투로, 태평양 전쟁의 흐름을 연합군 쪽으로 크게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42년 8월 8일 부터 9일까지 과달카날 전역 중 초기에 1차 솔로몬 해전(사보섬 해전)이 벌어진다. 여기서 일본 해군은 연합군에 대해 기습을 가해 성공하였으며, 일본군은 솔로몬 제도의 사보섬 근처에서 미군과 호주 군함을 공격하여 다수의 함선을 격침시켰다. 이 해전에서 연합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10]

1942년 8월 24일부터 25일까지 과달카날 전역에서 2번째 솔로몬 해전이 벌어진다. 과달카날 섬을 놓고 벌어진 해전이며,미군은 헨더슨 비행장의 제공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 함대의 지원을 저지하려 했고, 일본군은 과달카날의 연합군에 대한 반격을 위해 함재기와 함대를 동원했다. 일본 함대는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으나, 미군의 함재기와 방공 시스템이 일본 항공기를 격퇴하는 데 성공하며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게 되고, 일본 해군이 상당한 손실을 입으며 과달카날 전역의 전략적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1942년 11월 12일부터 15일까지 과달카날 전역에서 3차 솔로몬 해전이 벌어진다. 과달카날 섬의 헨더슨 비행장에 대한 일본군의 대규모 육상 및 해상 반격을 연합군이 저지한 치열한 전투로,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과달카날을 탈환하기 위해 전함과 구축함, 그리고 항공 전력을 대규모로 동원해 헨더슨 비행장을 공격하려 한다. 하지만, 미군 함대와 항공 전력이 이를 격퇴하며, 미군이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전투 이후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의 공격 작전을 중단하고 방어로 전환했으며, 결국 과달카날 전역에서 후퇴하게 된다.

5. 1943년

1943년은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이 된 해였다. 연합군이 과달카날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군을 압박하며 반격을 강화해나간다. 이 시기 연합군은 "섬 점령 전략"을 통해 태평양 상의 주요 섬을 하나씩 확보해 나가며, 일본의 보급로와 방어선을 차단해나갔다.

1943년 3월 2일부터 3월 4일까지 호주와 미국 공군이 비스마르크해에서 일본 해군 및 육군의 수송선단을 공격해 큰 승리 거두게 된다. 이로 인해 뉴기니섬에 병력을 보급하려던 일본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 전투에서 일본의 보급선단을 거의 전멸되었고, 일본군이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 지역에서 고립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 뒤, 1943년 5월 11일부터 5월 30일까지 알래스카 서쪽 알류샨 열도의 애투 섬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 미군은 애투 섬에 상륙하여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는 험난한 기후와 지형, 그리고 일본군의 치열한 저항으로 인해 미군에게 어려운 전투였으며, 특히 일본군은 마지막까지 항복하지 않고 반자이 돌격을 감행하면서 전투를 이어나간다. 미국군은 애투 섬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높은 사상자를 내며 타격을 입었다.[11]

1943년 7월 13일에는 솔로몬 제도에서 벌어진 해상 전투가 벌어진다. 일본군과 미군, 그리고 연합군 간의 전투였으며, 과달카날 전역의 일부로 솔로몬 제도에서의 해상 지배권을 놓고 격돌한 전투로,  전투는 콜롬방가라 섬 인근 해역에서 발생하였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집중 어뢰 공격을 통해 연합군 함대를 강타하여 큰 피해를 입혔고, 특히 미국측은 경순양함 호놀룰루와 세인트루이스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뉴질랜드측은 경순양함 리앤더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군 역시 구축함 여러 척이 격침되면서 손실을 입게돠고, 결정적으로 보급에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되어 결국 솔로몬 제도 전역에서 전략적으로 밀리게 된다.

1943년 11월 20일부터 11월 23일까지는 길버트 제도의 타라와 환초에서 벌어진 격렬한 상륙 전투가 벌어진다. 미 해병대는 상륙 전 폭격과 포격으로 일본군의 방어선을 무력화하려 했으나, 일부 방어시설은 여전히 파괴되지 않았고, 특히 산호초 지형이 상륙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미 해병대는 LVT 상륙 돌격 차량을 사용해 상륙했으나, 많은 병사들이 산호초에서 좌초되거나 해변에서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 큰 희생을 치루게 되었으나, 76시간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미 해병대는 타라와를 점령했다.

마지막으로, 1943년 11월,  호주군은 일본군이 장악한 부건빌 섬 내륙의 밀림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지속적인 공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저항했으나 보급 부족과 고립으로 점차 약화되었고, 최종적으로 부건빌 섬에 있던 일본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항복하지 않고, 종전 후에야 무기를 내려놓게 된다.

6. 1944년

1944년은 태평양 전쟁의 판도가 결정적으로 연합군에게 유리해진 해였다. 연합군은 주요 거점을 점령하며 일본군의 전력을 약화시켰고,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기지들을 확보해나갔다.

1943년 12월 26일, 연합군은 일본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라바울을 포위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이에 미국 제1해병사단은 글로스터 곶에 상륙하여 일본군과 격렬한 교전을 벌였다. 밀림 지형과 악천후가 이어져 전투가 매우 힘든 상황에서 이루어졌으나, 해병대의 끈질긴 진격으로 일본군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고, 승리를 거두게 된다.[12]

1944년 2월 17일부터 18일 사이에는 헤일스톤 작전이 진행되어 진다. 미국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비행기들이 일본 해군의 항공 기지와 선박에 대한 대규모 공중 폭격을 실시하였고, 일본의 수송선, 군함, 항공기 및 군사 시설등이 다수 파괴된다.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일본의 항공 능력과 해상 작전이 큰 타격을 받는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1944년 3월부터 7월까지 인도 북동부의 임팔과 코히마 지역에서 작전을 진행한다. 일본군은 임팔과 코히마를 주요 목표로 삼아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는데, 연합군의 방어선이 단단히 구축되어 있어 격렬한 전투를 치뤄야만 했다. 일본군은 임팔을 포위했으나, 1944년 6월, 연합군이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어버린다. 일본군은 많은 인명 피해와 함께 후퇴했다.

설상가상으로 사이판 섬마저 빼앗기게 된다. 1944년 6월 15일부터 7월 9일까지 진행된 사이판 전투에서 미국 해병대는 사이판 섬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1944년 6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틀 동안 진행되어진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군은  약 400기의 항공기를 잃고, 항공 모함 3척(신호, 타카오, 쿄카이)을 침몰되는 궤멸적 피해를 입게 된다.[13]

일본의 패전은 계속해서 진행된다. 1944년 7월 21일부터 8월 10일까지 괌 섬에서 진행된 전투에서 미국은 괌을 재탈환하는데 성공한다. 1944년 9월 15일부터 11월 27일까지 진행된, 펠레리우 전투에서 미국 해병대가 승리하면서 펠레리우 섬이 미국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1944년 9월 17일부터 10월 30일까지 진행된 앙가우르 전투에서도 역시 미군이 승리하게 되면서 섬을 빼앗기게 된다.

그 뒤 대만 항공전이 진행된다. 이 전투는 태평양 전선에서 진행된 항공 전투로, 주일본의 대만 섬과 주변 지역에서의 항공 우세를 확보하기 위한 일본군의 작전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의 작전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은 일본의 공군 작전을 차단하고 대만 주변에서의 항공 우세를 확보하여, 필리핀과 본토 공격을 위한 전초 기지를 마련하고자 했다. 일본군은 대만에서의 방어를 강화하고, 공중에서의 우세를 유지하기 위해 공중 작전을 수행했고, 미국군은 항공모함을 통해 일본의 공군 기지 및 군사 시설을 공습하며, 공중 우세를 확보하기 위한 공세를 강화했다.그 결과,일본군의 방어력이 저하되면서, 미국군이 대만 지역에서의 항공 우세를 점차 확립나가게 된다.[14]

또한, 1944년 10월 23일부터 26일까지 전투가 진행되었고, 연합군은 필리핀 탈환 작전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일환으로 레이테 만을 목표로 삼게 된다. 킬리 비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강력한 전투 함대가 미국의 경함대에 접근하자, 미국 해군은 숫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반격을 감행하여 일본의 전투함을 손상시킨다.그 뒤에 벌어진 산타 크루즈 전투는 미국 항공모함과 일본의 항공모함 간의 대규모 항공 전투로 일본 해군의 항공력은 크게 약화되게 된다. 마지막으로 레이테 만 전투가 벌어지게되고, 일본 해군은 레이테 만에 대한 미국의 상륙 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여러 전투를 펼쳤지만, 미국 해군의 항공 지원과 해상 작전 덕분에 일본 해군은 큰 피해를 입게된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은 항공모함 4척과 많은 전투기를 잃었고, 미 해군의 우세가 확고해졌다.[15]

7. 1945년

1945년은 태평양 전쟁의 최후가 되는 해였다. 연합군은 일본 본토에 근접하며 막대한 희생을 치렀고, 일본군은 마지막까지 극렬히 저항했으나 전쟁의 흐름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였다. 이 해는 필리핀 해방 작전의 최종 완결,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 그리고 원자폭탄 투하, 만주전략공세로 일본이 항복하는.해이다. 1945년의 주요 사건들은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국면을 이루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식을 이끌었다.

1945년 2월부터 3월까지 필리핀을 탈환하기 위해 마닐라 전투가 벌어지며, 미국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나게 된다. [16]

1945년 2월 19일에 미군은 이오지마 섬에 대한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이오지마 섬은 일본 본토에서 약 1,200km 떨어진 곳으로, 미국이 일본 본토 공습을 위한 중간 기지로 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수많은 방어 시설을 구축해 놓았고, 미군은 이오지마에서 극심한 저항을 맞이하게 된다.

일본군은 지하 터널과 요새를 활용해 미군의 공격을 방어했으며, 무리한 돌격 대신 방어적인 전술을 펼쳤다. 미군은 항공기와 함포를 동원해 섬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철저한 방어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오지마 전투는 약 한 달 동안 이어졌으며, 미군은 26,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일본군 역시 거의 전원이 전사하는 등 치열한 교전이 이루어졌다.

또한, 미국은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을 통해 일본의 전쟁 능력을 약화시키고,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고자 했다. 이에 1945년 3월 9월부터 10일까지 도쿄 공습을 진행하게 된다. 미국의 B-29 폭격기가 도쿄를 대상으로 대규모 화재 폭격을 감행하였고, 이 공격으로 일본의 산업 및 군사 시설에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후에도 미국은 여러 도시를 목표로 한 공습을 계속하였다. 주요 도시와 산업 지역을 공습함으로써 일본의 생산 능력을 감소시키고, 군사적 지원을 약화시켰고, 일본의 방공망 역시 계속해서 약화되어갔다.

1945년 4월 1일부터 시작되어 6월 말까지 약 82일간 지속된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이자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오키나와 섬은 일본 본토에서 5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전략적 거점이였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183,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오키나와 전투는 "강습 작전"으로 불리며 대규모 상륙과 치열한 지상전이 이어졌다.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은 극렬한 저항을 펼쳤으며, 일본군은 섬 전역에 방어선을 구축했고, 무리한 돌격 대신 지하 터널과 요새에서 방어하면서 연합군을 지연시키는 전술을 펼쳤다. 또한, 일본군은 자살 특공대인 "가미카제"를 이용해 미 해군 함대를 공격했으며, 가미카제 공격으로 인해 미국 해군은 상당한 손실을 입게 된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연합군의 피해도 컸다. 미군은 약 12,000명의 전사자와 36,000명의 부상자를 기록했으며, 일본군은 약 100,000명의 병력을 잃게 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과 민간인 수십만 명이 희생되었고, 오키나와는 폐허가 되었다.

오키나와 전투의 결과, 연합군은 일본 본토에 대한 최종 침공을 위한 전진 기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일본 본토는 연합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이 전투는 일본 내에서도 큰 충격을 주었고, 일본이 전쟁을 계속하기 힘들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연합군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자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기 위해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전쟁을 종결시키기로 결정하였고,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했다. 그래도 항복을 선언하지 않자, 8월 9일, 미국은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원자폭탄의 끔찍한 위력과 더불어 소련이 만주를 침공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자,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고, 항복을 한다.
[1] 영상 초입부의 노래는 일본 제국 해군 군가 바다에 가면, 영상 마지막의 노래는 일본 제국 해군 군가 군함행진곡(일본)이다. [2] 그래서 이 날을 "블랙 크리스마스"라고도 부른다. 이후 홍콩에서는 일본의 강압적인 통치와 점령이 이어졌다. [3] 싱가포르 함락은 1942년 2월에 이루어진다. [4] 필리핀은 1942년 5월에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5] 괌은 일본의 지배 하에 들어갔으며, 이로 인해 일본은 태평양 중부 지역에서 군사적으로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다. [6] 다만, 폭격 이후 대부분의 폭격기들은 연료가 부족해 중국으로 불시착하거나 추락했으며, 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잡히거나 목숨을 잃었다. [7] 이 해전은 이후 미드웨이 해전으로 이어지며, 태평양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8] 미국은 이 해전에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반격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9] 하지만, 1943년 미국과 연합군의 반격으로 아투섬을 빼앗기게 된다. [10] 하지만, 과달카날 전역 전체에서는 연합군이 전략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다. [11] 애투 섬 전투는 미국 영토 내에서 벌어진 유일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이후 미군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키스카 섬으로 진격한다. [12] 이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방어력 약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있다. [13] 필리핀 해 해전은 제 2의 미드웨이 해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14] 이 전투는 이후 필리핀과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한 발판으로 작용하게 된다. [15] 레이테 만 해전은 또한 해전 역사에서 가장 큰 해전 중 하나로 기록되며, 군사 전략, 해상 전투 기술, 항공 전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입증한 사건으로 남아 있게 된다. [16] 필리핀은 1945년 7월에 일본군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