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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크로포트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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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크로포트킨
Пётр Кропоткин | Peter Kropotki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eter_Kropotkin_circa_1900.jpg
<colbgcolor=black> 본명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공작[1][2]
(Кня́зь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Кропо́ткин)
출생 1842년 12월 9일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사망 1921년 2월 8일 (향년 78세)
소비에트 러시아 모스크바 주 드미트로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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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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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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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학력 제1모스크바 김나지움
페테르부르크 근위학교
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수학과
종교 무종교 ( 반신론 무신론)
직업 철학자, 과학자, 지리학자, 아나키스트
서명
파일:Peter_Kropotkin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3. 사상
3.1. 아나코 코뮤니즘3.2. 상호부조론3.3. 집산주의의 철폐
4. 영향5. 저서
5.1. 대표 저서5.2. 그 밖에
6. 어록7. 여담

[clearfix]

1. 개요

러시아 제국 철학자, 과학자, 지리학자이자 아나키스트. 가명은 '보로딘(Бороди́н)'이었으며, 영어권에서는 '피터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으로 활동했다.

미하일 바쿠닌 이후, 19세기 아나키즘 운동을 대표했던 인물로, 당시 서유럽에서 널리 인정받던 허버트 스펜서 적자생존론에 반기를 들고 "모든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상호부조론을 발표해 크게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20세기 초반 독립운동가 신채호를 통해 아나키스트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

크로포트킨처럼 여러 계층에서 활약하고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은 드물다고 할 수 있다. 황궁의 가장무도회에서 호화로운 옷을 입고 니콜라이 황제 곁에 서 있거나, 알렉산드르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 시종으로서 뒤따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무서운 감옥 안에서 황제의 동생 니콜라이 대공의 자백유도를 거절하고는 그를 내쫓기도 하고, 바로 발밑 독방에 감금되어 있는 사람이 미쳐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는 관료이기도 했고, 과학자이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미지의 땅을 탐험하는 탐험가였다가, 어떨 때는 박해받는 가난한 혁명가이기도 했다. 그는 거대한 저택에 남부럽지 않는 귀족이었지만, 망명자가 되어 돈이 없어 차와 빵만으로 산 적이 많았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한 크로포트킨은 혁명가의 삶을 살면서도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평생을 스스로 희생하며 살았다. 그는 결코 복수자가 아니었으며 언제나 순교자였다. 그는 그러한 희생을 조금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3]

2. 생애

파일:attachment/크로포트킨/Example.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ropotkin_Nadar.png
황궁 근위 장교 시절 펠릭스 나다르가 촬영한 크로포트킨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에서,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크로포트킨 공작[4]의 4명의 자식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가 4살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곧 재혼하였고, 엄격하고 허세많은 계모 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여느 귀족들처럼 가정교사로부터 조기교육을 받았다. 15살에는, 귀족들만이 다닐 수 있으며 매년 최상급 우등생 16명이 궁정근위로 임명되는 페테르부르크 근위 사관학교에 합격했다. 궁정근위는 황족의 측근이 될 수 있어 큰 명예인 동시에 출세가 보장되는 길이어서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근위 사관학교에서 계속 수석을 하였던 그는 크고 작은 접견식, 무도회, 연회 등이 있을 때마다 궁정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시종무관을 하기도 했으나, 황궁이 돌아가는 꼴에 회의감을 느끼고, 수석 졸업 이후 당시 아무도 안가던 시베리아 오지 전출을 자원하였다. 시베리아에서는 미개척지를 탐험하며 지리학과 동물의 생태 환경 등을 연구하였고, 이 때의 연구를 기초하여 산맥 구조선 이론을 구상하고 잘못되어 있던 지도작도법을 수정하였으며 빙하에 대한 지질학적 논문을 작성하는 등의 과학활동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과학자로서의 길이 열렸고, 1867년엔 군을 퇴역하고 이듬해 러시아 지리학협회 정식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71년 마침내 지리학협회 사무관직 제안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영광스러운 그 자리를 거절한다. 그는 지리학을 사랑했으나, 주변에 배고픈 사람들이 진흙같은 한 조각 빵 때문에 투쟁하는 이 때에, 그 고상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어떻게 옳은 일이 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이 무렵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이후 고통받는 민중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다. 1년 뒤, 해외출장 허가를 받아 스위스 여행을 하는 중, 인터내셔널 취리히 지부에 가입했으며, 스위스 쥐라 산맥의 시계 제조 공동체를 방문하면서[5] 이들이 이루고 있던 노동조합 형태의 자발적인 상호 협동을 보며 아나키스트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 후로 러시아에 돌아와, 당시 브나로드 운동에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 소모임 '차이콥스키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나, 러시아 제국 정부에 발각당해 1874년 감옥에 투옥되었다. 2년 동안의 감옥생활 중 괴혈병과 류머티즘으로 죽음의 위기가 찾아왔고 감옥병원에 입원되었으나, 동료 아나키스트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감옥을 탈출했고, 이후 영국,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며 인터내셔널 활동과 신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881년 혁명가들에게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자 여러 군주국들은 스위스를 '망명객들의 피신처'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에 스위스는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크로포트킨을 포함해 각국의 망명객들을 추방하였다. 스위스 정부가 그에게 추방명령을 내렸고 그는 런던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1년 뒤 프랑스로 건너가 아나키스트 운동을 펼쳤으나, "광산과 모든 생산수단, 주택이 국가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부르주아 계급은 공포를 느꼈다. 당시 가난한 사회주의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의 분노를 테러로 표출했는데, 언론은 테러의 지도자로 크로포트킨을 지목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사회주의 운동에 충실했을 뿐, 그들에게 테러를 지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프랑스 정부는 그를 끝내 체포하고자 했다. 쫓기는 와중에 아내가 체포되고 처남이 숨을 거두자, 처남의 장례를 위해 감옥 정문 앞으로 출두하고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아내 곁에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당국에게 거절당하고 바로 체포되어 리옹으로 호송되었다. 5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프랑스 내 지식인들의 지속적인 항의와 반발로 인해, 1886년 조기석방되어 1917년 러시아 혁명 전까지 30년간 영국에 거주하면서, 아나키즘 운동과 연구 저작 활동에 몰두했다.

러시아 혁명이 터진 이후 크로포트킨은 러시아로 돌아와 이때만 해도 상당한 세력을 자랑했던 모스크바 아나키스트들을 중심으로 정치 활동을 펼치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주도권을 탈취한 볼셰비키들이 아나키스트 서클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우크라이나 마흐노 흑군 탄압 등 아나키스트 숙청 작업에 점차 몰두하였다. 이에 크로포트킨은 볼셰비키의 수장, 블라디미르 레닌을 맹렬히 비판하였다.[6]
블라디미르 일리치, 당신의 행동은 지금 당신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원칙들과 완전히 반대편에 있소... 혹시나 변명이랍시고 정치인으로서 권력 그 자체를 추구하는 건 의무라는 둥 요즘 절대 군주들도 하지 않는 말 따윈 않길 바라오. 당신이 전 유럽 공산주의의 선구자로서 이런 추악한 방법으로는 당신이 추구한다는 원칙을 이룰 수 없다는 걸 모를 만큼 자신의 권위주의적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오? 전 세계 공산주의의 수호자라고 자처하는 이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순수한 의사 표현조차 이렇게 짓밟으면 그 이념의 미래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오?
- 레닌에게 보내는 편지
수많은 아나키스트 동료들이 감옥에 갇히고 죽음에 처하는 사태에 이르렀지만, 다행히 크로포트킨은 볼셰비키 정권의 직접적인 박해는 받지는 않았다. 그는 이제 19세기 브나로드 운동과 러시아 사회주의 아나키스트들의 살아있는 거두였으며, 특히 당파적 분열을 넘어 제정 러시아 시절 좌파와 자유주의 세력 전체의 큰아버지뻘 인물이었기에, 레닌으로서도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레닌을 향한 크로포트킨의 지속적인 항의는 마치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묵살당했다.

말년에 『혁명적 윤리학』을 저술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결국 1921년 2월 8일 새벽 3시에 숨을 거뒀다. 그 소식을 들은 측근 아나키스트들은 곧장 장례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 소식을 전세계에 알렸다. 장례위원회는 형무소에 수감 중인 아나키스트들을 잠시 석방하여 고인과의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레닌에게 요구했고, 레닌은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담당 실무자가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오자 장례위원들은 레닌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많은 외국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공산당 조직이 가져다놓은 조화들을 모조리 철거하겠다고 위협했고, 이에 놀란 담당 실무자는 아나키스트들을 잠시 석방하였다. 마침내 7명의 아나키스트들이 군중의 박수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장례식은 소련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반볼셰비키, 반정부 구호, 플래카드, 선동 등이 동원된 최후의 반정부 집회[7]이자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마지막 공개 집회가 되었다. 이때 그들의 플래카드에는 그의 명언인 권위가 있는 곳에는 자유란 없다가 적혀져 있었다.[8]

1921년 2월 4일 크라스노다르 지방의 소도시 로마놉스키 후토르가 크로포트킨으로 개칭되었고, 그의 사후 1957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의 영향으로 모스크바 지하철 1호선 '드보레츠 소베츠카야' 역이 그의 이름을 따 '크로포긴스카야'로 개명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3. 사상

파일:external/philosophyforlife.org/3640728222_67e69b7b30.jpg
아나키즘의 구호 중 하나인 상호부조가 적혀있다.

3.1. 아나코 코뮤니즘

현대엔 아나코 코뮤니즘(무정부 공산주의[9])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와 임금제 폐지,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 조직된 공동체를 강조했고, 이러한 방식은 훗날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지역 단위의 조합 설립과 공동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3.2. 상호부조론

크로포트킨 이전까지 아나키즘은 마르크스주의 계열에 비해 이론적, 사상적 기반이 약하고 충동적인 테러리즘에 의지하는 경향이 강했으나,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프랑스의 엘리제 레클뤼의 지질학적 연구와 함께 본격적으로 인간의 노동, 사회적 관계를 생태학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하부 구조로부터 자발적인 조직화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대안 권력 구조 형성이란 노선을 주장하면서 국제 아나키즘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인간은 경쟁이 목표가 아닌 상호부조하며 함께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일종의 노동조합 형태의 보험 제도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 사유 재산과 권위주의를 부정했으며 중앙 집권적 정치 형태가 아닌 자발적 참여에 기인한 지역 공동체적 사회 구조를 주장했다.

3.3. 집산주의의 철폐

크로포트킨은 임금제도와 그 유사한 제도를 지나친 집산주의적 체제라며 비판하였고 화폐자체도 부정했다. 화폐와 임금제는 자본주의시작의 근간이고 이는 곧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고 다시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체제를 부활시킬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고 이는 미하일 바쿠닌과 같은 이들과 차별화되는 아나르코 공산주의의 특이점이였다. 그는 임금제도 대신 인민들이 필요에 따라서 필요한 생산물을 얻을 수 있고 언제나 폐지되고 언제나 설립될 수 있는 자발적인 분배위원회를 주장했다.

4. 영향

이런 크로포트킨의 생태주의적 수평 연대 노선은 훗날 스페인 내전 당시 카탈루냐 아라곤 중심으로 사회 혁명을 주도했던 CNT POUM의 기본적인 조직 방침이 되었으며 현대에도 멕시코 사파티스타 혁명이나 시리아 인민민주당이 추구하고 있는 민주적 공동체주의[10]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크로포트킨의 공산주의적 아나키즘은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유행하던 테러리즘 중심의 아나키즘에 종지부를 찍고 하부 구조로부터의 체계적이고 치밀한 자발적, 수평적 연대를 통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인식 혁명과 정치적 혁명을 향한 역량 축적이라는 현대 아나키즘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깔았으며, 이에 기반하여 동시대 네스토르 마흐노 우크라이나 자유령과 훗날 CNT의 혁명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이론적 비중으로만 본다면 국제 공산주의의 역사가 레닌 전후로 나뉘듯 현대 아나키즘의 역사는 크로포트킨 전후로 나누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크로포트킨의 경제적 성격은 CNT[11]의 집산적 성격[12]과는 반대되긴 한다. CNT는 내전 당시 교환권등을 이용한 경제시스템을 이뤘고 이는 크로포트킨의 필요의 의한 분배와 능력에 따른 노동이라는 것을 (완전히는 아니지만)어느정도 위반한 것이기 때문이다.[13] 크로포트킨은 화폐 그 자체를 폐지한다는 점에서 아나키즘 생디칼리슴 성향을 띄우는 CNT와 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5. 저서

5.1. 대표 저서

※그의 대표 저서는 《빵의 쟁취 (1892)》, 《상호부조론 (1902)》, 《혁명가의 회고록 (1896)》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두 런던 시절 저술이다. 이 중,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는 것'이 진화의 한 요인이라는 것을 지적한 《상호부조론》은 그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생존경쟁에 중점을 둔 다윈의 진화론[14]에 대한 수정이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Mutual Aid - 보통 《상호부조론》으로 불리며, 국내에는 수 차례 번역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까지 활동한 몇 안되는 아나키스트였던 허유 하기락 선생이 해방 후 최초로 1983년에 《상호부조론》라는 이름으로 번역하였고, 현재에는 《만물은 서로 돕는다》, 《상호부조 진화론》 등의 다양한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아나키스트 리스쩡이 자국 내에 소개하여 중국의 사상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 The Conquest of Bread - 《빵의 쟁취》라는 제목으로 행성B에서 출판했다. 좌파 서양 인터넷 포럼들에는 특히 아나키즘 사상의 소개용 교과서 취급을 하는 정도로, 으로서 신들린 인지도(...)를 가진 서적이다. "아나키즘은 너무 이상주의적이다"라고 말하는 무지한 성향을 띠는 네티즌에겐 "빵 책이나 읽어라(READ THE BREAD BOOK)"이라고 태클 거는 경우가 많다. 레딧을 중심하여 생긴 좌파 유튜브 동영상 크레이터들의 모임 /r/BreadTube 또한 이 책의 이름에서 가져왔다.[15] 아나키스트 도서관 한국어판 링크
  • A Memoir of a revolutionary - 글자 그대로 '혁명가의 회고록'이라는 이 책은, 크로포트킨이 57세까지의 생애를 회고하며 쓴 자서전이다. 국내에는 1985년 한겨레 출판사에서 박교인 번역본이 처음 출판되었고, 이후 《크로포트킨 자서전》, 《어느 혁명가의 회상》 등의 제목으로 김유곤이 번역했다.

5.2. 그 밖에

  •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 - 이 책은 국내에는 1983년, 역시 하기락 선생에 의해 《전원, 공장, 작업장》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다. 아쉽게도 이 이후 번역된 바 없다. 도서관에나 가야 구할 수 있을듯.
  • In russian and french prisons - 크로포트킨의 옥중수기. 한국에서는 한국학술정보에서 출판한《러시아의 감옥과 유형, 그리고 강제노동》에 일부 실렸다. #
  • Modern Science and Anarchism - 국내에는 1973년 독립유공자 이을규 선생에 의해 《현대과학과 아나키즘》이라는 제목으로 찬문각 출판사에서 번역되었다. 현재는 절판되었고 아나키스트 도서관에서 새로 번역된 것을 볼 수 있다. 현대과학과 아나키즘
  • 《러시아 문학 오디세이》- 원저명은 <러시아 문학의 이상과 현실>, 국내에서는 작가와비평 출판사에서 2011년 번역되었다. #
  • The Great French Revolution - 한국에 번역된 것은 없다.
  • 기타 아나키스트 도서관 한국어판에 번역된 문서 - 노동자의 조직, 레닌에게 보내는 편지, 대중과 개인의 행동, 혁명 이후 사회의 영속성, 공산식당

6. 어록

"당신의 심장이 인류의 심장과 함께 박동하거나, 참된 시인으로서 인간의 숨결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면, 당신 주위에서 요동치는 이 고통의 바다 가운데서,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과 광산에 쌓인 시신들, 바리케이드 둔덕 위에 쓰러져 있는 부상자들과 시베리아 벌판과 열대 섬 해안에 자신을 묻으러 가는 추방자들의 행렬 가운데서, 숭고한 투쟁이 전개되고 패배한 자들의 고통스런 신음 소리와 승리한 자들의 술판, 비겁에 맞서 싸우는 용맹, 숭고한 열성과 비열한 악의가 요동치는 와중에 당신은 중립인 채로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설 것입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것이, 숭고한 것이, 그리하여 생명 자체가 빛을 위해, 인류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자의 편에 서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 청년에게 고함, p. 54
"권위가 있는 곳에 자유란 없다."
"감옥은 국가가 운영하는 범죄대학이다."
"혁명은 그 시초부터 학대받고 압박받은 자에 대한 정의의 행위이어야 하지 장래에 이루어지는 보상의 약속이 아니다. 혁명을 성공시키는 것은 희망이지 절망이 아니다."

7. 여담

  • 감옥탈출은 한 편의 영화같았다. 동료 아나키스트들은 크로포트킨을 탈출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감옥병원에 땔감을 공급하는 10대의 짐마차가 오는 시간에 비슷한 마차를 보내서, 그 마차를 타고 탈출하는 계획이었다. 신호는 우산에 달린 풍선을 담 위로 띄워 보이게 하는 것이었지만 담은 높았고 그 우산을 든 여성의 키가 작아서 크로포트킨이 보지 못했다. 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른 신호체계를 구상해야 했다. 하지만 당국이 눈치를 챘고 경비는 강화되었다. 동료들은 크로포트킨에게 새로운 신호체계를 알리기 위해, 다음날 친적을 사칭한 한 여성의 면회를 통해 크로포트킨에게 정교한 시계를 전달했다. 그 시계 안에는 탈출의 모든 계획이 적힌 암호문이 들어 있었다. 너무나 대담해서 크로포트킨은 전율을 느꼈다. 새로운 신호는 바이올린을 키는 것이었다. 2시간 뒤, 땔감을 실은 짐마차들과 함께 동료의 마차가 병원 문을 통과했고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린 소리가 갑자기 격해졌고, 그 소리는 마치 "바로 지금이에요!"를 말하는 듯 했다. 크로포트킨은 있는 힘을 다해 마차로 뛰었다. 간수에게 아슬아슬하게 잡힐 뻔 했으나 다행히 마차에 탑승했고, 그 뒤로 20명이 쫓아오며 "저놈 잡아라! 저놈 잡아라!"를 소리쳤다. 한편, 병원 정문에서는 또다른 동료가 병원문을 지키는 보초병의 주의를 분산시킬 목적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 그건 기생충에 관한 이야기였다. 얼마나 얘기를 잘했던지 보초병은 그 마차가 병원 정문을 지나칠 때까지 토론에 집중하였다. 이러한 작전들이 한치의 오차없이 잘 수행되어, 가까스로 병원 문을 지나가는데 성공했다. 정해진 집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곤 면도를 했고 10분 후 집을 나와 역마차를 갈아탔다. 간수들은 마찬가지로 근처 역마차를 빌려 그들을 추격하려고 했으나, 반경 1km[17] 이내에 역마차는 한 대도 없었다. 모든 역마차를 동료들이 빌려 타고 가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탈출에 성공하자 동료는 마부에게 곧바로 최고급 레스토랑 '도논'에 가자고 말했다. 그 날 수많은 집이 수색당했지만, 그들이 갔던 최고급 레스토랑은 수색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손님으로 가득찬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탈출 성공을 축하했다. 이틀 뒤, 황제는 분노하여 "반드시 찾아내라"고 명령했지만, 크로포트킨은 이미 동료의 여권을 가지고 핀란드, 스웨덴를 지나 노르웨이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며칠동안 오슬로 항구에 증기선을 기다리면서 어디로 갈까를 고심하다가, 증기선 선미에 유니언 잭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영국으로 가기를 결심했다.
  • 그는 인류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 충돌이 불가피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막연한 열망을 가지고 하는 폭력이 되어선 안된다고 보았다. 즉, 혁명에 있어서 폭력투쟁은 부차적인 문제인데, 그 충돌의 폭력성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먼저 사상을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충돌의 마지막 국면에서 총과 화기보다 창조적인 힘에 의해 재건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가 얼마나 자유롭고 창조적인 사회적 힘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심지어 변화를 반대했던 계급에게도 동의를 얻는 수준 높은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같은 광범위한 사상적 동의 위에서 행해지는 충돌은 양쪽의 희생자 수를 훨씬 줄일 것이다. 투쟁이 낮은 수준의 공격 본능이 분출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18]
  • 신문 칼럼식 기고문 <청년에게 고함>에서 과학이 엘리트를 위한 학문이 되었으며 제대로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 시대의 과학은 근본적인 목적과 방향성을 잃었으며 사회적 기성세력에 의해 잘못 사용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는 과학의 대중화에 대한 낙관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두에게 풀어진 기술은 오히려 과학 기술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고 그럼 우리가 못쓰는 황무지들도 풍요의 땅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흔히 크로포트킨이 농민의 삶에 중점을 맞춘 것에 크로포트킨이 생태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지만 크로포트킨은 엄연히 과학기술의 발전을 누구보다 긍정했던 사람으로 생태를 위해서 과학기술의 발전을 멈추자는 것을 누구보다 반대하였다.
    "당신이 참으로 당신의 학문에서 인류의 번영을 꾀한다면, 굉장한 질문이 야기될 것이다. 당신의 비판적인 정신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과학은 소수의 삶을 더 기쁘게 만들 뿐이지 인류 전부에게는 미칠 수 없는 사치한 종목임을 당신은 단번에 관찰해야만 한다. 1세기 전에 과학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건전한 가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섭렵하였거나 혹은 비판적인 참된 과학적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가? 야만인 같은 편견과 미신을 소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몇천 명은 방향을 잃어버리고 종교적 사기꾼의 꼭두각시로서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혹은 과학이 신체적 도덕적 건강을 위한 이성적 기초를 세우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살펴보자. 과학은 우리에게 우리가 어떻게 신체의 건강을 유지할지를 말해 주고, 도덕적ㆍ지적 행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들 책 속에 사장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오늘날 과학이 몇몇 특권층 사람만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 임금 노동자와 자본주의 주인들의 두 계층으로 나누어진 사회가, 이성적 삶의 원칙의 모든 가르침을, 인류의 10분의 9를 위해 아픈 아이러니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



    『청년에게 고함』
  • 임금제는 사회불평등의 기원이라 주장하였으며, 직업에 따라 대가의 차등을 둔다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직업의 사회 기여도를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한 직업의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무시하고 명령을 내리는자와 명령을 받는자를 구분지어 신 노예제를 만드는 것이라 하였다.
  • 분업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분업은 한 사람이 평생 한가지 일만 하게 하여 그 사람의 사회 전체를 못보게 하여 우둔하게 만들고 자신의 일에 지루함을 느끼게 하여 생산성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하였다.

[1] 공작으로 번역되는 러시아어 크냐지는 이름의 일부가 아니라 동유럽 문화권의 작위 중 하나로 어말 음소가 무성음화된 러시아어 발음은 ' [knʲæsʲ](크냬시)'에 가깝다. [2] 관용적으로 '크로포트킨'으로 알려져 있지만 ' 무소륵스키', ' 차이콥스키', ' 캅카스', '뱟카' 등의 표기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국립국어원의 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크로폿킨'이다. 비슷한 예로는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을 들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독일어 인명이므로 독일어 외래어 표기법을 따라 자음앞에 오는 파열음에 대해 'ㅡ'를 붙여 표기하는 것이다. [3] 게오르크 브란데스가 크로포트킨을 평가하면서 말한 대목. (『크로포트킨 자서전』 p.28) [4] 3개의 주에 걸친 넓은 땅과 농노를 무려 1200명이나 가지고 있는 귀족이었다. [5] 이때, 미하일 바쿠닌의 오른팔이었던 제임스 기욤을 만났다. 크로포트킨은 아쉽게도 바쿠닌을 만나진 못했다. [6] 특히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중심으로 아나키스트 및 사회혁명당, 멘셰비키 같은 다른 정파에 대한 박해를 두고 "동서고금을 들어 참 레닌만 한 혁명가도 없다. 다른 혁명가들은 어떠한 도덕적 이상을 위해 싸우는 반면 레닌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통렬한 비꼼을 가했다. 한편 그러면서도 외국의 친구와 동지들에게 "혁명이란 원래 결코 깨끗할 수 없고, 무질서는 변화의 필수적인 부분이다."라며 혁명과 민중의 자유를 향한 열정 자체는 옹호하였다. [7]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8] 스탈린을 통해 이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9] 한국에서는 흔히 공산주의라고 번역하지만, 코뮌은 ‘지역 자치체’를 가리키는 말이니 차라리 지역자치주의라고 함이 옳다. 실제로도 아나코 코뮌니즘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10] Democratic Confederalism [11] 다만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 부분인데 전국노동연맹- CNT 그 자체는 아나키즘 조직이 아니다. 그 산하 조직인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FAI가 아나키즘적 조직이며 CNT가 개량주의 노선이나 심지어 파시즘과의 연대도 하는 노선을 막고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길로 가게하기 위해서 따로 만든 조직이 있다. [12] 여기서의 집산적이란 크로포트킨이 미하일 바쿠닌을 비판함에서 나온 말로 "임금제도"를 결정적으로 폐지하지 않았다는 점을 뜻한다. [13] 이에 대해선 크로포트킨의 빵의 쟁취의 집산주의적 임금제도 부분을 살펴보길 추천한다. [14] 엄밀히 말하면 적자생존의 개념은 허버트 스펜서의 주장이다. [15] 하지만 이 서브레딧 자체는 사회민주주의부터 정통 마르크스주의 등 좌파 사상에 대한 영상이라면 모든지 허용되는 편이다. 그래서 흔히 /r/ChapoTrapHouse같은 극좌중에서도 극좌인 서브레딧에서는 리버럴들이라고 까인다.CTH도 자기들끼리 나 빼고 다 리버럴밖에 없다고 서로 까대긴 하지만 [16] 해설에 크로포트킨은 미국을 본떠 연방제는 찬성했으므로 국가 그자체는 반대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크로포트킨이 말한 연방제의 오독이다. 크로포트킨은 비국가 연방제를 주장했고 이는 자유연합에 근거한 연방제 즉 국가가 없는 코뮌들의 자유로운 상호부조에 기초한 연합이지 미국식 연방제가 아니다. 이는 해설을 담당한 하승우가 아나키즘에 대해서 국가주의를 긍정하는 것도 아나키즘일 수 있다라는 생각이 만든 오독에 가깝다. [17] 정확히는 '1베르스타'라고 말함. 1베르스타는 1.067km이다. [18] 『크로포트킨 자서전』 김유곤 옮김. p.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