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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뮬러 1 월드 챔피언십 역대 드라이버 챔피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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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前 레이싱 드라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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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짐 클락 Jim Cl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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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제임스 클라크 주니어 James Clark Jr, OBE[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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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6년
3월 4일 영국 스코틀랜드 파이프 구역 킬마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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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8년
4월 7일 (향년 32세)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카를스루에 현 라인네카어 군 호켄하임 호켄하임링 |
|||
국적 | 영국 ( 스코틀랜드 ) | |||
신체 | 키 171.5 cm | |||
소속 | 드라이버 | 팀 로터스 (1960~1968) | ||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colbgcolor=#eeeeee,#191919> 출전 횟수 | 73경기 | ||
월드 챔피언 | 2회 ( 1963, 1965) | |||
그랑프리 우승 | 25회 | |||
포디움 | 32회 | |||
폴 포지션 | 33회 | |||
패스티스트 랩 | 28회 | |||
첫 경기 | 1960년 네덜란드 그랑프리 | |||
첫 그랑프리 우승 | 1962년 벨기에 그랑프리 | |||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 196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랑프리 | |||
마지막 경기 | 196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랑프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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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레이싱 드라이버로 후안 마누엘 판지오, 아일톤 세나, 미하엘 슈마허, 루이스 해밀턴 등의 드라이버들과 같은 반열의 평가를 받는 드라이버이다. 로터스의 설립자인 콜린 채프먼의 분신과도 같았던 드라이버로, 초창기 로터스 역사의 큰 이정표가 되어 준 채프먼과 클락의 콤비는 레이싱 역사에 길이 남을 조합으로 불린다.2. 드라이버 경력
2.1. 포뮬러 1 이전
1936년 스코틀랜드 파이프에서 부농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는데, 부모는 클락이 레이싱을 하는 것을 반대했으나[2] 자가용으로 구입한 차량을 가지고 20세부터 지역 랠리와 투어링 카 레이스 등의 경주에 참여하면서 실력을 키웠으며, 이때부터 이미 엄청난 재능을 지닌 드라이버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처음엔 취미로 레이스를 시작했고 프로 드라이버로서 큰 뜻이 없었으나 모터스포츠는 점차 그의 삶에 깊이 파고들었고, 동료 드라이버들 또한 그를 크게 격려해 더 상위의 리그로 진출하게 된다.2.2. 콜린 채프먼과의 만남
채프먼과 함께. |
수많은 레이스에 참여한 클락은 우연히 로터스의 수장이었던 천재 엔지니어 콜린 채프먼과 인연을 맺는다.[3] 채프먼은 엔지니어로 유명하지만 반월 팀 소속으로 F1 경기에 엔트리하기도 했을 정도로[4] 드라이버로서도 유능했는데, 1958년 치러진 한 레이스에서 클락과 채프먼이 서로 같은 로터스 엘리트를 타고, 경쟁자로서 만나게 된 것이다.
경기 결과는 채프먼이 1위, 클락이 2위였다. 이때 채프먼은 클락에게서 큰 인상을 받았다. 클락이 1958년 재규어 D-타입이나 포르쉐 등의 빠른 차량을 몰고 온갖 경기에서 트로피를 따내기 시작하고, 1959년 르망 24시에서 엘리트를 몰고 클래스 2위로 완주하자[5] 그는 클락에게 포뮬러 주니어 머신을 몰아 볼 기회를 줘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테스팅에서 싱글시터 경주차를 처음 탄 클락이 이미 팀의 넘버 원 드라이버였던 그레이엄 힐과 비등한 수준의 시간에 들어오자 채프먼은 곧바로 그에게 계약을 제안했고, 그렇게 1960년 로터스와 계약을 맺은 클락은 동료 트레버 테일러와 함께 우선 포뮬러 주니어 대회에 출전하게 되는데,[6] 클락은 데뷔전에서 존 서티스와 테일러를 누르고 우승하였으며 그 시즌에 클락과 테일러는 공동 챔피언이 된다. 이 때 클락은 로터스 워크스 팀 소속으로[7] 포뮬러 1 대회에도 출전해 포디움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클락의 능력과는 별개로 그의 F1 커리어 초창기는 암울한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1960 벨기에 그랑프리[8]에서 동향 동료 드라이버인 크리스 브리스토의 사망사고를 눈앞에서 목격했으며, 심지어 트랙에 날아와 널브러진 그의 시체를 거의 칠 뻔하기까지 했다. 이듬해인 1961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는 당시 챔피언 컨텐더였던 볼프강 폰 트립스와의 접촉으로 인해 폰트립스의 차량이 관중 무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폰트립스는 물론이고 관객 15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대부분은 클락을 변호했지만 역시 비난을 피할 순 없었고 이래저래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한편 그럼에도 클락은 아주 빨랐고, 로터스의 차량 또한 아주 빨랐다. 당시는 리어 미드십이라는 엔진 배치 방식이 F1에 소개되면서 차량 설계의 근본을 뒤흔드는 변화가 휩쓸고 지나간 과도기였는데, 클락의 어마어마한 재능과 채프먼 휘하 로터스의 잠재력은 바뀐 규정에 잘 적응한 페라리가 깜짝 우승을 한 1961년 시점에서 이미 높게 평가받았고 연말 논챔피언십 경기들에서 수 차례 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클락과 채프먼은 매우 가까운 친구이자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으며, 채프먼은 클락의 몸에 정확히 맞추어 차들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스털링 모스가 부상으로 F1에서 은퇴하는 등 차량과 드라이버에 모두 세대교체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일고 페라리의 짧은 중흥이 끝나자 클락과 로터스는 본격적인 차세대 우승 후보로 여겨지게 되었다.
2.3. 그랑프리를 지배하다
1962년에 로터스가 새로 개발한 로터스 25는 현재까지도 역대 최고의 F1 차량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모노코크 방식 섀시를 F1에 최초로 적용한 사례이다. 25는 드디어 등장한 최전선에서 싸울 수 있는 차량이었고 클락은 정상적으로 완주한 모든 경기에서 우승을 거뒀다.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에서 개최됐던 독일 그랑프리에서는 26등까지 뒤처졌다가 첫 바퀴에 17명을 추월하고 4등으로 완주하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해당 시즌에는 9회의 챔피언십 레이스 중 6회의 폴, 5회의 패스티스트 랩을 기록했음에도 그레이엄 힐이 거의 모든 경기에서 완주하는 동안 신뢰성 부족으로 차량이 계속 운 없게 고장나면서 클락은 압도적인 기량에도 챔피언이 되지 못했고, 왕좌는 힐에게 넘어갔다.하지만 1963년에는 달랐고, 클락은 팀메이트였던 테일러를 완전히 분쇄하며[9] 10전 7승, 7회 폴, 6회 패스티스트 랩을 기록하고 마침내 챔피언십을 우승하면서 역대 F1 시즌 중 가장 압도적인 시즌 중 하나를 보낸다. 이번엔 1962년과는 달리 개막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리타이어한 것을 제외하면[10] 모든 경기에서 완주한 것은 덤이다. 이 시기 클락은 논챔피언십 경기에도 10번 출전하여 5승을 거뒀다. 이 시즌에 클락은 네덜란드 GP에서 2등부터 꼴등까지 전원을 백마커로 만든다든가, 프랑스 GP에서 엔진 스프링이 몇 대 망가졌는데도 1분 차이로 폴투윈을 한다든가 하는 믿기 힘든 기록들을 남겼다.
1964년 초반에도 압도적인 모습을 이어가지만, 새로 업그레이드한 로터스 33으로 차를 바꾼 뒤 다시 차, 특히 엔진에서 문제가 다발하며 최종 라운드 도중 챔피언 자리를 페라리의 존 서티스에게 내주고 만다. 1962년 챔피언 자리가 날아갔을 때 그랬듯이 이번에도 로터스와 클락은 절치부심하여, 프리시즌과도 비슷한 개념으로 치러진 1965년 초의 타스만 시리즈에서 가볍게 우승한 이후[11], 1965년 시즌에도 1963년과 비슷하게 9경기에 출전해 6승, 6폴, 6회의 패스티스트 랩 등의 성적으로 압도적인 챔피언이 된다. 이 때 2라운드인 모나코 그랑프리에 참여하지 않고 로터스와 함께 인디애나폴리스 500에 출전하러 갔는데, 그것도 우승했다(...).
1966년에는 엔진 배기량 제한이 1.5리터에서 3.0리터로 두 배 늘어나는 대규모 규정 변경이 있었는데, 3리터 엔진에 맞춰진 신모델 로터스 43의 개발이 늦어지면서 구형 섀시를 그대로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1.5리터 엔진을 기준으로 하여 공간을 끝까지 쥐어짜낸 33에 억지로 2리터 V8을 쑤셔 넣었다. 그렇게 경쟁자들이 3리터 엔진 쓸 때 2리터 엔진을 써야 하는 난감한 처지가 되어 우승 경쟁을 하지는 못했으나[12], 네덜란드 GP에서 망가진 차를 이끌고 3위를 하고, 마침내 3리터 엔진이 장착된 43이 완성되자[13] 미국 GP에서 우승을 따내는 등의 활약을 보인다.
1967년은 또 다른 로터스 최고의 차량 중 하나인 로터스 49가 데뷔한 해인데, 이 때도 차가 자주 망가지는 통에 챔피언을 하지는 못했으나 여전한 기량으로 시즌 최다인 4승을 한다. 이 시즌에도 명경기가 많았는데 로터스 49의 첫 경기인 네덜란드 GP에서는 테스팅도 없이 처음 차를 타본 탓에 퀄리파잉에서 8등에 그쳤음에도 본선에 들어와 쭉 올라와 차이를 벌리며 우승했으며, 이탈리아 GP에서는 12랩에 펑처로 한 랩 이상 뒤쳐졌는데도 50랩에 걸쳐 회복하면서 1등 자리를 따내며 감격스런 역전 우승을 차지할 찰나 마지막 랩에서 기름이 다 떨어지며 아쉬운 3위를 기록했고, 미국 GP에서는 1위로 달리던 중 뒤쪽 서스펜션이 부러지며 바퀴가 기울어졌으나 두 랩을 더 돌면서 우승을 차지했다.
2.4. 사망
1968년 시즌은 첫 레이스인 남아공의 카얄라미에서 산뜻하게 폴투윈을 차지하면서 판지오의 역대 최다 우승 기록을 경신하고 시작했으나, 그것이 클락의 마지막 F1 경기가 되었다. 타스만 시리즈에서 다시 가볍게 우승하고 돌아온 뒤인 4월 7일에 다른 경기에 참가하려다 파이어스톤과의 계약 때문에 호켄하임링에서 치러진 포뮬러 2 경기에 참가했는데, 경기 중 원인 모를 이유로[14] 사고가 일어났고 차량이 나무에 충돌해 클락은 즉사했다.해당 경기는 F2 경기였지만 당대 최고의 드라이버들이 모두 모여 있었기에 많은 드라이버들이 현장에서 비통에 잠겼다. 당시 그랑프리 씬은 지금보다 좁아 드라이버들이 자주 만나면서 친하게 지냈고, 또한 클락이 가졌던 기량과 위상, 인망은 워낙 컸기에 당시 포뮬러 1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파트너를 잃은[15] 채프먼이 극히 상심한 것은 물론으로, 한 달 뒤에 치러진 스페인 GP에도 가지 않고 칩거하였다. BRM을 거쳐 다시 로터스 팀에 돌아와 있던 그레이엄 힐은 절치부심하여 스페인에서 우승을 따내고, 결국 해당 시즌 챔피언까지 오른다.
3. 평가
'위대한 드라이버'를 꼽을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소 중 하나는 챔피언십 우승 횟수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2회 챔피언 클락의 위상은 슈마허, 판지오와 비교했을 때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클락은 명실상부한 F1 역사상 최고의 드라이버 중 한 명이자 196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당당히 거론되고 있다.그의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클락은 1960년대 내내 차에 어떤 종류의 문제가 있지 않는 한 필드를 지배했던 드라이버이다. 이렇게 적어 놓고 보면 클락의 스타일이 불안정하고 차를 잘 망가뜨렸나 싶을 수 있지만 오히려 매우 부드럽고 실수 없는 스타일을 고수했으며, 반대로 유리몸에 가까웠던 내구성의 당시 로터스 차들을 잘 다루면서 결과를 낸 경우이다.[16] 그러면서도 속도 또한 굉장한, 오각형이 꽉 차 있는 드라이버였다고 할 수 있다.
또 팀을 여기저기 옮겨 다닌 다른 드라이버들과는 반대로 F1 커리어 처음부터 끝까지 로터스 소속으로만 참전하여 '로터스 맨'으로서의 이미지를 공고히 다진 것 또한 그를 빛나게 한다.[17] 클락은 채프먼과의 파트너십 덕에 자신에게 맞춤형으로 설계된 좋은 차들을 타기는 했지만, 이러한 깔끔한 드라이빙 스타일 덕에 같은 차를 탄 테일러, 아룬델, 스펜스, 에이먼, 힐 등의 라이벌들을 시종 압도하는 성적을 거두었기에 절대 차빨로 좋은 성적을 냈다고 비하할 수 없는 드라이버이기도 하다.[18]
총 2회라는, 올타임 레전드로서 언급되는 다른 드라이버들에 비해서는 적은 챔피언십 우승 수를 보유하고 있으나 그의 F1 커리어는 한 경기밖에 뛰지 못했던 1968년을 포함하여 9년뿐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또, 지금 봤을 때야 기록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당시의 시점에서 보자면 유일한 레전드였던 판지오의 폴 포지션, 우승, 패스티스트 랩 기록들을 모조리 갈아치운 이가 바로 클락이었기 때문에 1960년대의 상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역대 폴 포지션 횟수 같은 역대 드라이버들의 스탯 순위를 조사할 때 지금까지도 다른 레전드들을 제치고 뜬금없이 상위권을 차지하는 경우가 빈번하며, 그렇기에 그를 여전히 역대 최고의 레이서로 꼽는 이들도 많다.
4. 여담
- 특성상 전설적인 F1 드라이버들은 보통 똘끼가 있거나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클락은 이례적으로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고 하고, 커리어 초기에도 레이싱에 관한 가족의 반대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계속 고심했으며, 기자 회견이나 인터뷰도 꽤나 불편해했다. 사색이 많고 수동적인 성격이었음에도 동료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해 줘서 계속해서 상위 레이스로 올라갈 수 있던 사례. 상당한 존경을 받았음에도 그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채프먼은 클락이 운전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인상적이었다고 회상했다.
- 클락과 채프먼의 조합은 굉장히 유명한데, 그들이 차를 만들어 가는 과정도 재미있다. 소위 재능충의 영역에 있던 클락은 굉장히 정석적인 드라이빙 스타일을 보여 주었지만서도 차의 공학적 특성을 다른 드라이버들에 비해 잘 몰랐다.[19] 한편 드라이버에게 차량이 주는 피드백은 정확히 흡수해 냈기에 클락이 차가 대충 이렇다 저렇다 코멘트를 하면 채프먼이 그걸 찰떡 같이 알아듣고 기술적인 솔루션을 제시하는 식으로 차를 만들었다고 한다.
- 의외로 옛날의 F1 드라이버 치고 미국에서도 상당히 유명한데, 1965년 인디 500 우승 때문이다. 1920년 프랑스의 가스통 셰브롤레[20] 이후 처음으로 미국 바깥에서 나온 우승자였기 때문. 특히 전후에는 로터스처럼 외국의 회사가 인디 500을 그렇게 공격적으로 파고든 경우가 없었기에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비유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한편 북미에선 짐 클락이 아니라 '지미 클락'이라고도 많이 불린다.
- 커리어 처음부터 끝까지 로터스에서만 활약했음에도 계약을 1년 단위로 매년 맺었다. 은퇴하고 싶을 때 언제든 은퇴하고 싶어서였다고. 대농 출신답게 언젠가 농장에 정착하는 게 목표였다고 한다. 실제로 은퇴 생각을 굉장히 자주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데뷔 시즌인 1960년에도 벨기에 GP에서 동향 동료가 두 명이나 죽자 레이스에서 영원히 은퇴하는 것을 고려했음을 인정했고, 1966년 로터스 차량의 경쟁력이 떨어졌을 때에도 은퇴 각을 슬그머니 봤다고 한다.
[1]
대영제국 훈장 4등급 수훈
[2]
돈은 많이 드는데 위험하고 천박하다고 했다고.
[3]
당시는 채프먼의 전성기가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채프먼은 이미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인재로,
반월 팀 차량의 섀시 제작을 진두지휘하여 반월의 챔피언십 우승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4]
비록 단 한 번 엔트리한 데다 연습 세션에서 차를 부숴 먹어서(...) 본 경기는 시작도 못했지만 말이다.
[5]
종합 순위로는 10위이며, 이듬해에는 당시의 1군급 차량이었던 애스턴 마틴 DBR1을 타고 종합 3위로 완주했다.
[6]
1960년대까지는 포뮬러 시리즈의 클래스별 구분의 관념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지금의 F1 드라이버는 시즌 동안은 보통 한 시리즈에만 정착하는 것이 보통인 것과는 달리 F1 드라이버가 짬 나면 같은 해에 F2도 출전하고 내구 레이스나 FJ도 출전하거나, 역으로 하위/외부 리그 드라이버가 주목받으면 F1에 스팟 참가하기도 하는 식.
[7]
당시에는 포뮬러 경기에도 내구 레이스처럼 차량을 직접 제작해서 출전하는 워크스 팀과 그 팀에서 만든 차를 그대로 사다가 출전하는 프라이빗 팀이 모두 존재했다.
[8]
F1 역사상 가장 암담한 그랑프리 중 하나로 꼽히는데, 1994 산마리노 그랑프리와 함께 한 경기 일정 동안 두 명의 드라이버가 사망한 몇 안 되는 경기다.
[9]
클락이 7번 우승하고 70포인트 넘게 따는 동안 테일러는 단 1포인트밖에 따지 못했다.
[10]
이것도 공식적으로 완주 처리가 되기는 했다. 모터스포츠에선 일정 거리 이상을 달리면 완주 처리를 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후반부에 리타이어하면 완주 처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엄밀히는 '완주(Finished)'보다는 '기록 인정(Classified)'에 가까운데, 클락은 100랩 중 78랩 째에 리타이어했고, 이 78바퀴의 주행 기록을 인정받은 것이다. 반대로 완주했어도 일정 랩 수를 채우지 못하면 기록 불인정(NC; Not Classified)이 되는 경우도 있다.
[11]
이후에도 클락은 계속 타스만 시리즈에 참가해, 4번의 시즌 동안 챔피언에 3번 등극한다.
[12]
자연흡기 엔진에서는 배기량이 곧 출력이기 때문에 간단히 말하자면 다른 차들 출력의 3분의 2 수준으로 달린 것이다(...).자체 하드코어 모드
[13]
BRM의 엔진이었는데, 이것도 정상적인 물건은 아니었던 것이 기존에 쓰던 1.5리터 V8 엔진을 두 개 합쳐서 만든 H형 3리터 16기통 엔진이었다(...). 당연히 구조는 완주율이 1/4밖에 안 될 정도로(...) 미치도록 복잡해졌고 당시 BRM 팀의 드라이버였던
재키 스튜어트도 크기도 너무 크고 기름도 너무 먹고 오일이랑 냉각수도 갑절로 들어가고 이게 다 추가적인 무게라면서 극딜을 넣은 바가 있다. 1966년 시즌은 이런 식으로 엔진 모델들이 상당히 중구난방이 되었던 시기였는데, 이듬해에 희대의 깡패 엔진인
코스워스 DFV가 필드를 지배하면서 서열 정리와 안정화가 되었으며 로터스도 DFV를 16년간 알차게 썼다.
[14]
펑처라고 보는 시선이 많지만 목격자가 연기밖에 못 본 마셜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밝혀진 건 없다. 사고 원인 조사 중 드라이버의 실수로 사고가 일어났을 가능성도 고려되었으나, 동료 드라이버들이 클락이 실수를 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논리로 반박하였다.
[15]
로터스에서 그의 대체자로 데려온 마이크 스펜스도 1968년 5월 인디 500 테스팅 중 사망했다.
[16]
당시 채프먼의 설계 사상은 그야말로 랩타임 하나에 올인한 '내구성은 결승선을 통과할 정도로만 확보하면 된다' 식이었다. 그 탓에 상술됐듯 1960년대의 로터스 차량들은 경기 도중에
잘 달리다가 갑자기 서스펜션이 부러지고 엔진이 맛이 가는 등(...) 내구성이 영 좋지 못한 차였고 실제로 힐이나 에이먼 같은 전설급이라고 불리는 드라이버들의 기록을 봐도 1960년대 중반까지 로터스 차량을 쓰던 시절에는 리타이어 횟수가 완주 횟수보다 많았다. 그나마 상황이 괜찮아진 1960년대 후반, 70년대까지도 여전히 일관성이 부족했던 머신이 로터스의 차량이었다. 클락은 이런 차를 가지고도 완주율이 높았으며 상술되어 있듯 1963년에는 전경기 완주까지도 달성해 냈다. 해당 시즌에는 모나코를 제외한 모든 경기에서 포디움에 들기까지 했다.
[17]
클락은 메르세데스의
루이스 해밀턴, 페라리의
미하엘 슈마허 다음으로 한 팀에서 가장 오랜 시즌을 보낸 드라이버이다.
[18]
사실 로터스에서도 딱히 클락만 띄워 주면서 대우해 주지 않았다. 완전히 같은 조건에서도 클락은 남들보다 부품을 훨씬 더 적게 썼다고 한다. 브레이크는 다른 드라이버들에 비해 얼마나 적게 사용했는지 눈에 바로 보일 정도였고 엔지니어들은 무엇이 클락의 기어박스인지 바로 알아챌 정도였다고. 그러면서도 예선 괴물 급의 랩타임을 작성해 내고는 한 것이다.
[19]
사실 자신이 왜 빠른지도 잘 몰랐다고 한다.
[20]
쉐보레의 창업주 루이 셰브롤레의 형제이다.